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0.10.25(일) 09;00-16;30
★코스; 살곶이다리-군자교-겸재교-중랑교-이화교-월릉교-월계1교-녹천교- 상계교-노원교-상도교-
중랑천 석교-레미콘공장-동일로-장암역 교차로-박세당고택-노강서원-석림사 원점회귀(47km)
★참가; 스카이천, 바이크 손, 람보림, 스머프차
<후기> 스머프 차
10월은 명실공히 단풍의 계절이다. 본격적인 가을 단풍철을 맞이하여 주말에 산을 찾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산은 이미 단풍 옷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10월 하순 쯤에는 단풍이 절정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라이딩은 의정부시 장암동의 수락산 자락에 위치한 역사문화유적지를 덕질하는데 중점을 두고 향연을 펼치기로 하였다. 살곶이다리에서 중랑천 자전길을 따라 동일로로 접어들고 박세당 고택, 노강서원, 수락산 석림사를 차례로 둘러보고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약 47km이다.
중랑천 자전거길은 수도권 어디든지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며, 남녀노소 누구나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는 코스다. 4명의 바이콜릭스(Bikeholics) 전사들만이 라이딩에 참여하였다. 하늘은 티 한 점 없이 맑고 푸르렀으며, 운동하기 좋은 날씨였다. 선선한 가을 바람을 맞으며 날개 달린 새처럼 가볍게 몸을 풀 듯 상쾌한 마음으로 출발하였다. 중랑천변을 따라가면 갈대, 코스모스, 국화 등 가을 꽃들이 화려하게 수놓고 있었다. 예쁜 꽃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추억을 남기곤 하였다..
에너지 충전 타임을 두 번 하고 다락천 합수부에서 중랑천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 박세당 고택으로 향했다. 장암역교차로에서 수락산 석림사 방향으로 들어서면 박세당 고택이 나온다. 서계 박세당(1629-1703) 고택은 집 뒤로는 수락산이고, 도봉산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곳에 터를 잡았다. 풍수를 잘 모르는 눈으로 보아도 명당임을 직감 할 수 있다. 박세당은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문신으로서 소론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며, 윤휴(1617-1680)와 함께 17세기 후반 반주자성리학적 입장에서 활동한 진보적 철학자이자 농학자이다.
한마디로 박세당은 고루하고 진부한 전통에 대항한 비판적 지식인이자 올곧은 선비였으며 또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를만한 뛰어난 학자였다. 그러나 노론계의 송시열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1702년(숙종28) 이경석(1595-1671)의 비문을 지은 것이 빌미가 되어 정치적인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비문속에는 송시열의 인품이 이경석(1629-1711)의 인품보다 못하다고 하여 노론에게 사문난적으로 삭탈관직 당하고 유배되었다. 그러나 숙종 26년 8월엔 이조판서직에 임명되었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박세당은 정치의 뜻을 버리고 40세에 경기도 양주 석천동으로 물러나 농사를 지으면서 학문연구와 제자 양성에 몰두하였다. 박세당은 17세 때 남구만(1629-1711)의 누이와 결혼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두었으며, 32세(현종1)에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하였다. 남구만은 학창시절에 널리 애송 되었던 시조 한수를 지은 사람이다.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은 언제 갈려 하나니". 남구만은 인조 때 태어나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박세당 고택에서 노강서원에 이르는 길은 운치가 있어 끌바하면서 천천히 이동하였다. 노강서원은 조선 숙종 때 문신인 박태보(1654-168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박태보는 박세당의 둘째 아들로 호남 암행어사, 파주목사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고, 인현왕후(숙종의 비)의 폐위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심한 고문을 받고 진도로 유배 가던 도중 노량진 사육신 묘 앞에서 휴식 중 죽었다. 재주도 뛰어나고 학문도 깊었으며 시비를 가리는데는 조리가 정연할 뿐만 아니라 비리를 보면 과감히 나섰던 성품을 가진 인물이다.
숙종 27년(1701)에 국가에서 사액서원으로 '노강' 이라는 이름을 받았다. 원래는 서울 노량진에 세웠으나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고, 1968년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노강서원에서 석립사로 가는 길 옆에 청풍정 터가 있다. 청풍정(淸風亭)은 서계 박세당 선생이 매월당 김시습을 추모하기 위해 영당을 짓고 앞에 세운 정자로 제자들과 학문을 강론하던 곳이다. 바깥 세계와 부처님 세계의 경계인 일주문을 통과하여 200m에 이르면 아담한 석림사가 나온다. 석림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로 인하여 인적이 드문 조용하고 평온한 분위기였다.
석림사는 조선 중기에 박세당이 김시습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창건하였다고 한다. 6.25 전쟁시 모든 건물이 불타버려 1956년에 비구니 상인(相仁)이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은 세종이 감탄한 천재 소년 이었다. 사육신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에 묻어둔 사람이 바로 김시습이다.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반발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출가하였다. 김시습은 선비 출신이면서 승려가 되어 기행을 벌인 기인이며,
최초로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작가이기도 하다. 오찬 시간이 다가와 단골인 수락산 숯불 닭갈비집으로 향하였다. 손님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소금 숯불닭갈비와 비빔막국수로 맛있게 식사하였다. 소금숯불닭갈비는 생전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지만 별미였다. 모두 다 맛있다고 극찬할 정도였다. 말품앗이하면서 정겹게 웃음꽃을 피우고 귀로에 올랐다. 복귀 도중에 바이크랜드에 들려 정비하고 살곶이다리를 지나 응봉역에서 상황을 종료하였다.
이번 여행을 통해 역사문화유적지를 덕질하는 유익한 시간을 가졌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과거의 사실을 비추어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보다 발전적인 미래를 준비하기 위해서다. 영국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였다. 역사는 오늘날의 우리들의 참 모습을 비춰주는 고경이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자연은 저마다의 가을 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벗들과 함께 자전거 여행 하면 할수록 우정이 더욱 깊어지고 노년의 의미를 아기자기한 잔재미와 행복으로 채워나간다. sd 16 바이콜릭스(Bikeholics) 브라보!
군자교에 이르기 전 갈대밭을 지나면서
중랑교에 이르기 전
중랑교에서 휴식
이화교를 지나서 가을 장미를 감상하면서
상계교에 이르기 전
다락천과 합수하는 지점에서 중랑천 콘크리트 다리를 건너는 중, 뒤로는 멋진 도봉산이 보인다
박세당 고택 정문에서, 뒤로는 수락산이 보인다
노강서원으로 가는 도중에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노강서원에 이르는 길은 운치있어 끌바하면서 이동 중
노강서원에 도착하기 직전 바이크 손대장
청풍정 터, 주춧돌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석림사 일주문에서
석림사 큰 법당에서 람보림
수락산 숯불닭갈비 막국수
도봉산을 배경으로
코스모스와 함께 추억을 남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