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시리즈는 애리조나 김병현(22)에게 '우승반지'라는 큰 선물도 줬지만 '홈런악몽'이라는 큰 시련도 줬다. 김병현이 "야구를 하면서 이렇게 힘든적이 없었다"고 털어놓을만큼 그 기억은 끔찍했지만, 미국 언론에서는 큰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애리조나가 2승1패로 앞선 지난 11월 1일(이하 한국시간) 월드시리즈 4차전. 1차전에 이어 3일 휴식후 선발로 나선 애리조나 커트 실링은 또다시 엄청난 힘을 과시하며 양키스타선을 꽁꽁 묶었다. 3-1로 앞선 8회말, 김병현은 실링의 공을 넘겨받았다. '동양인 첫 월드시리즈 등판' 순간이었다.
등판하자마자 7번 세인 스펜서를 삼진 처리. 8번 스콧 브로셔스와 9번 알폰소 소리아노도 연속 삼진으로 잡는 등 출발이 기가 막혔다. 9회말 1번 데릭 지터가 3루쪽 기습번트를 시도하다 아웃되고, 2번 폴 오닐에게 빗맞은 좌전안타를 내줬지만 별 문제는 없어보였다.
3번 버니 윌리엄스를 다시 삼진으로 잡아 2사 1루. 일은 여기서 터졌다. 4번 티노 마르티네스에게 초구를 얻어맞은 것이 가운데 담장을 훌쩍 넘어갔다. 믿기지 않는 9회말 2사후 동점홈런. 양키스타디움을 메운 양키스 팬들은 열광했고, 김병현은 다시 연장 10회말 2사후에 1번 지터에게 끝내기 우월 1점홈런까지 내줬다.
언론이 떠들어댔다. '왜 실링을 빨리 바꾸었느냐', '봅 브렌리 감독에게 문제가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악몽은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의 5차전. 다시 애리조나가 2-0으로 앞선 9회말 김병현이 마운드에 올랐다. 5번 호르헤 포사다에게 또 빗맞은 좌익선상 2루타를 내준게 마음에 걸렸지만 6번 스펜서를 3루수 땅볼, 7번 척 노블락을 삼진으로 잡고 아웃카운트 한개만 남겨놓았다.
이때까지도 설마 전날같은 일이 벌어질까 했다. 그러나 8번 브로셔스는 김병현의 3구째를 왼쪽담장 너머로 날렸고, 김병현은 그대로 마운드에 주저앉았다. 1루수 마크 그레이스가 뛰어와 얼굴을 감싸안으며 위로를 했지만 월드시리즈가 끝난 뒤 "정신이 멍해서 아무 생각도 안난다"고 할만큼 충격, 그 자체였다.
다행히 6,7차전에서의 극적인 승리로 애리조나가 우승을 차지, 김병현은 팬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으며 더 큰 박수를 받았지만 올시즌 한국 메이저리거에게 벌어진 가장 끔찍한 사건이었다. 〈 피닉스=신보순 특파원 bssh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