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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륙조선사 연구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현상태
안록산(서기 703년~ 757년) |
고선지(출생년 미상~756년) |
742년 평로절도사 |
741년, 서쪽의 달해부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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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4년 범양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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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7년 소발율국 공격. 정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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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년 하동절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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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9년 석국(타슈켄트), 걸사국(케쉬) 정벌 |
751년에 탈라스 전투에서 패전 |
고구려를 정벌하기 전 이적(李勣)과 설인귀(薛仁貴)가 소그드 구성(康居)을 정벌한 적이 있다. 대략 1세기 후에 고선지가 이 지역을 다시 공략한다. 안록산은 소그드 구성 출신으로 營州사람이라고 한다. 사사명 또한 史國출신이다. 대조영도 營州에서 활동했다. 이 지역은 돌궐, 거란, 해가 섞여 사는 지역인데, 안록산은 거란과 奚를 정벌하여 현종의 총애를 받는다.
안록산이 활동한 지역을 신당서에서 요점만 간단히 추려보았다.
新唐書 列傳第一百五十上 安祿山
安祿山,營州柳城胡也,本姓康。
[안록산 영주 유성호인이다. 본성은 강이다.]
張守珪節度幽州,祿山盜羊而獲,守珪將殺之,呼曰:「公不欲滅兩蕃邪?何殺我?」守珪壯其語,又見偉而晳,釋之,與史思明俱為捉生。知山川水泉處,
[정수규가 유주절도사일 때 안록산이 양을 훔쳐가지고 가자 수규가 (록산을) 죽이려고 하자. 큰소리로 “공은 량번(거란과 해)을 멸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찌 저를 죽이려 하십니까?”]
天寶元年,以平盧為節度,祿山為之使,兼柳城太守,押兩蕃、渤海、黑水四府經略使。四載,奚、契丹殺公主以叛,祿山幸邀功,肆其侵,於是兩蕃貳。
[천보원년, 평로를 절도부로 삼고 록산을 자사 겸 유성태수로 삼고 량번과 발해, 흑수 4부를 경략하게 했다. 4년, 해, 거란이 공주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록산이 가서 막는 공을 세우고는 (반란세력을) 죽이고 그곳을 공략하여 량번으로 삼았다. ]
...........중략)
養同羅、降奚、契丹曳落河八千人為假子,教家奴善弓矢者數百,畜單于、護真大馬三萬,牛羊五萬,
[동라를 (용병으로) 기르고, 해를 항복시켜 거란 예락하(曳落河) 8천인을 양자로 삼고 자신의 노비들에게 궁수에 능한자 수백으로 단우에서 목축하게 하여 호진대마 3만필, 소.양 5만두를 보유하게 되었다. ]
...........중략)
帝不知,賜鐵券,封柳城郡公。又贈延偃范陽大都督,進祿山東平郡王。
[황제(현종)은 아무것도 모르고(안록산이 저지르는 악행에 대해) 안록산에게 막강한 권력을 하사하고 柳城군공으로 봉했다. 또 범양대도독, 동평군왕을 제수했다.]
詔上谷郡置五鑪,許鑄錢。又求兼河東,遂拜雲中太守、河東節度使。既兼制三道,意益侈。
[황제가 조서를 내려 상곡군에 화덕(재련소)5곳을 세우게 하고, 화폐를 주조하는 것을 허락했다. (안록산은) 또 하동을 겸할 것을 청했고, 운중태수, 하동절도사가 되었다. 이에 3도를 장악하고 날로 거만해졌다.]
乃悉兵號二十萬討契丹以報。帝聞,詔朔方節度使阿布思以師會。布思者,九姓首領也,
[나아가 (안록산은)전 병력 20만군으로 거란을 토벌하여 보답하겠다 했다..(안록산은 이전에 거란을 치다가 화살을 맞고 대패한적이 있음) 현종은 듣고 조서를 내려 삭방절도사 아포사에게 그 군대를 합하라 했다. 포사는 9성의 수령이다.]
開元初,為默啜所困,內屬,帝寵之。祿山雅忌其才,不相下,欲襲取之,故表請自助。布思懼而叛,轉入漠北,祿山不進,輒班師。會布思為回紇所掠,奔葛邏祿,祿山厚募其部落降之。葛邏祿懼,執布思送北庭,獻之京師。
[개원 초, (아포사는)묵철에게 속해 있었는데, 당으로 귀부하자, 황제가 그를 총애하였다. 안록산은 그의 능력이 결코 자신보다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공격하여 취하려 하였다. 때문에 그는 스스로 돕겠다고 하였다. 포사는 두려워서 반란을 일으키고는, 막북으로 들어갔으나 록산은 가지 않고, 군대를 돌렸다. 포사는 회흘에게 공격당하여 막라록으로 도망왔다, 록산은 후막과 그의 부락을 함락시켰다. 막라록은 두려워서 포사를 잡아서 북정으로 보내서 경사에 바쳤다.]
時高仙芝屯陝,聞常清敗,棄甲保潼關,太守竇廷芝奔河東。常山太守顏杲卿殺賊將李欽湊,禽高邈、何千年,於是趙郡、鉅鹿、廣平、清河、河間、景城六郡皆為國守,祿山所有纔盧龍、密雲、漁陽、汲、鄴、陳留、滎陽、陝郡、臨汝而已。
[이때에 고선지가 섬(陝)에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봉상청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섬을 포기하고 동관을 사수했다. 태수 두연지는 하동으로 도망갔다. 상산태수 안호경은 적장 리흠주를 베고, 하임년을 사로잡았다. 그리하여 조군, 거록, 광평, 청하, 하간, 경성 육군을 모두 경사를 방어하는 요새로 삼았다. 안록산은 겨우 노룡, 밀운, 어양, 급, 업, 진류, 형양, 섬군, 임여를 점거했을 뿐이였다. ]
五代에 거란과 해가 활동한 지역을 보면
遼史 本紀第一 太祖上
明年秋七月,以兵四十萬伐河東代 北攻下九郡 ,獲生口九萬五千,駝 、馬 、 牛 、 羊不可勝紀.九月,城龍化州于潢河之南.... 하략)
[遼태조 2년 가을 7월, 군 사십만(四十萬)을 이끌고 하동(河東) 대북을 정벌하고, 九郡을 공격했는데 낙타, 말 ,양, 소, 양을 9만5천두를 얻었는데,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구월에 潢河의 남쪽에 룡화주에 성을 설치했다.]
明年春,伐女直,下之,獲其戶三百.九月,復攻下河東懷遠等軍.冬十月,引軍略至薊北,俘獲以還.先是德祖俘奚七千戶
[다음해 봄 女直을 정벌하여 3백호를 노획, 구월에 하동 회원등지의 군대를 공격, 겨울 10월 계북(葪北)을 경략, 해 7천호를 포로로 잡았다. ]
안록산이 현 중공의 하북성 일대에서 활동하지 않고,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의 사이에서 거란과 해를 공격한 것으로 본다면, 안사의 반란 원인이 명확해진다. 고선지는 749년에 석국과, 걸사국을 친다. 지금의 타슈켄트와, 케쉬이다. 케쉬, 즉 사국은 안록산의 지기, 사사명의 고향이다. 물론 범양절도사인 안록산의 영지이다. 당대 최고의 장수 고선지가 안록산의 영지를 공격했으니, 안록산은 자신의 정치적 생명에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751년에 고선지가, 아랍군과 싸워 패했다는 탈라스 전투 후에, 안록산은 하동절도사로 승진한다. 이것은 안록산의 입지가 더욱더 확고해졌으며, 고선지가 안록산에게 패한 것을 보여준다. 후세의 편수자들은 안록산 군대의 돌궐, 거란, 해부족의 용병을 이슬람군대로 덮어 씌웠다.
당조의 공격에 자신의 입지가 흔들릴 위기에 처해지자, 서기 755년 안록산은 중원공략을 결정한다. 한 달만에 동도 낙양(洛陽)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중원으로 치고 들어오자 고선지로 하여금 潼關을 수비하게 하고는 고선지는 모함을 받아 죽게 된다. 안록산이 장안(長安)을 점령하자, 당 현종은 파촉으로 몽진을 가는데, 실제로는 고선지는 자신의 봉지인 안서도호부에서 안록산을 막은 것으로 보인다. 안록산의 최대의 적은 고선지였고, 고선지를 제압해야 중원을 뚫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고선지를 제압하지 못하면 후방이 고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고구려의 유민 고선지는 동북아시아에서 서역으로 끌려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고향 지금의 신강지역에 있으면서, 고구려 부흥운동세력들을 진압한 것이다. 고구려의 중앙정부가 망한 뒤에도, 료동에 항복하지 않은 성은 수십 성이나 되었고, 조작으로 안서도호부가 되어버린, 안동도호부 사정을 잘 아는 고선지로 하여금 고구려 잔존세력을 토벌하게 하고는 토사구팽 시켜 버렸다. 고선지는 파미르동쪽 지역을 거의 다 장악하고, 쿠차를 중심으로 천산을 넘어 소그드지역을 3번이나 공격한다. 이 소그드 지역 공격은 안록산과 고선지의 전투로 보인다. 그런데 고선지가 소그드원정을 하기 전 소발율국, 호밀국을 정벌할 때의 기사를 보면, 흥미로운 기록이 보인다.
舊唐書 列傳第五十四 高仙芝
娑夷河,即古之弱水也,[사이하는 곳 옛 약수다.]
新唐書 列傳第六十 高仙芝
娑夷河,弱水也。[사이하는 약수다.]
위의 신․구당서기록에 고선지가 소발률국의 중심지인 아노월성 너머에 있는 娑夷河를 약수(弱水)라고 한다, 길기트(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국경지대) 와 파미르 사이로 바로 인더스 상류와 갠지스의 상류 인근이다,
약수는 우임금이 9주를 정할 때부터 나오는 지명으로 구주의 雍州에 있다. 즉 옹주의 중심은 진(秦)의 수도 咸陽이다.
9주는 사해이고, 사해는 지역 명으로 서융, 북적, 남만, 동이를 말하며 다른 말로 九夷를 뜻한다. 옹주의 서쪽에는 서융이 사는데, 周, 秦의 선대는 서융이다. 주(周)는 豳, 岐에서 시작했고, 秦은 大邱, 咸陽, 秦州, 秦川에서 시작했다. 주나라가 東周가 되고 춘추전국 때 까지도 秦은 낙후된 지역 이였다. 진시황이 육국을 정벌하고 천하의 주인이 되기 전까지는 문화의 중심은 힌두쿠시 이북과 파미르 이동의 신강지역이었다. 진시황이 함양과 아방궁을 세우고, 후에 한고조 유방이 豊沛에서 일어나 장안에 장락궁과 미양궁을 세운 이후로 서경(西京)/장안(長安)은 새로운 중원의 중심지로 부각되며, 천하의 중앙으로 거듭난다.
중국사와 한국사의 최대쟁점인 고구려와 당의 관계는 고려/조선의 西京세력과, 東京세력간의 천하쟁탈전이다. 동경과, 서경 이 양경체제는 조선사의 핵심이다. 서주와, 동주, 서한과, 동한은 수도의 이동을 뜻하며, 정치, 경제의 중심지와 그 정권이 동에서, 서로 , 서에서 동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와 수, 당의 전쟁 역시 서경과 동경세력간의 대결구도이다.
전대미문의 漢朝. 漢族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더욱더 혼란을 가중시킨다. 漢은 韓의 변형이 아닐까? 또한 발음으로는 한, 칸, 으로 훈으로도 읽을 수 있다. han , khan, hun. kan, 흉노, 훈, 키탄, 걸안, 키타이이다. 漢․楚 대결로 중원이 혼란한시기에 흉노는 왜 중원을 공격하지 않았을까? 흉노의 休屠, 幽都, , 燕山, 한고조의 豊沛, 剢郡, 모두 겹치는 지역이다. 한고조가 흉노의 당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흉노는 고구려와 매우 흡사하고, 한고조와, 무제가 싸웠던, 흉노는 동쪽의 제후 군벌들이거나, 대황 밖에 사는 중앙에서 밀려난 세력일 뿐이다. 흉노, 몽골, 선비, 돌궐, 연연, 키르기즈, 거란, 해, 말갈, 숙신, 오환, 오손을 포함할 수 있는 단어는 "고려"이다. 고려는 유라시아 전 대륙을 뜻하는 것이며, 고려의 영역 안에 존재한, 사이(四夷)들 명칭을 현대적 국가개념으로 재탄생시키면, 고려의 력사는 제각기 찢어져 각각 별개의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흉노, 선비, 말갈 ,돌궐이 고려의 중앙정부를 전복시키면, 중국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고, 실권한 세력은 다시 오랑캐가 되는 것이다.
'요․순은 동이(東夷)였다'하고, 주문왕은 서융(西戎)/西伯 이였고, 秦의 선조 非子도, 서융이었다. 즉 사이라 함은 中國/전복(甸服)밖의, 후복(侯服), 수복(綏服), 요복(要服), 황복(荒服)등등을 가리키는 말이며, 중국의 경영시스템이 백성의 요구에 부합하지 못될 때 사이의 제후들은 새로운 지도자를 요구하고, 그에 따라 새로운 중앙정부 中國이 탄생하게 된다. .
고로 천자가 된 자는 사이의 제후와 백성들을 잘 먹고, 잘 살게 할 수 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당 현종이 개원의 치를 통해 당조 개국 이래 최대의 번영을 누렸으나, 말년에는 양귀비에 빠져 국사를 멀리하고, 중앙정부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자, 안록산이 이 틈을 타 들고 일어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구려가 비록 천하의 패자로 오랜 세월을 군림하였지만, 결국 말년에는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군벌들이 난립하게 되자, 隨‧ 唐이 남방의 제후들을 진압하고 북방과 동방의 고구려 = 진(晉) : (韓, 魏, 趙 세력)을 무너뜨리게 된다.
이렇게 수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중조의 교체는 주기적으로 반복되어져 왔으며, 후세에 왕건이 고려인 송조를, 리성계가 또 다른 고려인 명조를 건설하는 것이다. 이들은 모두 황제와 치우의 자손으로 그 근본이 같으며, 천하의 주인이 어느 지방 출신이냐에 따라 왕조의 명칭이 바뀌는 것일 뿐이다.
19세기 초, 제국주의의 유령이 대대적으로 세계의 종교, 철학, 력사, 과학을 새로 재편하면서, 고구려와 당, 조선과 명을 현대국가로 이 분화시키고, 세계사를 쪼개 놓고, 100년이 넘도록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주입, 교육시켰으니, 국가 간의 종교분쟁, 민족갈등이 생기고, 동북, 서북공정이라는 말 같지도 않은 이론까지도 나오게 된다.
그러나 선조들이 즐겨 읽으시고, 노래하던 문학작품은 손을 대기가 꽤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의 할아버지들은 수백수천번이고 암송하고, 불렀던 리태백과, 두보의 시, 초한지, 삼국지, 서유기 등은, 쉽게 조작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한다. 필자의 조부께서는 당신 살아생전에 리백의 시와 삼국지를 항상 애독하셨고, 외조부께서는 외할머니께서 적적하실 때마다, 삼국지를 항상 읽어주셨다. 어려서 시골에서 자란 나는 여름에는 대청마루에서, 겨울에는 안방 화롯불 앞에서, 필자의 조부와 장기를 두면서, 한고조와, 항우의 고사를 들으면서 자랐다. 초한지와 삼국지라면 대한민국사람들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안다. 중국 사람이 썼다는 책을 한국인이 어찌 더 잘 아는지 대륙의 중공 인은 신기하다고까지 말한다.
이 초한지와, 삼국지의 무대, 그리고, 리백의 고향이 巴蜀이다. 유방이 파촉으로 도망가서 절치부심하여 漢朝를 건국하고, 蜀漢의 유비와 제갈량은 파촉에서 중원을 도모한다. 현종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자, 파촉으로 피신한다. 북방세력이 중원으로 쳐들어오면, 모두들 파촉으로 도망가서 후일을 도모한다. 왕건이 전촉의 왕이었다는 구오대사, 신오대사의 기록도 우연의 일치만은 아니라 본다. 발해도 마찬가지이다. 발해는 大震國이라고도 하기고 하지만, 역시 고구려의 후예라고 자청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89권, 34년(1539 기해 / 명 가정(嘉靖) 18년) 2월 26일(을축)
황제의 호광 행차에 사신 보내는 일을 상고하게 하니 전례 없다 하다
……전략) 그러나 옛날에 천자가 순수하면 사방의 악목(岳牧)이 조회하였다. 지금 황제가 멀리 행차한다는 말을 들었으니, 비록 해외에 있으나 특별히 사신을 보내야 하지 않겠는가? 전례를 상고하여 알아보라.”
[然古者, 天子巡狩, 方岳朝焉。 今聞皇帝遠幸, 雖在海外, 無乃有別遣使之事乎? 其廣考前例。”]
당 현종(唐玄宗)이 촉(蜀)에 행차하였을 때에 고려사신이 삼협(三峽)을 경유하여 서촉(西蜀)에 갔었다고 들었고 그 후에는 듣지 못하였습니다. 더욱이 중국의 산천과 도로는 외국인이 모르게 하니, 행재소에 가서 조회하는 일은 분명히 없었을 것입니다.”
[唐玄宗幸蜀時, 高麗使臣, 由三峽達于西蜀, 其後無聞焉。 況中朝山川道里, 不使外國人知之。 往朝行在所, 必無之事也。” ]
또 전교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이 행재소에 가서 조회한 것은 다만 당 현종 때에 있었던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종은 파천(播遷)을 하였으므로 고려 사람이 가서 문안한 것이다.
[又傳曰: “我國入朝于行在所, 只聞唐玄宗時事也。 然玄宗播遷, 故高麗人奔問矣。]
당 현종이 파촉으로 피난을 가는데 고려사신이 문안을 했다?
안사의 난은 천보 14년. 서기 755년에, 현종은 다음해인 756년에 파촉으로 도망간다.
이 시기에 고려라고 할 수 있는 나라는 발해와 신라밖에 없다. 발해, 신라가 어디에 있었길 래 현종을 문안했다고 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는 걸까? 정사에 기록되지 않은 기록이 왕조실록과 일성록에 기록되어 있다. 중종실록에서는 고려라고 하고 있고, 정조의 일성록에서는 신라라고 하고 있다.
국역 일성록 정조10년 병오(1786,건륭 51) 1월22일(정묘)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였다.]
.......전략)명황(明皇 당 현종)이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피하여 촉(蜀)에 행행한 시기에 특별히 신라(新羅)에서 문안 온 것을 가상하게 여겨 이원의 악부(樂部)를 하사하니 신라왕이 영광스럽게 여겨 종묘(宗廟)에 올려 마침내 신라와 고려의 종묘악이 되었던 것인데, (하략.......
왕조실록에서는 분명히 고려인이라고 하였다. 그 당시 고려는 발해, 대진국이다.
당이 신라의 대조명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왕건이 세운 고려는 당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고려 宋朝를 세운 것이 된다. 그 고려가 元朝에 밀려서 강화도로 피난을 간 정부를 조선 태조가 접수한다. 문제는 蜀의 위치다. 북방에서 중원을 밀고 들어와 관중이 무너지면, 모두 공식이나 되는 양 파촉으로 피난을 간다.
왕건이 前蜀의 왕이자 고려 태조라는 설이 있다. 촉나라, 즉 성도부는 한고조 유방, 촉한의 유비와 제갈량이 권토중래한 곳으로 물산이 풍부하고, 秦嶺과 劍閣의 험악한 棧道들이 막고 있어 쉽게 쳐들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대진국의 대씨가 왕씨로 이어져 온 고려가 아닐까? 발해와 신라, 발해와 당의 구도로 보면, 매우 개연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중원과 파촉의 구도와 조선왕조실록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이 코뿔소와 코끼리이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72권, 7년(1476 병신 / 명 성화(成化) 12년) 10월 21일(신묘)
박효원 등이 명군병·선명후암군병·현비병의 세 개의 병풍을 바치다. 병풍의 내용
○명군병(明君屛)
................전략)
당현종도(唐玄宗圖)
현종이 제위(帝位)에 있은 지 해가 오래되자 차차 사치의 욕심이 늘어나고 정사(政事)에 게을러져서 수왕(壽王)의 비(妃) 양씨(楊氏)를 맞아들여 귀비(貴妃)를 삼고, 오로지 음악과 미색(美色)으로 즐겼다. 잔치를 할 때 마다
[玄宗在位歲久, 漸肆奢慾, 怠於政事, 納壽王妃楊氏爲貴妃, 專以聲色自娛。 每酺宴........]
... 중략.....)또 궁인(宮人)을 동원하여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으로 춤추게 하였다. 또 무마(舞馬) 1백 필(匹)로 하여금 잔을 물고 축수(祝壽)케 하고, 또 물소필자주: 물소는 오역 코뿔소임[犀]와 코끼리[象]를 입장(入場)시켜 절도 하고 춤도 추게 하니, 안녹산(安祿山)이 보고 기뻐하였다.
[又出宮人舞霓裳羽衣。又敎舞馬百匹銜盃上壽, 又引犀象入場或拜或舞, 安祿山見而悅之。]
당덕종도(唐德宗圖)
덕종은 양암(諒闇) 중에 있을 때는 모든 일을 예법에 따랐다. 이에 앞서 여러 나라에서 길들인 코끼리를 여러 번 바쳤는데, 임금이 말하기를,
“코끼리는 사료(飼料)를 소비시키고 물성(物性)이 다른데, 무엇에 쓸 것인가?”
하고, 명하여 형산(荊山)의 남쪽에 놓아주게 하였다. 하략........
[德宗在諒闇中, 動遵禮法。 先是諸國屢獻馴象, 上曰: “象費豢養, 而違物性, 將安用之?” 命縱於荊山之陽。]
당 현종 때에 장안성에 코끼리가 살았고, 덕종 때에도 살았으며, 원 세조 쿠빌라이는 연경에서 코끼리를 타고 반란세력을 진압했다. 나얀과의 전투 때이다.
[대카안은 내가 말한 구릉 위에서 네 마리의 코끼리 위에 만든 목제 가마에 앉아 있었다.]
김호동 역주 , <마르코폴로의 동방견문록: 원제 세계의 서술>사계절 229P
조선왕조실록 태종 12년 임진(1412,영락 10) 12월10일 (신유)
전 공조 전서 이우가 코끼리에 밟혀 죽다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이우(李瑀)가 죽었다. 처음에 일본 국왕(日本國王)이 사신을 보내어 순상(馴象)을 바치므로 3군부(三軍府)에서 기르도록 명했다. 하략...........)
[前工曹典書李瑀死。 初, 日本國王遣使獻馴象, 命畜于三軍府.]
당의 장안, 원의 연경, 명의 북경, 한양에는 코끼리가 살았다.
코끼리는 인도코끼리와 아프리카 코끼리가 있고, 코뿔소도 인도 북부와 아프리카에 산다.
즉 조선의 수도에 있던 코끼리는 인도북부에서 데려왔거나, 아프리카지역 = 왜에서 조공 받은 것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코끼리를 3군부= 수도방위사령부에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고, 때로는 토목공사에 사용하기도 했다. 그것도 겨울인 12월에 전 공조전서 이우가 코끼리에 밟혀 죽는다. 한반도의 한양, 중공의 서안의 12월에 코끼리가 산다는 것은 말도 안돼는 황당개그다.
이곳은 중앙아시아지역으로는 설명이 될 수 밖에 없다.
아미르 티무르식의 복합군대는 몽골제국의 유목기마병, 나폴레옹식의 포병, 전통의 보병, 그리고 탱크기능을 담당한 코끼리부대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전술의 다양성과 효율성이 배가 되었다. 성동기< 아미르 티무르> 써네스트 177P)
리성계가 조선을 창업하기 전 고려정부는 원에게 밀려 중원을 내주고 강화도로 피난가 있었는데, 이곳이 고려의 남경=개경으로 보인다. 명사에서 태종이 수도를 남경에서 북경으로 옯기는 과정도 중국사에 나오는 현 베이징과 난징같이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긴 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조선의 3경,혹은 5경체제는 중원의 경기지방 즉 사방 천리 혹은 삼천리 안에 있어야 천자가 행궁하기도 쉽고, 통치하기도 수월하다. 몽골이 유라시아 전 대륙을 석권했지만, 정복하지 못한 곳이 단 두 지역인데, 하나는 인도대륙이고, 또 하나는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에 있던 맘룩왕조다.
쿠빌라이는 카불에서, 파키스탄으로 넘어가는 카이버패스(Khyber Pass)를 뚫지 못해서 고려정부가 南宋으로 남아 정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북인도 지역 파키스탄은 거대한 갠지스 강이 흐르고, 북쪽으로는 거대한 산맥들이 막고 있어서, 탈레반의 은신처로 지목되는 곳이고, 펀잡(Punjab) 평야가 있어 대단히 비옥하며, 북쪽 간다라지역은 불교문화의 중심지였다.
고려는 불교국가였고, 남해관음보살을 모시던 나라였으며, 불교미술 최대의 걸작 수월관음도를 남겼다. 서유기의 손오공이 삼장법사를 모시고 서역을 가면서 급할 때 마다 남해관음보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현장은 이 남해보살을 한번 만나고자 당의 장안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페샤와르로 간 것이지, 현 시안에서 신강을 건너 인도로 갔다, 배타고 중공의 동해안에 도착했다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 (이에 관한 것은 차후에 서술하겠다.) 즉 현재의 파키스탄 지역이 남송, 강화도의 고려로 지목되며 중국사에서의 남경이 된다. 그리고 태조는 북방을 석권하고 고려 남경의 壽昌宮에서 즉위하고 북경, 즉 한양으로 천도를 하게 된다. 그곳이 안록산이 쳐들어갔던 장안, 서경, 한양이다.
첫댓글 사마르칸트가 갈사국이란건 전 좀 이해가 안갑니다...부여나 고구려의 평양부근 땅은 무지 춥다 했습니다.
내외 몽골 서부정도가 패망 동부여의 갈사국 아닐까란게 제 생각입니다.
파키스탄이 남한(南漢) 격이자 남송(南宋)이란건 저도 같은 입장입니다.
사마르칸트는 강국이구요. 갈사국은 지금의 케쉬입니다. 샤흐리브즈 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