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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누가복음 11:37-41
37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눅 11:37-41 / [책망받은 유대 지도자들; 마 23:1-36, 막 12:38-40, 눅 20:45-47]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자 바리새파 사람 하나가 자기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겠다고 예수를 초청하였다. 예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유대인의 관습인 손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고 식탁에 앉으셨다. 그것을 보고 주인은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3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 바리새파 사람들은 겉은 깨끗이 씻지만 속은 여전히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어서 더럽다. 40) 어리석은 자들아! 하나님께서 겉을 만드시고 속도 만드시지 않았느냐? 41) 그 속에 있는 것으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다.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시자, 초대한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깁니다. 이에 예수님은 겉은 깨끗이 하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을 꾸짖으십니다.
점심식사 초대 받으신 예수님(37-38) 공생애 기간 동안 바리새인들과 자주 대립하면서도 식사초대에 응하셨습니다(5:29-32; 7:36-50; 14:1-24). 바리새파도 처음에는 예수님과 교제하기를 싫어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갈등이 심화되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진리의 빛을 자신에게는 결코 비추지 않는 부류였기 때문입니다(35). 예수님과 교제하고 가까이 할수록 자신들의 무지와 어두움이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점점 예수님을 싫어하게 된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화가 나신 이유를 충분히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바리새인들이 만든 정결규칙을 예수께서 의도적으로 범하신 일이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38).
겉과 속이 다른 바리새인(39-41) 예수님은 식탁 위에 놓인 잔과 대접을 가리키시면서 그릇의 깨끗함과 사람 내면의 더러움을 대조하였습니다. 탐욕은 다른 사람의 것을 탐내고 빼앗는 물질적 욕심을 지칭하고 악독은 일반적인 사악함을 말합니다. 겉과 속을 모두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만드신 분이 그 성정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겉모습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속까지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그의 아들 예수님도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십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어리석다”고 말씀하십니다(40). 여기서 어리석다는 센스가 전혀 없다로 바보를 뜻하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겉만 깨끗하게 할 줄 알았고, 정작 깨끗해야 할 속이 더러운 것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를 “너희 주머니와 너희 마음 둘 다를 뒤집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후히 베풀어라. 그러면 너희의 그릇과 손 뿐 아니라, 너희의 삶도 깨끗해질 것이다.”라고 번역했습니다(41). 마음속의 믿음은 손과 발로 베풀어질 때에 결실을 맺고 증명이 되기 때문입니다.
적용: 내 마음을 잘 아시는 예수님 앞에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한 것이 있다면 어떠한 것이 있나요?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것은 그 과정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뜻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더 깊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것에 집중하기보다 하나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깨어 보이지 않는 말씀의 세계를 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국민일보]
< 설 교 >
호크마 주석
=====11:37
한 바리새인이...앉으셨더니 - 여기 한 바리새인이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것은 모종의 적대 의식 또는 반감을 가지고 책잡기 위해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다고 짐작된다. '점심 잡수시기'에 사용된 동사 '아리스테세'(* )는 '먹다'는 의미의 '아리스타오'(* )의 과거형으로 정확하게 말해서 이 말의 뜻은 하루의 첫번째 식사를 가리킨다. 보통의 상류층 유대인들도 평일에 하루 두 끼의 식사를 한다. 한 번은 늦은 아침에 가볍게 하고(* , 아리스톤), 또 한 번은 늦은 오후에 하는 데 이것이 주식사이다(* , 데이프논). 안식일에는 세 차례의 식사를 하는데 예배가 끝난 후에 먹는 점심을 가장 잘 차린다. 이렇게 볼 때 예수께서 초대받은 식사는 첫 식사라는 의미에서 '아침'이며(요 21:12,15), 시간상 점심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앉으셨더니'(* , 아나퓨토)는 비스듬히 누워서 음식을 먹는 유대인들의 식사 자세를 묘사한 것이다.
=====11:38
손 씻지 아니하심을...이상히 - 막 7:2에는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가 바리새인들과 부딪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 자신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에 임함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여기서 '씻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배티조'(* )는 '담그다', '적시다'의 의미로서 규례에 따라 식사전에 물 그릇에 손을 담그는 것을 뜻한다. 이 행위는 당시 하나의 예의요 관습이었고,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많은 세상과 접촉함으로 인해서 생기는 불결을 제거하기 위한 결례(潔禮)였다. 아무튼 이 제의적(祭儀的) 식사 관습은 바리새인뿐 아니라 일반 유대인들도 철저히 지켰던 규범이었다(막 7:3-4). 따라서 이 유전을 무시한 예수의 행위는 그 바리새인에게 파격적인 것으로 다가왔다. 예수의 이러한 행위는 유대인들의 유전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저들의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악습을 질책하기 위한 의도적인 것이었다 할 수 있다.
=====11:39
겉은 깨끗이...속인즉 탐욕과 악독 - 예수는 '주'(* , 호 퀴리오스)로서 말씀하시며, 그 대상은 예수를 식사에 초대한 바리새인을 넘어 전체 바리새인들에게로 확대된다. 예수는 자신을 초청한 사람을 면전에 두고 매우 강한 어조로 그들의 위선을 비판하고 있는데 마태의 경우는 (마 23:25) '화 있을진저'라는 저주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종교적인 거룩함을 보이려고 그릇의 겉을 닦듯이 철저히 예식을 엄수함으로써 자신들의 외양을 포장하지만 그 속은 탐욕과 이기심으로 가득한 위선자들이라는 것이다. 탐욕(* , 하르파게스)은 '채어가다'는 뜻의 '하르파조'(* )에서 온 말로 '강탈', '약탈'의 의미를 포함한다. 또한 '악독'(* , 포네리아스)은 '악한 자'를 뜻하는 '포네로스'(*
)에서 온 말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종교적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나 그 중심을 얼마나 욕심이 많고 악한 자들인가를 잘 표현해 주는 말이다.
=====11:40
어리석은 자들아 - 겉만 깨끗하게 포장을 하면 속의 추악함이 감추어 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용납될 수 없는 어리석은 짓임에 틀림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창조자의 눈에는 피조물들이 모든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마 10:26).
=====11:41
그 안에 있는 것 - 이에 관하여 여러 해석이 있다. ❶ 잔과 접시 속에 있는 것, 곧 호화 음식으로 봄. 그러면 그 의미는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지 말고 그 식물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잔 속에 있는 것을 구제물로 주라 그러면 모든 것이 깨끗하리라"(NEB)가 된다. ❷ 이를 부사적 대격으로 해석하여 "마음으로부터 자선을 베풀라"의 뜻으로 본다(N.Turner). ❸ "네가 모아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즉시 너의 소유물이 깨끗해 질것이다"(J.Knox). ❹ 누가가 기록한 '구제하라'는 아람어 '깨끗이 하다'(dakki)를 '자선을 베풀다'(zakki)로 오역한 것이라는 해석(Wellhausen). 이러한 세가지 해석들은 각각 나름대로의 타당성을 갖고 있으며 39절과의 연관성에 비추어 볼 때 ❷의 견해가 가장 합당해 보인다. 왜냐하면 바리새인들은 그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할 뿐 아니라 그러한 마음의 필연적인 결과로 부정한 재물을 축적했음에 틀림없다. 이렇게 볼 때 그들에게 요청되는 것은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마음에서 우러나는 진심으로 부정한 재물을 모두 되돌려주는 것이며, 더 나아가 '구제'라는 말에 적합하게 자신들이 정당하게 모은 것에 대해서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마음의 깨끗함을 스스로 확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
눅 11장 37~44절 / 김광일목사
2009년 당시 정운찬(鄭雲燦) 국무총리 후보자가 국회 인사청문회를 마친 뒤 소견을 밝혔습니다. “새벽에 인사청문회를 마치고 3시 넘어 귀가하니 아내와 아들, 딸이 눈물을 흘리며 맞아들였습니다. 자녀들이‘왜 세금신고를 제대로 못했어요. 아버지가 추궁당하는 걸 보고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라며 펑펑 울더라고 털어놓았습니다. 아내도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을 더 열심히 의지하며 살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책망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가족에게 ‘우리 모두 지금부터 더 철저하게 자기 주변을 관리하며 살자'라며 달랬습니다. 아들과 딸은‘아버지의 청문회를 보면서 느낀 게 많았어요. 바르게 살겠다는 마음가짐만으론 충분하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자신을 성찰하며 살아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앞으로 나의 남은 인생이 10년이 될지, 20년이 될지 모르지만 청문회를 계기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를 했습니다. 비록 청문회에서 고생은 했지만 배운 게 많았습니다. 나와 가족에겐 청문회의 책망이 하나의 축복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책망을 듣고 기분좋아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기분이 상하고 책망 내용에 대해 수긍하기보다 기분나빠하는 것이 먼저 오는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때로는 심한 책망을 받을 경우 책망한 사람에 대해 미워하는 마음까지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 잠언 9장 8절은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합니다.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거만한 사람은 책망한 사람을 미워하고 그 꾸지람을 듣지 않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그 훈계를 들을 뿐 아니라 책망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훈계와 책망을 잘 듣고 고칠 경우 책망을 받은 사람이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Francis of Assisi)의 말입니다. “다른 사람이 해 주는 충고와 책망과 꾸지람을 마치 자기가 자신에게 하는 것 같은 인내심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종은 복됩니다. 변명하는 데 빠르지 않고 본인이 범하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수치와 책망을 겸손히 참아 견디는 종은 복됩니다.” 하나님은 허물과 죄로 인하여 잘못된 길을 걸어갈 때 우리를 바로 징계하지 않습니다. 책망하시고 권고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권고와 책망을 듣는 것이 가장 복된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신랄한 공격을 가하셨습니다. 6번이나 ‘화 있을진저’하시며 가혹한 책망을 하셨습니다. 왜 예수께서 6번씩이나 책망하시며 저주의 말씀을 하셨습니까? 바리새인들의 신앙생활 때문이었습니다. 그럴듯한 신학, 엄격한 도덕률,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이 회칠한 무덤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썩은 것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때부터 전승된 관습을 기탄없이 받아들이면서도 아브라함이 가졌던 순수한 신앙이나 정신은 없습니다.‘바리새’ 라는 말은 헬라어 ‘파라사이오’에서 온 말인데 ‘분리하다’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엄격히 구별했습니다. 거룩한 영역에서 자신을 다스리며 행동전반에 이르기까지 거룩한 것을 구별하게 되어 배타적이며 비판적이고 교만하고 옹졸한 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은 예수께서 단순히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책망하시기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어떻게 행해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스스로에게 물어보며 하나님 앞에 바로 세워지는 신앙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어떠한 모습을 책망하셨습니까?
첫째로 악독이 가득하니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or) 선교사가 가난한 집을 심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에게 2실링 6펜스만 있었습니다. 찾아간 집에는 갓난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아파 누워 있었습니다. 그는 속으로 ‘내가 가진 돈이 3실링 6펜스라면 여인에게 1실링을 기쁘게 줄 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아기 엄마에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늘에는 자비롭고 사랑 많으신 아버지가 계십니다”라고 위로했습니다. 그때 마음속에서‘이 위선자! 사람들에게 사랑 많으신 하나님 운운하면서 네 주머니에 돈을 움켜쥐고 있다니!” 하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테일러는 아기 엄마에게 갖고 있던 돈 전부를 주었습니다. 걸어 나오는 그의 발걸음은 빈주머니만큼이나 가벼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굶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10실링짜리 금화 하나가 우편으로 우송돼 왔습니다. 악독을 버리고 하나님의 은총을 구해야 합니다.
본문 39절입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여기의 ‘악독’은 '악한 자'를 뜻하는 ‘포네로스’에서 온 단어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순결성을 지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 중심은 욕심이 많고 악한 자인 것을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 겉뿐만 아니라 속도 창조하셨으며 겉뿐만 아니라 속도 정결케 되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면서 밖으로 볼 때는 거룩한 무리처럼 살지만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면 회칠한 무덤보다 나은 것이 있습니까? 속에는 악독한 것과 추잡한 생각, 위선, 교만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만 꾸미는 자는 아닙니까? 속이 더러우면 겉을 아무리 치장한다 해도 결코 깨끗해질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겉만 깨끗하게 포장하면 속의 악독이 감추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어리석음을 버리고 속사람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깨끗해지고 새로워지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사랑은 버렸으니
어느 신혼부부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너무너무 사랑해서 출근하면, 집에 홀로 있어야 하는 아내에게 미안해 작은 메모지에 "사랑합니다"라고 쓰고 그 쪽지를 이곳저곳에 숨겨놓았습니다. 아내가 옷을 입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이상한 것이 잡힙니다. "사랑해요" 아내는 놀랍고 행복했습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냉장고 문을 열면 거기에도 "사랑합니다"라는 쪽지가 있었습니다. 밥을 먹기 위해 냄비 뚜껑을 열어도, 화장품 뚜껑에도, 심지어 신발 속과 화장실 휴지에도 "당신을 정말 사랑합니다" 라는 글이 적혀있는 것이었습니다. 집안 어느 한 구석에도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습니다. 아내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너무나 감동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세월이 흐르니까 밥하려 할 때마다, 옷을 입을 때마다, 화장품 뚜껑을 열 때마다 뻔한 단어 "사랑해요"가 쓰여 진 종이는 더 이상 감동이 아니었고 늘어나는 쓰레기에 불과했습니다. 남편의 사랑이 따르지 않는 가식적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본문 42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십일조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십일조를 종류대로 드렸습니다. 그로인해 율법의 완전한 준수자라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물론 신앙의 외적인 표현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신앙의 표현은 그 중심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정신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드리지만 정작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저버렸습니다. 그러기에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복을 받기 위해서 십일조는 드리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계명의 근본정신을 등한히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교회는 분열되고 가정은 불화를 거듭하는 일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속으로는 독사의 독을 품고 있으면서 밖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척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외식하는 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마음과 정성이 없는 예배와 헌물은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형식에만 치우치는 종교 행위는 오히려 하나님께 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없는 모든 행위는 가증한 것이요, 위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들으면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문안만 기뻐하니
독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Otto E. L.von Bismarck)가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내가 오늘 한 일에 대하여 내일 다른 사람들의 여론을 들어보면 태반이 잘못되었다. 그러니 남의 칭찬을 받는다고 하여 기뻐하지 말고 남의 비난을 받았다고 하여 실망하지도 말아라. 본디 인간은 이러나저러나 간에 잘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후세에 이름을 남기겠다는 사람도 있으나 지극히 어리석은 생각이다. 지금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도 내 마음을 알아주기 어려운데 어찌 백 년이나 천 년 후의 사람들이 내 마음을 알아줄 것인가. 그러므로 너는 다만 하나님만이 네 마음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고 세상의 칭찬에 관심을 두지 말아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칭찬 받도록 힘써라”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칭찬이야말로 진정한 칭찬이며, 최상의 칭찬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43절입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사람들로부터 높임 받고 존경 받을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서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습관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들의 특권의식은 우월의식으로 변했고, 어떤 자리에서도 우월의식에 합당한 처우를 당연시 했고, 스스로 그렇게 행동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행동은 교만에서 온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네거리에서 큰 소리로 길게 기도했습니다. 구제할 때도 나팔을 불면서 구제했습니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옷 술을 길게 달았습니다. 상석에 앉기를 좋아했고, 사람들이 찾아와 문안해 주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무덤을 평토장했습니다. 봉을 세우지 않고 다른 땅과 같은 높이로 묻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무덤인 줄 모르고 밟을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토장한 무덤임을 알리는 나무나 돌을 세우고 거기에 일 년에 한 번씩 회를 칠했습니다. 그러나 회가 벗겨지고 세워놓은 돌이 넘어지면 무덤을 분간 할 수 없게 됩니다. 밟을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문제는 무덤인 줄 모르고 밟으면 7일간 부정하게 되어 예배도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평토장한 무덤과 같은 자들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평토장한 무덤과 같이 수많은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것입니다. 내면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데도 겉으로 볼 때 경건해 보이고, 신앙이 좋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람들의 칭찬 받는 일에 만족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칭찬받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위선이 습관화된 것이기 때문에 스스로뿐 아니라 백성들까지도 그 위선과 부패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무지함이 오히려 위선과 외식자체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기에 책망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신앙생활의 타성과 습관화로 인해 가까이 오는 사람들을 모두 썩게 하는 존재인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이 새롭게 믿으려는 초신자들에게 본이 되고 있습니까? 그들로 하여금 무덤에 빠지게 하는 평토장한 무덤 같은 존재는 아닙니까? 나의 신앙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하나님 없이 살아간다면 바리새인이며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입니다. 죽은 것에 회칠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예수의 책망을 기억하고 신앙의 형식만 있고, 그 내용과 열매가 없는 빈껍데기와 같은 신앙생활을 청산하시기 바랍니다.
공자(孔子)가 제자들과 길을 가는데 길옆에서 한 사람이 소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공자는 그를 불러 크게 호통을 쳤습니다. 그리고 계속 길을 가는데 이번에는 큰 대로에서 한 사람이 큰일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은 공자가 그에게 불벼락을 내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공자는 본척만척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제자들이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 사람은 더 잘못했는데 왜 그냥 지나치나요?” 그때 공자가 말했습니다. “저 인간은 야단쳐도 들을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라네.” 책망은 들을만한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책망에 잘 반응하시기 바랍니다. 말씀으로 책망을 받았다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책망받을 일이 없는 완벽한 사람을 쓰시는 것이 아닙니다. 모자람을 받아들이며 책망을 들을 때 감사로 여기는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어찌하여 네 속에 악독이 가득하느냐? 어찌하여 네 속에 사랑이 없느냐? 어찌하여 네 속에 교만이 가득하느냐? 예수 그리스도의 책망을 통해 참된 제자로 거듭나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분노하시는 예수님
눅 11장 37~54절 / 황의봉목사
어느 날,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초대를 받아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가셨습니다. 이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을 받은 나머지 진심으로 존경을 하게 되었고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시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까지 많은 군중과 함께 있다가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하기 위해 왔습니다. 입구에는 손을 씻을 준비가 다 되었고 바리새인과 다른 손님들은 장로들이 가르친 전통에 따라 손을 씻었는데 예수님은 왜 손을 씻지 않으셨을까요?
그런데 모세 오경에 나오는 구약 율법의 의식법에는 여러 가지 씻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음식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의 전통을 알고 있으면서도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일로 인해 사람들이 비난할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손을 씻지 않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명하시지도 않은 일들을 종교상의 문제로 잘 지킨다고 뽐내는 그들을 책망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 오경에는 없지만 ‘장로들의 전통’에는 사람이 식사하기 전에 일정한 방법에 따라 자기 손을 씻어야 하며, 각 식사 과정 사이마다 손을 씻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정결의 문제가 아니라 의식법상의 문제였습니다. 여기에도 지극히 사소한 세칙이 모두 정해졌습니다. 먼저 물을 손가락 끝에서 시작하여 손에 부어야 하며, 손목 바로 위로 흘러내리게 부어야 했습니다. 그 다음 각 손바닥은 다른 손 주먹으로 문질러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물을 다시 손에 붓는데 이번에는 손목에서 시작하여 손가락 끝으로 흘러내리게 부어야 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하나님을 누구보다 잘 섬기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을 얕잡아보고 비난했습니다. 이 시대의 바리새인이 누굴까요? 누구보다 성경을 잘 알고 있고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게 분노하고 계신 것은 곧 나 자신에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 예수님은 사람들의 눈에만 잘 보이려하고 하나님의 눈에 잘 보이는 일은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 설거지를 하는 사람이 자기가 먹은 잔이나 대접의 겉만 깨끗이 씻지는 않습니다. 물론 겉도 깨끗이 씻어야 하겠지만 더욱 깨끗이 씻어야 할 부분은 잔이나 대접의 속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손을 씻는 일에는 지극히 엄격했었는데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일에도 그같이 특별한 관심을 가졌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은 책망하셨습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겉은 깨끗이 하는구나. 즉 너희는 물로 손은 씻었으나 너희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탐욕과 악한 행동은 씻지 아니했다.”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허영, 높은 자리와 사람들의 칭찬 받기를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절). 회당에서 ‘높은 자리’는 청중들을 마주 보고 앉게끔 특별히 마련된 좌석을 말합니다. 회중들 사이에도 좌석의 구별이 있어서 앞좌석에 앉을수록 명예로웠고 명예가 없는 자리일수록 뒷자리였습니다. 이러한 앞좌석에 앉을수록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은 가급적이면 앞에 마련된 높은 자리에 앉고 싶어 했고 또한 특별한 볼일도 없으면서 시장을 돌아다니며 인사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 잘 보이는 외면적인 것들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종교의 외면적인 형식만 잘 갖추어져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행위를 철저하게 하기만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속한 교회에 규칙적으로 빠지지 않고 출석하고, 성경을 열심히 배우며, 교회에 넉넉한 헌금을 드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람들의 눈에만 잘 보이려하고 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보기에는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그의 마음속에 교만과 남을 경멸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면 이것은 진정한 신앙인의 모습이 아닙니다. 교회는 열심히 빠지지 않고 나가고 있지만 자기 아랫사람들에게 불공평하고 자기 상사에게 불성실하다면 그러한 사람은 크리스천이라 할 수 없습니다. 종교의 관계는 사소한 것까지 이행하면서도 삶의 현장에서는 자신의 책임을 다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아무도 크리스천이라 할 수 없습니다.
2. 사소한 것에는 관심을 두면서도 율법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신앙의 수단에 관계되는 율법은 아주 정확하게 지켰습니다. 특히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한 것에는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정통 바리새인들에게는 반드시 드려야 할 몇 가지 부과물이 있었습니다. 먼저는 땅에서 난 첫 열매 중 일곱 가지의 첫 열매를 성전에 드렸습니다. 그 일곱 가지는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석류, 올리브 그리고 꿀이었습니다. 둘째는 ‘테루마’가 있었습니다. 처음 난 열매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으나 테루마는 제사장들의 생계를 돕기 위하여 드렸습니다. 앞에 일곱 가지를 제외한 자라나는 모든 생물의 첫 열매 중 전 수확량의 50분의 1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십일조가 있었습니다. 십일조는 직접 레위인들에게 드렸고, 레위인들은 또한 그들이 받은 것의 십일조를 제사장들에게 드렸습니다. 십일조는 곡물뿐 아니라 “식용으로 쓰일 수 있는 것으로서 경작해서 땅에서 자라난 모든 것”의 10분의 1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이웃에 사는 레위인들에게 직접 드렸기 때문에 텃밭에 심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종류대로 완전하게 드렸으며 더디 드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사람들이라고 사람들한테 칭찬을 받곤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들한테서도 인정을 받았습니다. 강제적으로 제사장들한테 호의를 베푼 것도 여러 번입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필요할 때면 서로 손을 잡고 세력을 강화하려고 애쓰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이것도 행하여야 할지니라” 하시면서 그들이 정확하게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서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본질에 관계되는 율법을 그들은 무시했습니다.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너희는 사람에게 그들의 몫을 주는 데는 최선을 다하면서 하나님께 너희의 마음을 드리는 것에 대해서 전혀 생각지 않고 있다”고 책망하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적인 마음과 사악한 생활을 이상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색칠한 것에 대해서 책망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44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일까요? 민수기 19장 16절에는 누구든지 들에서 무덤을 만진 사람은 7일 동안 부정하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자는 모든 종교적인 예배 의식에서 참여하지 못하고 제외 되어야했습니다. 그런데 살다보면 사람이 알지 못하고 무덤에 닿을 수도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생기지는 않았습니다. 그래도 하여간에 무덤에 닿으면 부정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꼭 이와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사람들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영향력은 사람을 해칠 수 있었습니다. 전혀 알지 못하고 바리새인들과 가까이 한 사람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바리새인처럼 악에 물들어 갑니다.
바리새인들의 마음속에는 부패한 무덤처럼 혐오, 교만, 시기, 악독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간사하게 예배라는 미명 아래 그것을 감추어서 나타나지 않게 했습니다. 따라서 그들과 이야기하고 그들의 교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죄로 더럽혀지며 그들의 부패와 악한 교훈에 감염되고 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경건한 모습을 만들며 어떤 위험도 없다고 합니다. 코로나19가 무서운 것은 무증상 감염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아무런 증상이 없어 코로나에 감염된 줄도 몰랐는데 다른 사람을 감염시키고 있습니다. 전염병은 자기도 모르게 감염됩니다. 그러나 병에 걸린 사람들 자신은 결코 위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3.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자신들 스스로는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을 거듭거듭 책망하시자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율법교사입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교사입니다. 우리도 역시 위선자란 말입니까?” 율법교사의 대부분은 바리새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처럼 예수님의 책망에 찔림을 받았나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도 책망하셨습니다. 46절에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교사여.” 그리고 47절에도 52절에도 “화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하십니다. 예수님이 이처럼 율법교사들에게 화를 내신 까닭은 그들이 자신들도 지기 어려운 율법의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하나님 앞에 나아가지 못하게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안다는 지식의 열쇠를 가지고 자신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막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에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수천 가지나 되는 의식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핑계를 하는 일에도 전문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안식일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 2,000규빗(900m)을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만일 밧줄을 그 가로(街路) 끝에 가로질러 쳐 놓으면 그 가로의 끝도 자기의 주거지가 되어 그것을 넘어 2,000규빗을 더 갈 수가 있었습니다. 또 안식일에 금지된 일 중의 하나는 뱃사람들이나 낙타를 타는 사람들이 매는 매듭, 그리고 밧줄로 매듭을 매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여인이 자기 허리띠는 맬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에 물통을 우물에서 들어 올려야 할 때 밧줄은 우물에 맬 수가 없었으나 여인의 허리띠는 멜 수가 있었으니까 그것을 가지고 물을 긷는 꼼수를 생각해 냈습니다. 안식일에 짐을 운반하는 것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손등이나 발 혹은 입으로나 팔꿈치로나, 귀로나 머리카락으로나, 돈지갑을 거꾸로 뒤집어서나 혹은 돈지갑과 속옷 사이에 또는 속옷을 접은데 나 혹은 신이나 샌들 안에 가지고 다니는 것은 무죄하니라. 이는 그가 그것을 운반함에 있어서 통상적인 방법으로 운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런 예외규정을 일반 백성들에게는 시시콜콜 가르치지 않고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에게 의식법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그것들을 지키지 않았다는 책망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안식일에는 물건을 사고팔지 못하게 하는 규정을 주일에 적용시키는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늘 강단에서 주일에 시장에나 가게에서 물건을 사지 말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서너 살 먹은 아들이 주일날에도 마트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릅니다. 목사님은 토요일에 마트 주인을 찾아가 미리 선불을 지급해 놓고 “내일 우리 아들이 아이스크림을 달라고 하면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당부했습니다. 이 아이는 주일마다 떳떳이 마트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먹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애들이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면 주일을 범했다고 목사님에게 고자질을 했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예수님 당시 율법교사들의 행동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교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52절) 하고 크게 책망하셨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을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들이라고 했으나 그들이 존경하는 선지자들이란 오래 전에 죽은 선자자들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선지자를 만나기만 하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고인이 된 선지자들에게는 무덤과 비문을 세우고 존경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살아 있는 선지자에 대해서는 온갖 박해를 일삼으며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습니다.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훌륭한 관습과 모범적인 생활을 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 본래의 뜻과 맞지 않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 목적을 방해하는 도구로 사용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
눅 11장 37~44절 / 김학우목사(사랑의교회)
유대사회에서 “바리새인과 같다.”라고 하면 “이중인격자”라는 뜻입니다. 바리새인에 대한 태도는 한국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크게 환영받지 못하는 이름입니다. 그것은 위선자의 대명사로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다섯 차례나 “바리새인이여!”라며 책망하셨습니다. 오늘은 본문을 통해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인”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바리새인이 있다.
바리새인이란 이름은 “구별된 자”란 뜻으로, 좋은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구별되게 사는 것보다 소중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왜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책망하셨습니까? 그것은 말과 행동, 겉과 속이 전혀 달랐기 때문입니다. 국어사전에 “위선”은 겉과 속이 다른 것이라 적고 있습니다. 즉,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담배를 끊도록 훈련하는 금연학교에서 가르치는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는 담배를 끊기로 했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느끼게 하여 자신의 결심을 포기하지 않게 하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정반대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만나는 사람들에게 “나는 금식도 하며 구제를 했다.”라고 자랑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허물과 수치를 숨기거나 만회하기 위해 금식이나 구제한 것들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거나 자랑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39절)“너희 바리새인들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이중적입니다. 거기에다 현대 사회 구조가 우리를 이중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밖에서는 존경을 받지만 가정에서는 나쁜 아버지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타인들에게는 친절하고, 잘 하지만, 아내에게는 낙제인 경우가 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이 누구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1위가 40일 금식기도 한 성도, 2위는 철야기도 많이 한 권사님, 3위가 신학을 공부한 장로님이라고 답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은혜와 달란트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중성을 극복하려면 다른 사람이 과도한 기대를 갖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며, 또한 자신의 허물과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중적이 되는 이유는 자신을 대단한 사람으로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죄인이라 말씀합니다.
바울은 죄인 중 괴수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우리의 자격이나 공로 때문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추한 모습을 알고 깨달음으로써 헛된 망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언행이 불일치한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했습니다. 공동묘지에 가보세요! 주변 경관이 아주 빼어나고 쾌적합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는 섞어서 냄새나는 시체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말과 행동 속과 겉이 다를 때, 결과적으로 악취를 내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의 잘못을 거룩으로 포장하려는 태도, 자신의 참 모습과 다른 사람들이 알고 있는 나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하다 보면 결국 이중적인 사람이 돼버립니다. 우리 속에 바리새인적인 요소들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힘쓰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
타인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 바리새인이 있다.
유대인들이 소중히 여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회당과 탈무드, 그리고 랍비입니다. 회당은 대체로 BC 586년,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간 이후 출현했는데, 회당은 예배와 율법연구, 학교와 유대인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탈무드는 유대인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데, 모세오경을 근간으로 BC 500년부터 AD 500년까지, 약 1,000년의 유대종교와 역사와 전통 등을 수록한 것으로, 모두 20권 정도로 12,000 페이지로, 무게만 약 75Kg 되는 엄청난 분량의 책입니다.
탈무드는 한 마디로 신앙과 도덕, 역사와 전통 등을 망라한 것으로, 유대인들은 지식과 지혜의 바다라 부릅니다. 바다에 모든 것들이 있듯이 탈무드에 자신들의 모든 것들이 담겨 있다고 믿고 가르치고 배웁니다.
예를 들면, “탈무드”에서 사람을 평가하는 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키소” 이는 “돈지갑”이란 뜻으로,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뜻이며, 둘째 “코소”, “향락”을 뜻하는 것으로, 무엇을 즐기는가를 통해 그 사람을 알 수 있으며, 그리고 “카소”, “분노”란 뜻으로,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정하느냐에 따라 사람됨을 알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랍비는 “선생”이란 뜻으로 율법과 탈무드를 가르치며, 공동체 대표이자 어른이었습니다. 랍비는 신약시대부터 최고의 권위와 존경을 받았으며, 재판에도 참여했으며 모든 자리의 상석에 앉았습니다. 랍비는 종교예식, 결혼주례와 장례식, 개업, 이사 등 크고 작은 일을 맡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법관이나 경찰보다도 랍비의 말 한 마디가 더 큰 권위가 있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랍비가 되고 싶어 합니다. 랍비는 한국식으로 하면,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나 변호사가 되기만 하면 출세도 하고 사회적 지위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바리새인은 공동체 어른으로 사람들을 지도하고 가르쳤지만, 정작 자신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은 행하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 남에게 책임을 지우면서 자신은 책임을 지지 않았습니다. 가장 나쁜 것은 남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롬2:21-23)“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적질 말라 반포하는 네가 도적질하느냐 간음하지 말라하는 네가 간음하느냐”라고 지적하였고, 또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마23:17)“어리석은 맹인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옛날 제가 학교 다닐 때 선생님들께서 “너희들은 누구누구를 본 받으라.” 말씀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본 받으라고 할 만한 지도자나 위인이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눈을 닦고 보아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은 과거에 비해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 줄었기 때문도 있지만, 도덕적인 수준이 향상되었고, 비판적인 눈이 더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치관의 변화입니다. 과거에는 나라와 가정을 희생하고 가난하고 굶었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감격했으나, 요즘 사람들은 “아마 숨겨 놓은 재산이 있겠지?” 더욱 심한 것은 “자신이 굶은 것은 그렇다하더라도 가족조차 굶겨서야 되겠어?” “다 자기 좋아서 한 것이니까?”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리기 일쑤입니다.
다윗의 강점은 나단 선지자의 가르침을 받아들이는데 있었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나단 선지자를 죽일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나단의 가르침과 책망을 달게 받았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위대한 점입니다.
우리는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행한 잘못과 실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족한 것과 연약함을 위장하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숨지지 않을 때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섬기지 않으면서 섬김을 받으려는 바리새인이 있다.
(46절)“너희 율법교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 사회적인 배경을 가지고 높은 자리 않기를 좋아했지만, 손가락도 까딱하지 않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 두 가지 기념비적인 일을 행하셨습니다. 하나는 성만찬이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입니다. 성만찬을 통하여 자기의 십자가의 희생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을 통해 겸손과 섬김의 본을 보이셨습니다.
(마20:28)“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우리가 희생과 다른 사람의 짐을 지지 않고는 결코 섬길 수 없습니다.“집사, 권사, 목사”는 “섬기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이 AD 70년 로마에게 멸망한 후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했습니다. 2,000년 동안 나라를 잃은 가운데 어떻게 민족의 동질성을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역사가들은 “신앙과 교육의 힘”이라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바리새인과 랍비들이 완고하고 섬길 줄 몰랐지만, 훌륭한 바리새인 랍비도 있었습니다. 아주 훌륭한 랍비 한 사람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로마가 AD 66년 예루살렘을 침공한 후, AD 70년에 멸망당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이 파괴되었고 성전이 불탔습니다. 당시 800만 명의 유대인들 가운데 전쟁으로 절반인 400만 명이 이 때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벤 자칼”이란 바리새인 랍비가 있었는데, 그는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백성이 죽임을 당하고 흩어지는 것까지 참을 수 있었지만, 회당이 없어지는 것은 결코 보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무릅쓰고, 당시 로마군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을 찾아갔습니다. 그는 랍비의 자존심을 버리고 무릎을 꿇고 한 가지 부탁을 했습니다.
“장군이여! 로마와 당신은 예루살렘을 점령하려 왔지만, 우리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오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모든 것은 장군의 뜻대로 하더라도 회당을 파괴하지 말고, 어린아이들에게 계속 가르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길 바랍니다.” 장군은 랍비의 요청을 허락했고, 랍비는 “예시바”라는 회당을 세우고,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에도 토라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한 랍비의 헌신과 희생으로, 로마의 통치 아래에서도 자기 말과 언어를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나라를 잃어도 언어를 잃지 않았고, 국가는 없어도 민족은 없어지지 않았고, 모든 책은 없어졌어도 토라와 탈무드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생존한 비결입니다.
우리가 산에 올라가서 “야호…”소리를 지르면 그것이 곧 나에게 메아리로 돌아오듯 내가 한 그 비판이 곧 나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먼저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어라”고 하셨습니다.
아직 청산하지 못하고 남아 있는 바리새인적인 요소는 없습니까? 자신의 부족을 살펴서 아직까지 남아 있는 바리새인적인 요소들을 극복하는 성도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책망하심
눅 11장 37~52절 / 안양준목사
본문은 바리새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점심을 드시기 위해 가신 예수님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바리새인을 향해 ‘화있을찐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하는 말을 반복해 가면서 심하게 질책하시는 모습을 기록한 것입니다.
저는 참 주님은 대단한 분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같으면 도저히 점심을 초대받아 간 집에서 아무리 언짢은 일이 있다해도 주인을 향해서 그렇게 심하게 나무랄 자신이 없습니다만 만약 그랬다면 뒷일은 저 자신도 책임을 질 수 없겠고, 성도들도 한 목소리로 목회자의 자격이 없는 인간이라고 욕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의 위선에 대하여, 그들의 교만에 대하여, 그들의 부패에 대하여 조금의 양보없이 꾸짖으신 것입니다.
사실 가장 순결하고 아름다운 백합화가 썩으면 다른 어떤 꽃보다 냄새가 더 심하듯이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하면 그 사악함이 다른 어느 것보다 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제 자신을 보듯이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꾸짖음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말씀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바리새인들의 형식주의를 책망하심(39-41절)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향해 ‘너희의 겉은 깨끗하나 너희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사람의 밖을 만드신 하나님이 사람의 속도 만드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속을 보고 계시고, 외적인 모습보다 내면의 상태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남의 눈만 의식하고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는 제사 중심의 종교였습니다. 안식일에 제사드리고, 절기마다 제사드리고, 날마다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만큼 그들에게는 제사의식이 중요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드릴 정도로 율법에 정한 규례를 엄격하게 지키며 살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종교든지 이런 외적이고 형식적인 일에 치중하다보면 본질에 소홀하기가 쉽고, 결국 그러한 형식주의가 종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다 보니 제사를 드리는 정신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찌니라’고 하셨습니다.
종교의 본질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공의와 사랑입니다. 종교는 내용과 형식이 겸전(兼全)할 때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형식도 지켜야 하고 본질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 바리새인의 교만을 책망하심(43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하고 책망하셨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시장에서 사람들로부터 문안받는 것을 기뻐하는 행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높임을 받고 존경받을 만한 것이 자기에게 있음을 과시하는 것으로 바리새인들은 언제나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왔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에 대해서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을 가졌고,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특별히 선택된 자들이란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우월의식에 합당한 대우를 당연시했고 스스로가 그렇게 행동했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의 이런 행동은 교만에서 나온 것이라고 에수님은 꾸짖고 계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사람들 간에 계급과 차별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높아질수록 섬기는 일에 더 열심히어야 합니다.
눈이 높은 것이 죄이듯 기독교인에게 특권의식과 우월의식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죄입니다.
3. 바리새인의 부패를 책망하심(44절)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
평토장한 무덤은 오랜 세월이 흘러서 평평해진 무덤을 가리키는 것으로 위장된 부패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평토장한 무덤이 속은 부패해서 썩은 것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겉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같이 바리새인들의 종교적인 부패는 너무 오래 지속되었고, 습관화되었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나 모든 백성들까지도 그 위선과 부패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만약 오늘날의 교회나 목회자나 성도들이 썩어있으면서도 너무 오래 지속되다 보니 자신들이 썩은 것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두렵고 무서운 일입니다.
고인 물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는 것처럼 썩은 종교 안에서는 참된 성도들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형식적인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교만한 성도가 되지 않도록, 썩은 신앙인이 되지 않도록 항상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이 어떻게 깨끗해지는가?
눅 11:37-41 / 예수 그리스도의 종
‘무엇이, 어떻게 깨끗해지는가?’ 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증거 하겠습니다.
본문 37절은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실 때일까요? 누가복음 11:14-36의 말씀을 하실 때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실 때 유대인들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표적 곧,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가 삼일동안 있었던 ‘요나의 표적 밖에 없다’고 하셨습니다
. 그것은 예수님이 장차 삼일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부활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죽음에서 부활한 예수 내가 표적인데 또 무슨 표적을 구하느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을 하실 때’입니다. 그 때에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
본문에는 점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회당 기도가 끝난 후 먹는 가벼운 아침식사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아침식사에 초대한 이유가 있겠죠?
예수님의 탁월한 가르치심에 매료되어 식사에 초청했을지도 모릅니다.
한편으로는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인기절정의 인물이므로 예수님과 함께 식사함으로써 자신을 예수님과 동급 인물로 인정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원문을 보면 한 번 요청한 게 아니라 거듭거듭 요청한 것을 보면 그런 심리가 있습니다.
이르자면 일국의 대통령과 함께 식사함으로써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것과 같은 심리죠.
아무튼, 예수님은 한 바리새인의 식사초대에 쾌히 응하셨습니다.
그런데 본문 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식사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것은 위생적인 측면이 강하죠.
저도 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습관이 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도 예수님은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마가복음 7:2-5을 보면 몇몇 제자들이 식사하기 전에 손 씻지 않자, 즉각 바리새인들이 문제 삼고, 예수님을 질책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바로 그 사람들인 바리새인들이 가만있을 리 만무하겠죠?
본문 38절 하반절을 보니까 이번에는 질책은 하지 않고, 이상히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 깜짝 놀랐던 것입니다.
더욱이 식전에 손 씻는 것은 위생상의 문제뿐 아니라 죄 많은 세상과의 접촉으로 인해 생긴 불결함을 없애기 위한 유대인들의 규범이었습니다.
그러니 식전에 손을 씻지 않으신 예수님을 보고 그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이 부분을 읽는 사람들은 누구나 예수님이 왜 식전에 손을 씻지 않아 문제를 일으키시는가? 의아해할 겁니다. 정말 왜 그러셨을까요? 본문 39절에 답이 있습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이유가 무엇이죠?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일부러 손을 씻지 않으셨습니다.
즉, 자신의 마음속은 깨끗이 하지 않으면서 겉만 깨끗이 하는 바리새인들을 질타하시기 위해 일부러 손을 씻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식전에 손 씻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도 아니고, 계명도 아닙니다.
그들이 정한 한갓 규범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 자기들은 철저히 지킴으로써 씻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을 가지고 그들을 비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월감을 갖고, 비판하고 하는 자체가 겉과 속이 다른 모습 아닙니까?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것처럼 당시 바리새인들은 표리가 부동한 위선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식전에 손을 씻음은 물론, 자기들이 먹고 마시는 잔과 대접도 깨끗이 씻었습니다.
반면에 그들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는 자기들의 마음속은 씻지 않았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마가복음 12:40 하반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길게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에게 기도 많이 하는 사실을 자랑하기 위해 그들은 기도를 길게 했습니다.
기도하는 겉모습과 기도하는 마음속의 모습이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위선적인 모습은 또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3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렸습니다만 그보다 더 중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저버렸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엄청난 액수의 헌금을 했는데 그것이 모두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했습니다.
마기복음 12:40 상반절을 보면 바리새인들이 과부의 가산을 집어삼키지 않습니까?
그런 방법으로 재산을 축적하여, 그 중에 상당수의 금액을 헌금으로 드렸던 것입니다.
부정하게 돈을 번 사실은 감추고, 많은 헌금을 드리면서 자기들을 만 사람들 앞에 드러내며,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으니 얼마나 위선자입니까?
그래서 누가복음 11:44을 보면 예수님이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을 보고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평토장한 무덤’이란 것은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리는 무덤, 곧 ’봉분을 만들지 않고 평평하게 매장한 무덤’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숨기어서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는 무덤을 가리킵니다.
무덤인 줄 모르게 해 놓았으니 사람들이 무덤 위를 마구 밟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평토장한 무덤 같다”는 것은 “그들은 매사에 철저하게 덮어 감추거나 가리어 숨긴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23:27-8에서는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해 ‘회칠한 무덤 같다’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같다”는 말을 이해하려면 유대인들의 장례문화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장례는 우리나라의 것과 많이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장례를 두 번 치릅니다.
첫 번째 장례는 사람이 죽으면 무덤에 갖다 넣고, 1년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살이 다 썩겠죠? 바위를 판 무덤 안은 지독한 냄새로 진동할 것입니다.
시신이 다 썩으면 뼈만 남겠죠?
그 뼈를 따로 모아서 돌로 된 관에 넣고, 좁은 통로와 같은 장소에 밀어 넣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장례입니다.
유대인들 중에는 형편상 두 번째 장례를 미처 치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무덤 안에는 뼈들과 기타 더러운 물질로 가득할 것입니다.
하지만 무덤의 표면은 하얀 색의 석회를 칠함으로써 굉장히 희고, 깨끗했습니다.
햇빛이라도 비치는 날에는 회칠한 무덤은 번쩍번쩍 화려하게 빛을 발했습니다.
그 모양을 보고 누가 무덤이라고 하겠습니까? ‘유명 유적인가?’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따라서 “바리새인들이 회칠한 무덤 같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속은 무덤 속의 부패한 시신으로 인한 썩는 냄새와 말라비틀어진 뼈들처럼 온갖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 겉으로는 깨끗한 체 한다, 즉 그들은 극도의 위선자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매사에 덮어 감추고, 가리어 숨기며,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의 악행을 아시고, 본문 40절의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어리석은 자들아!’ 하셨습니다. 왜요?
자기들의 마음속은 썩을 대로 썩었으면서, 겉만 깨끗하게 하여 ‘누구보다 잘 믿고 있다’고 자부하며, 오만한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규범을 지키므로 굉장한 우월의식을 갖고, 세리와 죄인들을 배척하고, 심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행태의 삶을 사는 바리새인들을 크게 질책하셨습니다.
“겉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속도 만드신 것을 어찌 모른단 말인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 41절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깨끗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여기서 ‘그 안’은 어디입니까?
‘잔과 그릇 안’입니까? 아니면 ‘마음 안’입니까? 이도저도 아니면 ‘재물 안’입니까?
본문 39절에서 예수님이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 하신 것을 볼 때 그 안은 마음 안, 마음속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저와 여러분은 우리 가운데 무엇이 깨끗해져야 하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본문 41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무엇이 깨끗해집니까? 모든 것이 깨끗해집니다.
여기서 ‘모든 것’이란 단어가 두루뭉술해서 좀 애매모호합니다.
대체 우리 가운데 어떤 부분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는 걸까요?
우리 자신의 모든 것입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쉬우나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는 것이 아닙니다.
“탐욕과 악독을 가지고 부정하게 번 돈에 대한 죄의식과 그로 인해 껄끄러워진 하나님과의 관계 등등의 모든 것이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죄의식은 마귀가 주는 것도 있으나 그 어떤 모양의 죄의식이든, 느낌이 오면 즉각 자백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죄의식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요.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본문 41절 말씀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깨끗해지는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음속에 있는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구제해야 깨끗해진다”는 겁니다.
즉, “온갖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불의하게 모은 재산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야 비로소 깨끗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탐욕과 악독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탐욕과 악독을 붙여서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탐욕과 악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탐욕이 있는 사람들치고 악하지 않은 사람 봤습니까?
아마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악하고 독한 언행을 쏟지 않습니까?
더욱이 탐욕은 우상숭배 죄를 범하는 것이므로 가장 악독한 것입니다.
출애굽기 20:4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즉, “새긴 우상은 그 어디서도, 그 어떤 모양도 만들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와 같은 명령을 하셨을까요?
사람들이 지금까지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 가지 모양의 우상을 만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우상들을 만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만들 것입니다.
무수한 우상들 가운데 실제로 존재했던, 현재 존재하고 있는, 앞으로 존재할 우상들이 있을까요? 단 한 개의 우상도 없습니다. 모두 허구고, 허상입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우상 앞에 절을 합니다.
우상을 숭배합니다. 우상을 높입니다. 우상을 신적인 존재로서 인정하고 영화롭게 합니다.
그렇게 하기때문에 하나님께서 “새긴 우상을 그 어디서도, 그 어떤 모양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을까요?
그렇게 생각하기 쉬우나 그런 이유가 아닙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탐심과 악독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지금껏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우상들을 만든 까닭은 자신들의 탐심과 악독 때문입니다.
순전히 자신들의 탐욕과 악독을 채우기 위해 여러 가지 우상을 만들었고요.
오직 자신들의 탐욕과 악독을 채우기 위해 우상을 숭배하며, 높였고요.
자신들의 탐욕과 악독을 채우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하며, 소원을 빌었고요.
자신들의 탐욕과 악독을 채우기 위해 우상을 섬기며, 영화롭게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무수한 우상들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믿고 그 신들을 추앙하는 게 아닙니다. 순전히 자기 탐욕과 악독을 채우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골로새서 3:5 하반절을 통해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절에서는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따라서 우상숭배 죄의 근원이 되는 우리 마음속의 탐욕과 악독을 버려야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깨끗해지게 합니까?
즉, 우상숭배 죄와 같은 마음속의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부정한 방법으로 모은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우리를 깨끗해지게 합니다.
전도하다가 어떤 교회를 섬기는 분을 만났는데 자기가 과거 많은 돈을 벌었다더군요.
그런데 그 돈이 다 부정한 방법을 통해 벌었다고 하더군요.
그 많은 돈이 투자를 하여 실패한 적도 없고, 사기를 당한 적도 없었는데 다 날아가버렸다더군요. 그로 인해 수 년 동안 물질 문제로 굉장히 어려웠다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 때 그가 오늘 본문말씀처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더라면 자신이 깨끗해짐으로써 물질 때문에 여러 해 동안 고통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탐욕과 악독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마음속의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요.
탐욕과 악독 때문에 부정하게 번 돈이 있으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줘서 깨끗해져야 합니다.
아울러 한국교회는 탐욕과 악독으로 돈 번 사람들을 회개시키기는커녕 그들을 위해 축복해 주는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 깨끗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이 마음속의 탐욕과 악독을 버리고, 부정하게 번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가?” 하는 고민입니다.
탐욕과 악독을 다 버릴 수만 있다면 그 일이 가능할 것입니다.
탐욕과 악독은 우리가 버리고 싶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탐욕과 악독을 우상숭배와 동급으로 보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우상 숭배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탐욕과 악독을 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즉, 탐욕과 악독을 버리는 일에는 우리의 분명한 의지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한계의 장벽이 떡 하고 버티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한계의 장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완벽하게 해결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야말로 세상의 모든 탐욕과 악독을 버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버리셨을까요? 빌립보서 2:6-8절에서 잘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하나님이란 존재를 다 던져버리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실 정도로 버리셨습니다.
이보다 더 큰 자기비하, 자기 버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 자신의 모든 것을 벗어던진 사건이 인류역사에 어디에, 또 어떤 신들에게 있겠습니까?
자신을 비워 하나님이란 신분에서 사람이 되신 것도 모자라 온갖 조롱과 멸시와 천대와 침 뱉음과 매 맞음을 다 당하시고, 몸소 십자가에 달리시어 존귀한 몸을 찢으시고, 고귀한 피를 다 쏟지 않으셨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예수님을 늘 묵상하며,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칠 때 비로소 우리 마음속의 모든 탐욕과 악독을 버리게 되고요.
그렇게 하려고 몸부림칠 때 자꾸 은폐하려는 생각과 표리부동한 위선적인 모양을 다 던져버리고 죄의식과 그로 인해 껄끄러워진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끗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 깨끗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누가복음 강해(눅11:37-41)
손진길 목사(오픈 바이블 스타디 인도자)
결례(缺禮, 손발을 깨끗하게 하는 것)의 진정한 뜻은 마음속 탐욕과 악독을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눅11:37-41)
예루살렘에 가까워질수록 유대 땅에서 복음사역을 행하시는 예수님께 대하여 바리새인들의 관심이 드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과 행동은 두 가지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1) 첫째, 처음부터 부정적인 견해를 날카롭게 피력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벙어리에게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예수님께서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서 그것은 귀신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잠시 빌려서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는 행위라고 무조건 삐딱하게 보고 있는 자들입니다(눅11:14-15).
(2) 둘째, 예수님의 사상을 직접 확인해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랍비는 영생에 관한 예수님의 견해를 들어보고자 합니다(눅10:25). 그리고 본문에서와 같이 식사초대를 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어보고자 시도하는 어떤 바리새인도 있습니다(눅11;37-38).
예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가 되었든지 간에 그 시간과 장소를 빌려서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말씀의 진리를 정확하게 가르쳐주고자 하십니다(눅10:26-37, 11:17-20, 40-41). 그와 같은 예수님의 노력은 때로 신랄한 지적으로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눅11:42-54) 그것은 바리새인들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관심이 없다면 그렇게 잘못을 지적하고 야단을 칠 일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외면을 해버리실 것입니다(롬1:28). 그리하면 그들은 자기들이 옳은 줄 알고 그대로 종교활동을 하다가 백성들을 실족하게 한 잘못 때문에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들어가고 말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은 입장에서 이제부터 본문의 말씀을 한 구절씩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의 묵상을 통하여 그 깊은 의미와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파악해봅니다;
첫째로,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눅11:37);
(1) 유대 땅에 들어오셔서 복음사역을 하시는 예수님께 바리새인들이 많이 찾아가서 그 사역의 현장을 살피고 있습니다(눅11:37a).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1) 첫째,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이 선을 보였다고 하는 그러한 놀라운 치유의 능력과 축사(逐邪)의 기적 또는 죽은 자를 살리는 선지자의 능력이 실제로 발생하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하는 것입니다.
2) 둘째, 나사렛 예수의 주장 가운데에는 유대교인들이 도저히 수용할 수가 없는 대목이 많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인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3) 셋째, 혹시 예수가 메시아라고 한다면 외세를 물리칠 복안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닌지 탐지를 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2) 그와 같은 복잡한 생각을 가지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복음사역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의 바리새인은 아예 자기 집에 점심식사 자리를 마련하고서 예수님 일행을 초청하고 있습니다(눅 11:37b);
1)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아니하시고 그 초대에 응하십니다(눅11:37c). 보통사람 같으면 자신과 관계가 별로 좋지 아니한 그러한 바리새인이 식사초대를 할 것 같으면 그 저의를 의심하면서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 것입니다.
2)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전혀 그렇게 처신하지를 아니하시고 계십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눅10:27-37). 아버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을 긍휼하게 여기고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비를 베푸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초대에 응하지 아니하실 이유가 전혀 없으신 것입니다.
둘째로,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눅11:38);
(1) 유대인들이 손발을 깨끗하게 씻는 것은 원래 제사장들의 결례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출애굽기의 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 (물)두멍에서 수족을 씻되,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 물로 씻어 죽기를 면할 것이요, 제단에 가까이 가서 그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도 그리할지라. 이와 같이 그들이 그 수족을 씻어 죽기를 면할지니, 이는 그와 그의 자손이 대대로 영원히 지킬 규례니라”(출30:19-21).
(2) 제례의식을 행하는 제사장들의 결례가 전반적인 유대인들의 신체적 결례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결례의식을 백성들의 실생활에 적용하기 위하여 장로들이 다음과 같은 종교적인 전통을 만들고 있습니다;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고, 장에서 돌아올 때에는 물을 뿌리고 식사를 할 것이며, 잔과 주발 등은 그 겉을 깨끗하게 씻어야만 합니다”.
(3) 그러한 장로들의 유전을 백성들에게 종교적으로 교육시키고 있으며 모범을 보이고 있는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런데 어느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초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점심식사를 하시기 전에 손을 씻지 아니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참으로 이상하게 여기고 있는 집주인 바리새인입니다(눅 11:38).
셋째로,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11:39);
(1) 집주인 바리새인의 의문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답변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설명이 날카롭기 그지 없습니다. 그들 바리새인들이 중시하고 있는 장로들의 유전에 대하여 먼저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눅11:39a). 그것은 허물이 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릇을 깨끗이 하여 식사를 차리는 것은 정결함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잔과 대접의 겉만을 깨끗하게 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지 진짜 중요한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아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그릇으로 식사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그 속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눅 11:39).
(2) 유대교지도자들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마음속과 영혼의 상태를 먼저 보고 계신다고 하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탐욕과 악독을 회개하지 아니하고서 그저 겉만 깨끗하고 번지르르하게 포장하고서 계속 자신 있게 백성들 앞에서 종교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영이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이십니다. 따라서 사람의 중심을 통찰하시고 그 영적인 깨끗함의 상태를 가장 먼저 보십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16:7). 그것은 마치 총각인 치과의사가 선을 보러 간 자리에서도 신부감의 치아상태를 가장 먼저 살피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진리의 말씀을 생명의 빛으로 사람들에게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라고 하는 것은 겉과 속이 모두 깨끗하고 일치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율법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하는 바리새인들이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결례를 강조하면서도 그 속을 깨끗하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로지 남들이 보기에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서 식사를 하라고 강조하고 있을 뿐입니다. 잔과 대접 등을 깨끗하게 하라고 가르치면서도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청결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무지합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그 옛날 카인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사람의 눈으로 평가하며 사람을 속일 수 있으면 하나님도 충분히 속일 수가 있다고 하는 타락한 사고방식입니다”(창4:4-10).
넷째로,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11:40-41);
(1)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눅 11:40); 여호와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창세기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창2:7). 땅의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시니 마침내 영혼이 사람의 육신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되었다고 하는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하나님이 사람의 겉과 속을 모두 만드셨다고 하는 것은 창세기 제2장의 말씀에 비추어보면 진리라고 하겠습니다(눅11:40).
(2)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눅11:41);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바깥에 있는 육신이 아니라 사람의 속에 들어 있는 영혼이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 사람들은 흔히 세상적으로 생각하고 또한 행동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굶주리고 있는 자, 가난에 허덕이고 있는 자들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잘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모든 것이 해결이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빈국이 부국이 되고 나서도 상대적인 빈곤과 욕구불만이 사회적으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물질생활은 향상되는데 비해서 정신생활은 불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결과 물질만능사상에 젖어서 인간의 생명을 얼마나 하찮게 여기게 되는지 모릅니다.
2) 나아가서 사치와 향략으로 정신적인 빈곤이 더욱 심화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부자가 된 야곱이 모든 위험이 사라지자 요단 강을 건너가서 남쪽 벧엘로 가지 아니하고 북쪽 세겜으로 올라간 것과 같습니다(창 28:17-22, 33:17-20). 벧엘의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것보다는 대도시 세겜으로 가서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하여 그렇게 발걸음을 옮기고 마는 것입니다.
3) 그러므로 물질적인 것으로 인간을 구제할 수가 없습니다. 과학의 발달로도 사람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오로지 영적인 차원의 구원이 있어야만 합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실 때에 인간의 구제와 사람의 영원한 구원을 논의할 수가 있게 됩니다. 따라서 겉이 아니라 속을 깨끗하게 하여 창조주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구원의 첫걸음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 신앙이란 두 가지의 요소를 지니고 있습니다;
① 첫째, 창조주 하나님이 자신을 만들었으며 자신의 인생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② 둘째, 그러므로 창조주를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여호와의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신앙을 지니고 있다고 자랑하면서 선민들을 가르치고 있는 바리새인들이 실족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세상나라의 왕을 섬기는 것 정도로 여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세상나라의 왕은 백성들이 진심으로 임금을 두려워하고 중심으로부터 섬기고 있는지를 파악하지를 않습니다. 다만 백성들이 나라의 법을 지키고 왕명에 복종을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유대교지도자들 특히 바리새인들이 율법생활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왕 앞에서 그러하듯이 백성들이 사람들 앞에서 율법을 잘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생활에 있어서 구체적인 장로들의 유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결례의 규정이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겉을 깨끗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속입니다. 마음속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데 겉만 깨끗하게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며 가식적인 신앙의 태도입니다. 그러한 신앙생활로써는 자신을 구원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 자신이 하나님 앞에 서있는지 아니면 사람들 앞에 서있는지 점검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아무쪼록 하나님 앞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시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살롬!
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것
눅 11장 37-41절 / 이천우목사
본문을 비롯하여 54절까지 계속되는 내용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외식을 책망하는 내용을 대하면서 바리새인처럼 외식하며 살지 말자는 생각을 갖는 것에서 바리새인이 행했던 것들, 예컨대 본문에서 보는 손을 씻는 행위라든지 잔과 대접을 씻는 행위라든지 하는 따위를 더 이상 하지 않는 것을 바리새인처 럼 외식하지 않고, 바리새인처럼 살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표면적인 억제요 금지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이 해 왔던 일들을 더 이상 행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이 하는 행위에서 보시고 있는 외식하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요 그러한 행위에 있는 모습을 본받지 말라는 것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손을 씻는 행위라든지 잔과 대접을 깨끗이 씻는 행위를 하는 것이라든지 하는 따위의 행위들을 하지 말라는 금지에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를 가져나가는 것을 가지고 외식하는 것에 있어나가는 잘못을 예수께서는 따르지 말라는 것에서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본문인 누가복음 11장 37-41절은 누가복음 11장 37-54절의 일부인데, 전체 구절은 비교적 긴 구절인 17절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의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은 23장 전체 39절중에서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36절의 긴 구절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마가복음 12장에서는 3절에 불과한 짧은 구절로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이 중에서 누가복음 11장 37-41절에서 말씀해 주시고 있는‘사람을 정결하게 하는 것’에 한해서 그 내용과 이것 이 지닌 의미를 설명함으로써 예수께서 알게 해주시고자 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보도록 합니다.
이에 본문에서 예수께서 해 주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보는 것으로 시작하겠습니다. 예수께서는 앞서에서 말씀하신 등불 비유를 마치실 때 한 바리새인이 자기 집에서 음식을 대접하겠다며 와 주실 것을 예수께 청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러겠다며 쾌히 응하시고는 그의 집으로 발걸음을 하였습니다. 바리새인의 집에 당도한 예수님은 유대인의 관습인 손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고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유대인은 식탁에 앉아 식사를 하기 전에 먼저 손 씻는 의식인 정결의식을 행하는 것이 조상 때부터 해온 오랜 관습의 전통입니다. 이는 본래 이스라엘이나 근동의 민족들은 식사를 할 때 우리가 사용하는 수저나 저분, 또는 서양인들이 사용하는 포크와 나이프 등의 도구 없이 음식을 손으로 집어먹었기 때문에 식사 전에는 의례 손을 씻음으로써 위생에 주의하는 관례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유대인이면 누구나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손 씻는 일부터 당연히 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기를 겪은 이후에 이러한 관례가 거룩함에 이르는 정결 의식으로 정해져 하나의 유전이 되었습니다. 모세 율법에는 정결 규례가 있는데, 하나님의 거룩한 장막에 불러들임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그들 또한 거룩함에 있게 되는데, 여기에는 속죄제물의 희생이 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을 덮고 있는 것은 그들을 부정으로부터 벗어난 정결(거룩)의 은혜입니다. 이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알게 하시는 것에서 하나님은 각종 짐승을 깨끗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으로 구별해 놓으셨습니다.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새김질하는 짐승은 정결한 짐승으로 먹을 수 있게 하였으며, 낙타, 사반(오소리), 토끼와 같이 새김질만 하고 굽이 두 쪽으로 갈라지지 않은 짐승이나 돼지 굽은 두 쪽으로 갈라졌으되 새김질을 하지 않는 짐승은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짐승, 그리고 네 발로 걸어 다니는 길짐승 가운데에서 발바닥으로 땅 위를 걸어 다니는 짐승, 땅 위에서 기어 다니는 짐승도 부정한 짐승으로 규정하면서 이런 동물의 사체는 만지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민물고기이든 바닷물고기이든 물고기 중에서 지느러미와 비늘이 있는 것은 정결한 것으로 먹을 수 있게 하였으며, 지느러미와 비늘이 없는 것은 먹을 수 없는 부정한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경우 문둥병(각종 피부병), 아들을 출산하거나 달거리를 하여 피를 유출한 여인, 성병에 걸림으로 고름이 나는 자, 성행위에 의해 정액 유출과 그 접촉에 있은 남녀 및 성행위 없이도 정액 유출이 있은 자는 부정하며, 시신을 가까이 하며 접촉하는 것도 부정하다고 규정하여 그 부정으로부터 벗어나 깨끗할 거세서 정결 의식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범죄에 해당하는 부정한 행위에 있은데 따른 정결 의식을 갖는 것에서가 아니라, 동물의 상태 또는 사람의 신체상에 일어나는 특이함을 가지고서 이스라엘 백성이 정결할 때와 부정한 때를 여러 규례로 정함으로써 부정하게 되는 때와 정결하게 되는 때의 구별에 있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속죄에 있는 자기 백성을 그들의 부정함으로 부정한 자로 있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의 정결함으로 정결한 자에 있게 하실 것을 예시하여 주시는 것인데, 이는 장차 메시야 사역을 통해 정결케 하실 일의 예시로 삼는 일을 하시는 것에서입니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이 부정하다고 규정된 각종 규례에 해당할 경우 이것으로부터 정결 의식을 행하게 하여 자신을 깨끗함에 있을 수 있게 함으로써 부정으로부터 보호하시고 정결에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항상 자신을 살펴 돌아보는 것이 되게 하였습니다(레 10-15장).
그런데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서기관들은 이 정결 규례에 근거하여서 손 씻는 규례라든지 잔과 대접을 씻는 규례라든지 등도 만들어 정결 규례로 삼고 이를 지켜오는 전통을 세운 것입니다. 그에 따라서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오랜 세월을 이 전통을 따르며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행동에서 바리새인은 매우 의아하게 생각되는 모습을 본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인 손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고 바로 식탁에 앉으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신의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의아하게 여기는 것을 아시고는 그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너희 바리새인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너희 속은 착취와 악독으로 가득하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분께서 속도 만들지 않으셨느냐? 그러나 속에 있는 것들로 자선을 베풀어라. 보아라, 그러면 모든 것들이 너희에게 깨끗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으니,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온갖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희가 이것들도 행하고 저것들도 버리지 말아야 했다. 너희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으니, 너희가 회당에서 높은 곳에 앉는 것과 장터에서 인사 받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화가 있으니, 너희가 드러나지 않은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위를 밟고 다니면서도 알지 못한다."(눅 11:39-44, 바른성경)
바리새인은 정결의식을 따르는 손을 씻는 의식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을 이상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예수님을 부정한 자로 보는 것에서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바리새인들이 실상은 어떤 자들인지를 알려 주시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씻지만 속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속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차 있어서 더럽기 때문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겉은 바리새인이 정결 의식을 따르는 것에서 행한 손을 씻는 의식에서 보는 몸(신체), 그리고 39절에서 예수께서 언급하신 잔과 대접의 겉을 이릅니다. 그리고 속은 사람의 속, 곧 마음을 이릅니다. 예수님은 잔과 대접의 겉과 사람의 속마음을 대비시켜서 진정 깨끗하게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잔과 대접은 단지 먼지, 티끌로 더러워 있을 뿐입니다. 이건 말이죠. 물로 매번 씻으면 한동안은 깨끗합니다. 하지만 사람의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여 언제나 부패한 악취가 풍겨나는 더러움에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이렇게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으로 온통 더럽혀 있지만 이를 깨끗하게 하지 않고 단지 잔과 대접을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는 것에서 자신이 깨끗해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렇게 손을 씻고 잔과 대접을 깨끗이 씻는 것에서 자신들이 깨끗하는 줄로 알고 있는 정결 의식은 본래 율법이 명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행위는 장로들의 유전, 그러니까 장로들의 전통이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관습이었습니다.
이 장로들의 유전에서 손을 씻는 행위라든지 잔과 대접을 씻는 행위는 정결 규례에 속하는 것인데, 이번의 경우와 유사한 사건인 마가복음 7장 3-4절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 몇 사람이 예수님을 멸시하며 비난하는 것에서 한 말인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라고 말하여 정결에 관한 전통과 관습들이 매우 많았으며, 이것들을 엄격히 지켜 왔었음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개역한글에서는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손을 부지런히 씻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라고 말하여 부지런히 자주 씻는 행위를 가졌으며,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먹지 않았으니 씻는 행위를 갖는 것에서 정결의 규례를 열심히 지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식사 초청을 받고 그 집 식탁에 앉으면서 장로들의 유전을 따름에 있는 손을 씻는 정결 의식을 의도적으로 지키지 않은 것은 그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그가 보고 갖는 의문에 갖고 이상히 여기게 하는 것을 통하여 그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은 말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데, 이를 놔두고서 단지 손을 씻고 잔과 대접을 씻는 의식을 지켜 행하여서 사람이 깨끗해질 수 있는 것이냐며, 손을 씻고 잔과 대접을 씻는 그들은 자신의 속마음도 깨끗이 씻음을 받아야 할 것인데, 사람이 깨끗하려면 그들 안에 그들을 만드신 주께서 계셔야 된다는 것을 알게 해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을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표현하여 말한 것은 마가복음 7장 6-13절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여 하신 말씀인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 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은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유전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잘 저버리는 도다. 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가로되 사람이 아비에게나 어미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제 아비나 어미에게 다시 아무 것이라도 하여 드리기를 허하지 아니하여, 너희의 전한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라고 하신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이러하기에 예수님은 그의 겉을 만드신 하나님이 그의 속까지도 다 만드시지 않았느냐는 수사 의문문을 사용하여서 책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겉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속도 만들었는데, 바리새인은 이 사실을 잊고서 사람의 보이지 않는 속의 정결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단지 종교적 형식 준수를 지켜 가는 것에서 겉만 깨끗하게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정결한 자가 되게 하는 건인양 잘못 알고 있기에 외식에 있어 나갔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라고 크게 책망하시면서,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라고 책망하신 후 이어서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라고 하신 말씀은 그들의 마음이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신 말씀에서 볼 때, 그리고 그것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의 실상인 속마음은 재물을 취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의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서슴없이 폐하기까지 하고 그렇게 해서 취한 재물을 축적하는 것에 있다고 하신 말씀에서 볼 때 그들의 그러한 악한 죄에서 떠나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는 의미에서 하신 것이며, 그에 대한 실행으로 자신의 가진 것을 그가 부정하게 취함으로 애통함에 있는 자들에게 돌려주며 또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그는 그가 백성의 선생으로서 알고 있으며 가르침에 있어야 하는 주님을 따르며 섬김에 그들의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여 힘을 기울일 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임에 다름 아닙니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입으로만 아니라 마음으로 경외함에 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참생명인 영생을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구절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니라.(마 8:22)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눅 9:5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마 19:21)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막 10:21)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눅 18:22)
바리새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에 있는 우리입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의 주님으로 오셔서 우리 겉만 아니라 속도 만드신 그 모두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겉이 예수님을 따르며 입술에 하나님을 경외함을 담고 있는 깨끗함에 있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타락한 사람의 본성인 부패한 죄성에 의해 탐욕과 악독이 가득 찬 우리 속마음을 예수께서 차지하고서 십자가에서 구속하신 피공로로 깨끗함에 있게 하십니다. 그래서 말이죠. 입술로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거룩한 행위를 가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속마음에서도 그 마음을 차지하고서 하나님을 경외함에 있어나가게 하시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습니다(고후 5:17).
우리가 말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모든 부정으로부터 깨끗케 하시는 구원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리고 예수께서 이 일을 위해 우리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에 있기 전에 살아오던 방식인 자신의 육체를 위해 보이는 세상의 것이 전부인 옛사람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말이죠. 예수님에게서 영원한 생명을 받아서 살고 있는 우리이기에 이제는 자신을 위해서 살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적인 생각이나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예수님을 대하며 또한 우리 자신의 삶을 생각하는 일은 그만두고서 이제는 예수님과 그분의 나라를 소망 중에 바라보며 예수께 가진 믿음에 진실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들로 함께 교회를 이루고 있으니 자신의 유 익을 위해서가 아닌 예수께로부터 공급되는 사랑의 힘에 서로 의지하며 함께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악의 세력에 대하여 서로를 보호하고 살피며 이겨나가며 주께 믿음을 뿌리를 깊게 내려 견고히 서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진정한 바리새인 되기
눅 11장 37~44절 / 최종혁목사
새해가 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그런데 2017년 첫 누가복음 설교는 “화 있을진저!”입니다. 우리는 3년째 누가복음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셨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배우고 있습니다. 오늘은 바리새인들을 향해 선포하셨던 “화”에 대해 들을 것입니다. 이 “화”를 어떻게 “복”으로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나는 누구일까요?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헌금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교회에 빠지지 않고 우리가 믿어온 신앙의 유산을 귀하게 생각하고 지켜 가고 있습니다. 나는 세속적인 인본주의에 동조하지 않습니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고 성경에 따라 살아가고자 합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암송하고 또 연구하여 삶의 구석구석에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한 성직자들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말씀을 알고 그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런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고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하고 있는 ‘나는 누구일까요?’ 누군가가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부르겠습니까?
이런 사람이라면 우리는 ‘참 신실한 성도구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고 말씀에 따라 성실하게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모두 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고 있었고 말씀을 소중히 여기고 있었고 말씀이 삶에서 역사하기를 바라던 사람들, 고민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오늘날 이곳에 살고 있었다면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예배도 잘 참여했을 것입니다. 성경 공부에도 빠지지 않고 경건의 시간도 잘했을 것입니다. 아마 전도에도 열심을 냈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좋은 교인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사뭇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참 바리새인같으세요.’라고 말해보십시오. 그 관계가 계속 유지되기 어려울 것입니다. 오늘날의 바리새인은 당시 사람들과 참 다른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계속해서 갈등을 일으켰고 예수님도 그들에 대해서 강하게 책망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함께,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당시 그들이 세리와 창기들에 대해 ‘죄인’이라고 낙인을 찍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의 모습을 보면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과 그렇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앞서 말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이름의 뜻은 ‘분리된 자들’, ‘구별된 자들’로서 그들은 세상 속에 살면서 말씀에 따라 구별된 삶을 살기 원했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삶의 목표로 삼아도 괜찮을만한 그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뭐가 문제였을까요? 무엇이 순수한 동기로 시작한 이 무리를 예수님의 혹독한 책망을 받는 무리로 만들었을까요? 왜 예수님은 그들을 그렇게 책망하셨을까? 왜 경고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바로 전에 하신 말씀에 따르면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성하지 않다는 것을 오늘 본문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3가지 측면에서 그들을 지적하시는데 그들은 전통을 성경보다 앞세웠고, 비본질적인 부분을 본질보다 앞세웠고, 사람을 하나님보다 앞세웠습니다.
1. 전통이 성경을 대신한다(37~41절)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37절) 본문의 상황은 이전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하기도 하고 시험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지 아니한가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참 빛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비추고 있는데 너희가 아직도 어둡다면 무엇이 문제인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빛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빛이 밝은데 내가 어둡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문제는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미 밝게 비취고 있는 참 빛이신 예수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자신을 점검해 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때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청합니다. 예수님께서 방금하신 말씀의 가장 직접적인 대상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입니다. 이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어떤 의도로 초대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꼭 적대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디나 그렇지만, 유대인들도 식사 교제를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데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초대하면서(45절, “율법교사”) 예수님만 제외할 수 없어서 초대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궁금해서 초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초청에 응하셨고 그들의 잘못을 깨닫게 할 좋은 기회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집에 들어가 식탁에 앉으셨습니다.
“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38절) 바리새인이 이상하게 여긴 것은 위생적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손 씻는 것은 그들의 관습을 따라 예식을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이 행하지 않으셨기에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놀라고 충격을 받았던 것입니다. 이 예식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정결 예식을 자주 행했습니다. 생활하다 보면 의도치 않게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의식적으로 부정해지는 경우들이 생깁니다. 이방인을 만나거나 그들이 접촉한 무언가를 만지거나 하는 일이 있습니다. 부정하게 된 사람과 접촉하거나 그들이 만진 것을 만지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경우들도 있으므로 이들인 자주 정결 예식을 행했고, 식사 전에도 손을 씻는 것으로 자신들의 거룩함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일을 했습니다.
손을 씻는 것은 의식이기 때문에 그냥 씻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식을 하기 전에 손을 씻고 해야 했습니다. 정해진 물을 정해진 양만큼 정해진 방법을 사용해서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손에 물이 닿지 않도록 하는 모든 것은 제거되어야 했습니다. 손톱에 흙먼지나 때가 있으면 먼저 제거해야 했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페인트칠을 하다가 페인트가 묻으면 그것을 제거하고 의식을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용도로 먼저 사용된 물을 사용해서도 안 됐기 때문에 큰 단지나 항아리에 예식에 사용하는 물을 따로 보관했습니다. 항아리 위에 작은 용기(달걀 하나 반 정도에 해당하는 물을 담을 수 있는)를 두고 그 용기로 물을 떠서 손을 씻게 했습니다. 한 번에 물을 쏟아 손 전체가 구석구석 씻겨야 하고, 손을 씻은 물이 이미 씻긴 곳으로 다시 가면 안 됐기 때문에 손을 쳐들어서 물이 손목 쪽으로 흘러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되지 않으면 손이 정결하게 되었다고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신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늘 그렇게 해왔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의도적으로 어겼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스라엘의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런 일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일까요? 구약 성경을 보면 식사 전에 씻는 것이 언급된 부분이 있지만, 그렇게 해야 한다고 명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단지 그들의 관습을 따라했을 뿐입니다. 율법에는 부정하게 된 자들이 의식을 따라 정결하게 되고 특별히 제사장들이 직무를 행할 때 손발을 씻을 것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식사와 관련해서 모든 사람이 손을 어떻게 씻으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그럼, 왜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식사 전에 예식으로서 손을 씻는 것이, 성경에도 없는 이 의식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싶은 마음에서 만든 하나의 예식이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가까이서 섬기는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서 손발을 씻을 것을 명하셨다면, 우리도 제사장은 아니지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더 좋지 않겠냐는 순수한 동기에서 시작된 일이 하나의 전통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명령으로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의 전통을 기록한 문헌을 보면 그들은 손을 씻으면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손을 씻었다고 기도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그들의 전통과 진짜 하나님의 말씀을 구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폐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을 폐하고 그 자리에 자신들의 전통을 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그들의 전통과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 자리에 두신 것뿐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이상하게 보였고 충격적이었고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바리새인에게 예수님은 더욱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39절) 예수님은 전통이 가진 약점을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전통은 언제나 겉으로 보이는 것, 행위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행위를 가져오는 마음, 동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정확히 이 반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의 정결 예식이 자신들의 모든 것이 “깨끗하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잔의 겉만 깨끗해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겉이 깨끗하다고 자동으로 속이 깨끗하게 되지 않습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으로 스스로 깨끗해 졌다고 생각했던, 혹은 그렇게 되고 싶었던 그들의 마음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네가 어떻게 알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분으로서 그들의 마음에 무엇이 있는지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들 안에는 악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이런 마음의 죄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전통에 따르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것으로 하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혹은 그것으로 충분히 보상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자십니다. 겉만 만드신 것이 아니라 속도 만드셨습니다.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그저 겉으로 보이는 순종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시작해서 겉으로 이어지는 순종입니다. 이것을 애써 외면했던 바리새인들은 “어리석은 자들”이었습니다. 구약에 정통했던 바리새인들은 이 말에 심한 모욕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실제 그들이 했던 것은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롬 10:2-3).
이들에게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어떻게 깨끗하게 될 수 있는지 친절하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41절). 바리새인들이 구제를 안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열심히 구제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가진 것으로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고 하십니다. 그 마음으로 먼저 구제하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겉과 속을 모두 지으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정결한 것은 그 마음에서 시작하여 행동으로 옮겨지는 구제입니다. 생색내듯이 종교적인 의무감에서 행해지는 구제, 그러면서 그것이 마치 ‘하나님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것인 양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언제든 가장 싫어하시는 위선이고 외식입니다.
이것이 영적인 눈이 어두운 자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합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을 대신합니다. 우리에게 혹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생각하는 모습이 있다면 우리도 이들의 전철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가 됩니다. 어느 사회든 모임이든 전통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변할 수 없는 것으로, 우리의 정체성으로, 선택이 아닌 필수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큰 책망을 들었던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들의 두 번째 모습은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한다’입니다.
2.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한다(42절)
누가는 앞서 두 차례 예수님의 “화 있을진저”라는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첫 번째는 세상의 부귀를 추구하는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셨고, 두 번째는 예수님의 많은 이적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던 고라신과 벳새다를 향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여기서는 6번에 걸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경고의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42절)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잘못되어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비본질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썼지만, 보다 본질적이고 중요한 것은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말하는데, 이는 율법에 따르면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십일조를 드려야 했습니다(레 27:30). 바리새인들은 당연히 이 말씀에 따라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사실 그 이상을 드렸는데, 그것이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박하, 운향을 비롯한 여러 식물(허브)의 십일조였습니다. 이런 식물들은 굳이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이런 것들까지 십일조를 했을까요?
울타리 치기의 결과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뱀이 찾아와서 하와에게 그에 대해 물었을 때 하와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셨다고 말합니다. 본인이 혹은 아담이 울타리를 친 것입니다. 먹지 말라고 하셨으니 그럼 만지지도 않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서 울타리를 친 것입니다. 아마 조금 더 나갔으면 보지도 말라고 했을 것이고, 반경 50미터 이내는 접근하지 말라는 식으로 갔을지도 모릅니다. 울타리를 치는 것은 순수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점점 그 울타리가 커져서 본질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율법 이상으로 무언가를 하거나 혹은 하지 말라고 했던 것도 이와 유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했으니,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게 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고 했으니 무엇이 일인지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울타리 치기는 대개 처음 의도는 선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울타리들이 쌓여서 본래 의도는 희미해지고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예수님께서 언급하신 십일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곡물과 열매의 십일조를 원하시면 이런 채소의 십일조도 드리면 더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되었고, 누구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즐겁지 않은 일을 하기 위해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더욱 중요한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무시하게 되었습니다. 비본질이 본질을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부차적인 것이 핵심을 놓치게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일조가 필요 없다거나 그것 자체가 문제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말 원하고 할 수 있다면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는 것이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느냐입니다. 그들은 비본질적인 것, 사소한 것에 집중함으로 본질적인 것, 정말 중요한 것을 무시하고 있었습니다. 비본질적인 것을 필수로, 본질적인 것을 선택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하면서 사소한 것도 버리지는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자들이 보이는 두 번째 모습입니다. 여기에서도 우리의 모습이 보입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도 버려야할 바리새인의 모습이 있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의 세 번째 모습은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3.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한다(43절)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43절) 예수님은 여기서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기뻐했는지를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기뻐했던 것은 “회당의 높은 자리” 그리고 “시장에서 (다른 사람에게) 문안 받는 것”이었습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는 회당의 앞쪽에서 회중을 마주보는 높은 자리가 있었는데,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중요한 사람으로 인정받는 그런 자리였던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자리를 좋아했습니다.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인사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여전히 기본적으로는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에게 먼저 인사를 합니다. 나이에 따라서도 그렇고 사회적인 지위, 권력 등에 따라서 이런 것들이 결정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런 것이 있었는데, 바리새인들은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만큼 자신이 인정받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회당의 높은 자리나 인사를 받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이 그것을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인정을 받는 것을 그들이 기뻐했고, 다른 말로 하면 그것을 추구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선생을 존경하고 알아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선생이 그것을 추구하고 원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높임 받기 원하는 이들의 교만은 여러 모양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구제할 때 나팔을 불며 사람들 앞에서 구제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사람이 많은 곳, 공개된 장소에서 기도했습니다. 금식할 때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입니다.
이 모습이 사실은 그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사람으로 하나님을 대신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실까’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를 더 걱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가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의 나’가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동기나 본질보다, 보이는 전통이나 비본질적인 것들이 그들에게는 중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그들은 사람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사랑했고,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두려워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사람을 두었던 것입니다. 이것에 영적인 눈이 어두워진 자의 세 번째 모습이다.
바리새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 – 평토장한 무덤(44절)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는 처참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여 너희는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이 알지 못하느니라”(44절) “평토장한 무덤”은 땅을 파서 시신을 묻고 그냥 덮어둔 무덤으로 아무런 표시가 없으면 무덤인지 알 수 없는 무덤입니다. 속에서 시체가 썩고 있고 그 위에 있는 사람을 부정하게 하지만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좋은 동기에서 경건을 추구했던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구별된 삶을 살기를 원했던 자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눈이 어두워졌을 때, 그들은 말씀과 전통의 자리를 바꿨고, 본질과 비본질의 자리를 바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사람의 자리를 바꿨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성경의 수호자라고 자부했으며, 본질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도전
우리는 누구일까요?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히 하고, 말씀에 따라 살아가기 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마음의 소원을 가진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따라 거룩한 삶, 즉 구별된 삶을 살기 원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책망을 받았던 이유는, 무엇을 더 우선시하고 무엇을 더 중시하고 무엇을 더 사랑해야 하는지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요? 그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웠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눈이 어두웠기에 눈에 보이는 것에만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들은 힘써 하나님의 의를 버리고 자신의 의를 세우는 일 밖에는 할 수 없었습니다.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어야 할까요? 예수님께 나왔던 소경들처럼, 그들도 예수님께 나와서 보게 해달라고 구해야 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밝히 보고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리새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만약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그랬다면, 우리는 ‘바리새인’이란 말을 다른 의미로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할 것을 명령받았습니다. 세상과는 구별될 것을 명령 받은 것입니다. 세상 속에 있지만 우리는 세상과 구분된 삶을 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 속에서 주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전하라는 목적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지금 우리는 세상과 분리된 듯이 우리끼리 모이고 우리끼리 좋아하면서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가짜 바리새인, 바리새주의에 빠진 바리새인입니다. 주님이 바라시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바리새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겉으로 보이는 것만 바꾸라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의 마음이 새롭게 되어 우리의 삶이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우리 몸도 온전히 밝아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 더욱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하는지 알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합시다. 그러면서 우리 삶을 돌아봅시다. 이것이 화 있는 바리새인이 아니라 복 있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입니다.
말씀을 잘 안다고 자부하면서 정작 지키지 않는….
눅 11:37-54 / 더온누리교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문제(42~44절)와 율법 전문가들의 문제(46~47, 52절)를 각각 세 가지 화로 지적하신다.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는 앞 단락에 나온 등불의 비유와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이들의 눈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파악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욕망과 악으로 채워지고 말았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정결 예식은 구약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다. 율법에는 유출 병과 관련하여 손을 씻도록 규정했다(레 15:1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포로기를 겪으면서 제의적 정결을 일상에 적용하기 시작한다. 바리새인들은 손 씻기와 같은 정결 예식을 기준으로 유대인들 사이를 구분하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분했다. 말하자면 부정과 정결의 원리를 따라 사회를 유지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손 씻기와 같은 정결 관습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있어 필수적이었다. 이런 점에서 손 씻기의 정결 예법은 위생의 문제보다는 신앙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1.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37~41절)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있을 때 한 바리새인이 점심 식사에 초대한다(37절). 그는 예수님께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위해 앉은 모습을 보고 놀랐다(38절). 초대자는 손님이 식사 예의를 지키지 않은 것으로 언짢게 생각한다. 정결 예법을 준수하지 않는 것은 손님과 집 안 전체를 부정하게 만들고 만찬을 망치는 요인이다.
특히 백성들을 가르치는 예수님이 기본적인 예법도 준수하지 않는 모습에 “놀랐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생각과 반응에 대해 “너희 바리새인들”이라고 부르며 바리새인 전체의 문제를 지적하신다(39절).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함이 가득하다. 바리새인들은 그릇을 씻는 것과 같은 제의적 정결을 핵심 가치로 여겼으나 본질적인 가치와 우선권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바리새인들은 정결 예법을 생명처럼 여기면서도 그 마음은 탐욕과 악독으로 채워져 있다. “악한 것들”은 이 악한 세대에 속하고 악한 눈을 가진 자들을 떠올리는 표현으로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게 막는 요인이다(29, 34절).
예수님은 “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40절)”라고 말씀하시며 실제 모습을 정결해 보이는 겉모습으로 치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어리석다고 지적하신다. 차라리 손을 씻는 것과 같은 정결 예식을 지키기보다 궁핍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내면의 더러움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라고 하신다. 남몰래 숨겨둔 소유를 구제에 사용해야 한다. 그래야 깨끗하게 될 수 있고(41절) 믿음과 행함의 일치를 구현할 수 있다.
정결한 신앙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은 궁핍한 자들과 갇힌 자들을 회복하는 것이다(4:18~19). 구제는 탐욕과 악독과 반대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공의로운 깨끗한 삶이다. 하나님을 향한 정결한 신앙은 이웃을 위한 긍휼로 나타나야 한다.
2. 바리새인들의 세 가지 화(42~44절)
예수님은 세 번에 걸쳐서 아래와 같은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다고 선언하신다(42~44절).
첫째,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지만, 공의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렸다(42절). 십일조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표현으로 이웃을 위해 사용되어야 했다. 모든 채소에 십일조를 매겨도 탐욕을 채우는 행위를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 사랑의 표현도, 이웃을 위한 공의도 아니다(미 6:8). 십일조의 규례도 행하고 십일조를 통해 하나님이 의도하신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십일조의 규례보다 더 본질적이고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둘째, 바리새인들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기뻐한다(43절). 바리새인들은 대중의 인정과 인기를 즐겼다. 더 많은 인기와 더 높은 지위를 누리기 위해 종교 시설인 회당과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시장을 들락거렸다. 하나님께 집중해야 함에도 사람들의 시선에만 관심을 집중했다. 그들은 신앙을 사회적 지위와 명예를 충족시키는 도구로 이용했다.
셋째, 바리새인들은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무덤 위를 밟는 사람은 무정한 무덤 위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바리새인들의 내면은 누구보다 탐욕과 악독으로 부정해졌다. 겉은 품격 있게 단장했지만 속은 죽은 자들의 뼈가 보관된 무덤과 같았다. 더구나 이 무덤에는 표시가 없어서 지나는 사람들이 무덤을 밟고서도 무덤인지 알지 못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의 속이 부정결한 줄 모르고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같이 오염되는 것과 같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이 집단으로 감염시킬 수 있기 때문에 지도자들의 위선을 신랄하게 비판하신다.
3. 율법 전문가들을 비판하시는 예수님(42~54절)
예수님의 신랄한 비판을 듣던 율법 교사 한 명이 예수님께 그런 비판은 자신들을 모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45절). 이는 바리새인들에 대한 지적이 율법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학자들과 교사들인 율법 전문가들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건방진 태도가 자신들을 모욕한 것을 지적한다. 예수님이 사회의 근간인 정결과 부정의 기준을 뒤흔들고 이런 기준을 지키고 가르치기 위해 헌신하는 자신들을 폄훼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율법 교사의 항의를 받은 예수님은 율법 전문가들에게 임할 화를 세 가지로 선언하신다(46~52절).
첫째, 자기도 지기 어려운 짐을 다른 사람에게 지우면서도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짐을 지는데 도움을 주지 않는다(46절). 그들은 정결과 부정의 규례를 세밀하게 설정함으로 백성의 생활에 깊이 관여하고 엄청난 짐을 지웠다.
둘째, 율법 전문가들은 선지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다(47절). 율법 전문가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자들이다. 조상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율법 전문가들은 이 조상들의 증인이 되어 조상들의 행위를 옳게 여긴다(48절). 하나님은 “내가 선지자와 사도들을 그들에게 보내리니 그중에서 더러는 죽이며 또 박해하리라(49절).” 이처럼 예수님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가 구원 역사를 박해의 역사로 규정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들을 배척하고 제거한다.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거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종들을 거부한 것이다. 모든 선지자가 흘린 피의 책임을 이 세대가 지게 될 것이다(50절). 아벨의 피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은 사가랴의 피에 대한 책임이 이 세대에 돌아갈 것이다(51절).
셋째, 율법 교사들은 지식의 열쇠를 갖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는 사람들도 가로막는다(52절). 율법 전문가들은 율법에 대한 독점적인 지식을 근거로 수많은 규례를 만들고 강요하지만 실제로는 비본질을 본질로, 본질을 비본질로 바꿔버렸다. 열심히 정결 규례를 준수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율법 전문가들의 문제는 성경을 통해 명확하고 필수적으로 가르치기보다 모호하고 본질이 아닌 것을 구체화하고 목숨처럼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 것을 강화할수록 그들의 기득권은 강화되고 전문가의 지위는 높아졌다. 그러나 그들이 받을 무서운 심판을 예수님께서 경고하신다. 하나님에 관해 연구하고 가르친다고 해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니다. 특히 오만하고 긍휼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서 멀다. 진리의 열쇠를 가졌다고 자만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겪는 고충에 둔감한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심판에 가깝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사람들의 소리에 겸손하게 귀를 기울이고 관심과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해야 한다.
53~54절에서는 예수님이 바리새인의 집에서 나오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거세게 달려들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며 항의한다(53절). 이는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꼬투리 잡기 위함이었다(54절). 그들은 극도로 적대적인 태도로 예수님을 공격한다.
나는?
-바리새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감동하여 식사 초대한다. 예수가 자신과 생각이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할 때는 환대했다. 하지만 그가 손 씻지 않고 잡수시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긴다.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을 조상들의 유전으로 판단한 것이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나를 판단해야지 나의 관점으로 예수님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 우리 역시 예수님을 모셔놓고도 예수님을 아는데 관심이 없고 그분을 통해 나 자신을 살피지 않는다면, 천국의 식탁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정결은 겉이 아니라 속이 정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속이 정결한 이는 “자선을 베푼다”. 속에서부터 나오는 사랑, 자비, 긍휼이 “자선을 베푸는 삶을 빛나게 한다. 지금 겉으로는 식사를 대접하는 것과 같이 겉으로는 선대하나 속마음은 탐욕과 악독이 여전하다면 그 섬김이 진실한 것일까?
-사람의 겉만 아니라 속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꾸민 겉보다는 속에 품은 동기와 의도를 보신다. 마음으로부터 말씀을 지키고 있는지를 겉으로 드러난 일의 결과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신다. 참된 경건은 마음의 생각과 의도와 동기를 하나님께서 쓰시도록 드리는 일이 손을 씻는 일만큼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도 될 것이다. 탐욕과 악독함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 얼마든지 겉은 깨끗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지 않으신다.
-바리새인들은 율법의 문자적 의미를 충실하게 붙들었지만, 율법의 근본정신은 잃어버렸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데는 남다른 열심을 보였으나 정작 그 율법의 참 정신과 의도인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버린 것이다.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을 좋아했지만, 겸손하게 이웃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마치 평토장한 무덤과 같아서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도 모르게 부정하게 만들고 있었다. 앞뒤가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은 물론이고 공동체까지 부정하게 했다. -그들의 연구와 가르침들은 백성들의 삶에 깊게 관여 되어 엄청난 종교적 짐을 지웠지만, 그런 백성의 고충을 전혀 돕지 않는다(46절). 자신들이 만든 무거운 종교적인 짐을 지며 발버둥 치는 그들에게 “손가락”으로 조차 맞들어 주는 도움도 주지 않는다. *지킬 것을 강요하고 종용하며, 강제하나, 잘 지키도록 돕거나 공감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결례와 같은 규례들을 세밀하게 규정하여 일상의 삶을 숨 막히게 만들었지만 이것을 지키려는 고충을 이해하고 돕지 않는다. 전형적인 공감 마음이 없는 이들이다. 공감없는 지식은 사람의 영혼을 날카롭게 벨 뿐이다.
-바리새인을 향한 예수님의 비판을 듣던 율법사는 자신들도 염두에 둔 말씀임을 알고 발끈한다. 자기 위선을 돌아볼 계기로 삼지 않고 껍데기뿐인 기득권과 권위를 지키려고 반발했다. 게다가 자신들의 위선까지 지적을 받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더욱 완악해졌다. 이렇게 집요하게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그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지적이 옳았음을 증명해 주었다. 그들은 예수님도 몰랐고 율법도 몰랐고 자신도 모른 사람이었다.
-혹시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혹은 사람을 통해 나를 지적할 때 모욕으로 받지 않고 진심으로 받고 있는가? 나를 정당화하는 데만 여념이 없지는 않은가?
-율법 교사들은 스스로는 전혀 지키지 않고 지킬 수도 없는 율법의 짐을 다른 사람들에게 지우고 있었다. 율법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기쁨과 자유로움은 없고 죄책감과 패배감에 젖어 살게 했다. 율법에 대한 지식은 배우는 자들과 자신들을 차별하는 도구였을 뿐이다. 그들은 율법을 가르칠 수 있었을 뿐인데 그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들이 율법을 잘 알았다면 예수님이 전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율법 교사들은 율법을 왜곡했기 때문에 자신들도 그 나라와 왕을 거절했고, 자신에게 배우는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날 말씀을 전하는 자들을 극진히 섬기지만, 정작 그 말씀을 따르지 않는다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한 이 율법사와 다를 바가 있을까?
-바리새인, 율법교사….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있나 라며 나와는 전혀 상관 없는 이들처럼 구분했다. 하지만 시간이 이제는 내가 바리새인 일수도, 율법교사 일수도 있겠다는 것을 부정을 못하겠다. 겉과 속이 다름, 문자에 담긴 해석에 함몰하여 의미를 놓쳐 버리는 완고한 어리석음, 아는 것 보다 더 중요한 함께 살아가는 삶…. 어느 것 하나 확실하게 나는 이렇게 하고 있어.. 저들과 달라 라고 소리치지 못하겠다.
-오히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은 따라가지 못하겠고, 삶에서 사랑하며 사는 삶은 한참 뒤처져 있다. 겉이 아닌 속 사람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저들과 마찬가지로 속이는 것에 더 익숙한 것 같다. 이전에 행한 죄에 대하여 직면하지 않고 오히려 허울 좋은 해석을 빌미로 “정당화, 합리화’하는 것에 급급하는 기성 교회의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지식을 알아가는 것 보다 사랑하는 삶이 더 중요한데, 머리로는 고개를 끄덕이나 마음과 행동은 여전히 지식을 쌓는데 더 시간을 들이고, 사랑하며 사는 삶의 현장을 돌아보는데 미적거린다. 그래서 내가 바리새인, 율법교사가 아니라고 떳떳하게 말 못하겠다….
*하지만 주님의 마음을 본 받아 더욱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추구하고 실현하는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지… 선명하게 “화”입을 삶이 무엇인지 알려 주셨으니, 그 길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지…. 본질보다 중요한 것이 없고 본질을 삶 속에서 이웃을 사랑함으로 살아내기를 주저하지 말아야지…. 그래서, “나는 바리새인, 율법교사와 다르다!” 라고 소리치고 싶다…
*주님, 말씀을 잘 안다 하면서 정작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그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주님, 나의 명분과 권위를 지키기 위해 말씀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봅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더욱 겸손히 저를 돌아보겠습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
눅 11:37-44 / 복음장학회
서론: 지난 주일에는 눅 11:27-36을 본문으로해서 ‘말씀과 빛의 효력’이라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인간적 조건이나 눈에 보이는 기적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낳은 어머니가 참 복이 있겠구나라고도 생각하고 또 기적을 더 많이 보았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사람이 정말 복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니 예수님을 마음에 모신 사람은 빛에 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마음에 모시고난 다음에도 우리 마음에 그 빛을 가리우는 장애물이 있으면 그 빛이 다 비취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두움에 거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 제 마음에 주인이 되셔서 저의 모든 것을 주관해 주십시요.”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원리를 매순간의 결정에서 적용해야할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눅 11:37-44입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집에 초청하여 점심을 대접하면서 예수님 손 씻지 아니한 것에 대해 이상히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위선에 대해 책망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요즘 교회의 잘못된 형태도 살펴보고, 또 우리 자신도 이런 모습에 빠지지 않도록 살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 바리새인의 모순 (37-41): 37.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니까, 진리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예수님과 좀 친하게 지내기를 원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요 3장에나 눅 7:36에도 그러한 경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38.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태도에 좀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만들어낸 규범이 있어서 음식을 먹기전에 항상 손을 씻습니다. 물론 당시 건조한 지역이고 또 손을 자주 씻어야 위생적으로도 좋겠지요. 바리새인들은 율법외에 장로들의 규범으로 그러한 법들을 만들어 지킨 것입니다. 처음에는 규범을 좋은 의도에서 만들었겠지요. 형식화가 되니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잡수시니 그것을 이상히 여긴 것입니다. 39. 예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십니다. “너희들은, 겉은 자주 씻어서 깨끗할 지 모르겠는데,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겉으로는 깨끗한 척, 경건한 척 하는데, 속에는 욕심과 악한 마음이 가득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을 그런식으로 대하면 그런대로 괜찮을지 모릅니다. 실은 사람들도 진심으로 하는지 겉으로만 하는지 나중에는 다 압니다. 40. 하나님께는 그런식으로 대하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의 겉과 속을 다 만드셨기 때문에, 만물이 하나님 앞에는벌거벗은 것처럼 다 들어납니다 (히 4:13).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의 마음과 행동을 다 아시고 계시지만, 나중에 우리가 천국갈 때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다 드러나 각각 그 행한대로 받을 것입니다 (고후 5:10). 41. 바리새인들은 구제할 때도 나팔을 불고 구제합니다. 금식할 때도 그 표를 다 냅니다 (마 6:1-6).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구제할 때에 마음으로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생색내지 말고 구제하면, 모든 것이 깨끗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떨 때는 진정으로 구제해도, 상대방이 엉뚱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인내해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만 구제하면
괜히 돈 없애고 하늘나라에 상도 없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런 모순에 빠져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하여 일할 때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음이 먼저 드려져야 합니다. 겉으로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고 봉사하면, 수고만하고 하늘나라에 상은 없습니다.
2) 바리새인들의 위선(42-44): 42. 위선적인 사람은 본질적인 것은 덮어 두고 사소한 일에 집중합니다. 그들은 자기 밭에서 나는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공의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마치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 누가 십일조를 내느냐 안내느냐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잘못입니다. 복음전하라고 하면 벙어리가 되고 남의 말하는 것에는 더 잘하면 문제입니다.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험한 말들을 바리새인들에게 하셨겠습니까? (마23:33). 그들의 위선 때문입니다. 우리가 복음의 원리대로 살지 않으면 바리새인들처럼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내힘으로 경건하게 살려해도 안됩니다. 위선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복음이 무엇입니까? 내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엡 2:8-9). 뿐만 아니라 우리가 생활할 때도 내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생활하는 것입니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생활하는 것입니다. 43. 바리새인들이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 원하고, 시장에서 문안받고, 대접받기 좋아하는 것도 요즘 어떤 사람들하고 비슷합니다.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으려 하지 말고 도리어 섬기려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막 10:45). 돈을 내라고 해도 정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함께 동역하자고 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금요일에 예수 필름으로 전도하는 분들을 만났는데, 그 중 한 분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Without any shame, I would like to ask your help in showing the Jesus Film.” 저도 지난 12년간 목회하면서 홍성호 선교사님 오실 때, 두번을 제외하고는 우리 형제 자매님들께 교회에 연보하라고 설교한 적이 없습니다. 지금 저도 전혀 부끄러움 없이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예수 필름으로 전도하는 분들의 노력에 동참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진정한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예수 필름을 통해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답니다. 통계를 보면 우리가 3불을 투자하면 한 영혼이 주님을 영접합니다. 하루에 1불을 투자하면 1년에 120명이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통 생활에서, 1년에 120명에게 주님을 영접하게 할 수 있습니까? 예수 필름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 좋은 음식 대접받고난 다음에, 하루에 1불씩 투자하기로 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목회가 어디 있겠습니까? 가장 이윤이 많은 투자입니다. 복음전하는데 동참하면 너무 좋습니다. 44. 평토장한 무덤은 겉으로 보면 표가 안납니다. 속에는 썩은 시체가 있습니다. 위선하는 사람은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경건하지도 않으면서 경건한 체 할 필요 없습니다. 있는 그대로 주님께 내어 놓는 것이 좋습니다. 복음은 우리를 자신으로부터도 자유케 합니다 (요 8:32). 오늘의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들처럼 위선하지 말고, 복음전하는 중요한 일에 동참하는 복받은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