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필자 선생님, 그리고 조필자 선생님 그리고 그리고
선생님! 부끄럽습니다. 너무 오래 연락을 드리지 못한 점 고개를 들지 못할 만큼 부끄럽습니다.
먼길을 우회하여야만 선생님을 뵈올 수 있는 건 아닌데도 그것도 또한 모자란 제자의 길이였다 착각했습니다. 한 어린아이가 큰길을 가기까지 왕유(王乳)를 주신 선생님의 정갈하고 따뜻한 손길과 사랑으로 종이는 하루도 쉬임 없이 클 수 있는 자신이 언제나 있었던가 봅니다.
선생님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선생님의 어린 현종(鉉宗)이가 되어 지나온 길을 다시 선생님과 걷고 싶습니다.
아이들의 얼굴보다 더 넓은 잎사귀를 山만큼 간직한 몇 아름의 플라타너스 아래 어깨동무를 하여주신 그 운동장 따라 童詩가 무언 줄도 모르면서 詩를 배운다고 선생님의 지도를 받던 그때, 곱고 고운 선생님의 애정이 강물처럼 흐르는 佳谷국민학교
그렇게도 할 줄 모르는 배구를 한다고 오후 늦게 교무실에 들어가 부어오른 팔목을 늘쌍 선생님께 보이면 ' 현종아! 힘들지'하시며 옥도정기(당시로는 흉터나 외상 붓기와 벌레물린데 최고의 약)를 정성스레 발라주시는 선생님. 군내대회에 출전하여 우승팀에게 세 판을 15대 0으로 졌지마는 하나도 부끄럼을 가지지 않고 당당하였던 꽤나 잘났던 배구선수들(배구는 서브를 받는 쪽에서 이겨도 점수가 올라가지 못하고 서브만 빼앗아 오는 게임), 점심시간도 안되어 일찍 철수하면서 귀한 짜장면을 한 그릇씩 비우고 나서 금방 잊어버리고 맑게만 웃던 아이들은 어느새 어른이 되었습니다. 선수가 아닌 잠시로 취미라 생각하며 열심히 운동을 하였던 그 운동장 한 쪽으론 푸르게만 쭉쭉 뻗어가던 느티나무의 군락사이로 쏴-하니 선생님의 고운 모습이 살며시 다가옵니다.
선생님! 4학년 때 선생님의 글짓기 지도를 받아 학교대표로 글짓기대회에 출전하여 입상하지 못한 그 미안함과 부끄럼이 자그만 詩가 되었습니다. 그때도 산문시(散文詩)를 좋아했고 선생님의 칭찬에 즐거워하며 동시보다 산문시(약간은 멋스럽고 어른스런 문학의 흉내)를 즐기는 철딱서니를 사랑해 주셨던 선생님.
속리산 법주사를 돌아 대구 달성공원을 거쳐온 수학여행길. 선생님, 그렇게 아름다운 여행길은 종이가 소설로 만들지 않으면 없지 싶습니다. 선생님과 조현자 누이에게 매달려 신기하게 구경하였던 비경. 그리고 식사와 간식까지 일일이 챙겨 주시던 선생님. '금방울 은방울'의 동화책을 주시며 웃으시던 선생님.
그때가 어제 바로 조금 전 같습니다.
선생님!
종이가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실패를 하는 그 용감한 즐거움으로 청춘을 살 수 있음은 선생님이 늘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선생님이 몹시도 그리워 수소문하였지만 허사였습니다. 정말 죽기살기로 찾는다면 찾을 수가 왜 없었겠습니까. 어쩌면 찾고싶은 용기가 나질 않았음이 맞을지도 모릅니다. 위대한 현종이가 되어 선생님의 곁에 설 날을 위한답시고 핑계를 되었던 것 같습니다. 먼길을 가기로 작정한 이상 시간은 가파르게 흘렀습니다. 남들이 이상향이라고 탄복하고 탐욕 하는 것을 팽개치며 하늘에 그물을 치려 허공에 올랐습니다. 모든 물질을 다 걸러내고 대붕을 포획하기 위해 참으로 엉성하기 이를 데 없는 그물을 던졌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사랑이 종이의 몸을 싸안아, 어느 사이 대붕을 사로잡을 수도 있었고 어느 때 놓아줄 수도 있다는 자유가 되었습니다.
지상에서 제일 먼저 일출을 볼 수 있다해서 이름지어진 일월산 그리고 日字峰. 맑은 날은 그 먼 평양도 보였다는 전설과 지금도 동해가 보인다는 일월산을 자주 향하면서 선생님이 태어나 시집갈 때까지 계셨던 엄숙한 古宅(互恩 종택)을 시간이 날 때마다 지나왔습니다. 그때마다 선생님의 거취를 알려했으나, 시댁에 기거하는 이방의 사람들은 선생님의 연락을 모르는 사람들이어서 그 명분을 갖고 백방으로 선생님을 연락할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아직은 때가 아닐 수도 있다는 宗이의 꿈과 스스로의 왜소함이 머뭇거리게 하였나봅니다.
선생님, 그리울수록 돌아가는 것도 가장 빠른 길이라고 엉뚱하게 공식을 만들며 선생님의 그 고마운 정을 오래도록 비웠지 않나 싶습니다. 이제 선생님께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좀 더 계산되고 좀 더 엄격하고 좀 더 매서운 집념과 매듭으로 기묘년(己卯年)을 알차게 노력하겠습니다.
고등학교 때 선생님의 편지를 받고 그 이후 선생님이 화곡동에서 이사를 가시면서 이십 년이 넘어오게 선생님을 배반했던 것 같습니다. 늘 돌이켜보면 종이가 만약 선생님이라 하여도 한 자그만 아이를 그렇게 편애(偏愛)할 수 있는 용기는 없을 것 같습니다. 특히 그렇게 많은 학생들 앞이라면 내 자식에게도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이 없을 꺼라 돌이킬 때 선생님의 그 강인하고 아늑한 사랑은 헌신에 의한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다는 것을 철이 들면서 더욱 뼈저리게 다가섭니다.
선생님, 어떻게 변하셨는지요. 아마도, 너무도 곱게 세월을 드셨겠지요. 처녀일 적에도 너무도 아름다웠고 결혼을 하여 아이를 가지고도 너무도 천사였던 선생님의 모습을 정말 보고싶습니다.
선생님, 종이는 지금 文海의 길을 간다고 하는 게 맞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글은 小說을 업(業)으로 생각하며 서간문(書簡文)과 가끔은 詩를 쓰는 것도 소설 다음의 업으로 여깁니다 그리고 美術評論과 문화비평 政治評論에 대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강한 것이 위대하며, 큰 일이 正道이며, 또한 王道의 물줄기라는 밑그림으로 문학을 어설프게나마 다듬어 왔습니다. 선생님이 종이를 무한대로 사랑해주신 그 자신감으로 모든 자와 모든 사물에 고개를 숙일 수 있는 힘과 모든 자들 앞에서 강함과 위대함과 뛰어남이 무언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언어를 얻었습니다. 모든 일에는 순간 순간이 첩경이며 최선이었음에 선생님의 그 강렬한 사랑은 종이의 당시 기억이 지상(地上)에 묻어있는 한 그 무엇에도 바래지 않은 햇빛일겁니다.
점심시간에 운동장 그늘에 퍼 질러 소년신문을 읽고 있는 종이에게 살며시 다가와 포옹하며 함께 신문을 읽었던 선생님, 땡 땡 땡 鐘이 쳐서 선생님은 宗이를 포옹하며 교실을 향할 때 무른강낭 별명 이란 아이는 선생님과 저의 다정함이 더럽다고 운동장에 침을 탁탁 뱉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합니다. 거대한 유림의 고장에서 남녀 칠세 부동석이란 틀이 그 아이에게 시금석(試金石)으로 위대하게 자리잡은 그 틈 사이로 선생님의 자상하고 향기로운 미소가 지금도 변함 없이 종이를 감싸고 있습니다.
사랑 받으며 클 수 있는 그 행복, 자신이 좋아하며 존경하고 선망하는 그 누구로부터 정말 가슴에서 나오는 사랑을 받는 그 즐거움이 정녕 무엇인가를 종이에게 無言으로 생활해주신 선생님, 그때가 정말 가슴이 벅차 오릅니다. 선생님의 그 편애 적일 만치 선험적(先驗的)인 사랑으로 宗이는 종이만이 가질 수 있는 섬세한 사랑의 문학에 한발 더 다가설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랑이 아니면 그 무엇도 완전할 수 없다는 큰 믿음 속에 선생님은 종이가 가는 머나먼 길에
등대가 되고, 나침반이 되고, 오아시스가 되었습니다.
선생님, 영원히 아름다운 선생님,
그 선생님이 누나같이 :여선생님같이:
어머니같이: 이모같이: 고모같이:
펜팔의 소녀같이: 꿈속의 천사같이
종이의 꿈을 꼬옥 지켜주며 포옹해주시던 그 길은 현실이 아닌 여행이었습니다.
선생님이 종이에게 뿌려준 사랑은 하늘나라의 천사가 실수 아닌 실수로 보석함을 엎질러 한겨울 내내 쏟아져 내리는 함박눈처럼 글로써 표현을 다 할 수가 없답니다.
선생님!
그립습니다.
시인보다 종이에게 아름답고,
소설보다 종이에게 위대하고,
꽃보다 종이에게 향기로우며,
태양보다 종이에게 눈이 부신
선생님.
선생님!
보고싶습니다.
꿈처럼 사라지고 꿈처럼 다시 꾸는 기억의 저편을 옮겨 심으며 선생님, 미안했습니다. 짝사랑하는 소녀에게 다가서지 못하였듯이 좀 더 자신 있는 종이가 되어 선생님의 가까이 가려했다고 변명해도 되겠습니까?
완성시킬 수가 없었던 꿈의 가엾음에 그것도 삶의 일부였던가 봅니다.
선생님이 그토록 편애해주셨기에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사람이 되면 선생님께 가리라는 그런 모자람이 컸던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세월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음이 가장 선생님을 좋아하는 길임을 어렴풋이 느끼면서도 차마 선생님께 가기가 부끄러웠습니다.
선생님! 치열한 의식, 치열한 노력, 치열한 마무리가 없이는 그 무엇하나 완성이 없음을 선생님을 통해 새삼 각인하며 새해는 실천으로 보여주는 해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선생님, 종이의 곁에는 언제나 너무 아름답고 그리운 선생님, 소설 속 누이 같은 선생님이 가슴속에 늘 있음을 새삼 소중하게 깨달았습니다.
선생님, 당연히 건강하시겠지요. 그리고 종이를 사랑해주시던 그 처녀선생님시절처럼 행복이 늘 가득한 家內에 축복을 올립니다.
선생님, 반가워하며 환하게 웃으실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
己卯新年 첫 태양을 기다리며 고향의 모서리에서
모자란 제자
宗이 삼가
선생님 괄호 안 한자는 동음으로 뜻이 잘못 표현되지 않을까 싶어서 넣었습니다. 딸의 사진을 넣었습니다. 맏이를 □□(본인이 인터넷에 밝히길 원치 않았음)이라 짓고, 둘째는 국주(國主)라 지었습니다. 다음 아기를 낳으면 선생님께 먼저 알리겠습니다. 선생님께서 종이가 낳은 자식의 아명(兒名)을 반드시 지어 주리라 믿습니다.
조필자: 시인 조지훈의 손아래누이로 본향은 한양이며,호는 명원(明園}으로 19□□생으로 출가 때까지 향리이자 모교인 가곡초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였으며 출가 전까지 한번도 생가(호은종택:조지훈의 생가이기도 함)를 떠난 적이 없었다.
현종 : 필명은 정 효료수. 본명은 현도(鉉道), 아기 이름은 천수다. 국민학교에 입학하여서는 현종이란 이름으로 입학하였다. 중학교 이후로는 호적상의 이름인 현도로 바뀌었다.
*호은종택: 경상북도 영양군 日月면 주곡마실에 있는 한양 조씨 조광조 후손들로 □□파의 종택. 시인 조지훈의 생가이자 위로는 조헌영 등 당대의 거물 실세의 저택이다. 그 옆으로는 조□□씨의 생가와 그의 부인인 삼성가(三星家)의 □□이 2년 간 시댁에 살림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는 그 옆으로 국문학자 조동일 서울대교수와 조동걸 교수를 위시하여 많은 한국 지식인의 생가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일자봉(日子峯), 월자봉(月子峯): 경상북도에서 제일 높은 산으로 지상에 음양의 이치가 맞는 일월산은 하나 뿐이라는 전설이 있다. 그래서 일자봉이 있고 월자봉이 따로 있다. 이 일대의 사람들은 일자봉과 월자봉을 자기 집마당 밟듯이 올라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여자의 젖꼭지 위에는 올라갈 수 없어도 일월산 일자봉에는 올라갈 수 있고요 하늘나란 다녀올 수 없어도 일월산 월자봉은 다녀올 수 있지요' 라는 노랫가락이 있다. 지금은 동해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고 하여 그 일월산 지명이 정당함이 입증되고, 5천년 중국암각화에서 놀랍게도 일월산이란 그림이 선명하게 나온다. 천하의 중심이란 중국에서 그리도 찾아 헤매던 日月山일는지 모른다. 지금도 내가 내로라 하는 무속인들이 굿 내림을 위해 반드시 이곳을 찾으며 전설로 유명한 황씨 부인당이 산 정상에 그림처럼 있다. 일월산이 의병장 신돌석 장군이 왜병과 항전하며 화려한 전과를 겨룬 곳으로도 너무 유명하다. 일월산 산자락아래 조지훈,김주영과 이문열, 시원(詩苑)이란 시 전문지를 1935년 내어온 일도 오희병 시인이 살아온 곳이기도 하다.신사임당과 함께 한민족 여성상인 장씨부인과 영웅본색의 남이장군과 남이포와 여성독립운동가인 남자현여사며, 가람 이현일의 학통이 뿌리깊은 곳이기도 하다.
호남을 침략(1592년-)한 왜병들이 정담장군의 용맹성에 피바다가 되면서 호남을 다시 정벌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물러나게 한 일화로도 유명한 곳의 뿌리가 또한 영양이다. 임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의 저서에는 조선을 침략하여 무서운 장수를 별로 보질 못하였으나, 목숨을 내 놓고 조선을 지킨 두 장수가 있었으니 웅치(熊峙)전투에서 자신의 대군을 무참히 짓밟은 의병장 정담(鄭湛)(당시 김제목사로 사후 병조참판에 제수(除授)되었으며, 전투 전에 아들 휘(輝)에게 쓴 서한(書翰)문이 너무도 유명하다)과 동래부사 송상현이 있다하고 " 조 조선국 충간의담 (弔 朝鮮國 忠肝義膽 :조선국에 조문하노라. 충성스러운 간과 의로운 쓸개를 가진 )이란 제문을 지어 정담의 장렬한 최후의 높고 깊음을 기렸다. 그 정담(본:野城 )의 종택과 사당,서원이 주곡과 마주보는 가(佳)마실[佳谷,道谷= 셋 동네를 삼부곡이라 일컬음]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