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베짱이의 하루
직장 다닐 땐 직장이 목숨 같아 그만두면 죽는 줄 알았는데 퇴직하고 전혀 연고도 없던 강화도에 오니 사는게 꼭 베짱이 같아 노래를 감추기 힘들다. 아침에 일어나 상쾌한 소나무 숲 한바퀴 돌고 아침은 간단히 밭에서 기른 채소 먹고 책 읽고 글도 쓴다.요즘은 대학 중용을 공부하는데 나이들어 보니 경전처럼 달콤한 것이 없다. 누가 말씀을 꿀처럼 달다 했는데 먹어보니 정말 그렇다. 어디서 발표하고 가르칠 것도 아니고 시간에 쫒겨 허둥대는 것도 아니고 그저 빈둥거리며 느긋하게 읽는다. 여기 와서 예수 부처 공자등 옛사람들 하고 엄청 친해졌다. 마음의 벗이 따로 없다. 일부러 시간 약속 할 필요 없고 아무 때나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되니 참 좋은 친구들이다. 가끔 말귀를 못알아 듣기도 하는데 그냥 넘어가도 뭐랄 사람이 없다. 나이들어 심심한 사람들에겐 이들을 친구 삼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금요일은 제일 바쁜 날이다. 날마다 하는 일과지만 토끼가 세끼를 여덟마리 낳아(처음엔 잘 안보여 네마린 줄 알았다) 풀 뜯어 주는 시간이 길어졌다. 오늘은 차도 없어 토끼장까지 풀뜯으며 한시간 정도 걸었다.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여기와서 가장 열심히 한 일은 토끼기르는 일이다. 지난 100여일간 매일 적어도 한시간은 토끼를 위해 살았다. 말 그대로 생명과 더불어 생명을 위해 사는 것이 얼마나 거룩한 일이고 지순한 기쁨인지를 알았다. 토끼 새끼 낳은 날은 아들 딸 태어난 날만큼 기뻣다. 새끼들이 어찌 빨리 자라는지 20여일 지났는데 뛰어다니며 풀을 먹는다. 그 앙징맞은 귀여움은 우리 손자 못지 않다. 사람은 어디서 기쁨을 얻나? 기쁨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
닭들도 어찌 빨리 크는지 오늘 드디어 수탉이 동네 떠나가도록 큰소리로 꼬기요하고 울었다. 다섯 번이나 연달아 우는데 백년 묵은 시름(이태백의 과장법을 차용한 말임)이 떠내려 갔다. 벗님들, 이제 저는요 닭우는 소리를 들으며 삽니다.
닭장 치우고 나니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간단히 씯고 은행나무 사이에 메놓은 해먹에 눕는다. 흔들흔들 혈구산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다. 옆에는 5월에 심은 고구마 잎들이 푸르르고 은행나무 사이론 노란 꾀꼬리들이 날아 다닌다. 하늘은 태풍 지난 후 아기 눈망울처럼 맑다. 눈 코 귀 촉감 온몸이 호강을 한다. 깨어 있음이 이런 것인가?
스르르 잠들려 하는데 오형이 일 끝내고 와 한잔 하잔다. 돈벌기 싫다고 일주일에 한번만 일하고 가난과 여유를 즐기며 사는 기인! 평생 술값은 내가 내기로 했는데 싼 막걸리만 마셔 다행이다.우리 대화는 주로 녹색 얘기다. 녹색을 실천한다고 채식하고(나는 가리는게 없다) 지붕에서 빗물 받아 쓰고 유기농한다고 고구마 밭에는 비닐도 안 씌우고 논에는 우렁이가 가득하다. 요즘은 벌을 살려야 한다고 벌치는 법 배우려고 공부를 한다. 오형 만나면 늘 떠들던 입이 부끄럽다. 그러나 어쩌랴,나는 말쟁이니.
매주 금요일이면 우리 집에 이곳 농민 자녀들인 고3 학생 셋이 와서 영어를 배운다 평생 영어 선생 했지만 영어는 제대로 가르친 적이 없고 그저 사람답게 사는 얘기를 했는데,신기하게도 정신이 깨어난 학생은 공부도 잘한다. 여기 시골 아이들은 기초가 약해 그게 통할지 의문이지만--공부 좀 못해도 착하게 살면 그게 행복이지.우리 부모들이 이런 생각을 하면 세상도 아이들도 자신도 다 좋을텐데. 그런데 오늘은 방학을 해 오지 못한다고 연락이 왔다.않오니 보고 싶기도 하고 좋기도 하고,인간이란--
금토일엔 심도학사에 강의가 있는 날이다. 별일 없으면 아내와 개근을 했는데 오늘은 수강생이 만원이고 내가 이미 들은 강의라 오지 않아도 좋단다. 노는게 일인데 금토일의 휴가라니. 이런 저런 즐거운 공상을 하는대 멀리 목포에서 친구가 강화로 찾아가도 되냐고 전화가 왔다. 홀해 회갑이라 모처럼 가족들이 모였는데 회갑기념으로 세 딸들과 수련회를 할 생각이니 딸들에게 좋은 말씀을 해 주란다. 참 기이한 회갑행사다. 나는 있느니 시간뿐이다. 뭐든지 해달라면 공짜다.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무엇인들 못하겠는가?
첫댓글 참 재미있게 사십니다. 부럽습니다.
어떡하면 그렇게 살수있는지요? 세상에 눈뜰때부터 그렇게 살고싶었는데,아직도 허우적거립니다.
.............!!!!!!!!!!!
부럽습니다^^
득도하셨습니다...ㅎㅎㅎ 자유인이시군요...부럽습니다. 정신이 깨어남에 대해 묵상거리 안고 갑니다. 좋은 글 모셔갈께요. 감사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계십니다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