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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정, 그 끝자락을 잡고
7
“김희우. 숙취 시켜준다며.”
“피자로 숙취하라고. 왜, 미국에선 술 마신 다음날 기름기 있는 거 먹는다더라.”
나는 계속 바라보고 있기만 해도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거대한 피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희우를 흘겨봤다. 어제 마신 술의 여파로 아침 내도록 고생하는 나를 보더니, 강의가 끝나자마자 희우가 숙취를 시켜준다며 나를 데리고 온 곳은 다름 아닌 피자집이었다. 요새 뜬다는 유명한 피자 체인점. 희우가 며칠 전부터 요 앞을 지나갈 때 마다 와보고 싶다며 얘기하던 게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결국 숙취는 핑계고, 그냥 제가 먹고 싶은 것을 먹으러 온 거다. 덕분에 나는 눈앞에 놓인 커다란 피자에 손을 댈 엄두도 못 내고 있고.
울렁거리는 속과 함께 머리마저 지끈거려 김희우를 마저 째려보니, 희우가 배시시 웃으며 커다란 피자조각을 한입 배어 문다.
“그냥 네가 피자를 먹고 싶었다고 말을 해.”
“어차피 너도 나아님 밥 혼자 먹어야 되잖아. 오늘 산호 오빠랑 우진이 오빠 둘 다 없는데.”
나는 마요네즈가 듬뿍 첨가된 드레싱이 잔뜩 뿌려져 오히려 식욕을 상실하게 만드는 샐러드를 포크로 푹푹 찔러댔다. 뻔뻔한 김희우의 말에 반박해보려 했으나 얄밉게도 그 입이 뱉은 말이 모두 사실이라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근데 어쩐 일이야 진짜. 신보배가 술을 다 마시고?”
“…그냥.”
“누구랑 마셨어? 너 산호 오빠랑 우진이 오빠 말고 친구도 없잖아.”
고은형의 이름을 입 밖으로 꺼내려는 순간 들리는 희우의 뒷말에, 나는 고은형의 이름은 목구멍으로 넘겨버리고 반박을 했다.
“너 있잖아.”
“그러니까, 나 말고.”
“…이산호.”
“산호 오빠 말고.”
“……차우진.”
“말고.”
“……너.”
“…됐다.”
진심으로 내가 불쌍하단 표정을 지으며 희우가 손에 든 피자조각을 마저 입에 물었고, 나는 애꿎은 상추를 포크로 푹푹 찍어대는 행위를 반복했다.
그나저나 나 정말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건가? 지금까지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어제 우산이 없어 학교를 돌아다녔을 때만 해도 그렇고,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내가 대학에 들어 온 다음 사귄 친구라고는 희우와 차우진뿐이다. 그나마 희우는 겹치는 수업도 많고 해서 친해진 거라지만, 차우진은 이산호 친구라서 친해진 거고. 아니지.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그래도 만나면 인사도 주고받고, 종종 밥도 같이 먹는 과 동기들도 친구로 칠 수 있는 거 아닌가? …아닌가?
과연 나는 정녕 친구가 없는 것인가에 대해 내가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 희우의 휴대폰이 전화가 왔다는 것을 알리며 벨소리를 울렸다.
“어, 소윤! 어디? 나 지금 보배랑 밥 먹지. 너도 올래? 응, 학교 앞에 새로 생긴 피자 체인점. 그래 얼렁 와.”
“누구야?”
“소윤이. 우리 과 후배. 여기로 오라 그랬는데 괜찮지? 너도 좀 나나 산호 오빠나 우진이 오빠 말고 다른 사람들도 만나고 좀 그래야지.”
이미 후배에게 오라고 통보한 후에야 희우는 내게 동의를 구하는 시늉을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 안 만나는 지금도 괜찮은데…. 소심하게 중얼거리는 나를 향해 희우가 혀를 찬다.
“인생 혼자 사냐? 평생 산호 오빠랑 우진이 오빠랑 만 지낼 거야? 그 둘은 언제까지나 네 친구 해준대?”
“그건 아니지만,”
“세상만사 어떻게 될 줄 알고. 특히 산호 오빠랑 너. 넌 가끔 보면 아예 생활자체가 너무 오빠한테 맞춰져 있어. 물론 오빠랑 너랑 평생 알고 지낸 사이고, 그만큼 편하고 뭐 서로한테 맞춰져 있는 건 이해가 가는데,”
“…….”
“뭐랄까, 서로한테 너무 매여 있는 느낌? 특히 너는 더 그래. 아무리 서로 좋아하는 연인사이라도 각자의 생활이 있을 때 진정 연애를 즐기면서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건데, 너는 그냥 오빠가 삶의 일부가 돼버렸잖아. 아무리 좋아해도 그렇지.”
“좋아하는 거 아니라니까!”
“그럼 더 심각하지. 나중에 오빠한테 여자 친구 생기면 어떡할래? 너랑 오빠가 그때 가서 둘이 그냥 가족이라니 친구라니 그래봤자 내가 여자 친구라도 너랑 오빠랑 그렇게 붙어 다니는 거 기분 나빠. 서로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데, 질투가 안 나고 배겨? 그럼 결국 너랑 오빠랑 멀어지게 되겠지? 그럼 넌? 혼자 남는 넌?”
구구절절 논리적으로 말을 잇는 희우에게 대꾸를 할 수가 없다. 거기에 대해선 깊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녀석의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서있는 모습은 어렴풋이 상상해 본 적 있지만, 그건 내가 녀석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질투를 한거고, 이산호의 친구인 신보배의 입장에서 그 모습을 떠올린 적은 없었다.
희우의 말마따나 내 생활이 지나치게 이산호에게 맞춰져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끔은 내 인생이 녀석을 위주로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으니까. 내 삶뿐만 아니라, 내 기분조차 녀석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동전 뒤집어지듯 바뀌곤 하니까. 그 정도로 녀석에게 매여 있는 나인데, 어느 날 산호가 내 곁에서 사라진다면?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어쩌면 정말, 나는 이산호에게 조금 벗어날 필요가 있을지도…. 입을 꾹 다물고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희우가 이번엔 진심으로 걱정이 된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꼭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오지는 않겠지만, 내 말은 한 번 사는 인생 좀 두루두루 살아보란 얘기야.”
“…알았어.”
말투를 조금 누그러뜨린 희우가 달래듯이 내게 말했다. 갑자기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희우가 콜라를 한 모금 들이키곤 무언가 떠오른 듯 별안간 목소리의 톤을 한 톤 높였다.
“야, 그나저나 너 조심해. 소윤이 산호 오빠 좋아하는 거 같더라.”
“소윤이?”
“응, 박소윤. 지금 여기로 오는 애. 나한테 산호 오빠에 대해서 엄청 물어보더라.”
“아니, 근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 진짜 아니라니까.”
“얘 봐라, 튕기기는. 걔가 전에 나한테 너랑 산호 오빠 정말 아무사이도 아니냐고 막 캐묻더라. 그리고 어차피 걔 아니어도 오빠 인기 꽤 많아. 너 때문에 다들 일찌감치 마음을 접어서 그렇지.”
“헛소리 하지 마.”
“너 이런 것도 몰랐지? 허구한 날 혼자 짱박혀 사니까 그렇지. 이래서 산호 오빠를 어떻게 쟁취하려고.”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있는 콜라를 쭉 들이켰다. 희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아저씨처럼 낄낄 웃으며 나를 놀려댔지만, 나는 희우가 전하는 이야기가 퍽 충격적이라 즐겁게 나를 놀려대는 희우에게 뭐라 할 수 없었다. 이산호가 인기가 많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물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긴 하지만, 나야 딱히 녀석의 어떤 특정 매력에 반해 좋아진 게 아니다보니 녀석의 인기의 근원적 매력이 어딘지 궁금해졌다.
“어!? 소윤아, 여기!”
“언니 안녕하세요!”
즐겁게 웃어대는 희우가 돌연 내 얼굴에 향해있던 시선을 그 뒤로 틀며 목청을 높였다. 이어 들리는 귀여운 목소리가 흘러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자 이제 갓 고등학생티를 벗은, 키가 작은 여자애 하나가 보였다. 소윤이라는 그 여자애는 작은 보폭으로 쫄랑쫄랑 걸어오더니 희우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보배 언니도 안녕하세요!”
“으, 응.”
너무나 활기찬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대답하는 말을 더듬었다. 몸속에 에너지가 흘러넘치는 듯, 소윤이는 목소리부터 표정까지 아주 생기가 넘쳤다. 한 살이라도 더 젊은 게 좋긴 좋은가 보구나.
소윤이와 희우는 곧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다른 사람들의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뭐, 누가 며칠 뒤에 군대를 가게 됐다느니, 그래서 오늘 저녁에 모여서 한잔 하자 느니 하는 얘기. 나는 콜라에 몸을 담근 빨대의 끝을 입으로 잘근잘근 깨물며 입을 조잘조잘 움직이는 소윤이를 관찰했다.
“아! 오늘 우리 과 선배들이랑 국문과 선배들이랑 농구시합 한다고 그러던데. 우리 보러 가요!”
“농구? 누구누구 나가는데?”
“자세히는 모르는데, 우진이 오빠랑 승하 오빠랑 우영이 오빠랑… 산호 오빠!”
산호의 이름을 외치며 묘하게 목소리가 살랑거리는 소윤이는 진심으로 들떠있는 것 같아 보였다. 희우말대로 쟤가 정말 이산호를 좋아하는 건가 싶어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소윤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봤다.
“보배 언니도 갈 거죠? 응원하러.”
“응? 응.”
“아 기대돼. 저 저번에 농구 시합할 때 못 갔거든요. 근데 저희 과 오빠들이 전체적으로 다들 키가 크잖아요, 애들이 완전 멋있었다구 그래서 엄청 서운했는데. 언니는 봤죠?”
“아니, 난 작년에 몇 번.”
항상 몸속에 에너지가 넘치는 앤지, 아님 농구 시합을 볼 수 있다는 게 그 정도로 들뜨는 건지, 오늘 처음 인사를 나눈 소윤이는 나와 오래전부터 알던 사이인 마냥 그 작은 입술로 재잘재잘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밝은 모습이 부럽기도 하고, 또 신기하기도 해서 나는 옅게 웃으며 소윤이를 계속 관찰했다.
“역시 남자는 운동을 할 때 진국인 거 같아요. 아, 보배 언니는 산호 오빠랑 알고지낸지 오래됐으니까 오빠 운동하는 것도 자주 봤겠네요? 산호 오빠 운동 짱 잘한다면서요. 저번 시합도 거의 오빠 덕분에 이긴 거라고 애들이 그러던데.”
별로… 잘 모르겠는데……. 애매하게 말을 흐렸지만 소윤이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희우와 대화를 이어갔다.
작년에 차우진이 농구를 하는 모습은 종종 봤지만 그 때마다 산호는 알바 때문에 바빠서 오지도 못했다. 가끔 차우진이 예전에 미국에서 이산호랑 같이 고등학교 농구부에 들었었다는 얘기를 하는 걸 들었던 것도 같고. 녀석이 한국에 있던 동안은 체육시간에 녀석이 가끔 축구를 하는 걸 본 정도? 근데 그렇게 두드러지게 운동을 잘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소윤아 너 산호 오빠한테 관심이 아주 지대하다?”
“에이, 희우 언니. 그냥 멋있다는 거죠. 솔직히 산호 오빠 멋있잖아요?”
“풉.”
배시시 웃으면서 수줍게 희우의 말에 부정을 하는 소윤이의 말에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입 밖으로 뱉어냈다. 하지만 그런 내 모습에 오히려 소윤이가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안 그래요? 하고 내게 되물었다. 거기에 도리어 내가 당황해 웃음을 거뒀고.
“이산호가 멋있다고?”
“네. 애들 다 그렇게 생각하던데.”
“…도대체 어디가? 어디가 어떻게?”
“음… 뭔가 남자답잖아요. 말도 별로 없고, 허세 같은 것도 안 부리고, 카리스마 있고. 특별히 어디가 멋있다 라기 보단, 전체적으로 훈훈하잖아요. 아, 그래. 상 남자. 완전 상 남자 같은 느낌!”
아무리 내가 산호를 좋아한다지만, 소윤이의 말에 동의할 수는 없다. 상 남자 같다느니, 말이 없다느니 이런 건 이산호의 대외적인 이미지일 뿐이지. 집에선 녀석이 얼마나 수다쟁이에다 땡깡을 부리고, 심지어 얼마나 거만하고 깐깐한지 알면 소윤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아무튼 간에 이로써 내 앞에 앉아있는 이 깜찍한 신입생이 이산호에게 엄청난 호감이 있다는 건 거의 확실했다. 그런데 그럼 나는 대체 이산호의 어디가, 왜 좋은 거지?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 근데 오빠 얼마 전에 소개팅 했다면서요?!”
“응? 응.”
“그 여자 완전 예쁘다면서요. 아 부럽다.”
어디서 누가 어떻게 소문을 퍼뜨린 건지, 소윤이는 산호가 부럽다는 건지, 소개팅녀가 부럽다는 건지 잔뜩 울상을 지었다. 별로 예쁘지는 않아, 소윤이에게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간밤에 마신 술 때문에 느글거리던 속이 이번에 무진장 쓰려왔다.
“아 그 여자? 야 내가 얼마 전에 우진이 오빠랑 산호 오빠 얘기하는 거 얼핏 들었는데, 산호 오빠는 그 여자한테 별 관심 없는 거 같더라.”
도무지 누구편인지 알 수 없는 김희우가 말했다. 내가 이산호를 좋아 한다 굳게 믿고 있는 주제에 소윤이의 짝사랑을 응원하는 건가 싶다. 이산호가 소개팅녀한테 관심이 없다니, 얼마나 관심이 많은데. 둘이 매일같이 연락하고, 같이 밥도 먹고, 심지어 비 오는 날엔 우산이 없음 데리러 가기도 하고. 이게 서로 관심 없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야? 다박다박 따지고 싶었지만 생각해보니 오히려 내가 너무 비참해진다. 의기소침해진 나와 달리 소윤이는 도리어 힘이 넘치는 듯 밝은 목소리로 입을 떼었다.
“역시 산호 오빤 진국! 여자를 외모로 좋아하지 않는 거까지 멋있어.”
콩깍지가 단단히 씌어 웅얼거리는 소윤이는 정말 대단히 산호에게 빠진 것 같았다.
우정, 그 끝자락을 잡고
이산호가 운동을 잘한다는 소윤이의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듯, 녀석은 농구 시합 내내 여기저기 날아다녔다. 덕분에 우리 과는 시합에서 완승을 거두며 왁자지껄,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했고.
“신보배, 나 물 좀.”
“오빠 여기요!”
땀으로 흠뻑 젖은 머리를 털며 산호가 응원석으로 다가왔다. 물을 달라는 녀석의 말에 몸을 틀어 옆에 놓인 물병을 집는데, 그 사이 내 옆에 있던 소윤이가 제 손에 쥐어져있던 물병을 냅다 녀석에게 건넸다. 얼떨결에 산호는 소윤이의 손이 내민 물병을 받아 들었다.
“어… 고마워.”
그 덕택에 내가 무안하게 쥐고 있던, 산호에게 주려했던 물병을 언제 다가왔는지 차우진이 낚아채 갔다.
“웬일로 괜찮은 짓 하나 했더니 이상한 거나 달고 오고.”
차우진이 물병에 담긴 물을 입에 들이 붓고는 나에게만 들릴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한 거라니, 소윤이? 의뭉스런 눈빛으로 땀에 절은 놈을 올려다보자 고개를 몇 번 저으며 혀를 찬다. 뭐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하지만 차우진은 저를 계속 의아하게 쳐다보는 나 따위는 무시한 채, 산호에게 말을 했다.
“집에 바로 갈 거냐?”
“어. 씻어야지. 더워 죽겠다. 신보배, 내 옷이랑 가방 좀.”
나는 근처에 놓여있는 녀석의 겉옷과 가방을 챙겼다. 어제 비가 온 후에 급작스레 후텁지근해진 날씨에, 운동마저 해서 그런지 산호는 정말로 더워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땀이 계속 나는지 끊임없이 고개를 양쪽으로 터는 녀석에게 가방을 건네며 한손으로 녀석의 이마의 땀을 닦아냈다.
빨리 씻고 싶다고, 나에게 집에 가자고 말을 하며 가방을 어깨에 걸치는 녀석과 함께 애들에게 인사를 하며 학교를 떠나려는데, 나를 오묘하게 쳐다보는 소윤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런데 뭐랄까, 강아지 같은 소윤이의 눈이, 아까와는 달리 고양이의 눈빛을 띄며 나를 주시했다. 뭐지, 이건? 몸이 조금 흠칫 할 만큼 묘한 눈빛이었지만, 나를 잡아끄는 이산호 덕에 나는 금방 그 눈망울에서 눈을 떼야 했다.
***
“너 고등학교 때 농구 했었어?”
“내가 말 안했었나? 이 몸이 무려 농구부 캡틴이셨다.”
버스 정류장에 이산호와 나란히 앉아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녀석에게 물었다. 아직도 더위가 가시지 않는지,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던 녀석이 내 물음에 대한 답으로, 특유의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거들먹거린다. 캡틴을 무슨 제비뽑기로 뽑았나 보네. 내가 산호의 얼굴에 대고 웃으며 얄밉게 비아냥거리자 산호가, 까분다. 하고 말하며 장난스럽게 내 이마를 검지로 밀어냈다.
“그럼 막 학교에 치어리더도 있고 그래?”
“응.”
“…미국드라마 보면 운동부 캡틴이랑 치어리더 대장이랑 막 사귀고 그러던데.”
“푸하, 치어리더 대장… 풉.”
치어리더 대장이란 말이 그렇게 웃긴 건지, 내 말을 듣고 있던 산호는 큰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미국드라마에서 보통 운동부 캡틴이랑 치어리더 대장이 학교에서 제일 잘 나가던데… 둘이 맨날 사귀던데…. 나는 궁금함 반, 질투 반의반, 초조함 반의반으로 산호에게 물은 거였지만, 녀석은 대답해줄 의향이 없는 듯 계속 웃기만 했다.
“…진짜야?”
“뭐가?”
“미국드라마….”
“풉. 대체 뭘 묻고 싶은 거냐.”
그러니까 애들 말대로 네가 인기가 많다는 게 정녕 사실이냐고! 속마음은 이미 녀석에게 큰소리로 호통을 치며 따지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으며 아니야. 하고 싱겁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하지만 이미 내 속뜻을 파악해버린 건지, 산호는 웃음기가 잔뜩 서린 목소리로 거들먹거린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나 인기 많다니까.”
“…이런 게 대체 어디가 멋있다고…….”
“어? 나 인기 많은 거 인정?”
내가 녀석의 농담 섞인 말에 반박을 하지 않고, 못마땅하다는 듯이 웅얼거리자 산호가 의외라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저리 치우라며 녀석의 얼굴을 손으로 밀어내자 녀석이 옅게 웃으며, 웬일이야, 했다.
“그냥, 오늘 어떤 멋모르는 신입생이 너보고 멋있다고 헛소리해서.”
“나? 누가??”
저보고 멋있다고 한 게 그렇게 좋을까. 녀석이 싱글벙글 웃으며 물어 온다. 안 그래도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는 녀석에게 굳이 소윤이 얘기를 해야 하나 싶어 미간을 찌푸리고 있자, 녀석이 뭔데, 하고 나를 재촉한다.
“있어. 너 좋아하는 1학년 여자애. 근데 아무래도 더위를 단단히 먹어서 잠깐 눈에 뭐가 쓰인 걸 거야.”
“아아, 박소윤?”
“뭐야, 알아?”
“모를 수가 있나.”
들뜬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녀석은 흥미 없다는 듯 이내 고개를 도로 제자리로 돌렸다. 예상외로 미지근한 반응에 오히려 내가 깜짝 놀라 녀석을 쳐다봤다.
“그 반응은 뭐야. 연하는 별로다 이거야?”
나는 밝아지는 목소리를 숨기지 못하고 산호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한다는데, 그 사람이 정말 별로가 아닌 이상 신경이 쓰이게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어떻게 보면 내가 녀석을 좋아하게 된 것도, 녀석이 나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였으니, 녀석이 소윤이에게 정말 아무 흥미도 없어 보이는 걸 보면 정말로 소윤이에게 일말의 마음도 없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소윤이가 어디 모자란 구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밝고 귀여운 게 딱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자그마한 여자의 정석인데. 그럼 녀석이 소윤이를 거절할만한 이유는 나이밖에 없다. 근데 소개팅녀도 산호에겐 연하고. 그럼 결국 소개팅녀에게도 희망이 없단 뜻? 잠깐, 근데 그렇게 따지고 보면 나도 연하인데? 물론 친구로 지내고 있긴 하지만…….
“연하가 싫다기 보단, 정신연령이 어린 애들은 싫어.”
“아.”
“더군다나 박소윤 나 좋아하는 거 아니야.”
열심히 머리를 회전시키던 나는 산호의 말에 맥이 빠졌다. 결국 제자리다. 그나저나 소윤이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린지. 이산호에 대해선 온통 알 수 없는 것투성이라 저 머릿속엔 당최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 건지 한번 들여다보고 싶다.
“어쨌거나 신보배 네가 드디어 내 진가를 알아 본거냐.”
“진가는, 개뿔.”
“이 오빠가 이렇게 인기가 많으시다. 그러니 있을 때 잘하도록.”
얄밉게 깐죽거리던 이산호는, 내가 눈으로 녀석을 흘겨보며 손을 들어 녀석의 팔뚝을 한 대 치려는 순간 교묘하게 몸을 피했다. 때마침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를 향해 걸어가며 녀석은 나를 향해 한 번 더 얄밉게 웃는 걸 잊지 않는다. 아우, 저 모습을 소윤이가 봐야 하는데.
나는 얌체 같은 이산호를 따라 버스에 올라탔다. 녀석의 뒤를 이어 교통카드를 단말기에 찍고, 익숙하게 버스 뒷문 근처에 비어있는 좌석들로 향했다. 습관처럼 좌석의 옆에 붙어 서 나를 기다리는 녀석의 옆구리를 한 번 찔러주고 창가에 엉덩이를 붙이자 녀석이 시끄럽게 칭얼거리며 옆에 앉는다.
땀에 젖은 산호의 머리가 아직까지 마르지 않은 탓에, 창문을 손가락이 들어갈 만큼만 찔끔 열자 포근한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아, 가는 길에 마트 들려서 배추 사야 돼.”
“배추?”
“응. 주말에 김장하려고.”
“으. 힘들어 죽겠는데 짐꾼 노릇도 해야 돼?”
“대신 저녁에 해물 탕 해줄게. 해물도 사가자.”
“김치는 몇 포기 담을 건데? 이번에도 고모님 집 것도 한꺼번에 하냐.”
“아마도?”
“그냥 배달시키라니까.”
“해물 탕 해준다니까.”
상상만 해도 어깨가 아프다며 산호가 미간을 찌푸린다. 손을 그러쥐어 주먹으로 녀석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엄살은. 하고 웃자 녀석이 정말이라며 울상을 짓는다.
“어유, 신혼부부인가보네. 요즘 세상도 흉흉한데, 어린 나이에 참 보기 좋네. 이거 하나씩 들어.”
문득 우리 뒤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 한 분이 우리의 대화를 들으신 건지, 팔을 앞으로 뻗어 박하사탕 두 개를 내미셨다. 그 기분 좋은 오해에 당황해, 내가 고개를 틀며 신혼부부가 아니라고 해명을 하려는데, 이산호가 넉살좋게 웃으며 사탕을 건네받는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래, 내가 줄 건 없고, 우리 손주들 같아서.”
인자하게 웃으시며 흐뭇하게 나와 산호를 바라보는 그 보기 좋은 미소덕분에 나는 그저 옅게 웃었다. 나에게 박하사탕 하나를 내미는 산호에게 조그만 목소리로 핀잔을 주니, 녀석은 기분 좋은 호의를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라며 사탕을 입에 넣는다.
기분 좋은 호의. 녀석은 분명, 굳이 할머니의 호의를 거절하면서 까지 할머니의 기분에 산통을 깰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겠지만, 혹시나 할머니의 오해가 기분이 좋다는 걸까, 나는 괜스레 마음이 떨린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한 쪽 귀에 이어폰을 꽂으며 산호가 다른 한 쪽 이어폰을 내게 내민다. 녀석이 네민 이어폰을 받아 귀에 꽂자 잠시간의 정적 끝에 처음 들어보는 잔잔한 기타선율과 함께 꽤나 대중적인 가수의 익숙한 목소리가 흐른다. 처음 들어보는 노래의 제목을 산호에게 묻기도 전에, 달콤한 목소리가 속삭이는 노래의 가사가 귓가를 타고 내 마음까지 전해진다.
멀리 그대가 보일 때면
난 가슴이 떨려 어김없이
어제 그제도 보았는데
설레는 내 맘이 이상해
심장소리보다 한 박자 느린 기타소리가 귓가를 상냥하게 두드린다.
그대와 손을 마주잡고
보드라운 바람 벗 삼으니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터지는 웃음이 이상해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보드라운 바람이 간지럽게 볼을 스친다.
슬픔이 머물다간 자리
눈물이 고였던 흔적
어느새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
나는 그대 곁에 그댄 내 맘속에
적당히 따사로운 햇살과 적당한 습도를 머금은 공기가 내 마음마저 간질이는 기분에, 목석마냥 앞을 향해 딱딱하게 굳어있는 고개를 차마 녀석이 있는 쪽으로 돌릴 수가 없다.
이어폰을 통해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잠시 멈추자, 기분 좋게 떨리던 숨결마저 따라 멈춘다.
넓고도 넓은 세상 안에 그 많고도 많은 사람 중에
우리 둘이 함께 라는 게 그럴 수 있단 게 이상해
잔잔하게 속력을 내던 심장이 이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두근거려 파도처럼 요동친다. 봄바람이, 제멋대로 내게 마법을 부리고 있다.
이건, 반칙이야.
슬픔이 머물다간 자리
눈물이 고였던 흔적
어느새 시원하게 씻겨 내려가
나는 그대 곁에 그댄 내 맘속에
애써 내리깐 시선의 끝에 산호의 손끝이 닿는다. 정말이지, 이건 반칙이다.
넓고도 넓은 세상 안에 그 많고도 많은 사람 중에
우리 둘이 함께 라는 게 그럴 수 있단 게 이상해
희우의 말이 옳았다. 내 세계는 지나치게 이산호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녀석의 행동 하나, 말 한마디에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동전이 뒤집어지듯 바뀌는 내 기분. 어제는 내 마음을 저 나락 끝까지 몰아냈던 녀석이, 오늘은 나를 저 푸른 하늘 높이까지 붕붕 띄운다. 이건 정말… 중증이다.
안녕하세요 홍지입니다 :)
오늘은 나름 달달한 에피소드로 (제 딴에는) 엄청난 분량과 함께 왓슴다.
이제 봄이 됏는데, 여러분이 보배와 함께 맘껏 설레이셧음 하는 저의 소소한 바람으로! ㅎ.ㅎ
아래의 더보기는 소설에 대한 저의 소소(하고싶지만 실로 엄청난 분량과 함께)한 코멘트!!
읽지 않으셔도 그리 큰 상관은 없으십니당.
우선 산호와 보배의 관계, 그러니까 알게 모르게 서로에게 길들여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습니다.
같이 밥을 먹는 모습과 같은 맥락으로요. 서로에게 습관이 되버린 너무 자연스러운 관계 같은..?
뭐 보배가 아무렇지 않게 산호의 땀을 손으로 (무려 손으로!) 닦아주는 모습이나
(이런건 웬만한 사이에선 못하는 것...인거 같아서. 솔직히 남의 땀을 손으로 닦아준다니..
굉장히 친하고 오래된 사이가 아니면 무척 더럽게 느껴지지 않나요???)
산호가 버스 창가자리를 당연하게 보배에게 양보하는 모습 같은..... 그러나 또 동시에 서로에 대해서 너무 무지한 모습?
보배가 산호와 떨어져있던 시간동안의 산호는 잘 모르는 것처럼요.
그리고 버스에서 산호가 보배에게 들려준 노래! 가수 이적씨의 '이상해'라는 노래입니다 =)
저 노래는 개인적으로 제가 정말 좋아하는 노래!
잔잔한 노래를 좋아하시는 분들에게 추천해드리고 싶어요. 봄과 너무 잘어울리는 노래입니당. *.*
사실 저 노래에 관한 에피소드는 저의 실화를 가미한 에피소드임니당. ㅎㅎㅎ
별건 아니구요, 정말로 털끝만큼도 서로 이성으로 보지 않던 친구엿는데, 딱 산호와 보배가 그려진 배경과 비슷한배경에서 저 노래를 들려주더라구요. 정말 주변 환경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저도 모르게 순간, '어?얘가나좋아하나?'싶을 정도로 아주 잠깐이지만 설레엿다는...ㅎ.ㅎ 저 방법을 작업방법으로 적극 추천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암튼 그 때의 설레임을 그대로 옮겨다 놓고 싶엇는데.. 제 역량부족인지 그리....... ㅠㅠ 너그럽게 여러분이 설레여 주시길!!
아 그리고 저 완전 감격햇어요ㅠㅠ
웬지 요즘 살이 무럭무럭 차오른다 싶엇더니, 저번화에 추천이 부려 9분!!!!!
추천과 댓글을 먹고사는 저는 이런 살이라면 얼마든지 대환영이에요!!ㅎㅎㅎ
그럼 정말로 사설을 끗.
마지막으로 저번화에 댓글을 달아주신
♡희야짱♡ 님, 헉!오마이갓 님, 햇님포유 님, dposa 님, 철수와바둑이 님,
그리고 추천을 해주신 9분!
감사하구 애정합니다!! 복 무진장무진장 받으실거에요!!!!>.<
저는 다음화에, (상남자라표현됏지만 아직상남자의모습을보여주지못한)산호의 상남자스러움을 갖고 돌아오겟습니다^.^
첫댓글 재밌어요 ㅋㅋ
감사합니다 :)
너무 재밌어요!!! 산호도 멋있고 보배도 귀엽고.. 짝사랑의 설렘과 마음아픔 ㅠㅠㅠ 뭔가 느껴져서!! ㅋㅋㅋㅋㅋ 다음편 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산호 보배 칭찬도 감사하구, 짝사랑의 여러 감정들도 느껴주셨다니 (?말이좀...이상하네요) 7화는 제 목표 이상을 달성한 기분이에요:)
산호가 질투하게 보배가 밀당좀 했으면 좋겠어요..ㅠ
밀당은... 제가 소질이 없어서 보배도 못하나봐요.. 보배 성격이 점점 제 성격이 되가는 듯..?
그치만 앞으로 보배가 복수할 날이 빠른 시일내에 오게 될테니 통쾌하게 봐주세요ㅎ.ㅎ
보배가 이번엔 더 다가갔으면 좋겠는데... 그만 튕기고 애 태우고 산호에게로 다가가. 이번편도 좋아요. 빨리 서로가 사랑했으면 합니다.
사실 저는 튕기고 애태우는 건 산호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보배를 복돋아 주셔서 놀랐어요. ㅎㅎ 좋아해주셔서 항상 감사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