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사람들은 종교를 찾는가
우리 국토의 높고 낮은 산 곳곳에는 그윽한 풍경 소리 울리는 사찰이 자리 잡고 있으며, 크고 작은 도시는 물론 한적한 농어촌에까지 십자가의 불빛이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그 정도로 종교생활을 활발히 하고 있다는 단적인 예이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절이며 교회에 나가서 종교생활을 하는 것일까?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마당에 오히려 돈을 바쳐 가면서 그곳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에 아무런 종교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는데, 그들은 왜 종교를 갖지 않는 것일까? 그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를 영어로는 릴리전이라고 한다. 신 내지는 지고의 존재자와의 재결합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말이다. 이것은 인간이 지은 죄로 말미암아 신의 곁에서 멀어졌다가 구세주의 죄 사함을 받고 다시 그의 품 안으로 돌아간다는 기독교적 발상에서 나온 개념이다. 그러나 이런 정의는 신을 내세우지 않는 종교에서 볼 때는 과녁을 빗나가도 한참 멀리 빗나간 것이다. 그래서 현대의 종교학자들은 종교에 대한 정의를 다시금 내릴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종교란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생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궁극적 해결을 목표로 한다’는 설이 학자들 사이에서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미국의 종교학자 폴 릴리히(1886-1965)가 그런 주장을 편 대표적 인물이다.
그럼, 이 자리에서 물어보자. 인생의 궁극적 의미와 문제는 무엇이며 그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종교와 어떻게 만나는가를... 애타게 사랑하는 연인과 영영 헤어지게 되었을 때 앞날이 보장된 운동선수가 불의의 사고로 불구의 몸이 되었을 때, 목숨 바쳐 이루어 놓은 일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으로 변할 때, 우리는 희망을 잃고 좌절한다, 고통스럽게 절규하다 쓰러진다. 주변의 모든 것이 무가치해 보인다. 더구나 암과 에이즈 같은 불치병이나 다른 원인들로 인해 죽음에 직면한 경우에는 생의 무의미함을 절실히 통감하게 된다. 죽음 앞에서는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 왔던 돈, 명예, 권력, 그리고 가족조차도 의지가 되지 못한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의미를 잃는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이 몇 십 년 후에나, 혹은 늙음의 끝에나 오는 것은 아니다.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주변에 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더불어 자라난다. 살아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곧, 죽음을 향한 발걸음인 셈이다. 한 발로는 삶을, 다른 한 발로는 죽음을 딛고 우리는 마치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아가고 있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닌 것이다. 일평생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기를 누구나 꿈꾸지만 죽음과 허무라는 망망대해에서 텀벙거리다가 종국에는 그 속에 빠지는 꼴이다. 이렇게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 착각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주변의 죽어가는 사람들의 육신을 부둥케 안고 못내 흐느껴 우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이율배반 속에서 살아간다. 나의 행복이 상대방의 불행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고통, 허무, 죽음이 우리네 일상생활 주변을 배회한다. 아니, 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추락)이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이 엄밀한 의미에서 지옥이다. 그렇게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 속으로 빠져들 때 현실의 삶은 온통 가치를 잃고 만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나는 무엇 때문에 살아왔는가? 인생이란 무엇이고 산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도대체 나란 누구인가? 바로 이런 물음이 인생과 세계에 대한 궁극적인 문제이다. 그 궁극적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사람들은 종교에 입문한다. 좌절과 고통, 희망의 상실을 종교를 통해서 극복해 보려는 것이다. 돈을 번다든다 명예를 얻거나 의식주를 해결하는 문제는 궁극적인 문제가 아니다, 돈이나 명예, 의식주에 기초한 문화생활 없이도 우리는 다소 불편하긴 하지만 살아가는 데 심각한 지장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는 종교 이외의 다른 것을 통해서는 해결할 수 없는 아주 중차대한 문제이다. 이렇게 종교는 물질적 측면에서 인간의 생존 조건을 더 좋게 만들기보다는 허무한 세계 속에 던져져 있는 덧없는 인간의 생존 그 자체에 눈을 돌려 존재 이유를 묻고 있다.
따라서 종교는 최고의 가르침임이 분명하다. 동양에서는 그것을 으뜸가는 가르침이라 하여 마루 종, 가르침 교를 써서 종교라고 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종교가 인간 삶의 본질이라든가 행복의 감도를 높이는데 전혀 무관심하다는 말은 아니다. 종교는 일상생활 속에서 애써 부딪히는 갈등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뿐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불교는 마음을 잘 다스려 일상생활 속에서의 행복과 평화로운 삶을 추구하고 그것을 향상시켜 주는 길을구 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궁극적인 행복, 아무런 고통과 번뇌가 없는 행복, 설사 고통과 허무와 죽음이 닥쳐온다고 하더라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는 큰 자유의 경지를 추구한다. 그것이 바로 종교가 추구하는 최고 가치이다.
혹자는 그러한 삶의 중요한 문제는 철학에서 다루고 있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묻는다. 물론, 철학에서도 나란 누구이며 세계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묻고 있다. 그러나 철학에서는 그러한 물음이 머릿속에서만, 학문과 이론의 차원에서만 머물고 있다. 반면 종교에서는 그러한 궁극적인 문제를 진지하게 묻고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진리와 진실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 이를 몸소 실천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그것이 신앙 및 수행 생활이다. 인간은 이러한 고통과 허무와 죽음의 바다를 어떻게 하면 건널 수 있을까?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나타나 구해준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스로 헤엄쳐 나가는 도리밖에 없다. 이처럼 절대적 존재나 굿과 점 같은 주술 등 자신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에 의지하는 종교를 타력종교라 하고 반면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헤엄쳐 나가 저 언덕에 도달하는 종교를 자력종교라 한다.
어떠한 형태적 종교가 되었던 종교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내면의 행복과 평화의 길을 제시하는 것은 물론, 죽느냐, 사느냐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을 구원해 주는 희망의 빛이요, 나침반임이 분명하다.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한 번쯤은 맞게 되는 좌절과 고통이라는 계기를 통해, 혹은 그러한 계기를 맞지 않더라도 인생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명상 끝에 사람들은 종교에 입문하게 되는 것이다.
출처 ; 고명석 / 유쾌하게 읽는 불교 中
고명석 ;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불학연구소 연구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