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김대중 전대통령 영결식 추모문화제 <만가(상여소리), 오정해>|
오정해씨를 만나고 왔습니다.
저는 방송국에서 일을 하는데도 사실 알고 지내는 연예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씩 로비나 엘리베이터에서 녹화하러 온 연예인들을 마주칠 때면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습니다만, 남 몰래 눈을 흘끗흘끗 거리면서 마냥 신기해 하지요.
지금껏도 연예인들을 만날만한 아이템은 해본 일이 없기 때문에
저한테는 오정해씨가 첫 <연예인 인터뷰이>인 셈입니다. 나름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오정해와 DJ, 독특한 인연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2명의 주례만 섰다고 합니다.
1971년 비서관으로 있던 방 모씨와 1997년 서편제에 출연했던 오정해씨.
수 없이 받았을 주변 사람들의 주례를 모두 마다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습니다.
오정해씨는 1993년 서편제 개봉 당시
영화를 관람하러 온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주례를 부탁했다고 합니다.
보통 아랫사람(?)들을 통해 티켓을 보내달라거나
영화 필름을 직접 보내라고 하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찾아와 티켓을 사서 영화를 보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고 하더군요.
영화가 끝난 후 오정해씨를 직접 찾아와
"판소리를 세계에 알리는 사람이 되려면 공부도 열심히 해야 한다"는
진심어린 조언을 해 주시는 모습에.. 오정혜씨는 단박에 김 전 대통령의 팬이 됐다고 합니다.
자리가 파할 때 쯤 오정해씨는 김 전 대통령에게 주례를 부탁합니다.
"선생님.. 저.. 나중에 저 결혼할 때요.. 선생님이 제 주례해 주시면 안돼요?"
흠칫 놀라는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 김 전 대통령은 허허 웃으며 그러겠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4년이 지나 결혼을 앞두고
오정해씨는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김 전 대통령을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오정해씨의 걱정과는 달리 김 전 대통령은 흔쾌히 주례에 응했습니다.
"오정해양, 당연히 해야죠.. 제가 그 때 약속했잖아요."
오정해씨는 그 때 이야기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 사실 그 때 김 전 대통령이 평생 2번 밖에 주례를 안하셨다는 걸 몰랐어요.
나중에 신문에 난 걸 보고 알았어요. 그게 몇십년만에 주례를 서 주셨다는 것도요.
그 것 때문에 많이 힘들어 지셨대요. 누구는 서주고 누구는 안 서주냐고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내가 참 겁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죠. 제가 주례를 부탁하니까
선생님께서는(오정해씨는 김 전 대통령을 항상 '선생님'으로 불러왔답니다)
작은 글씨가 빽빽하게 적힌 스케줄 사이에 제 주례 스케줄을 적어 넣으시더군요.
핑계를 대려면 충분히 대실 수 있었을텐데, 약속을 지켜주신 거죠. 못잊을 영광이예요 저한테는."
아침식사만 3번, '그래도 손님인데..'
김 전 대통령의 서편제 관람을 계기로
오정해씨는 김 전 대통령이 청와대에 입성하기 전까지
김 전 대통령의 일산 자택을 격 없이 자주 찾았다고 합니다.
초대를 받는 경우는 주로 아침식사를 함께 했는데,
오정해씨는 그 때의 생소했던 기억을 이렇게 풀어놓았습니다.
"선생님께서 꼭 하루 일과가 바쁘시니까 아침식사를 같이 하자고 전화를 많이 하셨어요.
그래서 아침에 가보면 이미 그 시간에 꽉 차있는거에요. 저랑 방금 전에 식사하셨는데 또 식사하시구
또 식사하시는 거에요. '아니 아침을 세번이나 드세요?' 했더니 '사람 집에 사람이 왔는데..
어떻게 다과만 내놓을 수 있냐'고 그래서 밥을 드신걸 감추시고 또 드시는 거에요.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게.. 그 모습이 기억에 남아요."
오정해씨는 김 전 대통령이 배려심이 참 깊었다고 회상하면서
그와 관련된 또 다른 일화를 하나 들려줬습니다.
"선생님은 사람들 이름을 다 기억하세요. 직급 낮은 경호원 분들까지요.
명절 때가 되면 그 사람들까지 하나하나 다 챙겨주세요. 제가 집에 놀러가면
항상 가방에다 뭘 그렇게 챙겨주셔서 한아름 가지고 왔던 기억이 나요.
이희호 여사님도 사람 잘 챙기기로 유명하시고요. 두 분을 위해 챙기시는 건 별로 없어요.
다 다른 사람들 퍼주느라 바쁘셨죠. 정말 훌륭하신 분들이예요."
.........
사회부 기자인 저는 아직 정치인들을 많이 만나보지 않았을 뿐더러
개인적으로 김 전 대통령이나 그 주변 분들을 만나볼 기회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정치인들이 사람들을 어느 정도나 잘 챙기는지,
DJ의 행동이 다른 정치인들과 얼마나 다른 지도 솔직히 잘 모릅니다.
그저 대중이 알고 있는 정도로,
대중이 갖고 있는 이미지 정도로 DJ를 이해하고 있다고 해야겠지요.
특히나 제가 학교생활과 사회생활을 만끽할 때에는 이미
크게 불편하지 않을 정도의 민주적인 사회 분위기가 갖춰져 있었기 때문에
제가 누리고 있는 자유가, 제가 사용하고 있는 권리가 얼마나 귀한지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사회의 많은 어르신들이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망연자실해 하시는 이유를
저를 비롯한 수많은 젊은이들이 가슴깊이 느끼지 못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다만,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그것을 배우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비단 저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리라 생각합니다.
앞마당에 쌀 뿌려 놓던 할아버지
김 전 대통령은 앞마당에 항상 쌀을 뿌려 놓았다고 합니다.
새들이 와서 먹고 가라고 그러는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는데요.
오정해씨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김 전 대통령 부부 이야기도 들려주었습니다.
"제가 가서 뵐 때마다 두 분은 항상 정장 차림을 하고 계셨어요.
힘들지 않냐고 물으니까 '이게 원래 내 일인데 뭐' 하시며 웃으시던 생각이 나요.
일산 자택이 조금 답답하게 지어져서 여름엔 많이 더우셨을텐데도 항상 웃으셨어요.
"선생님께서는 약주를 안하시기 때문에 군것질을 참 좋아하셨어요.
그런데 여사님은 배 나온다면서 정해양이 좀 말려보라고 하셨죠.
그러면 안 먹겠다고 하시고는 숨어서 몰래몰래 먹고 그러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선생님을 놀리면 선생님은 '오정해 양이 나를 항상 이렇게 놀려요' 하시며 웃으셨어요.
그 정도 자주 보셨으면 한 번쯤은 '정해야' 이렇게 부르실만도 한데,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어요."
"가끔 선생님 댁에가서 밥 먹고 드라마도 보고 오고 그랬거든요.
선생님이 안 계시면 여사님하고 둘이 이야기 하고 간식을 먹기도 하고요.
아 참, 선생님은 <동물의 왕국>을 그렇게 좋아하셨어요. 집에 진돗개도 키우셨고요.
한 번은 연대 김대중 도서관 설립할 때 가서 노래를 했는데, 그 때 제가 진도 아리랑을 불렀 거든요.
제가 노래를 하니까 선생님께서 앞 줄에 앉아서 환하게 웃으시면서 무릎 장단을 치시던 게 생각 나네요.
선생님께서 아프시고 투석을 하시면서부터는 자주 찾아뵙지 못했어요. 너무 힘들어 하시더라고요.
안 찾아뵙는 게 도와드리는 거겠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대화 내내 오정해씨는 환한 얼굴로 옛 일을 회상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과의 기억이 참 깊이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시간 남짓 만남을 정리하면서 마지막 질문을 드렸습니다.
"서거 소식 들으셨을 때 어떠셨어요, 물론 못 들으시겠지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텐데.."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거라는 생각 하면서 불안 했는데 그게 오늘이구나 생각 드니까 한 순간 멍했어요.
어제 병원 가서 영정사진 보니 왜 저기 계시지.. 왜 저사진이 저기 있지 싶은 거예요. 뉴스 보면서도 그렇고.
영정 사진을 보니까 그제서야 진짜로 가셨구나 생각도 들더라고요."
"선생님께서 멈추지 않고 항상 발전하는, 더 거듭나는 국악인 되라고 하셨어요.
그 말씀 어기지 않고 앞으로도 훌륭한 국악인, 소리꾼 될 거에요."
환하던 얼굴에 슬픔이 내렸습니다.
그리고 이내 눈가에 눈물이 맺혔습니다.
훌륭한 소리꾼이란 말에 진심이 묻어났습니다.
.........
사람들은 누구나 하루를 삽니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이 같기 때문이지요.
어떤 습관으로 사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습니다.
물론 어떤 생각으로 습관을 만들어 가느냐 역시 중요한 일일테고요.
김 전 대통령 인생의 공과 과를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만,
김 전 대통령이 인간 오정해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오정해씨가 <공부하는 소리꾼>이 되겠다는 꿈을 꾸게 된 것도,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하지 않고, 가능하면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남편의 기를 살려주는 사람이 되라'는 주례사를 평생 곱씹으며 살아가게 된 것도
모두 김 전 대통령 덕분이었으니까요.
사람이 사람에게 주고 받는 생각과 영향력이
제법 크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됐습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금요일부터 시작하는 연극 <여보, 고마워> 표를 건네시더군요.
마음만 감사히 받겠다며 만류했지만 한사코 티켓을 주셨습니다.
더 이상 거절하면 실례가 될만큼 분위기가 엄해져서.. 표를 받고는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럼 친구들을 몰고 올테니 그 친구들과 사진을 좀 찍어 주세요."
오정해씨는 활짝 웃으시며 그러겠다고 하셨습니다.
다음 주말엔 친구들을 몰고
모처럼 충정로 나들이를 나서 볼 생각입니다.
다음 주 쯤엔 제 블로그에서
다소 쌩뚱맞은 <법조기자의 연극관람기>를 읽게 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하. ^^ |
첫댓글 오랫만에 만가를 들으니 옛 생각에 콧잔등이 시리네요...
울 아버지도 단가를 무척 좋아하셨고... 상두꾼인 아버님 친구분의 만가(상두소리)는 지금도 저를 흔드는 근원의 소리로 제 혼을 채칙질합니다.
DJ ~~~
인내와 끈기... 사랑...
늘 선생님으로 불리우고팟던 우리나라의 멋진 정치지도자이자 휴머니스트... 존경합니다 ^^
커~ 미래미 대형님..올만 입니다.
고 DJ께서 먼길 떠나시던날.. 우리 둘은 서울시청 광장에서..
누구 보다 더 서럽게 손을 부여잡고 통곡 했었지요.
민주화 시대, 그 양대 기둥 중 하나는 이미 변절했어도
끝까지 신조 굽히지 않은 DJ의 절개... 만추에 새겨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