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단새를 기억한다. 눈 덮인 킬리만자로에 산다는 전설속의 새. 밤새 추위에 떨면서 아침이 되면 둥지를 틀리라 마음먹지만 햇살이 비치면 그 따스함에 모든 걸 잊고 만다는 망각의 새. 서른아홉의 끝에서 나는 원인이 뻔한 우울을 앓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방황하던 젊은 날, 그토록 갈망하던 마흔이 문 앞에 와 있었지만 바라던 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무채색의 내가 희미하게 눈 떠 있을 뿐이었다. 꿈마저 망각한 채 멎어있는 나를 흔들어 깨울 무언가가 참으로 절실했다. 그 무렵 지인을 통해 한라산 사진을 주로 찍는다는 사진가를 알게 되었다. 틈만 나면 그 분의 홈을 들락거렸다. 사진을 향한 그의 열정은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었고 고난의 기록과도 같은 산행일기는 읽을수록 매료되었다. 여행을 즐기는 내게 그의 사진들은 또 다른 신세계로 다가왔다. 모처럼의 여행에서 남녘에 나다니는 봄빛과 섬진강을 따라 흩어지는 매화 꽃잎을 보며 두고 오기 아깝다는 생각을 한 저녁이었을 게다. 인터넷 쇼핑몰을 뒤져 제법 무게 나가는 카메라를 떡하니 사들이고 말았다. 찬거리를 사러나간 시장에서 간 고등어 한 손과 소국 한 다발을 앞에 두고도 한참을 망설이곤 하던 나로서는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꾸물대지 않았다. 시간은 멎어있는 게 아니란 걸 자꾸만 부피를 키워가는 나이가 말해주고 있었다. 오직 사진을 찍기 위해 삶의 터전마더 뭍에서 섬으로 옮길 정도로 사진을 사랑하는 그분은 기꺼이 나의 사부가 되어주었다. 집안일을 모두 끝낸 늦은 밤 컴퓨터 앞에 앉으면 사부님의 사진 강의가 빽빽하게 올라와 있었다. 꼼꼼하게 공부하고 숙제까지 마치면 창밖이 뿌옇게 밝아오는 날도 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가져보는 나만을 위한 시간이었으므로 약간의 긴장과 피곤이 섞인 그 시간이 소름 돋도록 좋았다. 카메라가 내 몸의 일부인 것처럼 옆에 끼고 사는 날이 늘어났다. 틈만 나면 습지의 안개와 강나루의 일몰을 담으러 나섰다. 노을이 번지는 키 큰 미루나무 주변과 강가 보리밭을 서성거렸다. 주부의 부재 뒤에 찾아올 가족의 불편을 덜기 위해 몇 배로 부지런을 떨어야 했지만 좋아서 하는 일이므로 투덜거림이란 녀석은 맨 발로 도망가고 뒤꿈치도 보이지 않았다. 적정노출과 셔터스피드는 가장 기초적인 것이지만 실전에서는 항상 해메곤 했다. 디지털카메라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포토삽을 통한 후작업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피사체를 보는 '카메라아이'라든가 구도 잡기는 갈수록 어려웠다. 노출이 모자라거나 색감이 맞지 않는 사진을 숙제로 제출한 날은 어김없이 사부님의 질책이 날아들었다. 그러면서 함께 묻어오는 한 마디. "설거지 끝나면 전화하세요!" 더딘 걸음으로 따라 오는 제자에게 언제든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할애할 준비를 하고 계신 사부님을 위해서라도 처음의 열정만은 간직해야 했다. 그저 스쳐 지나던 풍경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카메라의 눈으로 보면 바람이 다니는 길이 보였다. 언덕의 억새밭에도, 강가 보리밭에도, 하늘을 지나는 구름에게도 바람의 길이 있었다. 낯선 바람을 만나는 일이 나를 들뜨게 했다. 들판을 수놓은 키 큰 꽃들의 이마며 그물을 끌어 올리는 어부의 억센 팔뚝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포구에 나란히 정박해 둔 코발트불루의 어선들이 이국에서 만난 엽서마냥 반가운 악수를 청해 올 때나 섬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며 엿 파는 총각의 질펀한 사투리를 들을 때면 두고 온 가족이 눈물겹도록 보고 싶기도 했다. 그런 풍경들을 내 카메라에 담았다. 익숙하게 받아들이던 뭍의 소음들이 귀를 어지럽히면 섬으로 찾아들었다. 단조로움만 있고 잡다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곳, 그런 곳에서 몇 달 혹은 며칠이라도 발목이 묶여 버렸으면 했다. 세상과 단절된 곳에서 태풍을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섬에 들 때마다 바다는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고 나는 예정대로 섬을 떠나와야만 했다. 한번쯤 짙은 해무 속에 길을 잃고 싶었으나 아직 그 작은 소망은 이루어 진적 없다. 사람이 그리울 땐 시골 장을 찾아 나섰다. 자꾸만 사라져가는 우리네 정겨운 모습들이 그 곳에 있었다.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의 흙 묻은 손, 그 얼굴에 번지는 함박웃음, 대장장이의 빰을 타고 흐르는 굵은 땀방울, 오일장에서 모처럼 만난 동무와 막걸리 한 사발을 나누어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는 수염이 허연 할아버지. 오래보아도 질리지 않는 따뜻함이 그곳에 있었다. 꼽아 보면 여러 해 동안 맘에 드는 사진을 찍기 위해 길을 헤매고 다녔다. 일곱 번 색이 변한다고 이름 붙여진 서해 갯벌 칠면초가 내 맘 같아 보일 때도 있었고 페 염전의 적막이 꽃보다 살가울 때도 있었다. 사진을 찍는 일은 여행을 통해 나를 돌아보는 과정이고 그 속에서 지금의 나를 발견하기 위함이다. 동해의 일출을 찍기로 한 날, 잠을 아껴 먼 길을 달려가 손 시린 것도 잊고 셔터를 누른다. 어느새 훌쩍 철이 들어 기다림을 아는 내가 한껏 성숙해진 나를 만난다. 아무리 기다려도 원하는 오메가는 볼 수 없고 여명만을 찍고 돌아서야 할 때 사진가가 개입할 수 없는 부분이 자연이라는 걸 또한 배우게 된다. 출사에서 돌아와 내가 찍은 사진들을 모니터에 띄우면 상처를 지니고도 여전히 푸른 나무가 있고 볼 때 마다 다른 일출과 일몰의 장엄함이 있다. 그런 자연에게서 나는 생명력을 느끼고 기운을 얻는다. 그 속에 몰입하는 동안 자연과 나는 하나가 된다. "사진은 영원한 시간의 풍경이기에 다만 한 컷을 노출할 때에도 그리움을 볼 줄 알아야 한다."던 어느 사진 평론가의 말을 떠올리며 나는 날마다 그리움이 가득 담긴 내 삶의 풍경화를 만나러 길을 나선다.
(박월수 님의 수필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