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이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돌. 그 70년이 흘러오는 동안 과연 우리 사회는 어느 만큼 발전해온 것일까. 전직 언론인이자 독립운동사 및 친일반민족사 연구가인 김삼웅 선생의 평가는 냉혹했다. 정치는 5공·유신 시절로 회귀했고, 경제는 사상 최고의 실업자와 빈부 격차를 보이고 있고, 일본은 군국주의화로 치닫고, 중국·미국의 패권다툼으로 인한 한반도 전쟁가능성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정치 지도자들은 아무런 해법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김 선생은 “100년 전 을사늑약이나 국치일 시절에 한반도에 암운이 크게 드리웠던 시절과 지금이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며 “우리 국민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광복 70주년의 기쁨과 감격은커녕 아픔과 안타까움이 짙다고 했다.
이런 역사 역행의 원인으로 김 선생은 “친일 역사를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그 악의 뿌리가 다시 활개를 치고 번식을 하고 연대를 이루고 있는 것”을 꼽았다. 구체적으로 “일본군 출신 딸이 대통령을 하고 있고 친일파의 아들이 집권당의 대표를 하고 있는 참담한 시대”라고 표현하며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를 직접 비판하기도 했다.
김 선생은 “일제강점기에 친일에 앞장섰던 언론 사주들이나 대학 교수들은 주류가 되어버리고, 독립운동가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어떻게 보면 헌법에 부합되는 일을 했던 정통세력은 이단시 되어버리는 역사 왜곡, 이런 것이 오늘의 비탈진 국가를 만든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는 “젊었을 때 정의감이나 분노를 잃어버리면 그 민족이나 국가, 사회는 희망이 없어진다”며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취업이 어렵고 희망이 없는 게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 10대 20대들이 도쿄에서 2.8 독립선언을 했고, 의열단도 10대 20대가 다 했었고, 3.1만세운동도 청년 학생들이 앞장섰고, 4.19혁명, 광주항쟁, 6월 항쟁도 대부분 학생들이 중심이 되었다. 요즘 청년세대들만 제일 불운하다, 희망이 없다, 그러면서 기성세대만 탓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시대적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자신의 소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알고 현실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하고, 그래서 분노할 것은 분노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개척할 것은 개척해 나가는 게 청년의 자세라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 역행 현상에 대한 안타까움과 질타는 최근 발간된 그의 저서 <역사의 절망을 넘어-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꽃자리)에도 잘 드러나 있다. 김 선생과의 인터뷰는 12일 오후 백범기념관에서 있었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
-요즘 건강이 괜찮으신지?
유신 직후인 1970년대 초,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서 기자로 일할 때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을 겪었다. 시멘트 바닥에 꿇어앉히고 가슴을 발로 차고 해서 그게 나이가 드니까 근육통, 심장병으로 나타나고 있다. 약을 좀 심하게 먹어서 탈이지 지낼 만 하다. 약을 많이 먹으니까 부작용이 생기는 것 외에는 아직 정신은 멀쩡하다.
-이번에 <역사의 절망을 넘어>를 비롯해 <몽양 여운형 평전>, <10대와 통하는 민주화운동가 이야기> 등 3권의 책을 한꺼번에 내셨는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달 말에 또 2권이 나온다. <김남주 평전>을 비롯해 임시정부 부의장을 하셨던 우사 김규식 선생 평전 등이다.
-건강도 안좋으신데 왕성한 저술이 어떻게 가능하신지 궁금하다.
그동안에 쭉 준비해왔던 게 이번에 쏟아져나오는 것이다. 한꺼번에 다 쓴 게 아니다.
-준비라면 평소 계속 자료를 찾고 하신 건가?
그렇다. 자료 찾고 집필하고 원고 쓰고. 그러니까 포도주 공장에서 오랫동안 숙성시켰다가 햇수가 되면 한 병씩 한 병씩 뽑아내듯이 그렇게 한 것이다.
-자료 찾기나 이런 것은 도서관에서 하시나, 아니면 집에서 하시나?
주로 집에서 한다. 3년 전에 한국출판협회에서 모범장서가로 선정될 때 집에 와서 조사를 해보니까 장서가 2만 8,000권 쯤 되더라. 3년간 한 500권 쯤 더 샀으니까 지금은 2만 8,500권 정도 되는 것 같다.
-집 자체가 하나의 큰 도서관일 것 같다.
그렇다. 화장실 하고 부엌만 빼놓고는 온 집이 3중 서고로 꾸며져 있다.
-광복 70주년이 내일 모레인데 정치나 경제나 사회 구석구석을 보면 착잡한 느낌이 든다. 역사학자로서 광복 70주년을 맞으시는 소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1910년 8월 29일에 국치를 당해서 1945년 8월 15일 국권을 회복할 때까지 만 34년 11개월 반이었다. 만 35년이 채 안된다. 그걸 따져보면 올해 8.15는 일제 강점기에 비해 꼭 두 배가 되는 시간이다. 그래도 일제 강점기에 우리 독립운동가, 지사들은 그 험난한 산전수전 겪으면서 독립을 쟁취했는데 우리는 70년이 된 지금까지 국토는 분단되어 있고, 흔히 우리가 민주화와 산업화를 달성했다고 하는데 민주화는 이명박·박근혜 정권 들어와서 완전히 후퇴해 버렸다. 5공, 유신체제로 역행하고 있고, 산업화·근대화는 상위 1%가 24%의 GDP를 갖고 있다. 4대 재벌이 60%의 매출량을 갖고 있다. 이건 재벌 공화국이다. 정치는 5, 6공 시대로 회귀하고 경제는 소수 특권층의 배만 불리고, 남북 관계는 언제 서울 상공에서 폭격이 오고갈지 모르는 위기상황으로까지 접어들고 있고, 또 일반 국민들은 청년 실업자가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정부 수립 이래 이렇게 많은 청년실업자가 거리를 배회한 건 처음이다. 이렇게 볼 때 해방 70주년을 마냥 환호만 하고 있을 시점이 아닌 것이다.
거기다 우리를 강점했던 일본은 언제 식민지를 했냐는 듯 과거사는 하나도 반성하지 않고 아베 정권의 일탈적인 군국주의는 끝간 데 모르게 가고 있고, 우리의 고유한 영토를 자기네 영토라고 공공연하게 자기네 교과서에다 기록하고 있고, 미국과 중국의 패권 싸움 과정에서 한반도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니까 100년 전 을사늑약이나 국치일 시절에 암운이 한반도에 드리웠던 시절과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 국민들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할 것 같다. 광복 70주년이 마냥 기쁘고 즐거울 수만 없는 아픔, 안타까움이 더 강하다.
-이렇게 정치가 5공으로 후퇴하고, 경제는 암울해진 원인, 어디에 있다고 보나?
여러 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치욕의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줄여서 얘기하면 나라를 팔고 친일에 앞장섰던 세력을 청산하지 못함으로써 그 악의 뿌리가 다시 활개를 치고 번식을 하고 연대를 이루면서, 그러니까 일본군 출신 딸이 대통령을 하고 있고 친일파의 아들이 집권당의 대표를 하고 있는 이런 참담한 시대, 거기다 일제강점기에 친일에 앞장섰던 언론 사주들, 대학들, 교수들, 이런 사람들이 주류가 되어버리고, 독립운동가나 민주화운동, 통일운동에 앞장섰던, 어떻게 보면 헌법에 부합되는 일을 했던 정통세력은 이단시 되어버리는 역사 왜곡, 이런 것이 오늘의 비탈진 국가를 만들어버린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광복 70주년 역사 키워드 70> 서문을 잠깐 보니까 분단의 원인도 역사 왜곡의 이유로 꼽으셨던데?
흔히 우리가 분단을 미국과 소련의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패권다툼의 산물로 인식하고 있고, 실제 그런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기본적인 것은 일본이 식민지로 만든 것, 원천적인 분단의 뿌리는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도 일본이 1945년 8월 8일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8월 9일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어서 34만 명 정도가 희생됐다. 그랬는데도 일본 정부가 항복을 하지 않고, 소련이 참전하길 기다렸다가 항복했다. 소련이 8월 10일에 참전했다. 이것은 우리의 정치인들이나 지도자들이 공부를 좀 더 해야 할 대목이다. 일본 지도층은 자기네 국민 34만 명이 죽어가는 참사를 지켜보면서도 항복을 안하고, 소련이 참전하는 걸 지켜보면서 8월 10일에 스웨덴 대사를 통해 미국에 항복한 것은 소련이 참전하기 전에 항복하면 소련의 역할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 부분은 설명이 좀 필요하다. 그러니까 미국이 오키나와를 점령할 때 1만 명 이상의 미군이 희생됐다. 일본은 10만 명 이상 전사를 당했고. 미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오키나와라는 조그만 섬 하나를 점령하는 데도 그 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조선을 해방시킨다고 한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겠는가. 그리고 그때 당시 일본군이 세계 최강이라고 했던 육군이 200만~300만 명 정도가 중국에 관동군으로 있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거기에다 원자폭탄을 떨어뜨릴 수는 없는 거니까 소련이 참전해서 관동군을 무장해제 시키는 조건으로 포츠담 선언이라든가 이런 데서 미국과 영국, 소련이 참전을 하기로 했었다. 소련이 그 당시 즉각 참전하지 못한 것은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히틀러가 항복하면서 전선이 아시아로 옮겨졌다. 8월 10일에 소련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면서 그걸 일본이 지켜보면서 항복선언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놀랍고 무서운 게 그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도 소련이 참전하면 반드시 대가를 줘야 할 것 아닌가. 그러니까 일본 대신 조선이 분단된 것이다.
우리 지도자들은 그런 걸 잘 모르고 있다. 국가 위난시에 황실이라든가 일본 지도층의 대처나 이런 부분에 대해 우리 국가지도자들은 세계의 흐름을 예민하게 보고 대처해야지 자칫하면 한말 상태같이 된다. 2차 대전 후 오스트리아는 4분열 됐고, 신탁통치를 10년간 받았다. 그럼에도 좌우익, 보수나 진보나, 친미나 친소파가 모두 힘을 합쳐 영세중립국가가 되었다. 그런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가 해방이 되었는데 엉뚱하게 참전국가였던 일본은 멀쩡하고 우리는 분단된 것은 우리의 지도자들의 무능, 아직도 일본의 움직임을 꿰뚫지 못하는 우리의 외교역량 이런 걸 보면서 비탄을 금할 수 없다.
-선생님께서 많은 분들의 평전, 칼럼 등을 내고 계신데 끊임없이 글을 쓰시는 목적은?
우리 현대사를 개괄하면 해방 후 4.19 혁명기간에 1년, 1980년 서울의 봄 6개월, 김대중 노무현 정권 10년, 그러니까 한 11년 정도를 빼고는 미 군정이거나 독재치하이거나 사이비 민간정부 시절이었다. 그런 과정에서 우리 역사가 굉장히 역행되고 국가의 정통세력이 주류가 되지 못하고 변통세력, 사대세력, 친일세력, 분단세력, 독재세력이 주류가 되어서 이제는 거의 뿌리를 내려버렸다. 이게 세습화되고 있는 굉장히 불행하고 비극적인 나라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으면 그래도 의병운동이나 독립운동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제는 그런 시절도 아니고, 특히 최근에 와서는 역사교과서를 왜곡하고,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거대 족벌신문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그런 변통세력의 대변지 역할을 해버림으로 우리 젊은 세대들에게 바른 역사, 비교적 올곧게 국난을 헤치고 독립운동을 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생애를 조명하고 싶었다.
다만 예외가 있는데 이승만과 안두희 평전은, 이승만은 국부인데 어떻게 보면 독재자이고 민주주의 역행자인데, 국민에 의해 탄핵되고 4.19에 의해 추방된 자인데 어떻게 그런 자를 국부로 추앙하고 있는지, 그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이승만 평전을 썼다. 안두희 평전은 단순히 백범을 암살한 안두희 개인이 아니라 안두희를 배경으로 하는 반민주·반민족 세력, 적어도 안두희가 백범을 암살한 것은 우리 현대사 100년의 역사를 역행시켜버린 문제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단순히 백범을 죽였다는 것이 아니라 백범의 죽음으로 인해, 통일세력, 민주주의 세력, 민권세력, 독립운동 세력이 좌절되어 버린 것이다. 백범을 죽인 후 반민특위를 없애버렸지 않나. 그리고 나서 국회 프락치 사건도 나고. 그래서 안두희를 변호하는 세력들의 실체, 누가 백범을 죽이게끔 안두희를 하수인으로 만들었는가, 그 당시 미국의 역할에 대해 쓰고 싶었다. 안두희는 미국 CIA의 에이전트(요원)였다. 미국 자료에 있다. 그런데도 아직 우리는 미국에 대해 한마디도 못하고 있다. 어떤 과정을 통해 그를 에이전트로 채용했고 추천한 사람은 누구인지 모르고 있다. 나 역시 노력했지만 찾지 못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평전을 쓰시기 시작했나?
제가 85년인가 86년에 <박열 평전>을 썼다. 박열 선생이 아나키스트인데 일황을 저격하려다가 발각이 되어서 23년 감옥살이를 하고 해방 후에 나왔다. 그 당시 일제에서 20년 넘게 감옥살이를 한 사람은 박열 선생이 처음이었다. 그런데도 해방 후 이승만이 자기 양자로 삼겠다고 해서 불러들였는데 감옥에서 나와서 민단을 처음 만든 분이었다. 백범 김구 선생 묘소 옆에 있는 이봉창, 윤봉길 이런 분들의 유해를 이분이 찾아왔다. 백범 선생이 귀국 후 박열 선생 등 몇 분들 통해서 유해를 찾아오도록 했다. 그런 분인데 해방 후 이승만한테 농락당해서 북한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가 어떻게 행방이 없어졌다. 평양 가서 자료를 찾아봤는데 찾을 수가 없었다.
-북한에서 행방불명이 되신 건가?
행방불명이라기보다는 어느 날 갑자기 북한 언론매체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제가 놀란 게 20대 청년이 일본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4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나는 일본의 신민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피고인으로 부르지 마라. 나는 조선의 대표니까 조선의 국왕이 입었던 옷을 입게 해라. 판사가 일본을 대신해 법복을 입었듯이. 나는 조선의 대표니까 판사와 동등하게 자리를 만들어라. 나는 조선 민족이니까 일본 말을 안하겠다, 통역을 대라. 그분은 일본 말을 잘하신 분이었다. 그럴 정도로 일본 재판부에 제시했다. 그 중 두 가지는 실현이 됐다. 이런 분을 보고 이런 투철한 분이 단지 북한으로 갔다고 해서 이름 석 자도 알려지지 않고, 교과서에도 안나오는 게 분통스러웠다. 그래서 일본에 가서 자료도 수집하고 했는데 그때만 해도 5공 때이고 자료 수집도 쉽지 않고, 어쨌든 그걸 썼는데 일본 NHK에서 2시간 동안 나를 인터뷰했다. 박열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박열 선생과 사귀었던 여인이 가네코 후미코라는 아주 유명한 일본 여성이다. 일본의 여성이 일황을 처단하려고 했던 조선 청년과 옥중에서 결혼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아주 잔인하게 두 사람을 옥중 합방을 시켰다. 거기서 임신을 했다. 그래서 일본 다나카 내각이 무너진 유명한 사건이다. 일본 NHK는 주로 가네코 후미코 관련해서 집중 보도했었다. 그때부터 시작해 25명의 평전을 썼다.
-앞으로 출판 예정인 평전은 어떤 게 있는가?
이달 말에 우사 김규식 선생, 그 다음 조소앙 선생, 그 다음은 고대 총장했던 김준엽 선생 등이 예정돼 있다. 요즘 총리를 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이 자격도 안되는 형편없는 지경인데 그분(김준엽 선생)은 이승만 대통령 때부터 김대중 대통령까지 총리로 모시려고 했던 분이다. 노태우는 당선자가 되어서 가장 먼저 총리를 맡아달라고 김준엽 선생을 찾아갔다. 김준엽 선생은 장준하 선생과 장정을 하면서 나중엔 사상계 부사장도 하고, 다른 분들은 해방되어서 다 귀국하는데, 앞으로 중국을 알아야 한다고 중국에 남아서 공부를 하셨다. 1950년대부터 중국에 대해 연구하신 분이다. 그 다음엔 2017년이 이상설 선생 돌아가신 지 100주년인데 이상설 선생이 숨은 독립운동을 많이 하셨다. 그분에 대해서도 헤이그 3열사라고 하면 이준, 이위종, 이상설이라고 하는데 이상설 선생이 전사(대표)고, 두 분이 부사(부대표)였다. 일본 총독부가 그때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재판을 내려서 못들어왔다. 러시아에서 안중근 선생 같은 분들이 독립운동을 할 수 있도록 물적 기반을 제공했던 분이다. 먼저 러시아로 이전을 하셔서 거기서 독립운동의 터전을 닦았다. 러시아 쪽 사람들과도 많이 알고, 거기 조선족들에게 덕망을 많이 쌓아서 의병으로 많이 참여도 시키셨다. 제가 신문사에 있을 때 2002년 쯤에 러시아 아무르 강에 조그만 비석을 하나 세웠다. 돌아가시면서 가지고 있던 유품이나 자료를 다 소각시켜서 강에 흘려보냈다. 혼이라도 흘러서 고국에 가고 싶다고 해서. 그런 분이셨다.
-지금까지 25명의 평전을 쓰셨는데 그 중 <단재 신채호 평전>을 읽은 적이 있다. 단재 선생은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이지만 단순히 펜대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조국의 독립을 위해 행동하신 분인데, 그런 점에서 얼핏 김 선생님의 족적이 단재 선생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지금까지 쓰신 평전 25명 중 단재 선생을 가장 존경하는 게 아닐까 짐작이 갔는데 맞나?
존경한다기보다 가장 닮고 싶은 분이다. 엊그제 대전시립역사박물관에서 초중고 교사 50명을 모아서 강의하는 게 있었는데 제가 단재에 대해 3시간을 강의했다. 어느 선생이 묻더라. 꼭 닮고 싶은 분이 누구냐고. 그래서 단재 선생이라고 대답을 했다. 실제로 보시다시피 제가 몸도 왜소하다. 단재 선생도 왜소하셨다. 술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빨개지셨고 저도 그렇다. 그분은 성균관에서 박사를 했는데 난 성균관에서 교수를 5년 정도 했다. 단재 선생이 <대한매일신보> 주필을 했다. 그래서 제가 <서울신문> 주필로 갈 때 <대한매일신보>로 제호를 바꾸자고 해서 바꾸기도 했었다.
-선생님이 제안해서 제호를 바꾼 것인가?
그렇다. 그때는 4년 동안 조중동에 맞서 한경대(한겨레, 경향, 대한매일)까지 갔었다. 그런데 4년 임기 끝나고 나오니까 다시 <서울신문>으로 돌아가더라. 제가 감히 단재 선생 같은 분을 닮을 수는 없지만 역사 인물로서 닮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 분이 이순신 장군, 을지문덕, 강감찬 등 전기도 많이 쓰셨다. 저도 평전을 썼고. 그 분은 소설을 여러 편 썼는데 나는 소설은 못썼지만 문학은 좋아한다. 또 그 분은 민족사학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데 난 말석이지만 근대 민족사학 쪽에 공부를 하고 있고, 그 분이 말년에 아나키스트로 돌아가셨는데 나는 한국아나키즘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 그분은 56세에 돌아가시고, 그 중 8년을 옥중에서 사시면서 그런 업적을 남기셨는데 저는 70이 다 되어서도 그런 업적의 반도 못하고 있으니 감히 따라간다고 할 수도 없다.
-선생님께서 ‘광복’ 대신 ‘해방’이란 표현을 쓰셨는데 이만열 명예교수님 같은 분도 광복은 일제로부터의 독립과 완전한 나라를 뜻하는 것이라면 해방은 단순히 일제로부터 자유가 된 걸 뜻한다고 하시는데 그런 점에서 광복보다는 해방이 맞지 않을까 싶은데?
해방 당시 8.15 때는 해방이란 말을 썼다. 광복이라고는 안썼다. 미 군정 3년 동안 남북 분단되기 전까지는 해방이라고 썼고, 남북 정부수립 후에 남쪽은 광복절이라 하고, 북한은 해방기념일이라고 썼다. 일본은 종전기념일, 중국은 승전기념일이라고 불렀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해방기념일이다. 그런데 북한이 그 용어를 쓰고 있다고 해서 안된다고 한다면 말이 안된다. 역사적인 의미가 중요한 것이지 누가 쓰고 안쓰고가 중요한 게 아니다. 예를 들어 북한에서 ‘동무’를 쓴다고 해서 우리가 안쓰는데 동무라는 게 얼마나 좋은 용어인가. 초대 국회에서 4대 국경일을 정할 때 광복절로 하다 보니까 그게 굳어진 측면이 있다. 나중에 통일국가가 되면 ‘해방일’로 바로잡아야 한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과연 역사의 수레바퀴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선생님은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시는가?
흔히 ‘역사란 무엇이냐?’에 대해 E H 카 같은 수준의 말, 즉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이다, 토인비 같은 분은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것은 단재 선생 같은 분은 ‘역사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라고 했다. 그러니까 E H 카나 토인비 얘기는 다들 알고 유식의 척도라고 생각하는데 막상 우리 독립사학자가 말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이때 아는 조선 민족, 비아는 일제다), 이런 말은 잘 모른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 국민의 절대가치, 명제는 비아와의 투쟁인데 최근에 와서는 단재의 사관은 증발되어 버리고 마치 E H 카의 말, 그것도 원래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인데 대부분의 책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나온다. 우리가 무슨 재주로 과거와 대화를 하겠나. 현재가 과거와 대화하는 것이다. 그럴 정도로 우리 역사 풍토가 지극히 외세지향적이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제가 가끔 얘기하지만 어쩌다 드라마 같은 걸 보면 우리 장관이나 고급관료들이 ‘저, 내일 미국(일본) 들어갑니다’라고 한다. 조선 사람이 ‘외국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아(我)가 다른 나라에 갈 때 ‘나간다’고 하고, 자기 집에 들어올 때 ‘들어온다’고 하는데 왜 일본이나 미국 갈 때 ‘들어간다’고 하느냔 말이다. 사소한 것 같지만 식민지 35년, 미 군정, 지금도 그런 영향권 아래 살다보니까 사대의식이 골수에 박혀 있는 것이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찮은 것 같지만 이런 용어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을사늑약은 바로 잡혔다. 1910년 8월 25일에 일제에 합병됐다, 합방됐다, 강제 합병이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일본 사람들이 그 용어를 만드느라고 일본 학계와 고급 관료들이 몇날 며칠을 싸웠었다. 그 당시 합방, 병합이란 용어 등 여러 가지를 썼는데 그건 간단하다. 병탄(倂呑)이다. 합병, 합방은 주식회사 A와 B가 적당한 조건을 가지고 합치는 것이다. 그게 합병, 합방이다. 일본이 무력에 의해서 조선을 빼앗아 합친 것은 병탄이다. 이런 용어를 두고 왜 일본식 용어를 쓰는지, 해방 70년인데 말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 역사학자, 언론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