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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류봉은 1년에 한번씩은 반드시 고향을 찾는다. 고향의 생가가 두류봉을
반겨주는 것도 아니고, 오롯이 남아있지도 않다. 본채는 그래도 10여년전까
지 혼자 살다가 돌아가신 숙모님이 거처하던 곳이라, 시골의 정취를 보이며
건재하지만, 사랑채는 완전히 날아가 버렸다. 행랑채는 반쯤은 쓰러져 부서
져 있고, 반정도는 언젠가는 완전히 없어질 것을 예고하면서 그냥 형태만 남
아있다. 그러나 두류봉은 이런 생가를 복원할 수도, 부셔버리고 다시 지을 능
력도 권한도 없다. 막내로 태어난 팔자라 늙은 맏형과 장조카는 그냥 그곳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
▲ 두류봉이 태어난 생가의 본채 - 71년전 이 집의 안방에서 출생했다
▲ 헛간과 광이 있던 행랑채는 반쯤 쓰러져 있다.
▲ 친구들과 놀고 공부하던 사랑방이 있던 사랑채는 없어져 골목쪽 입구만 건재하다
그래도 고향을 찾는 것은 선산에 성묘하고, 세월과 시대의 흐름을 잘못 만
나 짧은 인생을 살다 가신 부모님의 묘소를 찾아보면서 엎드려 세월의 흐
름을 고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금 고향마을에는 가까운 집안도
친척도 살지 않고, 그 시절 어릴 적 친구가 한명도 없다. 몇몇은 이미 이 세
상 사람이 아니고, 살아있는 친구도 서울、부산、대구、창원、울산이나 진
주에 살지, 고향을 지키는 사람은 없다. 고향을 둘러볼 때마다 뒷산과 조금
떨어진 지리산자락을 멀리서 바라본다. 동급생 남자 12명 중 가장 어린나이
로 유일하게 도내에서 제일 좋다는 부산의 어느 중학에 진학하였으나, 입학
하고 넉달만에 꿈을 접고 시골에 돌아와 지내다가, 다시 중학생이 되는데는
또 몇 해를 기다려야 했다.
▲ 마을 뒷산의 부모님 산소를 올라가는 가파른 산길에 진달래가 피어 두류봉을 맞아준다.
▲ 마을의 뒷산의 부모님 산소 주위에도 어김없이 봄이 오고 진달래가 핀다.
▲ 마을의 뒷산 부모님 산소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함께 모신 합봉이다.
지리산은 고대로부터 신비스러운 기운을 안고 있는 유람의 성지 혹은 이
상향의 은둔처였다. 어릴 적 어머니께서 정화수 물 한 그릇 떠놓고서 그쪽
을 향해 산신님께 자식의 건강과 집안의 안녕을 빌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뿐만 아니라 백두대간이 흘러나왔다고 해서 두류산(頭流山), 옛 삼신산(三
神山)의 하나인 방장산(方丈山), 조선태조의 왕위 찬탈에 불복한 채 고려조
에 대한 의리를 밝힌 지리산의 굳건함을 기리는 불복산(不伏山)의 전설도
깔려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유학자들이 심성을 수양하는 수신처가 되어
사림(士林)의 본거지로, 임진왜란에서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을 길러낸 산실
이었다. 지금 벚꽃축제로 유명한 하동의 삼신산쌍계사(三神山雙溪寺), 방장
산대원사(方丈山大源寺)와 방장산법계사(方丈山法界寺)라고 일주문에 쓰여
있고, 칠선계곡을 오르는 함양추성골에서는 지리산벽송사(智異山碧松寺)라
고 이름을 붙였다.
▲ 하동 화개천을 따라 지리산대성골로 향하는 계곡물은 맑고 벚꽃은 가지를 늘어뜨리고있다
▲ 화개천 계곡을 따라 전개된 지리산의 녹차밭 비탈에 늘어뜨린 벚꽃가지
▲ 삼신산 쌍계사(三神山雙溪寺)라고 쓰여있는 쌍계사입구의 일주문
지리산 속에서 자라던 산청사람들은 어릴적부터 두류산(頭流山)이라고 부
르며 자랐다. 통일신라시대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선생이 두류산에 삶
을 새겨둔 이래 많은 명인들이 이 산을 올라보고 산행기를 남겼는데 <頭流
錄><續頭流錄><頭流山紀行文>이란 이름이 가장 많다. 두류산유람록 출현
에 기폭제 역할을 한 인물은 당연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 1431~
1492)선생이다. 밀양출생으로 훗날 그의 제자인 김일손(金馹孫)이 성종실
록 편찬을 위한 사초(史草)에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것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것으로 역사에 나타나 있다.
▲ 산청 지리산 유들골계곡으로 오르는 길가운데 있는 방장산 대원사 일주문
▲ 방장산 대원사(方丈山大源寺) 일주문 포커스
▲ 지리산 유들골계곡으로 오르는 도로에서 방장산 대원사에 들어가는 절문
김종직(金宗直)이 함양군수로 부임한 이듬해인 1472년에 그의 제자들과
지리산탐승에 나서, <遊頭流錄>을 남겼다. 김종직의 제자이면서 당시 최
고의 문장가로 강직한 사관으로 평가받던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은
1489년 <續頭流錄>을 썼다. 지리산에서 은거하여 독서로 정진한 뒤 벼슬
을 한 이륙(李陸: 1438~1498)은 1461년께 쓴 <頭流錄>에 천왕봉과 법계
사 주변의 불교 문화, 그리고 향적사, 쌍계사 등 여러 사찰을 중점적으로
적고 있는데 그가 지리산 사찰에서 학문에 정진했음을 알 수 있다.
▲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으로 흘러들어오는 임천강의 의탄교를 건너서 승용차를
구비구비 모퉁이를 이리저리 돌아 벽송사에 오르면 나무장승한쌍이 맞이한다
▲ 벽송사는 높고 외진 곳으로 한때 6.25이후 빨치산의 야전병원역할을 담당하던 곳이었다
1960년대 이후 소실되고 쓰러져 폐사가 된 절을 일으켜 중건하였으며, 지금도 계속된다
▲ 함양의 칠선계곡 추성골 지리산 벽송사에 있는 장승
지리산을 중심으로 경상우도의 영남학맥을 이어갔던 남명(南冥) 조식(曹
植 : 1501~1572)선생은 지리산을 열두번 오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12번을 두류산에 오르고, 1558년 그는 <流頭流錄>을 남겼다. 깊은 속정
이야 ‘뱀 비늘을 숨긴 지리산의 검푸른 내’처럼 그 깊이를 알 수 없으나, 실
천적 성향이 강한 학풍과 마지막 은둔지로 삼았던 지리산의 연결지점은 어
디일까. ‘안으로 마음을 밝게 하고 밖으로 의로써 실천한다’는 남명(南冥)의
경의사상(敬義思想)의 원천은 바로 지리산이다.
▲ 지리산의 북쪽응달 높은 곳에 위치한 벽송사에는 이제 목련꽃이 맺기 시작한다
▲ 지리산 벽송사에는 수령 300년이 넘은 보호수인 도인송이 있다.
▲ 지리산 벽송사 내에는 이렇게 길고 커다란 거북바위가 있다.
한 시대를 대표했던 유학자가 ‘절대 복종하지 말라’며 처사로 남기로 자청
하며 품고자 했고, 닮고자했던 지리산의 기상. 임진왜란 때 남명 문하에서
제일 먼저 의병장이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후 일제말기 학도병을 거
부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던 식민지 청년들에게도, 지리산은 반역의 거점
이자 유토피아의 공간이었다. 신선이 드나들었다는 그래서 지상과 천상의
경계였던 지리산 청학동의 석문(石門)이, (산에서) 내려오면 안락한 생활이
보장된다며, 빨치산의 하산을 권유하는 ‘안락문(安樂門)’ 표지가 되기까지
지리산은 그저 여기가 무릉도원이 아니라, 언제나 현실의 첨예한 갈등의 양
면으로 우리 곁에 있었다. 지리산의 숨겨진 아름다움(秘境)과 슬픈 역사의
흔적(悲境)은 고향을 찾은 두류봉의 가슴속에 만감이 교차하면서 심장의 고
동소리를 멈추게 한다.
▲ 벽송사는 6.25 이후 빨치산이 점령하여 그들의 근거지로 유명한 빨치산루트이다
빨치산이 소탕된 이후 중건하고 절을 복원하여 아직도 불사가 계속되고 있다.
▲ 새롭게 짓고 단장되는 신라고찰 벽송사의 여러 건물모습
▲ 벽송사에서 바라보는 지리산의 위용 - 절의 위치가 높고 험함을 알 수있다
빨치산의 기억을 담은 지리산은 1967년 12월 29일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
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너무 많은 작가들의 소재로도 쓰였다. 통영 출신이
면서 진주에서 학교를 다닌 박경리의 대하소설《토지》에 나오는 최참판댁
이나 평사리도 지리산 자락의 이야기이며, 지리산 속 하동출신인 이병주의
대하소설《지리산》에서는 주인공들은 힘든 일본유학을 주경야독으로 공부
하다가 좌익사상에 물들고, 일제의 징병제를 피하여 지리산에 숨어들었다가
조국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 새롭게 복원된 벽송사의 원통전
▲ 벽송사의 원통전에는 새로운 붓다상이 모셔져 있다.
▲ 벽송사 절마당에는이런 거북바위도 있었다.
지리산 은둔생활에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게 되었지만, 당중앙의 정책에
반론을 제기하다가 숙청되는 등 젊은이의 고뇌를 보이기도 하고, 1950년
에 6.25 전쟁에서 퇴로가 막혀 빨치산이 되었다가 그 후 1951년 8월부터
1954년 6월까지의 지리산 속의 남부군의 빨치산 활동이 주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전통적인 지주계급으로 그 신분의 제약과 한계속에서 인간미를
나타내는 하영근과 이규, 소시민적 지식인으로서 특유의 무력감에 빠져서
회의주의자가 되었던 권창혁、김경주, 공산주의 이론을 신봉하면서도 당
의 무모하고 획일적인 명령체계에 승복하지 못하여 갈등을 겪어야 하였던
하준규、박태영, 그리고 시류에 따라 부침하는 좌익과 우익의 여러 인물들
이 난세의 현실에 대처하여가는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집합하여놓은 작품이
다.
▲ 벽송사는 오래된 고찰이라 이런 부도도 절모퉁이에 모셔져 있다.
▲ 보물 474호인 벽송사 3층석탑 - 봄이 오는 지리산에서 여인이 탑돌이를 한다
▲ 보물 474호인 벽송사 3층석탑 - 안내문
전남 벌교에「조정래-태백산맥문학관」이 있어 그곳을 그냥 관광으로 다녀
온 단순한 여행자들은 조정래가 벌교 사람으로 알지만, 그는 순천의 선암
사에서 태어난 소설가이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서도 ‘여순사건’ 으로
시작되어 순천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서 나온다. ‘현부잣집’과 ‘소희’의 집
이 있는 제석산은 벌교와 순천에 걸쳐있는데, 산위에 오르면 낙안읍성과 벌
교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소설가 조정래는 자기의 작품속 인물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사람으로 《태백산맥》에 나오는 ‘외서댁’이라고 말하는 걸 들
었다. 외서댁은 김동식의 아내로 전쟁 중 남편의 뒤를 이어 빨치산이 된다.
전방투쟁을 지원했고 중대장까지 오르며 용맹성을 발휘했다.
▲ 벽송사를 둘러서 조부님산소 뒷쪽 지리산에는 오래된 노송이 방풍림으로 서 있다
▲ 조부님산소는 지리산 높은 곳에 위치하지만, 아래까지 산길로 승용차가 통행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4대째 독자계승하던 집안에 3형제9남매를 두셨고, 4대만에 벼슬을 하셨다.
구한말 20대초반 너무 일찍 개화파에 몸담으셨다가 지리산에 숨어들어 지내게 되었다.
▲ 할아버지 산소는 지리산 높고 험하며 울창한 산세에 자리잡고 있다
▲ 할아버지 산소는 배산임수 지형이라 앞에는 깊은 지리산 골짜기 물이 흐른다
지리산자락 혈관의 흐름을 모르는 외지인은 웅석봉 청계골 진달래가 아름
답고, 바래봉이나 세석평전의 철쭉꽃이 붉은 것은 알아도, 그 품안에서 태
어나 빨치산과 토벌군의 격렬한 전장에서 나무하고 소먹이며 그 산길을 넘
고 개울을 건너 면소재지에만 있는 먼 길 초등학교를 다니며, 학교에 가는
길이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항상 뛰어 달려야 하던, “지리산 골짜기출신
촌놈”의 응어리진 마음을 알 리가 없다. 청계골 진달래가 멋있고, 피아골
단풍이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세석평전의 철쭉이 붉고, 바래봉의 5월이
도시민의 나들이장으로 변하여 조용하던 산동네가 북적거려도 70평생 지
리산자락의 산세를 어머니의 품안으로 여기며, 일찍 가신 그분들을 그리워
하면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잡듯 그냥 매달려본다.
▲ 고향에 둘러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 성묘하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다
▲ 소위 명당을 구한다고 선대산소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다.
마을에서 계곡을 마주하며 험한 길을 자동차로 또 몰아가야 한다
지리산 자락의 진달래가 가장 빨리 피어나고 고고히 얼굴을 내미는 것도,
그곳의 철쭉꽃이 유난히 붉은 것도, 피아골의 단풍이 불타듯 붉고 고운 것
도, 먼 옛날부터 이 지리산 자락의 골짜기에서 수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원
혼이 봄이면 붉은 꽃으로, 가을에는 붉은 단풍으로, 피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백제와 신라의 싸움터, 임진왜란과 어린 시절 겁먹으며 지켜보던 빨
치산 토벌에 이르기까지 지리산은 골골이 계곡마다 피의 역사를 품고 있다.
지리산자락의 곳곳이 유난히 붉은 꽃과 붉은 단풍은 아마도 골골이 산화된
붉은 피의 처연한 서사시이면서 우리의 역사이다. 특히 지리산이 처절한 피
의 현장으로 부각된 것은 6.25전쟁을 전후한 조선인민유격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지리산 빨치산의 역사는 이보다 앞선다고 한다. 1946년 대구 10월
인민항쟁으로 유혈사태가 일어나면서 남로당이 불법화되는 과정에서 산으
로 들어간 좌파들을 중심으로 꾸려진 야산대들이 대한민국 빨치산의 전신
이다.
▲ 지리산을 한바퀴 돌고 선산에 성묘한 후 생가마을 둘러서 진주로 나왔다
생가마을 이웃집이 동네이장을 맡고있는데, 철근콘크리트 양옥집을 지었다
▲ 생가마을은 집앞까지 승용차길 도로를 닦았지만, 골목집은 차량통행이 불가능하다
▲ 생가마을의 동구밖만 나서면 넓은 20번국도가 뚫여있다
빨치산대장 하준수(南道釜)의 탄생과 함께. 야산대 일부는 1948년 여순
사건 이후 군 정규 부대에서 전환한 유격대에 흡수돼 본격적인 파르티잔
활동을 시작했다. 지리산을 중심으로 덕유산, 백운산을 연결하며 경남, 전
남, 전북을 잇는 지리산 유격지구는 여기에서 탄생했다. 그리고는 그 이후
인 1949년 창설된 조선 인민유격대와 합류했다. 조선 인민유격대는 제주
4·3과 여순사건을 한국전쟁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으며, 토벌대와의
전투과정은 일종의 작은 전쟁이 되어, 한국전쟁 전초전을 형성했다. 한국
전쟁 전부터 이현상이 지리산에서 지휘하던 부대는 인천상륙작전 이후 강
원도로 후퇴했다가, 다시 전선을 재정비해 1951년 남조선인민유격대, 이
른바 <남부군(南部軍)>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 지리산 아랫동네인 면소재지 마을에는 벚꽃이 활짝 피었다
▲ 남명선생이 노래한 두류산 양단수에는 맑은물이 휘돌아가고 버들강아지가 곱게 뻗어난다
“지리산 첩첩산중 손아귀에 거머잡고/ 험악한 태산준령 평지같이 넘나
드네/ 지동치듯 부는 바람 우리 호통 외치고/ 깊은 골에 흐르는 물 승리를
노래한다/ (후렴) 우리는 용감한 지리산 빨치산/ 최후의 승리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다”(「지리산 유격대의 노래」). 노래가사와는 다르게 이들의 행
로를 따라, ‘달뜨기-웅석봉-짜래골-배암사골-의산-범왕골-풀무잔등-피
아골-노고단-곡성-고리봉-달궁골-학동골……’ 그 계곡과 골짜기에서 수
많은 생명들이 산화해 갔다. 1963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산청군 - 두류봉
의 출신지 - 지리산 기슭에서 최후의 빨치산 정순덕이 생포됨으로 지리산
빨치산의 기억은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공원의 기념으로 대체된다.
▲ 지리산계곡에는 아름드리 낙락장송의 노송도 가끔식 볼 수 있다
▲ 서울4대문 밖을 모르는 서울토박이인 내자는 지리산 선산에 오르면서 힘들다고 야단이다
한쪽의 기억이 사라져갈수록 한쪽의 기억은 더 강력한 신화가 되고 있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리산에서 모의됐던 탈식민화에 대한 동력이나 근대국
민국가에 이상적 기획을 모두 탈취당한 채, 만들어진 공포의 붉은 이름 -
빨치산이라는 기표는 대한민국 정체성을 위협받았고, 초등학교 입학후 구
구단은 못 외워도 괜찮았지만 산청군출신 빨치산 4명의 특징을 외우지 못
하면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어린 시절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로
생각하던 참모총장 백선엽장군의 이름은 일찍부터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백
선엽장군의 명의로 빨치산들에게 보내는 “산에서 빨리 내려와 자수하라”는
삐라도 보았고, 밤에는 빨치산이 내려와 동네사람들을 모아놓고, 위대한 김
일성장군(?)과 이현상대장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피아골에 숨어 지내는 빨
치산 ‘아가리부대’의 극악무도한 야만성을 강하게 그려냈던 영화 「피아골」
(1955)이 나온 것은 어른이 되어 알았지만, 상급학년 때였다.
▲ 지리산 깊은 계곡 산골자기 개울물은 아직도 차갑고 싸늘하다
▲ 지리산 높은 지대 응달에서는 이제 간신히 진달래가 기지개를 켜고 있다
《남부군》(1990)《태백산맥》(1994)에서는 빨치산 그들 역시 인간적 고뇌
에 빠져서 지쳐있었지만,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는 것
을 증명해주고 있다. 《남부군》의 저자인 이태(李泰 /본명 李愚兌: 1922~
1997)는 생전에 남부군 기록을 남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록들에 의하면 1949년 이래 5년여에 걸친 소백 지리 지구 공비토벌전
에서 교전회수 1만717회, 전몰군경의 수 6천333명, 빨치산 측 사망자의
수는 믿을만한 근거가 없지만 줄잡아 1만 수천은 넘을 것으로 추정된다.
피아 2만의 생명이 희생된 그 처절함이 세계유격전 사상 유례가 드문 이
엄청난 사건에 실록 하나쯤은 남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 지리산에도 응달과 양달이 기후가 다르고 고도에 따라 계절이 다르다
▲ 토박이들은 지리산 유들골 골짜기라고 하는데, 일제시대 한자말로 유평리라 고쳤다
그렇게 죽어간 그 많은 젊은 넋들에게 이 기록이 조그만 공양이 됐으면 하
는 마음이었다.” 지리산 굽이굽이 산자락에 널브러진 주검들은 죽어서야 가
해자/피해자, 적군/아군, 산 위/산 아래의 구분 없는 대동세상에서 만났을까.
어느 시인이 노래한다. “지리산 등성이 여기저기 누운/ 산사람 혹은 국방군/
그들이 뒤엉켜 함께 피우는/ 찔레꽃/ 지리산의 찔레꽃”(「지리산 찔레꽃」
중에서). 이미 예부터 민중들이 기복을 비손했던 이 지리산이 이제 역사의
제장(祭場)이 된다. 이쪽과 저쪽의 죽음과 한을 해원하는
▲ 서울로 돌아오면서 하동 화개골과 사천 선진성과 남해를 돌아왔다
▲ 화개골은 골짜기도 깊고 물도 맑으며 봄향기가 코끝을 찔렀다
▲ 두류봉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 면소재지 학교를 거의 20리의 산길을 걸어 다녔으나,
3학년부터 3km정도 되는 곳에 학교가 생겨 옮겼다 동급생은 12명-제일 어렸다
지금 폐교된지 20년이나 되었고 지리산건설회사가 인수하여 회사건물로 쓴다.
6.25사변이 지나간지 어언 66주년 - 젊은 세대에게 말하지 못한 이야기들
이고, 또래의 세대들도 직접 체험이 없는 부류는 단순한 소설 속의 한 구절
로 치부하는 이야기들 - 경험하고 당한 사람은 슬프면서 쓰라린 과거와 어
린 시절의 기억을 지리산을 찾을 때마다 되뇌게 된다. 절단과 분리의 상처
가 너무도 깊이 패인 사람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뒤의 오는 사람들이 너무 자의적이고, 소설적인 방식으로 접근할 가능이
높다.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 삼천포와 창선도사이 다리
▲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 - 삼천포와 창선도사이 다리
▲ 삼천포와 창선도 사이의 다리와 삼천포항 포구
▲ 삼천포 앞 바다
▲ 지리산 높고 넓은 웅지를 보고 태어난 두류봉이 갑갑한 서울의 아파트에서 노년을보내다니?
첫댓글 두류봉님의 고향 자랑 글에 조회수가 넘쳐나는 걸보니
인기가 대단한듯 하여 댓글을 안달수 없네요.
그 초라한 산간 벽촌 시골 집에서
두류봉 같은 인재가 태어나, 사회적으로 많은 성취를 이룬 것을 보니,
지리산 정기 때문인지?, 본인의 노력 때문인지?
하여튼 잘 읽었습니다.
사랑하는 두류봉 화이팅 !
글의 내용을 보면 70평생을 살아온 고뇌와 일곱살에 양친부모가 모두 돌아가신 고통을 썼지요.
먼길을 재를 넘고 물을 건너 면소재지학교에 다니다가 3학년때 가까운 곳에 학교가 생겨
12명이 동급생인 미니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혼자만 부산의 모중학에 진학했으나 넉달만에 그만두고
3년후 다시 진주에 있는 중학을 들어간 못나고 슬픈 인생이었죠. 다만 덕분에 또래로서는 한문공부는 깊이 할 수 있었죠.
이 이야기는 절대로 즐겁거나 인기를 끌기 위해 쓴 이야기가 아님을 알립니다. 개중에 고등학교 동급생 중 개인적으로
내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 아이보다 훨씬 어린 어떤 인간은 볼 때마다 나를 괴롭히고 쌍소리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