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오전 밸리 강습을 마치고 집에 온 나는 남편이 입을 겨울옷들과 일할 때 신을 운동화(진곤의 낡은 농구화)와 속옷, 양말등을 가방 한가득 챙겨서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갔다. 목포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건 두시 사십분. 저녁이 돼서야 목포 기독병원에 도착했다.
한달전 시제사 때문에 부산 시댁에서 만났던 남편은 열흘전, 서울 집에 오려고 일터인 전남 강진에서 출발해 오던 중, 목포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밤 9시쯤이었는데 빨간불에 서있던 남편의 모닝 차량을 뒤에서 트럭이 곧장 달려와 박았다는 것이다. 영암군청 공무원인 40살 그 남자는 혈중알콜농도 0.12의 음주운전으로 빨간불도, 모닝차량도 눈에 뵈지 않았단다. 그래서 시속 80키로 이상으로 달려와 그대로 쬐그만 모닝차를 날려버렸다. 남편은 그 트럭이 뒤꽁무니를 박기 0.5초전 그럴줄 알았단다. 차가 앞으로 쭉 밀려가면서 브레이크를 밟으며 30미터 앞에 멈춰선 모닝차는 뒤유리창이 박살나고 물론 뒷부분이 심하게 찌그러졌지만 다행히 운전하던 남편은 다친 데가 하나도 없었다. 국도 2차선에 멈춰선 차에서는 연기도 나고 차문도 잘 열리지 않았는데, 갓길에 멈춰선 트럭에서 운전자가 내려 어디론가 가려고 하더란다. 비상경고등을 켜논채 가까스로 차에서 나온 남편은 그를 붙잡아 이야기를 하려는데, 쌩쌩 과속으로 달려오던 차들이 남편의 세워논 차를 연달아 받아 7중 추돌사고가 또 났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었고 차들만 부서졌다. 그 7중추돌사고를 당한 사람들 중 하나는 가해차인 그 트럭을 이미 몇키로 전에 봤다고 한다. 신호등마다 서지 않고 그냥 계속 달리던 트럭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는데 결국 그도 피해자가 된 셈이다. 아무튼 가해자인 그는 남편을 비롯한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형사합의를 받고, 직장에선 불가피한 징계조치를 당할 예정이고, 면허는 물론 취소됐고, 우리 차는 보험으로 보상수리를 받았다.
특별히 다친 데는 없었지만 혹시 있을지 모를 후유증과 기타 등등 이유로 남편은 일주일 넘게 목포병원에 있으면서 아침 저녁으로 포도당 주사를 맞아서인지 얼굴이 전과 달리 뽀얗게 피어있었다. 남편은 날 보더니 얼굴에 뭐가 그리 났나, 그런다. 난 히히 웃으며, 점 뺐어..그랬다.
평소에 병원을 멀리하던 사람이라 건강검진 한번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지난 여름부터 속이 아프다해서 이참에 위내시경도 받아보라 했더니, 검진결과 헬리코박터균에 의한 위궤양이란다. 추석무렵에는 위출혈도 있어서인지, 빈혈 수치도 높아서 이주일 동안 먹을 철분약과 위궤양약 잔뜩 받아서 퇴원을 하게 되었다.
보험사직원과 서류를 마무리하고, 공업사에 가서 수리된 차를 찾느라 월요일 밤을 목포병원 근처에서 자고, 화요일 저녁에서야 모든 일을 마무리하게 된 우리는 전남 함평에 가서 육회비빔밥을 먹고, 광주 터미널 근처 여관에서 일박을 하며 '선덕여왕'을 시청하였다. 남편과 나란히 누워 TV를 보는 것도 무척 오랜만의 일이었다. 남편은 남들이 다들 재밌다고 칭찬이 자자한 그 드라마의 이모저모를 비판적으로 지적하였다. 역사적 고증을 무시하고 픽션을 만드는 건 포기했다쳐도 배우들의 품격에 맞지 않는 연기에 대해서 혀를 끌끌 찼다. 유흥가 한복판에 자리잡은 여관이어서 밤새도록 쿵작쿵작 소리가 들려와 깊이 잠들기가 힘들었다. 새벽 다섯시가 되어 일어나, 남편은 담양의 일터로 떠나고, 나는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다. 해뜨기 전 출발해서 오른쪽 차창으로 여명이 밝아오는 걸 보며 전라,충청을 거쳐 오니 경기쯤부터 비가 촉촉히 내리고 있었다.
나는 일주일 세번 월수금 오전에 밸리댄스 운동을 하며 일상의 활력을 얻는 편이어서 수요일 오전 밸리 타임을 놓치는 게 적쟎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할일이 있을 때 쉬지 않고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노가다로 살아가는 남편은 다행히 이번 사고로 인해 한 열흘 푹 쉬면서 속아픈 병의 원인도 알 수 있게 되었고, 약도 처방받아 치료받을 수 있게 되니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뜻밖의 수입도 조금 생겼다.
강남고속터미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좀 자르고 파마를 했다. 오랫동안 미장원에 가지 않아 한정없이 길고 지루해진 머리에 변화를 기하고 싶었다. 앞머리까지 싹뚝 자르고 보니 요즘 유행하는 스타일의 단발머리가 되었는데 영 적응이 안된다. 겨울비 내리다 그친 불광천길을 걸어 집으로 오다가 시장에 들러 쪽파와 집고추도 샀다. 지난 주일날 나은숙이 밭에서 키운 무를 갖다주어 맛있는 동치미를 담가 먹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실로 십여년만에 동치미를 담가 보는 것 같다. 내친 김에 배와 갓도 사서 집에 있는 둥근 항아리에 담가야겠다. 집고추의 칼칼한 맛이 잘 배어났으면 좋겠다.
첫댓글 모닝차가... 정말 좋은가보네여...오우후~~대단한걸여*.*
큰 사고였는데, 남편 다친 데가 없으시다니 다행이라는 말을 넘어서는군요. 수정씨 우연한 여행 덕분에 글에 얹혀 저도 남도 땅 둘러본 듯 합니다. 이런 글 참 오랜만이네요. 잔잔한 일기 같기도 하고 에세이 같기도 하고...수정씨 손맛 배인 동치미 국물 먹고 싶습니다.
동치미 익으면 우리집에 놀러오세요, 구수한 된장찌개랑 생선 구워서 먹지요^^
언니 남편분은 지난번에도 크게 사고나고 안 다쳤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대단하십니다. 언니 단발머리 궁금 궁금 ^^
그게 올해초인지 작년초 일인지 헷갈리는데...설을 쇠러 트럭을 몰고 마산에서 부산으로 오는 국도에서 깜박 졸아 무언가를 들이받고 멈춰서 그때는 트럭 앞유리가 나가고 크게 부서져 폐차까지 할 정도였는데 하나도 안다쳤지. 할아버지 비석 세우는 일 하느라 샀던 중고 트럭이었는데 주변에서 조상님 보살핌이라고 하더군. 우연이라기엔 뭔가 의미가 있는 사건들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더욱 정신차리고 똑바로 살아야겠다는 각성이...
잔사고에 남편분 오래사시겠네.ㅋㅋ별탈없이 퇴원해서 정말 다행이네요. 나두 동치미 먹구싶다~
오늘 머리가 그 머리군요.. 큰일날뻔했네요. 이런일 저런일로 언니는 터미널 버스를 많이 타는 것 같아요. 언니만의 고유한 색깔이 물씬 풍기는 글이네요. 분명 동치미는 맛날것이여요. 좋은 무를 항아리에 담아 익히면 맛은 뭐... 당분간 남편분 잘~ 챙겨주세요. 아플때는 무조건 잘해줘야 합니다. 어련히 잘 하시겠지만요..
오늘 머리가 그 머리군요.. 큰일날뻔했네요. 이런일 저런일로 언니는 터미널 버스를 많이 타는 것 같아요. 언니만의 고유한 색깔이 물씬 풍기는 글이네요. 분명 동치미는 맛날것이여요. 좋은 무를 항아리에 담아 익히면 맛은 뭐... 당분간 남편분 잘~ 챙겨주세요. 아플때는 무조건 잘해줘야 합니다. 어련히 잘 하시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