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사(1) - 프로이센공국의 탄생과 독립
아는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만, 1525년, 튜튼기사단의 단장, 알브레히트 폰 호엔촐레른은 개신교로 개종하고, 튜튼기사단령을 프로이센공국이라는 세속제후의 영토로 전환합니다. 이는 1519년에서 21년까지 이어진 폴란드와 튜튼기사단의 전쟁의 결과 중 하나로, 폴란드왕의 조카이기도 했던 알브레히트는 튜튼기사단장을 사직하는 한편, 개신교 공국으로서의 프로이센공국을 만들고, 이는 폴란드의 속국으로 남게 되었죠.
1568년, 알브레히트의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2대째 프로이센공이 되었습니다만,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었습니다. 1605년, 브란덴부르크선제후 요아힘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공국의 섭정이 되었고, 1611년에는 그 아들인 요한 지기스문트가 섭정이 되었습니다. 요한 지기스문트는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장녀인 안나의 남편이었고,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의 아들들은 모두 요절하였기에, 1618년,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사망하자 프로이센공국은 브란덴부르크변경백령과 동군연합으로 묶이게 되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의 시작이죠.
1619년, 요한 지기스문트도 사망, 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게오르그 빌헬름이 이 동군연합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게오르그 빌헬름의 치세는 삼십년전쟁이 벌어지던 시대였고, 브란덴부르크는 스웨덴과 황제 사이에 위치한데 더해, 게오르그 빌헬름의 줏대없는 외교와 무능력함이 더해져 엄청난 피해를 입어야했죠.
1640년에는 게오르그 빌헬름의 아들, '대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뒤를 이었고, 1648년에는 다들 아시다시피 베스트팔렌에서 맺어진 3개의 조약으로 삼십년전쟁이 막을 내렸습니다. 전후처리의 결과,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동쪽으로는 동폼메른을, 서쪽으로는 마크데부르크와 민덴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전쟁의 주무대가 된 이 지역들은 막대한 피해를 받은 상태였지만, 전쟁에 있어서 호엔촐레른가의 역할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생각치도 못한 보상이었죠. 물론 이는 황제의 머리 위에 어느 정도 체급이 있는 국가를 두고 싶어한 결과입니다만. 덤으로 1609년에 터진 율리히-크레페-베르크연합공국의 계승문제도 해결, 호엔촐레른가는 크레페와 베르크, 라벤스베르크도 획득할 수 있었죠. 결국 호엔촐레른가의 영토는 뫼즈에서 메멜까지의 넓은 영토에 흩어져있게 되었고, 이는 호엔촐레른가가 끊임없이 영토의 확장과 통합을 추진하게 된 하나의 원동력이 됩니다.
1655년, 스웨덴국왕 칼 10세 구스타프가 폴란드-리투아니아연합(이하 폴란드)을 침공, 제2차 북방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처음에는 칼 10세에게 저항했으나, 스웨덴군의 쾌진격 앞에 굴복, 1656년에 라비아우의 조약을 체결합니다. 프로이센공국은 폴란드가 아니라 스웨덴의 봉국이 되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칼 10세 구스타프에게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게 되죠.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바르샤바전투에 참가하는 등, 스웨덴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합니다.
하지만 1657년, 덴마크와 스웨덴이 전쟁에 돌입, 칼 10세가 덴마크로 진군하기 위해 폴란드에서 철군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역시 군을 철군합니다. 이어서 황제가 폴란드편으로 개입할 자세를 보이자 프리드리히 빌헬름도 폴란드측에 접근합니다. 이해에 브롬베르크조약이 체결되었고, 라우엔부르크와 뷔토프가 브란덴부르크에 할양됨과 동시에 프로이센은 폴란드의 신하가 아닌 독립된 공국이 됩니다. 대신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폴란드의 편으로 참전하고, 점령하고 있던 에름란트 등의 왕령프로이센은 반환해야했죠.
이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스웨덴의 적대자로서, 제2차 북방전쟁과 스코네전쟁 때 한번씩 서폼메른을 점령합니다만, 전후처리에서는 아무것도 획득하지 못한 채 두번 다 스웨덴에게 반환해야했습니다. 결국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끝없는 전쟁 속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남긴 성과는 브롬베르크조약에서 획득한 작은 영토와 프로이센의 독립적 지위가 전부였습니다. 물론 최강으로 불리던 스웨덴군을 격파함으로써 강력한 브란덴부르크군의 위용도 남기기는 했지만 말이죠.
그리고 168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사망, 그 아들 프리드리히가 브란덴부르크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이자 프로이센공 프리드리히 1세로서 즉위하게됩니다.
2. 전사(2) - 속계선제후와 왕위의 문제
잘 아시다시피, 원래 신성로마제후의 선제후는 세 사람의 성계제후-마인츠, 트리어, 쾰른의 주교-와 네 사람의 속계제후-보헤미아왕, 라인궁정백(팔츠), 브란덴부르크변경백, 작센공-의 일곱으로 이루어져있었습니다. 삼십년전쟁 중에 라인궁정백의 선제후위가 바이에른공에게 넘겨졌으나, 베스트팔렌조약의 결과 라인궁정백에게도 선제후위가 다시 부여되어 선제후는 여덟로 늘어났죠.
이어서 1692년, 대동맹전쟁-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 팔츠계승전쟁, 9년전쟁이라고도 하죠- 중에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에른스트 아우구스트가 황제로부터 선제후의 자리를 약속받게됩니다.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선제후, 속칭 하노퍼선제후의 시작이죠. 이 선제후위는 1708년에 제국의회에서 정식으로 승인받게되는데, 에른스트 아우구스트는 1698년에 사망했으므로, 정식 선제후는 그 아들인 게오르그 루트비히부터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이리하여 선제후는 3명의 성계제후와 6명의 속계제후로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북독일에 존재하던 속계제후는 브란덴부르크, 작센, 하노퍼의 셋으로, 이들은 영토가 인접한 것도 있고 혼인관계로 맺어진 것도 있어서 서로에게 라이벌의식을 가지고 있었죠. 이때 브란덴부르크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왕위'의 존재였습니다.
근대 이전의 유럽은 중세의 영향이 아직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이 시절에 왕위라는 것은 '전부터 존재하던 것'이지, 마음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었죠. 하지만 이 시절에 '왕위'라는 것은 현대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라는 단어만큼 매력적인 단어요, 정치적 가치가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제국제후들은 외부에서 왕관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는 했죠.
그 왕위에 있어 브란덴부르크는 두 라이벌에게 뒤쳐진 입장이었습니다. 작센의 아우구스트는 1697년에 폴란드왕으로 선출되었는데, 폴란드에서의 왕은 작센에 있어서도 암묵적으로 국왕으로서 대우받았습니다. 물론 외교상으로도 왕이었죠. 그리고 하노퍼의 게오르그는 1700년에 앤여왕의 아들 글로스터공 윌리엄이 사망하고 1701년에 왕위계승법이 제정된 뒤로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자 1위가 되었죠(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통합 및 연합왕국의 성립은 1707년). 이렇게 두 라이벌이 국왕이거나, 국왕이 될 것이 확실한 가운데, 프리드리히가 노릴 수 있는 왕위는 없었습니다.
3. 새로운 국가의 탄생 - '프로이센에 있는 왕'
앞서 적었듯이, 두 라이벌이 국왕이라는(또는 국왕이 될 것이라는) 사실은 프리드리히를 짜증나게 했습니다. 외교에 있어서 '국왕'과 '공작'은 전혀 달랐기에, 이대로 있으면 자신이 라이벌들에 비해 격이 낮게 되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프리드리히가 얻을 수 있는 왕위도 없었습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동격이 될 수 없던 이 상황에서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프리드리히의 주요한 영지는 대부분 제국에 속해있었습니다. 제국이 여전히 존재하던 시절, 제국 내에서 새로운 왕위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제국 내에 존재하는 왕위는 단 둘, 이제는 이름만 남은 '로마인의 왕(독일왕)'과 합스부르크가의 세습왕위가 된 보헤미아국왕이었습니다. 여기에 브란덴부르크국왕을 칭한다는 것은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니, 말 그대로 싸우자는 것이었죠.
하지만 프리드리히는 제국의 바깥에 존재하는 독립된 국가의 영주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프로이센공국이었죠. 프리드리히는 이 프로이센공위를 프로이센왕위로 만들기로 결심, 황제의 인가를 받기 위해 거의 모든 것을 희생했습니다. 프리드리히가 왕이 되는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다름아닌 튜튼기사단의 존재였는데, 프로이센에서는 추방되었으나 빈에는 여전히 존재했던 이 기사단은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영지를 강탈한 이단자의 후예가 그 땅을 기반으로 국왕이 되는 것을 막기위해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또 하나의 장애는 바로 폴란드였는데, 앞서 적었듯이 왕령프로이센-폼메렐렌, 쿨메르란트, 에름란트, 마리엔부르크-는 여전히 폴란드의 영토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프로이센의 왕'이라는 칭호를 허용한다는 것은, 이 왕령프로이센에 대한 지배권의 주장을 용인한다는 것이기에, 폴란드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1700년, 자신과는 하등의 관계도 없는 스페인계승전쟁에 황제의 편으로 참가하는 조건으로, 프리드리히는 왕위를 허가받았습니다. 폴란드와의 관계가 있었기에 '프로이센의 왕'이 아닌 '프로이센에 있는 왕'이라는 어정쩡한 칭호였지만, 어쨌든 왕이 되어 라이벌들과 동격이 될 수 있게 되었으니 그만하면 만족이었죠. 그리고 1701년 1월 18일, 프로이센의 수도인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프리드리히가 대관, 프로이센왕국이 시작됩니다. 바로 이 날, 새로운 왕국이 유럽에서 탄생하게 된 것이죠.
4. 평가 - '프로이센'의 왕위는 무엇을 낳았는가?
손자이자 첫번째 '프로이센의 왕'이기도 한 '위대한' 프리드리히는 할아버지의 이 행위-왕관을 위해 모든 것을 건 행위-와 결과에 대해, 할아버지의 왕위는 허영심으로 인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허영심에서 공허한 칭호를 원했고, 획득한 것으로, 실제로는 별달리 위신이 높아진 것도 아니며, 단지 그 외관을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이 허영심의 결과는 제국 내에 흩어져있던 호엔촐레른가의 영지들을 '프로이센왕국령'이라는 하나의 단위로 묶었습니다. 각기 다른 작위 아래에 통치되던 주민들이, 어느날 갑자기 '프로이센국왕'의 신하가 되어, '프로이센왕국'의 관료에 의해 통치받고, '프로이센국왕'의 군이 주둔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죠. 그리고 이것은 주민들의 의식을 하나로 묶었고, 훗날의 위대한 국가의 형성과 독일의 통일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1713년의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프로이센에 있는 왕'의 작위는 교황령을 비롯한 몇몇 카톨릭국가를 제외한 대부분의 국가에게 승인을 받았고, 1772년, 1차 폴란드분할로 프로이센 전체를 차지한 뒤로는 '프로이센의 왕'이 되었으며, 이후 독일제국이 몰락, 바이마르공화국이 성립할 때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호엔촐레른가의 수장은 지금도 왕위를 주장하고 있지만 말이죠.
p.s
참고로 '프로이센에 있는 왕'이란 어디까지나 외국에서의 호칭이었습니다. 국내에서는 그냥 '프로이센왕'이었죠.
참고문헌
Sebastian Haffner, Preussen ohne Legende, Hamburg, 1979.
첫댓글 뫼즈에서 메멜까지
구 독일국가의 한 소절이군요~ 이 시대에 벌써 그 기초가!
오오 파편적으로만 알고 있던 부분이 정말 매끄럽게 잘 정리되었네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으헝 독일쪽 역사 너무 복잡해요 특히 제후쪽들요 ㅜ.ㅜ. 잘보았습니다 한번 더 봐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