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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비서실장 출신이 밝히는 김대중의 실체 | |
518원흉은개대중 (2007.08.03) read 476ㅣ 프린트하기 | |
번호 : 190821 작성자 : 역사학도 작성일 : 2007/08/03 조회 : 6 찬성/반대 : 1/0 점수 : 3 김대중이 5월 19일까지 직선제 개헌안 취소하라 협박 ☞ 김대중 비서실장 출신이 밝히는 김대중의 실체 71년부터 87년까지 김대중의 경호담당 비서로 있다가 그에게서 실망을 느끼고 결별한후 김대중의 비도덕성과 표리부동함을 비판한 (동교동 24시)란 책을 낸 함윤식씨가 90년대 중반에 모 언론사와 가진 인터뷰 내용. ☞ 80년 5월 11일 정읍에서 선동 연설 - 김대중씨는 80년 5월 11일 전북 정음에서 열린 동학제에 참석하여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연설을 한 것으로 아는데 이날의 연설 내용과 분위기를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으로서는 잘 기억나는 것은 없으나 대략 동학혁명이 처음부터 폭력주의가 아니라 상소를 하고 주의 주장을 건의 하였으나 관철되지 않아 봉기한 것으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마찬가지 이며. 박정권 18년간 가장 큰 과오는 신라통일 이후 지방색을 다시 불러일으킨 것 이라고 하는 등 선동적이고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김대중씨는 그날 시간관계상 현지 인사들과 따로 회합한 사실은 없으나 연설이 끝나고 청중들이 귀경하는 김대중씨의 차량행렬 따라 시위와 구호를 외치는 등 분위기는 한껏 고조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5 · 18 전 학생대표 등 만난 김대중씨 - 80년 계엄사 발표에 따르면 김대중씨는 정동년씨에게 광주사태를 일으키도록 지시하고 거사 자금으로 5백만원을 주었다고 했는데 김대중씨는 그 후 이 사실을 부인하고 88년 13대 국회 개원 직후 대표 연설에서 정동년씨와는 처음부터 전혀 모르는 사이이고 미국 갔다와서 처음 만났다고 하여 그와의 관련설을 전면 부인 했는데요. 그러나 당시 군 검찰관으로 재판에 관여했던 정기용 변호사는 88년 11월의 국회 청문회에서 김씨가 체포된 후 모든 사실을 순순히 시인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정선생이라 부르며 정선생, 날 살려만 줘요. 난 죽지만 않으면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소.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정선생의 은혜는 꼭 갚겠소 하며 통사정을 했다고 하는데. <그 얘기는 저도 후문으로만 들었습니다. 80년 재판은 김대중씨와 다른 피고인들이 분리되어 받았기 때문에 저도 김대중씨의 재판 광경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 기억으로는 정동년씨는 분명히 5 ·18 이 나기 전 동교동을 두 번 다녀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방안에서 두 사람만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또 거사 자금이 전달 되었는지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동년씨 뿐만 아니라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 10여 명이 5.18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동교등을 다녀간 사실도 있습니다.> ☞ 김대중 과격노선 군 개입 불러 - 그렇지만 상식적으로 5백만원을 줬다고 해서 그런 어마어마한 사태를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80년 당시 김상현, 조연하씨 등 측근 참모들과 많은 사람들이 너무 강경 일변도로 나가면 군부가 개입 할 빌미를 줄 수 있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있는게 좋겠다고 했으나 김대중씨는 이를 일축해 버리고 장외 투쟁으로만 치달았습니다. 김대중씨는 80년 3월 26일의 YMCA 연설을 시작으로 하여 한신대, 동국대 등에서 선동적인 연설로 일관하여 집회가 끝나고 나면 데모로 연결되는 것이 보통 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김씨 측에서 동원한 청중들이 단단히 한 몫을 한 것은 물론입니다. 이들은 연설도중 군데군데에서 옳소와 박수를 연발하며 분위기를 잡고 청중들을 흥분 시켰습니다. 특히 YWCA 집회에서 김대중씨는 미국 대통령 토마스제퍼슨이 한 민주주의는 그 나라 국민들의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인용하여 과격하고 선동적인 분위기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연설내용은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책자로 출간 되기도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5 ·18 이 누군가의 각본에 의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으나 5 18 이 일어 나도록 상황을 몰고 간 사람은 김대중씨 라는 사실입니다. 최근에 전두환씨도 검찰에 제출한 답변서에서 밝혔지만 저는 그때 김대중씨의 과격한 노선이 없었다면 군이 개입할 명분은 없었다고 확신합니다. - 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출신자들 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 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 전복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 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 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 승낙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 5월 19일까지 시한부 선전포고 - 5월 12일에는 북악파크호텔에서 한승헌, 이문영, 이해동, 예춘호, 서남동, 문익환, 심재권, 계훈제, 김종완, 이현배, 장기표씨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전략회의까지 마친 후, 최규하 대통령 정부에게 비상계엄의 즉각해제, 신현확 국무총리의 퇴진, 정부 개헌 심의위원회의 즉각해체 등을 요구하고, 5월 19일까지 확답을 하지 않으면 실력 행사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등 공공연히 선전포고까지 한 걸로 되어 있는데요. <10만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학생데모의 절정을 이루었던 5월 15일의 서울역앞 집회 때 동교동은 크게 고무되어 있었고 김대중씨의 비서들은 모두 다 서울역으로 달려 나가 동교동에는 단 1명의 비서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통해 현장의 상황은 속속 동교동으로 보고 되었습니다. 동교동에는 저만 남아 쉴새없이 걸려오는 이들의 전화를 받기에 바빴습니다.> - 88년에 서울대 교수로 있던 노재봉씨가 광주사태는 김대중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기술 이라고 말하여 큰 파문을 일으킨 적이 있는데 과연 노씨가 말한 김대중씨의 노련한 기술 이란 무엇을 염두에 두고 한 말 같습니까. <글쎄 저도 노재봉씨 생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김대중씨가 근본적으로 의회 민주주의자 라기보다는 민중혁명에 의한 집권을 지향하는 그의 정치노선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김대중씨는 그 때 전국적인 민중봉기가 일어나면 군부타도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김대중씨의 과격한 정치노선은 80년 3월 26일 YWCA 에서 행한 연설 전문을 기록한 민족혼과 더불어 라는 소 책자에 자세히 나타나 있습니다.> ☞ 고정간첩과도 만난 김대중 - 김대중씨는 해방 후 좌익활동을 한 사실이 있다고 알려져 있고 본인도 스스로 밝힌 적이 있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본 김대중씨의 사상적 성향을 판단해 보신적이 있으신지요. <사실 그때는 특별히 신경을 쓰지않아 잘 몰랐지만 지금와서 어렴풋이 생각해 보면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김대중씨 말로는 자신은 해방후 呂運亨씨 산하의 건국 준비위원회에 가입 하면서 정치활동을 시작 했는데 혈기왕성한 청년시절에 아무것도 모르고 그길만이 애국하는 길이라 믿고 뛰어 들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아 2년만에 탈퇴했다고 했습니다. 정계입문을 좌익단체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그 후로도 김씨의 정치 행적에서 사상적으로 냄새가 좀 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이건 제가 모 중진 화가로 부터 직접 들은 얘긴데, 김대중씨는 67년 6 ·8 선거 때 임자도에서 고정간첩으로 활동하던 정태묵과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진 화가는 현재도 살아계신 분인데 그분은 원래 정태묵의 동생 정태일과 절친한 친구여서 선거기간 중에 정태묵의 집에서 머문적이 있는데 그 때 그 집에서 김대중씨가 정태묵과 두어 차례 만나는걸 보고 들었다고 합니다. 정태묵과 김대중씨는 목포상고 선후배 관계 였습니다. 물론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자금을 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만났던 것 만큼은 분명하다고 합니다. 그 후 정태묵은 임자도를 거점으로 하여 활동하는 고정간첩 임이 드러나 체포되어 처형 당했는데 북한을 10여 차례나 왕래한 사실이 있다고 합니다.> 2005/06/28(23:41) http://cafe.empas.com/518/bbs/b3/read.html?asn=35¬ice=0&pno=2&oby=2&odir=0&fd=0&bt=16&ac=50&rurl=list.html%3Fpno%3D2%26oby%3D2%26odir%3D0%26ac%3D50%26fd%3D0 _____________ 광주사태 당시 시위구호는 "직선제 개헌 반대" 혹은 줄여서 "개헌 반대"였다. 아래 사진은 김대중이 직선제 개헌 반대 과격시위 선동하여 취소된 개헌공청회 관련 기사 김대중 일당의 5월 19일까지 시한부 선전포고 만기일 5월 19일 신현확 총리 내각 사퇴. "최규하 물러가라" 시위구호 압박에 최규하 대통령도 곧 하야를 단안할 것이라는 뉴스도 함께. 광주사태의 진실: 영화 "화려한 휴가" 실제인물 사진전 http://blog.daum.net/sionvoice/10753520 광주사태 당시 광주 31사 한동석 중위의 이어지는 댓글 증언 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 ====================================================== ====================================================== 위에 역사학도님의 글을 보니 다른 참고할 만한 글이 생각납니다. 지만원씨가 쓴 "제3의 4.19 광주반란의 배후는 김대중" 이라는 글과 중앙망국위란 필명으로 독립신문에 "[광주사태] 김대중이가 김일성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했을까?" 라는 글을 같이 참조하세요. + + + + + + + + + + + + + + + + + + Name 지만원 Subject 제3의 4.19 광주반란의 배후는 김대중 장기표, '슨상님 화염병으로 4.19와 같은 무정부 상태를 만들어 드릴테니 대통령 하십시오' 1980.3.26일, YWCA 강연회에 나가 김대중은 이렇게 강연했습니다.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국민의 피를 먹고 자란다. 민주주의는 국민의 피와 땀과 눈물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말은 결코 슬러건이 아니라 진실이다” 5.18 수사자료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1980.4.10일 20:00경, 북악파크호텔 501호실,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고은태, 김종환, 한완상, 심재권, 등 국민연합 10여명의 간부들이 북악파크호텔에 모여 대권경쟁에서 김대중이 이기는 방법을 논의했다. 신민당에 들어가면 지지기반이 약하다는 판단 하에 ‘민주화운동’을 돌파구로 독자적인 장외투쟁으로 승부를 벌이기로 했다. ‘민주화운동’의 구호는 ‘계엄령해제’ ‘개헌포기’ ‘유신잔당포기’ ‘정치일정단축’ ‘구속자석방’ ‘학원자유’ ‘언론자유’ 등이었다.” “먼저 학생시위를 유도하고, 분위기를 띄워 학생시위를 학교 밖으로 확산시켜 시민들의 호응을 유도하고, 여기에 국민연합의 예하조직인 민주헌정동지회, 한국정치문화연구소 등이 호응하여 대대적인 반정부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이렇게 하면 최규하 정부가 궁지에 몰릴 것이며, 국민연합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학생집회부터 대대적으로 선동하기로 했다.” “복학생 이현배를 총무국장, 장기표를 조직국장, 심재권을 홍보국장에 임명하는 등 복학생 3명에 선동임무를 부여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선거일정으로서는 차기 대통령에 당선될 가능성이 없으므로 차기를 잡기 위해서는 장외투쟁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5.8일, ‘국민회의’가 민주화촉진선언문을 발표하자 전국총학생회장단이 반정부 폭력시위를 결정했다. ‘민주청년협의회’ 회장인 조성우는 ‘국민연합’의 중앙상임위원장인 문익환의 지시를 받고,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를 열어 행동지침을 결의했다.” “조속한 시일 내에 대규모 가두시위를 전개한다, 각 대학은 학교별로 출발하여 광화문 네 거리를 점령하고 중앙청을 비롯하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령한다. 데모 저지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각 대학별로 각목, 돌맹이, 화염병을 준비한다.” 회의가 끝난 후 장기표, 심재권은 국민회의에 보고서를 제출했습니다. “5월8일, 민주청년협의회 확대간부회의의 결정에 따라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전국적으로 동시에 폭력시위를 벌여 정부 중요관서를 점거할 계획이며 이렇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어 차기정권까지 장악할 수 있다” 서울대, 연대, 이대 등 전국 39개교에서 시위를 열었고, 20여개 대학에서 농성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했습니다. 5.9일, 서울대, 연대, 고대, 경희대, 동국대, 홍익대, 외대, 단국대, 숙대, 인하대 등에서 야간횃불시위가 열렸습니다. 5.10일, 서울 대 단과대학들이 철야 시국성토대회를 열고 11일까지 농성하기로 했다. 고대, 연대. 한양대, 단국대, 서울산업대에서도 야간농성을 벌였습니다. 5.11일, 고대, 연대, 성대, 외대, 경희대, 단대, 건대, 세종대, 숙대, 이대 등에서 교내시위를 벌였습니다. 5.12.17:00시, 국민회의 지도부, 김대중, 문익환, 예춘호, 이문열, 한완상, 한승현, 서남동, 이해동, 심재권, 장기표, 이헌배, 계훈제 등이 북악파크호텔에서 또 다시 회동하여 투쟁방향을 논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오고 간 보고와 지시 내용은 이러했습니다. 장기표-심재권: “전국 26개 대학의 학생회장단 45명이 5.11.15:00시부터 5.12.09:00시까지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철야회의하여 앞으로 잠정적으로 교내시위만 한다. 휴교령 발동시에는 단호히 투쟁을 전개한다. 계엄령해제와 정치일정의 명백한 발표를 촉구한다. 학원사태 해결을 위한 정부와의 대화를 위하여 국무총리 면담을 촉구한다는 사항을 결의하였으며, 이어 5.16. 전국대학학생회장단은 이화여대에서 회의를 열러 새로운 투쟁방법을 협의키로 하였는데 앞으로 학원시위가 확산될 것이 전망됩니다” 김대중: “ 과도정부의 실권을 잡고 있는 유신잔당들이 민주화에 역행하여 정권을 계속 잡으려는 음모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빈독재 민주회복을 실현하는데 그 목적이 있겠지만 궁극적으로 반민주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본쇄한 다음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 서울대, 연대, 고대 등 명문대학의 동정을 잘 살펴보라” 장기표: “각 대학은 일정한 날을 정하여 동시에 각목과 화염병을 사용한 폭력시위를 과격하게 벌여 저지하는 과정에서의 희생을 각오하면서 민중의 호응을 얻어 정부중요부서를 점령하게 되면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가 되는 데 이를 계기로 민주세력의 구심인물인 김대중 선생을 사태수습인물로 내세워 학생과 민중을 설득하면 정권장악이 가능하고 사후 수습으로서 민주제도연구소를 주축으로 과도정부를 이끌면 차기 정권까지 잡을 수 있습니다. 저는 심재권과 함께 각 대학 학생회장단에 영향력이 있는 복학생들을 규합, 학생폭력시위를 주도하겠으니, 선생께서는 이문영에게 과도정부구상을 미리해 두시기바랍니다” 김대중: “알았다” 광주사태의 기폭제 김대중의‘국민회의(민주화회복국민회의)’ 1973년 8월 8일의 일본에서 반국가활동을 벌이던 김대중을 납치해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국제문제로 비화되자 김대중은 검열에 걸리지 않을 단어만 선별하여 이 사건이 중앙정보부가 주도하였다는 것을 널리 알렸고, 이를 근거로 재야의 유신반대 투쟁이 힘을 얻게 됐습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가 교내 4.19기념탑에서 비상총회를 열고, 중앙정보부 해체와 김대중 납치사건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자신감을 얻은 각 대학 학생들은 조직적인 연대 투쟁을 계획하여 이듬해 봄부터 활동을 개시했습니다. 1974년 3월부터 경북대, 서강대, 연대 등에서 구국선언이 이어지고, 1974년 4월 3일 이화여대에서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명의의 '민중, 민족, 민주선언' 이 발표됐습니다. 이것이 곧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사건이었습니다. 1974년 11월 27일, 김대중은 야당, 종교계, 재야 문인, 언론인등 각계 대표 71인을 동원하여 '‘민주회복국민회의(국민회의)를 결성, 연대투쟁 기구를 창설했습니다. 이어서 김대중은 재야세력과 학생운동 세력 등 반정부 조직들을 총 망라하여 1979년3월, ’국민연합‘(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이라는 또 하나의 조직을 결성했습니다. 여기에 명령을 내리는 조직은 ’국민회의‘였습니다. 1980년 5월의 학원소요는 순전히 김대중 등이 만든 ‘국민연합’이 배후조종한 폭동으로 발전했습니다. 반정부 노선을 넘어 최규하 정부를 무너트리고 4.19와 같은 무정부상태를 만들어 김대중 정권을 창출하기 위한 소요였습니다. 국민회의’ 지도부의 결정은 곧바로 ‘민주청년협의회’에 명령으로 떨어졌고, 이어서 학생회 회장들이 동원됐습니다. 이들 학생회장들은 1980,5.1일, 대정부투쟁 방안을 의논했고, 이어서 5.9일, 서울대 등 21개 대학의 총학생회장단협의체를 구성했습니다. 이 협의체는 ‘국민회의’가 제시한 10개 항의 정치적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가두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11일, 26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서울대 학생회관에서 또 다시 회동을 갖고 5.12일부터 5.17일까지 모든 학교가 대정부투쟁을 지속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비상계엄이 선포돼 있는 상태에서도 도심지에서의 폭력 시위가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5.15일 서울역에서 학생시위대가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을 덮쳐 죽이는 장면을 본 국민, 언론, 군인들은 계엄을 물계엄이라 비아냥거렸고 계엄당국의 물렁물렁한 대응을 비난했습니다. 5.14일, 김종환 내무장관은 계엄사령부에 학생소요가 경찰력으로 대처할 수 있는 한계를 넘었으니 계엄군이 출동해 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5.14일 및 15일 양일간의 소요가 극렬함의 정도로 보나 양적으로 보아 경찰력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라 판단했습니다. 이 양일간의 학생소요는 김대중이 이끄는 국민연합 산하인 민주청년협의회의(장기표 등 복학생 조직) 사주에 따라 전국 33개 대학총학생회장들에 의한 투쟁이었습니다. 김대중의 음모: 1980.5.22 국가를 전복한다 하지만 5.22일로 계획돼 있는 소요는 국민연합 등 소위 재야정치 당체들과 전국 59개 총학생회장단회의의 연대 하에 이루어지는 대대적인 민중봉기이기 때문에 군에 의한 대대적인 대책이 절실하게 요구되었습니다. 주영복 국방장관은 5.16일, 최규하 대통령이 중동 순방에서 돌아오자마자 청와대에서 열린 시국대책간담회에 참석하여 이 사실을 보고했습니다. 5.17. 11:00시, 국방부에서 각군의 관구사령관급 이상의 지휘관 43명이 참석한 전군지휘관회의가 열렸습니다. 합참 정보국장이 국내-외 정세를 브리핑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주영복 장관이 참석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일일이 의견을 개진하게 했습니다. 군 지휘관들은 한결같이 “더 이상 혼란이 계속되어서는 국가가 망한다”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오후 2:30분까지 장장 3시간 30분에 걸쳐 진행된 회의는 극도의 사회혼란과 북괴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강력한 사전 조치만이 해결책이라는 데 만장일치했습니다. 국방장관은 이를 근거로 전국비상계엄 선포를 대통령에게 건의하기로 결론지었습니다. 주영복 장관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5월17일 오후 4시, 신현확 부총리에게 비상계엄 보고했고, 이어서 5시에 대통령 공관을 방문하여 전군주요지휘관회의결과를 보고하고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건의했습니다. 5.17. 오후 7시, 최규하는 신현확 총리를 불러 전국비상계엄확대 처리를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에 따라 5.17.21:30분, 임시국무회의가 열렸고, 이어서 23:30분, 최규하 대통령은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선포했습니다. 전국의 모든 지역이 조용해졌습니다. 유독 김대중을 호남 한풀이의 대장군으로 믿는 호남의 수도 광주에서만 소요를 일으켰습니다. 5.18은 김대중이 일으킨 것입니다. 2006.8.28 + + + + + + + + + + + + + + + + + + [광주사태] 김대중이가 김일성에게 병력지원을 요청했을까? 글쓴이 : 중앙망국위 (2006-10-29 22:56:59 ) 읽음 : 153, 추천 : 5 김대중이가 간이고 쓸개고 다 빼놓고 김정일 종노릇 하는게 정도를 지나쳐도 한참 지나칩니다. 도대체 귀신이 씌였던가 아님 도저히 밝힐수 없는 약점이 잡히지 않고는 저럴수 없습니다. 그 동안에는 김대중이 일본에서 한민통을 통해 반정부활동을 하던 시절, 북한 부수상 김병식을 만나고 김일성의 지원금을 받은일 등을 김정일이 폭로하며 김대중을 "배은망덕한 놈, 패역무도한 놈"으로 매도하자 햇볕타령을 한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이미 폭로하여 들통난 일이라면 그게 그렇게 까지 약점이 될수 있을까? 폭로 된 약점이 약점으로서의 가치가 어느 정도일까...? 김일성이 돈 받은 것을 폭로한 것은 신호탄이고 뒤에 더 큰것이 있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미치광이 처럼 맹목적으로 김정일에게 매달릴수야..... 광주사태를 김대중이 직접 선동했음을 알리는 글을 봤습니다. (참고 : 광주 반란의 배후는 김대중 http://www.systemclub.co.kr/bbs/zb4pl5/zboard.php?id=new_jee&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keyword=광주&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552 ) 광주사태때 북에서 대대병력을 광주에 보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그 동안 광주사태때 북에서 간첩들을 보냈다는 증언이나 정황증거 등은 많았지만, 대대급이라고 규모까지 밝혀가며 구체적인 내용이 들어나기는 최근의 일입니다. 광주사태 이전에 그외 지역의 소요사태도 많았습니다. 부산 마산등에도 소요가 있었지만 유독 광주만이 대형사건으로 변했습니다. 김대중은 일본에 있을때 이미 김일성과 닿는 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김일성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김일성은 생전에도 김대중이가 꼭 대통령이 되기를 바랬었습니다. 김대중은 민중봉기로 정권을 찬탈할 계획을 세우고 실행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그렇게 용감하지 못하여 정말 용감한 투사가 필요했을겁니다. 희생을 두려워 않고 앞장서 죽음을 맞이할 전사가 필요했습니다. 김일성에게 직접 병력지원을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북쪽 입장에서도 대대규모의 병력을 보낸다는 것이 쉬운일은 아닐겁니다. 보내는 일도 어렵지만 결단을 내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아무런 희망도 보이지 않는데 무턱대고 대대병력을 보내 희생 시킬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런대도 518 때를 집중적으로 광주에,,, 시기적으로 공간적으로 대대병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이는 광주에 분명히 내통하는 자가 있지 않고는 있을수 없는 일입니다. 내통세력은 김대중밖에 없습니다. 이미 김일성과의 연락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민중봉기로 정권을 찬탈할 계획을 가지고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희생을 두려워 않는 전사는 키우지 못했습니다. 김일성이한테 도와달라고 했을 것입니다. 김대중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김정일정권이 무너져서 3호청사의 비밀문건이 공개되는 것이라지요..... 그래서 김정일이보다 더 대남적화에 악을 쓰는 중. 아무튼, 광주사태는 비록 성공은 못했지만 어느 정도의 성과는 있었습니다. 이후, 80년대 대학가에서 신입생들을 단번에 쥐사꼴통으로 만드는 일을 "광주비디오"가 해냈습니다. 대학에 갓 들어간 신입생들이 선배에 이끌려 지하실에 끌려가 난생 처음보는 쇼킹한 장면을 보지요. 광주비디오. 그걸 보고나면 세상 모든게 다 거짓말로 보입니다. 전두환은 살인마, 노태우도 살인마,,,,,, 그길로 쥐사꼴통으로 직행입니다. 그때도 간첩들이 활동했다는 정황은 있었는데,,,,, 광주사태 자체를 숨기기만 했던 전두환.... 최영환 김대중은 지 야욕을 위해서는 애비도 팔아먹는 놈입니다. 출신이 비천해서 인지 끝도 모를 권력욕, 명예욕, 재물욕, 욕심이란 욕심은 한도 끝도 없는 추물, 말종입니다. 정치인 시절에도 민주투사 인양 햇지만,,,, 그는 부하들 앞에서 황제 처럼 굴었습니다. 슨상님은 존경하는 것은 불경죄에 해당하고 숭배해야 한다고... 대통이 되고서도 국무회의 한답시고,, 머리 희긋한 장관들이 대중이 말을 한마디도 안빼놓고 메모를 해야 했습니다. 국무위원이란 자들이 발언을 할려면 벌떡 일어나 대중이 한테 인사를 하고 말하고, 발언이 끝나면 대중이 한테 또 인사하고 자리에 앉고... 그런 놈이 615 전날, 김정일이 면전에서 돌아가라고 모욕을 줘도 그대로 감수할 수 밖에 없는 사연이라니... 김정일이가 김대중은 쌀을 달라면 쌀을 주고, 돈을 달라면 돈을 내놓을수밖에 없다고 했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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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런놈을 대통령 으로 모시고 ㅡㅡ 억울하고 분하다
광주사태의 진실이 정말로 빨리 밝혀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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