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장·허장환씨 39년만에 광주서 계엄군 만행 고백 증언 신뢰 높고 국가폭력 맞선 광주시민 의로움 입증 진상 규명 방향 제시, 추가 증언·기록물 확보 '마중물' 증언 역사적 검증, 진상조사위 조속 출범 등 과제로
◇ '5·18 당시 정권 찬탈 기획에 따른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무차별 학살에도 광주시민들은 평화공동체로 민주화의 역사를 썼다'는 전 보안사 수사관과 미군 정보요원의 증언이 5·18 진실 규명의 동력을 이끌지 관심이 쏠린다. 1980년 5월 정보·수사관이었던 이들이 39년 만에 밝힌 고백들은 미 기밀해제 문건·군 기록물 확보, 추가 증언, 진상 조사 방향 제시의 마중물이 될 것이란 기대를 모은다.
○··· 다만 증언에 대한 역사적 검증, 미해결 과제 규명, 추가 핵심 증언을 도출키 위한 사회적 분위기 조성, 진상조사위 출범, 사살 명령 입증과 사법적 판단 등은 풀어야 할 숙제다. 16일 5·18 기념재단에 따르면, 505보안부대 전 수사관(전남북 비상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국보위 특수부 부장) 허장환씨와 미군 501정보여단 전 정보요원 김용장씨는 지난 사흘간 광주·서울에서 신군부의 만행을 증언했다. 이들의 증언은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정권 찬탈용으로 광주진압을 기획해 학살을 자행했지만, 시민들은 평화 시위로 민주주의를 지켰다'는 게 골자다.
이들은 경험과 정보·첩보 취급·보고 내용을 토대로, 보안사가 특수공작으로 광주시민을 폭도로 몬 뒤 무력 진압을 정당화하고 관련 증거를 철저히 왜곡·은폐한 정황도 다시 조명했다. 1980년 5월21일 광주를 찾은 전두환씨의 사살 명령, 5·18 기획과 역사 왜곡의 주체인 보안사령부의 행적, 가매장 희생자 재발굴 뒤 국군통합병원서 시신 소각 의혹, 헬기 사격 경위, 군 비밀조직의 기록물 은폐, 계엄군의 성폭행 등도 고백했다.
◆ 518 개엄군만행을 폭로한 김용장·허장환씨
▷ 5·18 연구진은 /국군이 국민을 무차별 학살한 국가폭력 재입증 /신군부의 집권 음모·폭압에 맞선 광주시민의 의로움 조명 /주한미군 정보관 광주서 첫 증언 /진상 규명과 추가 증언·자료 확보 동력 /역사 왜곡 근절 계기 등을 '이들의 증언 의미'로 꼽았다.
◇ 1980년 광주 제1전투비행장서 파견 근무했던 군인 4명 중 유일한 한국인이었던 김씨가 항쟁 열흘간 첩보 40건을 보고했고, 미 육군 정보보안사령부와 국방정보국 검증을 거쳐 5건이 백악관까지 보고된 점과 김씨가 경험·추론을 구분해 증언하는 점 등으로 미뤄 비교적 신뢰도가 높다는 설명이다. <△ 사진:>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군 501정보여단 정보요원과 505보안부대 수사관으로 활동했던 김용장·허장환씨가 14일 오후 광주 서구 5·18 기념재단 대동홀에서 계엄군의 만행을 증언하고 있다.
○··· 또 광주의 공식석상에서 뒤늦은 고백을 사죄한 김씨와 오월 영령과 시민에 대한 미안함을 밝힌 허씨가 '5·18 진상 규명에 적극 동참하겠다'고 공언한 만큼, 핵심 의혹을 밝히는 데 탄력을 줄 것이란 분석이다. 이들은 지난 14일 광주 증언회에서 "보안 각서보다 광주의 진실이 더 중요하다. 광주항쟁 전체를 본 정보관과 계획을 세워 수행했던 수사관의 증언은 2개의 바퀴와 같다"고 했다. 오월 어머니들에게 꽃을 전해받고 포옹을 했던 이들은 "광주라는 말만 나오면 하염없이 눈물이 나온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전남북 비상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국보위 특수부 부장)으로 활동했던 허장환씨가 15일 오후 광주 서구 국군통합병원 옛터에서 5·18 희생자 시신이 소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원 보일러실 소각장과 연결된 굴뚝을 가리키고 있다. <△ 사진:> 5·18 희생자 소각 의혹 국군통합병원 굴뚝
○··· 증인들이 살아있을 때 광주항쟁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한다"며 진실 규명에 강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김씨는 우리 정부와 협조해 자신이 작성한 5·18 보고서 원본 이관을 미국 정부 측에 요청할 계획이라고도 밝혔다. 김씨는 특히 "국가권력의 만행에도 광주시민들은 무기를 스스로 수거·반납했다. 치안 부재 상태인 열흘 동안 단 한 건의 금은방·은행 털린 사건이 없었다. (평화로운 항쟁으로)신군부에게 빌미를 주지 않았다"며 민주화의 물꼬를 튼 광주시민의 의행을 강조하기도 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전남북 비상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국보위 특수부 부장)으로 활동했던 허장환씨가 15일 오후 광주 서구 국군통합병원 옛터에서 5·18 희생자 시신이 소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원 보일러실 소각장을 가리키고 있다.
○··· 조진태 5·18 기념재단 상임이사는 "항쟁을 관찰하고 정보를 취합·검증·보고했던 김씨의 증언 자체가 의미가 있다. 보안사로부터 음모를 지시받고 실행했다고 밝힌 허씨는 주요 상황과 관련한 육하원칙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어 "(이들의 증언이)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며 "정부 차원의 미 기밀문서 확보와 5·18 진상조사위 출범이 시급하다"고 역설했다. 이재의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도 "훼손·폐기된 우리 군의 자료에 비해 미국의 정보는 상대적으로 보존돼 있을 것"이라며 "핵심적인 증언들이 미 보고서로 입증된다면, 감춰진 역사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다"고 말했다.
◇ 5·18민주화운동 당시 505보안부대 수사관(전남북 비상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 국보위 특수부 부장)으로 활동했던 허장환씨가 15일 오후 광주 서구 국군통합병원 옛터에서 5·18 희생자 시신이 소각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병원 보일러실의 '보안목표'를 가리키고 있다. 방호시설로 보기 어려운 보일러실이 보안사가 지정하는 '보안목표'로 지정됐다.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는 "미국 (5·18 관련)보고서는 왜곡·조작될 경로가 없다고 본다. 또 김씨가 추후 보고서를 확보한다면, 내용을 검증할 수 있다. 증언 자체도 의미가 있었지만, 증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확대 해석이나 정쟁의 도구로 삼아선 안 된다"고 설명했다.
김 교수는 "다만,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들을 검토하고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가능성을 열어두고 접근하면 진상 규명 활동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이들이 적극 증언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sdhdream@newsis.com
○···신대희 기자 = 15일 육군 2군 사령부 '광주권 충정작전 간 군 지시 및 조치사항' 1980년 5월23일자 문건을 보면, '閣下(각하)께서 Good idea(굿 아이디어)'라는 손글씨가 적혀 있다. 해당 문건에 적힌 '각하'는 전두환씨를 지칭한다. 전씨가 5·18 진압작전의 기획단계에서부터 개입해 최종 승인을 했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사진 = 경향신문 제공) photo@newsis.com
▷ 당시 전남대 3학년, 도청 상황실에 있던 김현경씨 체포 대비해 일부 내용 한글 자모 등 암호로 표기 “5·18 왜곡 맞서 당시 순수했던 열망 전하고 싶다”
◇ “그때 공포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예비역 육군 중령 김현경(59·서울)씨는 15일 <한겨레>와 만나 계엄군 진입 전날 전남도청 안의 비장한 분위기를 이렇게 증언했다. 당시 20살이었던 그는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학생이었다. <△ 사진:>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판 ‘안네의 일기’를 쓴 김현경씨.
○··· 그는 공수부대가 퇴각한 뒤 시민군이 도청을 장악하자 상황실에 배치돼 거리방송, 성명 낭독, 원고 준비 등을 맡았다. 그는 숨 가빴던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체험을 대학노트에 빼곡하게 정리했다. 전체 40여쪽 가운데 절반가량은 시민군 지도부가 활동했던 전남도청 상황실의 상황이 담겼다.“어디서 전투가 벌어졌는지, 시신이 몇구나 발생했는지, 구급차는 출동했는지 등을 챙기느라 숨 가쁘게 돌아가는 낮 시간에는 기록을 할 수 없었어요.
◇ 통행금지 직전에 친구 집이나 친지 집에 찾아가 자면서 그날 중요한 일들을 정리하려 했지요.” 그는 체포됐을 때 남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자신만 알 수 있는 암호로 내용을 적었다. <△ 사진:> 1980년 5월23일의 일기와 발각에 대비한 표기 체계.
○··· 민감한 부분은 한글 자모 24개를 아라비아 숫자와 알파벳 소문자로 변환해 표기했다. 중간에 글자를 빼거나 순서를 바꾸어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도록 체계를 만들었다. “옆 사람 이름조차 묻지 말라고 했어요. (계엄군 편의대 활동 등으로) 전남도청 안에서 독침 사건이 발생하는 등 누구도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죠. 그래서 기록을 한다는 건 엄두를 낼 수 없는 일이었는데….” 초등학생 때부터 일기를 써온 그는 누군가 역사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느꼈다.
◇ 그가 39년 동안 보관하다가 이날 내놓은 기록은, 나치 치하의 암스테르담에 은신했던 가족의 생활을 일기로 쓴 유대인 소녀 안네 프랑크를 연상하게 했다. <△ 사진:> 김현경씨가 작성한 1980년 5월 열흘 동안의 기록 중 일부.
○··· ‘광주판 안네의 일기’에는 개인적인 시위 경험과 시민군 지도부의 활동이 깨알 같은 손글씨로 정리되어 있다. 그는 “시위 대열에 들었다가 계엄군에 쫓겨 두세차례 체포의 고비를 넘겼다. 충장로 가정집에선 화장실이 비좁아 안방 장롱 속에 숨었다가 살아났고, 광주극장 앞 관음사에선 미나리를 다듬고 있던 보살들이 몸뻬(헐렁한 일 바지)를 입혀주는 바람에 위기를 넘겼다”고 회고했다.
◇ 상황실에 들어갔을 땐 같은 과 1년 후배가 ‘도청에 있으면 죽는다’며 자꾸 나오라고 했지만 끝내 고집을 피웠다는 일화도 전했다. <△ 사진:> 김현경씨는 1980년 전남대 정치외교학과 3학년 학생으로 전남도청의 시민군 상황실에서 상황 전파 등의 활동을 했다.
○··· 또 그는 집회 발언을 정리한 메모, 미국이 항모 2대를 파견했다는 기대, 계엄군 진입에 대한 두려움, 시민군의 결연한 의지, 수습파와 항쟁파의 치열한 갈등, 주먹밥을 나르던 여성들의 헌신 등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는 시민군 지도부가 꾸려진 23일 오전 ‘대학생은 모여달라’는 말을 듣고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나흘 동안 상황실과 기획실을 오가며 거리방송, 성명 낭독, 원고 준비 등 임무를 수행했다. 계엄군의 진입이 임박하자 시민군 지도부는 26일 저녁 ‘나이 어린 학생과 여성은 집으로 돌아가 우리의 진실을 알려달라’고 등을 떠밀었다.일기에는 눈물을 머금고 도청을 떠난 이후 그의 안타깝고 부끄러운 심경을 표현한 대목이 여러 차례 나온다.
◇ 전두환 글씨 비석 철거하라/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을 하루 앞둔 17일 경기도 포천시 소흘읍 국도 43호선 축석고개에서 민중당 포천시 지역위원회 당원들이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에 붉은 페인트를 넣은 계란을 던지며 호국로 기념비 철거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사진: 1987년 완공된 국도 43호선의 도로명은 ''호국로''이며, 기념비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 친필 글씨로 호국로(護國路)를 한자로 새겼다. 포천/연합뉴스
○··· “부끄러워 부끄러워 태양을 바로 볼 수 없다. 죄스러워 죄스러워 고개를 쳐들고 다닐 수 없다. 차라리 돌아앉지 않은 강산이 눈물겹다.” 도청이 함락된 뒤 그는 용케 체포를 면했고 일기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는 “친분있는 선배들을 따라다녀 학생회나 동아리의 기록에 남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회고했다.그는 계엄군에 대한 반감이 높았던 광주에서는 드물게 여군 장교에 지원했다. 해병대 출신인 오빠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장교가 되는 꿈을 꾸어왔기 때문이다. 면접관이 “80년에 시위를 했느냐”고 물었다. 망설이던 그는 “그때 광주시민은 모두가 시위를 했다”고 답했다.
83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임관했다. 90년 여군병과가 해체되자 정보로 돌아 여군 최초로 전방군단 정보대대장, 사단 정보참모 등을 지냈다. 2012년 중령으로 30여년 동안의 군생활을 마감했다. 예편 뒤인 2016년 경기대에 ‘한국 여성의 국방참여 확대방안에 관한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그는 “군대에 있을 땐 광주에 관심을 두기 어려웠다. 지금 극렬해진 5·18 왜곡에 마음이 많이 아프다. 그때 순수했던 한 사람 한 사람의 열망과 행동을 전달해 진실의 조각을 맞추는 데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했다.글·사진 안관옥 기자
▷“긴장 속의 최전선 밤낮없이 살피고/ 떠나는 그날까지 땀 젖은 전투복/ 저기는 지뢰지대 위험하니 내가 간다/ 지휘관의 그 외침 부하 위한 사랑이네/ 고귀한 그 정신 길이길이 받들어/ 사나이 붉은 가슴 나라 위해 바치리” 육군에서 만든 ‘위험하니 내가 간다’라는 제목의 군가다.
◇ 이종명 자유한국당 의원이 2000년 6월 전방 수색부대장 시절 후임 설아무개 중령과 함께 정찰에 나섰다 설 중령이 지뢰를 밟고 쓰러지자 병사들에게 “위험하니 내가 간다”는 말을 남기고 홀로 설 중령을 구하러 들어갔다는 영웅담을 담고 있다. 이 의원도 당시 지뢰를 밟는 바람에 발목을 잃었으나, 끝까지 병사들의 접근을 막은 채 소총과 철모를 끌어안고 지뢰밭을 기어나오는 투혼을 발휘했다고 한다. <△ 사진:> 김용장 전 미군 정보부대 군사정보관(오른쪽)이 13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계엄군의 집단발포 직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광주에 직접 내려왔다”고 증언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 이 의원은 그날 이후 ‘슈퍼 히어로’가 됐다. 살신성인을 행한 참군인이라는 칭송이 쏟아졌다. 보국훈장, 올해의 육사인상, 대통령 표창이 이어졌다. 그의 군인정신을 새긴 탑이 세워지고, 그의 전우애를 그린 뮤지컬이 만들어졌다. 신체장애를 입은 군인이 계속 군에 복무할 수 있도록 법이 개정되기까지 했다. 2015년 9월 전역한 이 영웅은 6개월 뒤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새누리당의 비례대표 2번으로 금배지를 단다. 최근 <문화방송>(MBC)이 그의 영웅담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 의원에게 ‘가짜 영웅’이라는 딱지까지 붙였다. 이 의원이 당시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는 수칙을 어기고 수색로를 벗어났으며, 그가 밟은 지뢰에서 튀어나온 파편이 오히려 설 중령에게 2차 상해를 줬다는 것이다.
◇ 유강문 선임기자
○··· 수색부대장 현임과 후임이 모두 수칙을 어겼을 뿐 아니라 차례로 지뢰를 밟아 부대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을 초래했으니 훈장이 아니라 징계를 받아야 마땅했는데도, 군이 조직적으로 공적을 조작했다는 지적이다.군에서 칭송한 영웅이 훗날 논란에 휩싸인 예는 적지 않다. 군사정권 시절 교과서에는 ‘심일 소령과 육탄 5용사’의 신화가 실렸다. 한국전쟁이 터진 1950년 6월25일 북한군이 자주포를 앞세우고 춘천으로 진격해 오자 심 소령(당시 중위)이 특공대를 꾸려 수류탄과 화염병으로 자주포 탱크를 폭파했다는 영웅담이다. 이날의 공적으로 심 소령은 한국군 최고 훈장인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전쟁영웅’이 됐다. 국가보훈처가 2011년 ‘이달의 6·25 전쟁영웅’을 제정했을 때 첫번째로 꼽은 게 그였다.그러나 당시 심 소령이 소속돼 있던 연대에서 중대장을 지낸 이대용 전 베트남 주재 공사가 2016년 “심 소령의 신화는 거짓”이라고 증언하면서 논란이 불거졌다.
그는 “춘천 전투에서 심 소대장은 육탄돌격을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도망을 갔다. 그 바람에 대전차포 1문을 북한군에게 넘겨줘야 했다”고 말했다. 1981년 당시 육군본부가 ‘탈주병에게 훈장을 주는 게 말이 되느냐’는 진정서를 접수하고 조사를 벌여 심 소령의 공적을 허위로 결론내렸다는 증언까지 보태졌다.가짜 영웅 논란에 휩싸인 이 의원은 이른바 ‘5·18 망언’으로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5·18은 애초 폭동이었는데,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40년이란 세월이 지나면서 민주화운동으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그가 진짜로 참군인이었다면 시민을 향해 총을 쏜 군의 역사를 누구보다 부끄러워했을 것이다. 이 의원의 5·18 망언은 그가 참군인이 아니었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가짜 영웅은 그를 만들어낸 집단의 보호를 받는다. 진실이 밝혀지면 그들 모두가 한순간에 거짓말쟁이가 되기 때문이다. (...)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