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깟사빠 사자후 경(Kassapasihanada Sutta. D8) - 고행과 참된 道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 때에 세존께서는 우준냐에서 깐나깟탈라에 있는 사슴동산에 머물고 계셨다. 그 무렵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세존께 다가갔다. 가서는 세존과 힘께 안부 인사를 나누었다. 두 분이 안부 인사와 우호적인 대화를 나눈 뒤에 한 곁에 섰다.
2. 한 곁에 서서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와 같이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저는 이렇게 들었습니다. '사문 고따마는 모든 고행을 비난한다. 그는 모든 고행자와 거친 삶을 사는 자(난행고행)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한다.'라고. 고따마 존자시여, '사문 고따마는 모든 고행을 비난한다. 그는 고행자와 거친 삶을 사는 자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한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고따마 존자께서 말씀하신 대로 말하는 자들입니까? 거짓으로 고따마 존자를 비난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들은 가르침에 일치하는 법을 설명하는 것입니까? (고따마 존자가 설했다고 전해진 이것을 반복하더라도) 어떤 사람도 나쁜 견해에 빠져 비난의 조건을 만나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저는 고따마 존자를 비난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3. "깟사빠여, '사문 고따마는 모든 고행을 비난한다. 그는 고행자와 거친 삶을 사는 자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한다.'라고 말하는 자들은 내가 말한 대로 말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있지도 않는 거짓으로 나를 비난하는 것입니다.
깟사빠여, 나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天眼)으로, 고행자와 거친 삶을 살았던 어떤 고행자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깟사빠여, 나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고행자와 거친 삶을 살았던 어떤 고행자가 죽어서 몸이 무너진 다음 좋은 세계, 하늘 세계에 태어나는 것을 봅니다.
깟사빠여, 나는 이런 고행자들의 온 곳과 갈 곳과 죽고 다시 태어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있는데 어찌 내가 모든 고행을 비난하고, 모든 거친 삶을 사는 고행자를 전적으로 비난하고 비방하겠습니까?
4. 깟사빠여, 어떤 사문·바라문들은 현명하고 많이 배우고 다른 자들과의 논쟁에 뛰어나고 화살로 머리카락조차 맞힐 수 있는 정도로 그들은 예리한 지혜로써 다른 견해들을 단번에 잘라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들과 나는 어떤 점들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어떤 점들에 있어서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때에 '옳다'고 말하는 것을 나도 어떤 때는 '옳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들이 어떤 때에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나도 어떤 때는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때에 '옳다'고 말하는 것을 어떤 때 나는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들이 어떤 때에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어떤 때 나는 '옳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가 어떤 때에 '옳다'고 말하는 것을 그들도 어떤 때는 '옳다'고 말하기도 하고, 내가 어떤 때에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그들도 어떤 때는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내가 어떤 때에 '옳다'고 말하는 것을 어떤 때 그들은 '옳지 않다'고 말하기도 하고, 내가 어떤 때에 '옳지 않다'고 말하는 것을 어떤 때 그들은 '옳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5.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서 이렇게 말합니다. '도반들이여, 서로 일치하지 않는 점들에 대해서는 일단 그대로 두도록 합시다. 서로 일치하는 점들에 대해서는 이제 현자들이 (다음과 같이) 스승은 스승끼리, 교단은 교단끼리,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게 합시다. 즉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서 선하지 않은 것이고 선하지 않은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 불리고,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좋지 않은 것이고 좋지 않은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이제 누가 이러한 법들을 남김없이 버렸습니까? 사문 고따마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들입니까?라고.
깟사빠여, 그런데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해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서 선하지 않은 것이고 선하지 않은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 불리고,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사문 고따마가 이런 법들을 남김없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들은 부분적으로만 버렸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이렇게 여기서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면 대부분은 내가 칭송됩니다.
6. 깟사빠여, 또 현자들이 (다음과 같이) 스승은 스승끼리, 교단은 교단끼리,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도록 합시다. 즉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받들어 실천해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라 불리고,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이제 누가 이런 법들을 남김없이 성취하였습니까? 사문 고따마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들입니까?'라고.
깟사빠여, 그런데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해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행해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라 불리고,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사문 고따마가 이런 법들을 남김없이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들은 부분적으로만 성취하였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이렇게 여기서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면 대부분은 내가 칭송됩니다.
7. 깟사빠여, 또 다시 현자들이 (다음과 같이) 스승은 스승끼리, 교단은 교단끼리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도록 합시다. 즉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서 선하지 않은 것이고 선하지 않은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 불리고,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이제 누가 이러한 법들을 남김없이 버렸습니까?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의 모임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들의 제자들의 모임입니까?라고.
깟사빠여, 그런데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해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서 서로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서 선하지 않은 것이고 선하지 않은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고 비난받아 마땅한 것이라 불리고,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실천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나쁜 것이고 나쁜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의 모임이 이런 법들을 남김없이 버렸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들의 제자들의 모임은 부분적으로만 버렸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이렇게 여기서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면 대부분은 내가 칭송됩니다.
8. 깟사빠여, 또 현자들이 (다음과 같이) 스승은 스승끼리, 교단은 교단끼리,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도록 합시다. 즉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받들어 실천해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라 불리고,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이제 누가 이런 법들을 남김없이 성취하였습니까?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 모임입니까, 아니면 다른 스승들의 제자들 모임입니까?'라고.
깟사빠여, 그런데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해서 이와 같이 말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존자들이여, (우리 사이에 일치하는 점)들 가운데 선한 것이고 선한 것이라 불리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고 비난받지 않는 것이라 불리고, 받들어 실천해야 하는 것이고 받들어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 불리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고 성자들에게 적합한 것이라 불리고,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이라 불리는 이러한 법들이 있습니다. 사문 고따마의 제자들의 모임은 이런 법들을 남김없이 성취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스승들의 제자들의 모임은 부분적으로만 성취하였습니다.'라고.
깟사빠여, 이렇게 여기서 현자들이 서로 문의하고 서로 이유를 묻고 서로 숙고하면 대부분은 내가 칭송됩니다.
9. 깟사빠여, 우리에게는 법이 있고 닦음과 익힘이 있습니다. 그대로 실천을 하면 '사문 고따마는 시기에 맞는 말을 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다'라고 스스로 알게 되고 스스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깟사빠여, 어떤 법이 있고 어떤 닦음과 익힘이 있기에 그대로 실행을 하면 '사문 고따마는 시기에 맞는 말을 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다'라고 스스로 알게 되고 스스로 보게 됩니까?
그것은 바로 이 여덟 가지 성스러운 바른 길(八支聖道)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삼매(正定) 입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 법이고 바로 그 닦음과 익힘입니다. 그대로 실천을 하면 '사문 고따마는 시기에 맞는 말을 하고, 사실대로 말하고, 이익되게 말하고, 법에 맞게 말하고, 율에 맞게 말하는 자다'라고 스스로 알게 되고 스스로 보게 됩니다.
10. 이렇게 말하자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도반 고따마여, 다음과 같은 고행을 실천하는 것도 이러한 사문·바라문들에게는 사문(사문됨)이라 불리고, 바라문(바라문됨)이라 불립니다.
도반 고따마여, 그는 나체수행자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음식을 주기 위해서 오라 하면 가지 않고, 음식을 주기 위해서 서라 하면 서지 않으며, 가져온 음식을 받지 않고, 자기 몫으로 지정된 것을 받지 않으며, 초청에 응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릇으로 주면 받지 않고, 접시로 주면 받지 않고, 문지방을 넘어서 주는 것, 막대기에 꿰어진 것, 절구공이 안에 있는 것을 받지 않으며, 두 사람이 먹고 있을 때 주는 것을 받지 않고, 임신부가 주는 것을 받지 않고, 아이에게 젖을 먹이는 여자로부터, 남자 품에 안겨 있는 여자로부터 받지 않으며,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주는 것을 받지 않으며, 개가 옆에 있을 때 받지 않으며, 파리 때가 날라 다니는 곳에서 받지 않으며, 생선과 고기를 받지 않으며, 술, 과즙주, 발효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그는 한 집에 가서 한 집의 음식만을 받고, 두 집에 가서 두 집의 음식만을 받고, ··· 일곱 집에 가서 일곱 집의 음식만을 받아 먹습니다. 한 닷띠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두 닷띠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하고, ··· 일곱 닷띠의 음식으로 삶을 유지합니다. 하루에 한 번만 음식을 먹고, 이틀에 한 번만 음식을 먹고, ··· 일주일에 한번만 음식을 먹고, 보름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며 삽니다.
11. 도반 고따마여, 다음과 같은 고행을 실천하는 것도 이러한 사문·바라문들에게는 사문이라 불리고, 바라문이라 불립니다.
그는 채소를 먹는 자이고, 수수를 먹기도 하고, 생쌀을 먹기도 하고, 부드러운 뼈를 먹기도 하고, 수초를 먹기도 하고, 왕겨를 먹기도 하고, 쌀 씻은 물을 먹기도 하고, 깻가루를 먹기도 하고, 풀을 먹기도 하고, 소똥을 먹기도 하고, 나무뿌리와 열매를 음식으로 해서 살고, 떨어진 열매를 먹는 자입니다.
12. 도반 고따마여, 다음과 같은 고행을 실천하는 것도 이러한 사문·바라문들에게는사문이라 불리고, 바라문이라 불립니다.
그는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마포로 된 거친 옷을 입고, 시체를 싸맨 헝겊으로 만든 옷을 입고, 넝마로 만든 옷을 입고, 나무껍질로 만든 옷을 입고, 영양 가죽을 입고, 영양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입고, 꾸사 풀로 만든 옷을 입고, 판자로 만든 외투를 입고, 머리카락으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동물의 꼬리털로 만든 담요를 두르고, 올빼미 털로 만든 옷을 입습니다. 그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고행을 실천하여 머리카락과 수염을 뽑는 자이고, 앉는 것을 거부하는 자여서 자리에 앉지 않고, 쪼그리고 앉는 고행을 실천하는 자여서 쪼그리고 앉는 자이며, 가시를 가까이 하는 자이어서 가시로 된 침상을 사용하며,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 고행을 실천하며 머뭅니다."
13. "깟사빠여, 비록 그가 나체수행자이고, 관습을 거부하며 살고, 손에 받아 핥아서 먹고 ··· 보름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며 살더라도, 그는 단지 방편으로 음식을 먹기에만 몰두하여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에게 계의 갖춤과, 삼매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은 닦아지지 않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문으로부터 멀리 있고, 바라문으로부터 멀리 있습니다.
깟사빠여, 참으로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비구는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14. 깟사빠여, 비록 그가 채소를 먹는 자이고 ··· 떨어진 열매를 먹는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계의 갖춤과, 삼매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은 닦아지지 않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문으로부터 멀리 있고, 바라문으로부터 멀리 있습니다.
깟사빠여, 참으로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비구는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15. 깟사빠여, 비록 그가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 고행을 실천하며 머문다 할지라도, 그에게 계의 갖춤과, 삼매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은 닦아지지 않고 실현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사문으로부터 멀리 있고, 바라문으로부터 멀리 있습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비구는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16. 이렇게 말씀하시자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습니다."
"깟사빠여, 세상에서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다.'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17. 그런데, 깟사빠여, 만일 나체 수행자이고 ··· 보름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며 사는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을 두고,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고 너무나 실천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어렵다. 바라문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깟사빠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심지어는 하녀까지도, '오, 참으로 나는 나체 수행자가 되어야겠다, 관습을 거부하며 살아야 겠다, 손에 (받아) 핥아서 먹어야겠다 ··· 보름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며 살아야겠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실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두고,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다.'라고 한다면 '사문은 어렵다. 바라문은 어렵다.'라는 말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애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이것이, 깟사빠여, 비구는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18. 그런데, 깟사빠여, 채소를 먹는 자이고 ··· 떨어진 열매를 먹는 자라는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을 두고,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고 너무나 실천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어렵다. 바라문은 어렵다.'라는 말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깟사빠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심지어는 하녀까지도, '나는 채소를 먹는 자가 되어야겠다 ··· 떨어진 열매를 먹는 자가 되어 살아야겠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실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두고,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다'라고 한다면, '사문은 어렵다. 바라문은 어렵다.'라는 말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이것이, 깟사빠여, 비구는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19. 그런데, 깟사빠여,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 고행을 실천하여 머무는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을 두고,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고 너무나 실천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어렵다. 바라문은 어렵다.'라는 말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깟사빠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심지어는 하녀까지도, '나는 삼베로 만든 옷을 입어야겠다 ···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 고행을 실천하며 머물러야겠다.'라고 하면서 이렇게 실천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이 정도의 고행을 닦는 것과는 다른 것을 두고, 사문은 어렵고 바라문은 어렵다'라고 한다면 '사문은 어렵다. 바라문은 어렵다.'라는 말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이것이, 깟사빠여, 비구는 사문이라고도 바라문이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20. 이렇게 말씀하시자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사문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습니다."
"깟사빠여, 세상에서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라는 것은 당연합니다.
21. 그런데, 깟사빠여, 만일 그가 나체수행자이고 ··· 보름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며 살더라도, 그는 단지 방편으로 음식을 먹기에만 몰두하여 사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방편으로 음식을 먹으며 사는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을 두고, '사문은 알기 어렵고 바라문은 알기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깟사빠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심지어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나체 수행자이고 ··· 보름에 한 번만 음식을 먹으며 산다.'라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두고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이것이, 깟사빠여, '비구는 사문이다. 비구는 바라문이다.'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22. 그런데, 깟사빠여, 채소를 먹는 자이고 ··· 떨어진 열매를 먹는 자라는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을 두고,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깟사빠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심지어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채소를 먹는 자이고 ··· 떨어진 열매를 먹는 자다.'라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두고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리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이것이, 깟사빠여, '비구는 사문이다. 비구는 바라문이다.'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23. 그런데, 깟사빠여,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 밤에 세 번을 물에 들어가는데 몰두하며 머문다 할지라도,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을 두고,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깟사빠여,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심지어는 하녀까지도, '이 사람은 삼베로 만든 옷을 입고 ··· 밤에 세 번 물에 들어가는 데 몰두하며 머문다.'라고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이 정도의 고행을 실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두고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고 한다면, '사문은 알기가 어렵다. 바라문은 알기가 어렵다.'는 말은 적절합니다.
깟사빠여, 비구가 성냄이 없고 악의가 없는 자애로운 마음을 닦을 때, 마음의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에 의한 해탈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여 성취해 머뭅니다. 이것이, 깟사빠여, '비구는 사문이다. 비구는 바라문이다.'라고도 불리는 것입니다."
24. 이렇게 말씀하시자 나체수행자 깟사빠는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어떤 것이 계의 갖춤입니까? 어떤 것이 삼매의 갖춤입니까? 어떤 것이 지혜의 갖춤입니까?"
25. "깟사빠여, 여기 여래가 이 세상에 출현합니다.
‘그분 세존께서는 아라한[araham]이시며, 모든 법을 바르게 완전히 깨달은 분(samma sambuddho)이시며, 명지와 실천을 구족한 분(vijjacaranasampanna)이시며, 열반으로 잘 가신 분(sugato)이시며, 중생들의 세간을 잘 알고 계신 분(lokavidu)이시며, 위 없으신 분(anuttaro)이시며, 어리석은 사람을 잘 길들이는 분(purisadhammasarathi)이시며, 하느님과 인간의 스승(satthadevamanusam)이시며, 깨달은 분(buddho)이시며,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신 분(세존)(bahgava)입니다.
그분은 이 세상의 모든 중생들, 즉 마라들, 범천들, 축생들, 사문들, 바라문들, 천신 하느님및 인간들에게, 스스로 철저히 알았고, 겪어 알아, 갖추신 것을 널리 알리고 계십니다.
그분은 시작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끝도 훌륭하고, 의미와 표현이 일치하는 법을 설하며, 완전히 원만하고 청정한 거룩한 삶을 드러냅니다.'
26. 이런 법을 장자나 장자의 아들이나 다른 가문에서 태어난 자가 듣습니다. 그는 이 법을 듣고서 여래에게 믿음을 가집니다. 그는 이런 믿음을 구족하여 이렇게 숙고합니다. '재가의 삶이란 막혀있고 때가 낀 길이지만 출가의 삶은 열린 허공과 같다. 재가에 살면서 완전무결하고 청정무구한 잘 닦여진 자개껍질과 같은 청정범행을 실천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나는 이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리라.'라고.
27. 그는 나중에 재산이 적건 많건 간에 모두 다 버리고, 일가친척도 적건 많건 간에 다 떠나서 머리와 수염을 깎고, 물들인 옷을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합니다.
28. 그는 이렇게 출가하여 계율을 지키며 머무릅니다. 바른 행실과 행동의 영역을 갖추고, 작은 허물에 대해서도 잘못됨을 보며, 학습계목들을 받아지녀 게으르지 않고 익히며 닦습니다. 선한 몸의 업과 말의 업을 잘 갖추고, 생계를 청정히 하고, 계를 구족하고, 감각의 근들의 문을 보호하고 마음새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고,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합니다.
29. 깟사빠여, 어떻게 비구는 계를 갖춘 자입니까? [짧은 길이의 계: 모두 26가지로 계를 지님]
30. [중간 길이의 계: 모두 10가지로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을 멀리함]
31. [긴 길이의 계: 모두 7가지로 삿된 생계를 멀리함]
32. 깟사빠여, 이렇게 계로써 잘 단속하는, 계를 갖춘 그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도반들이여, 적을 정복한, 관정(灌頂. 왕이 즉위할 때 사해의 물을 정수리에 부어 축의 하는 것)의 의식을 치르고 왕위에 오른 끄샤뜨리야 왕은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계로써 잘 단속하는, 계를 갖춘 그 비구는 어느 곳에서도 두려움을 보지 못합니다.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戒蘊)을 갖춘 그는 안으로 피하지 않아도 되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깟사빠여, 비구는 계를 갖춘 자입니다.
33. 어떻게, 깟사빠여, 비구는 감각의 근(기능)에서 문을 보호하는 자입니까?
깟사빠여, 여기 비구는 눈으로 형상을 보면서 표상(相)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느낌(受)을 붙잡지 않습니다.. 만약 그의 눈의 근(眼根)이 보호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삿되고 선하지 않은(간탐과 고뇌) 형상들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눈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 길들이기 위해, 고요하게 하기 위해 닦고 익힙니다. ···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 ··· 코로 냄새를 맡으면서 ··· 몸으로 감촉을 느끼면서 ··· 마음으로 법(마음현상)을 인식하면서 표상을 붙잡지 않고, 뒤따르는 느낌을 붙잡지 않습니다. 만약 그의 마음의 근(意眼))이 보호되어 있지 않으면 마음에 들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법들의 공격을 받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마음의 근을 제어하기 위해, 길들이기 위해, 고요하게 하기 위해 닦고 익힙니다.
깟사빠여, 이 성스러운 감각의 근의 단속을 갖춘 그는 안으로 더렵혀지지 않는 행복을 경험합니다. 이렇게, 깟사빠여, 비구는 감각의 근에서 문을 보호하는 자입니다.
34. 어떻게, 깟사빠여, 비구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갖춘 자입니까?
깟사빠여, 여기 비구는 나아갈 때도 물러갈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면서(正知) 행합니다. 앞을 볼 때도 돌아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구부릴 때도 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가사·발우·의복을 지닐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먹을 때도 마실 때도 씹을 때도 맛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대소변을 볼 때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걸으면서 · 서면서 · 앉으면서 · 잠들면서 · 잠을 깨면서 ·말하면서 · 침묵하면서도 분명히 알면서 행합니다.
이렇게, 깟사빠여, 비구는 마음새김과 알아차림을 갖춘 자입니다.
35. 어떻게, 깟사빠여, 비구는 만족한 자입니까?
깟사빠여, 여기 비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의복과 몸을 지탱하기 위한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을 수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날개를 가진 새는 어디를 날아가더라도 오직 자기의 양 날개만으로 날아갑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비구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의복과 몸을 지탱하기 위한 음식으로 만족합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이것을 수용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렇게, 깟사빠여, 비구는 만족한 자입니다.
36. 이러한 성스러운 계의 조목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감각의 근의 단속을 잘 갖추고, 이러한 성스러운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잘 갖추고, 이런 성스러운 만족을 갖춘 그는 숲 속이나, 나무 아래나, 산이나 골짜기나 산속 동굴이나 묘지나 노지나 짚더미와 같은 외딴 처소를 의지합니다. 탁발하여 공양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똑바로 세우며 전면에 마음새김을 확립합니다.
37. 그는 세상에 대한 간탐(慳貪)을 제거하여 간탐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머물고, 간탐으로 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성냄의 오점을 제거하여 성냄이 없는 마음으로 모든 생명의 이익을 위하여 연민하여 머물고, 성냄의 오점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해태와 혼침을 제거하여 해태와 혼침이 없이 광명상(光明想)을 가지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을 갖춘 자로 머물고, 해태와 혼침으로 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들뜸과 후회를 제거하여 산만하지 않아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은 마음으로 머물고, 들뜸과 후회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의심을 제거하여 의심을 건너서 유익한 법들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은 자로 머물고, 의심으로부터 마음을 청정하게 합니다.
38. 예를 들면, 깟사빠여, 어떤 사람이 빚을 내어 장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성공하여 오래된 빚을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부인을 한 명 부양할 수 있는 여분의 재산도 생길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전에 빚을 내어 장사를 했다. 그런 나는 장사에 성공하여 이제 오래된 빚을 다 갚았다. 그뿐만 아니라 부인을 한 명 부양할 수 있는 여분의 재산도 생겼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롭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과도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음식을 먹을 수 없어 그의 몸에 힘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며칠 후 그는 병에서 회복될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힘도 다시 생겨날 것입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병에 걸려 아픔과 고통에 시달렸다. 음식을 먹을 수 없어 나의 몸에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병에서 회복되었다. 음식을 먹을 수 있고, 힘도 다시 생겨났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롭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어떤 사람이 옥에 갇혔다가 얼마 뒤 옥에서 풀려난 것과도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안전하고 두려울 것도 없고 또 재산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전에 옥에 갇혔다. 그런 나는 이제 옥에서 풀려났다. 나는 안전하고 두려울 것도 없고 또 재산도 줄어들지 않았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롭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어떤 사람이 노예가 되어 자기 생각대로 행동하지도 못하고, 남에게 속박되어서 가고 싶은 곳에도 갈 수 없이 지내다가 얼마 뒤 노예의 신분에서 풀려난 것과도 같습니다. 그 사람은 이제 자유롭게 되어 더 이상 남에게 속박되지 않고, 그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전에 노예가 되어 내 생각대로 행동하지도 못하고, 남에게 속박되어서 가고 싶은 곳에도 갈 수 없이 지내다가 이제 노예의 신분에서 풀려났다. 이제 나는 자유롭게 되어서 더 이상 남에게 속박되지 않고, 내가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자유인이 되었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롭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어떤 부유한 사람이 재물을 가지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막을 걷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사람은 얼마 뒤 그 사막을 다 건너서 위험이 없는 안전한 장소인 마을에 도착을 했고 또 재산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전에 부유하고 재물을 가지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사막을 걸었다. 이제 나는 그 사막을 다 건너서 위험이 없는 안전한 마을에 도착을 했고 또 재산도 줄어들지 않았다.'라고. 그로 인해 그는 환희롭고 마냥 행복하기만 할 것입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자신에게서 이들 다섯 가지 장애(五蓋)가 제거되지 못한 것을 관찰할 때 비구는 스스로를 빚진 사람(욕심) , 환자(악의), 옥에 갇힌 사람(해태와 혼침), 노예(들뜸과 후회), 사막을 걷는 사람(의심)로 여깁니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이들 다섯 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비구는 스스로를 빚에서 벗어난 사람, 병이 쾌유한 사람, 감옥의 굴레에서 벗어난 사람, 자유인, 그리고 안전한 곳에 도착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39. 깟사빠여, 그와 마찬가지로 자신에게서 다섯가지 장애가 제거되었음을 관찰할 때 환희가 생겨납니다. 환희로운 자에게는 기쁨이 생깁니다. 기쁨을 느끼는 자의 몸은 편안합니다. 몸이 편안한 자는 즐거움을 느낍니다. 즐거운 자의 마음은 삼매에 듭니다.
40. "깟사빠여, 비구는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 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어떤 목욕하는 사람이 그릇에 비누가루를 담고 물을 타서 둥글게 뭉쳐가면서 반죽을 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 비누가루에 물기가 흡수되고 스며들어 안팎으로 물기가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감각적 쾌락으로부터 멀어지고 선하지 않은 법[不善法]으로부터 멀어져, 거친 사유(일으킨 생각.尋)와 미세한 사유(지속적인 고찰.伺)를 지닌, 분리됨으로부터 생겨난 기쁨[喜.희열]과 즐거움[樂.행복]이 있는 초선(初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분리됨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깟사빠여, 이것도 역시 그에게는 삼매의 갖춤입니다.
41. 다시, 깟사빠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밑바닥에서 솟아나는 물로 채워지는 호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호수에는 동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서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북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남쪽에서 흘러들어오는 물도 없고, 또 하늘에서 때때로 소나기도 내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호수의 밑바닥에서 차가운 물이 솟아올라 그 호수를 차가운 물로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 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할 것입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비구는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가라앉아, 안으로 고요해지고, 마음이 한 곳에 고정되어(心一境性), 거친 사유와 미세한 사유가 없는 삼매로부터 생겨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제2선(二禪)에 들어 머뭅니다. 그는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온 몸 어디라도 삼매에서 생긴 기쁨과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깟사빠여, 이것도 역시 그에게는 삼매의 갖춤입니다.
42. 다시, 깟사빠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할 것입니다. 온 몸 어디라도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이 있는 호수에서 어떤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들이 물속에서 생기고 자라서 물 밖으로 나오지 않고 물속에 잠긴 채 무성하게 자라 있는데, 차가운 물에 의해 머리에서 뿌리까지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합니다. 그 청련이나 홍련이나 백련의 어떤 부분도 물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비구는 기쁨을 떠나 평정이 머무는, 마음챙김과 알아차림(正念正知)을 지녀, 즐거움을 몸으로 느끼는, 거룩한 이들이 말하는 바, 평정과 마음챙김을 지녀, 즐거움이 머문다고 하는 제3선(三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으로 이 몸을 충만하게 하고, 흘러넘치게 하고, 가득차게 하고, 고루 미치게 할 것입니다. 온 몸 어디라도 기쁨이 사라진 즐거움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깟사빠여, 이것도 역시 그에게는 삼매의 갖춤입니다.
43. 다시, 깟사빠여, 비구는 기쁨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몸을 지극히 청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고루 미치게 하고 앉아 있습니다. 온 몸 어디라도 지극히 청정하고 깨끗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어떤 사람이 발 끝에서 머리까지 온 몸에 하얀 천을 덮어쓰고 앉아 있다면 그의 몸 어느 부분도 하얀 천으로 덮이지 않은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비구는 기쁨이 끊어지고 괴로움이 끊어져, 이전의 기쁨과 근심이 사라진,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평정을 통한 마음챙김의 청정을 지닌(捨念淸淨) 제4선(四禪)을 구족하여 머뭅니다. 그는 이 몸을 지극히 청정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고루 미치게 하고 앉아 있습니다. 온 몸 어디라도 지극히 청정하고 깨끗한 마음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습니다. 깟사빠여, 이것도 역시 그에게는 삼매의 갖춤입니다.
44. "깟사빠여, 여기 비구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지(知.앎)와 견(見.봄)으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철저히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성장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있다.'라고.
예를 들면, 깟사빠여, 깨끗하고 빛나고 팔각형으로 잘 가공된 하늘 색 보석이 흠이 없고 완전한 품질을 갖추었다. 거기에 파란색이나 노란색이나 붉은 색이나 흰색이나 갈색의 실이 묶고 있다. 그것을 눈이 있는 사람이 손에 놓고서 생각할 것이다. '깨끗하고 빛나고 팔각형으로 잘 가공된 하늘 색 보석은 흠이 없고 완전한 품질을 갖추었다. 거기에 파란색이나 노란색이나 붉은색이나 흰색이나 갈색의 실이 묶고 있다.'라고 살펴보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그는 이와 같이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지(知)와 견(見)으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이 철저히 압니다. '나의 이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네 가지 근본물질(四大)로 이루어진 것이며, 부모에게서 생겨났고, 밥과 죽으로 성장되었으며, 무상하고 파괴되고 분쇄되고 해체되고 분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의식은 여기에 의지하고 여기에 묶여있다.'라고.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45.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다른 몸을 만듭니다. 모습을 지닌, 마음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수족과 뼈마디와 온전한 감관을 만들어 냅니다(마음에 의한 신통).
예를 들면, 깟사빠여, 사람이 문자풀로부터 갈대를 골라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문자풀이고 이것은 갈대이다. 문자풀과 갈대는 다르다. 그러나 문자풀로부터 갈대를 골라냈다.'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예를 들면, 깟사빠여, 사람이 칼을 칼집에서 뽑아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칼이고 이것은 칼집이다. 칼과 칼집은 다르다. 그러나 칼집으로부터 칼을 뽑아냈다.'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예를 들면, 깟사빠여, 사람이 뱀을 뱀의 껍질로부터 벗겨 낼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뱀이고 이것은 껍질이다. 뱀과 껍질은 다르다. 그러나 껍질로부터 뱀을 벗겨냈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비구는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마음으로 만든 몸으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 몸으로부터 다른 몸을 만듭니다. 모습을 지닌, 마음으로 이루어진, 일체의 수족과 뼈마디와 온전한 감관을 만들어 냅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46.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여러 가지 신통의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합니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된다. 여럿이 된 후 하나가 됩니다. 나타나고 사라짐에 담장이나 성벽이나 산에 걸림없이 넘나드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와 같습니다. 땅 속에서 걸림없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이 마치 물속에서와 같습니다. 물 위를 거침없이 가는 것이 마치 땅 위에서와 같습니다. 공중에서 가부좌를 행하는 것이 마치 날개 달린 새와 같습니다. 대신변과 대위덕을 지닌 달과 태양을 손으로 어루만지고 쓰다듬습니다.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숙련된 도기공이나 도기공의 제자가 잘 준비된 진흙으로부터 그릇을 원하는 대로 만들고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예를 들면, 깟사빠여, 숙련된 상아 세공사나 그의 제자가 잘 준비된 상아로부터 어떤 상아 제품이든 원하는 대로 만들고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예를 들면, 깟사빠여, 숙련된 금세공사나 그의 제자가 잘 준비된 금으로부터 어떤 금제품이든 원하는 대로 만들고 생산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그는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여러 가지 신통의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와 같은 다양한 종류의 신통을 체험합니다. 하나가 된 후 여럿이 됩니다 ··· 브라흐마(범천)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몸으로써 위력을 미칩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47.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신성한 귀의 계(界)로 마음을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먼 길을 여행하는 자가 큰 북소리, 무딩가 북소리, 고옫소리, 빠나와 북소리, 딘디마 북소리를 듣는 것과 같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것은 큰 북소리다, 이것은 무딩가 북소리다, 이것은 고동 소리다, 이것은 빠나와 북소리다, 이것은 딘디마 북소리다.'라고. 이처럼, 깟사빠여, 그는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신성한 귀의 계(界)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인간을 뛰어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귀의 계를 통해 멀거나 가까운 하늘과 사람의 소리를 듣습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48.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이끌어 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마음으로써 마음을 잘 이해하여 알아차립니다. 그는 탐냄을 지닌 마음을 탐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탐냄을 떠난 마음을 탐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성냄을 지닌 마음을 성냄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성냄을 떠난 마음을 성냄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을 어리석음을 지닌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을 어리석음을 떠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집중된 마음을 집중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산란한(집중되지 못한) 마음을 산란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광대한 마음을 광대한 마음(고귀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알아 차립니다. 광대하지 못한 마음을 광대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위가 있는 마음을 위가 있는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위가 없는 마음을 위가 없는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을 삼매를 얻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삼매를 얻은 마음을 삼매를 얻은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젊은 여인이나 남자가 치장하기를 좋아하며 깨끗하고 흠 없는 거울이나 맑은 물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점이 있는 것은 점이 있다고 알고 점이 없는 것은 없다고 아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깟사빠여, 그는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다른 이의 마음을 아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다른 중생, 다른 사람에 대해 ··· 해탈하지 못한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49.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다. 한 생, 두 생, 세 생, 네 생, 다섯 생, 열 생, 스무 생, 서른 생, 마흔 생, 쉰 생, 백 생, 천 생, 벡천 생, 수많은 무너지는 겁, 수많은 이루어지는 겁, 수많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겁에 대해 기억한다. '거기에서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피부색(종족)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그곳에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 거기에서의 이름은 이러했고, 가문은 이러했고, 음식은 이러했고, 즐거움과 괴로움의 고통의 경험은 이러했고, 목숨의 마침은 이러했으며, 그와 같이 거기에서 죽어 다시 태어났다.'라고. 이와 같이 여러가지 특징을 지닌, 내력을 지닌, 다종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사람이 자기 마을로부터 다른 마을로 갔다가 다시 또 다른 마을로 갔다가 자기 마을로 되돌아 온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나는 우리 마을로부터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 있었고, 이와 같이 말하였고, 이와 같이 침묵하였다. 나는 그 마을로부터 다시 다른 마을로 갔다. 그곳에서 이와 같이 서 있었고, 이와 같이 앉아 있었고, 이와 같이 말하였고, 이와 같이 침묵하였다. 그리고 그 마을로부터 다시 우리 마을로 되돌아왔다.'라고. 이처럼, 깟사빠여, 그는 마음이 삼매를 닦아,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전생에 대해 기억하는 지혜(宿命通)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여러 전생을 기억합니다. 한 생, 두 생 ··· 다종다양한 전생의 거처를 기억합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50.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중생들의 죽음과 삶에 관련한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가는 중생들을 알아 차립니다. '참으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악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고, 삿된 견해를 지녀 삿된 견해의 업을 받습니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고통스러운 곳, 비참한 곳, 험난한 곳, 지옥에 태어납니다. 혹은 다시 그대들이여, 이러한 중생들은 몸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말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녔고, 마음에 의한 선한 행위를 지녀 성인을 비방하지 않고, 바른 견해를 지녀 바른 견해의 업을 받습니다. 그들은 몸이 무너져 죽은 후 좋은 곳에 나아가 하늘의 세계에 태어납니다.'라고. 이와 같이 인간을 뛰어 넘은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열등함. 수승함. 아름다운 용모. 추한 용모. 즐거운 곳. 고통스러운 곳에 그대로의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사거리 가운데에 높은 누각이 있는데 시력이 좋은 사람이 거기에 서서 사람들이 집에 들어가고 나오는 것과 길을 걷거나 사거리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집에 들어가는구나, 이들은 나오는구나, 이들은 길을 걷고 있구나, 이들은 사거리 가운데 앉아 있구나.'라고. 이처럼, 깟사빠여, 그는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중생들의 죽음과 삶에 관련한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청정하고 인간을 뛰어 넘는 청정한 하늘과 같은 눈으로 중생들을 봅니다. 죽어감, 태어남 ··· 그대로의 업에 따라 가는 중생들을 알아차립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51. 그는 이렇게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정화되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유연케 하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일어남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것이 번뇌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이렇게 알고, 이렇게 보는 그는 감각적 쾌락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존재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무명의 번뇌로부터 마음이 해탈합니다. 해탈에서 해탈했다는 지혜가 있습니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압니다.
예를 들면, 깟사빠여, 깊은 산에 맑고 고요하고 깨끗한 호수가 있고, 거기서 시력이 좋은 사람이 둑에서서 조개껍질, 자갈, 조약돌, 멈춰있거나 움직이는 고기 떼를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에게는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 호수는 맑고 고요하고 깨끗하다. 여기에 이런 조개껍질, 자갈, 조약돌이 있고 고기 떼는 멈춰있거나 움직인다.'라고. 이처럼, 깟사빠여, 그는 마음이 삼매를 닦고, 청정하고, 깨끗하고, 흠이 없고, 오염원이 사라지고, 부드럽고, 준비되고,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는 마음으로써, 모든 번뇌를 소멸하는 지혜로 마음을 이끌어내고 향하게 합니다. 그는 '이것이 괴로움이다.'라고 있는 그대로 철저히 압니다. ···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압니다. 깟사빠여, 이것이 그에게는 지혜의 갖춤입니다.
52. 깟사빠여, 이러한 계의 갖춤과, 삼매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과는 다른 더 높고 더 수승한 계의 갖춤과, 삼매의 갖춤과, 지혜의 갖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53. "깟사빠여, 계를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편으로 계를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최상의 계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계에 관한 한 내가 더 뛰어납니다.
54. 깟사빠여, 고행을 통한 금욕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행을 통한 금욕을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최상의 고행을 통한 금욕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금욕에 관한 한 내가 더 뛰어납니다.
55. 깟사빠여, 지혜를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혜를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지혜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지혜에 관한 한 내가 더 뛰어납니다.
56. 깟사빠여, 해탈을 설하는 어떤 사문·바라문들이 있어서 그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해탈을 칭송하여 말합니다. 그러나, 깟사빠여, 성스러운 최상의 해탈에 관한 한 거기서 나는 나 자신과 동등한 자들을 관찰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더 뛰어난 자가 있겠습니까? 깟사빠여, 참으로 높은 해탈에 관한 한 내가 더 뛰어납니다.
57.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빈 집에서 사자후를 토할뿐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합니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58.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러나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라고 말합니다.
59.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에게 질문을 하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아울러 누구라도 그에게 질문을 한다.'라고 말합니다.
60.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그들의 질문을 설명하지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아울러 질문하는 자가 누구라도 그들의 질문을 설명한다.'라고 말합니다
61.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 나는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그들을 만족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62.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들어야 할만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들어야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63.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듣고서 청정하게 믿지는 않는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그들은 듣고서 청정하게 믿는다'라고 말합니다.
64.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그들은 청정한 믿음을 행하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그들은 청정한 믿음을 행한다.''라고 말합니다.
65.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그들은 올바른 길을 닦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들에게는 나는 올바른 길을 닦는다.'라고 말합니다.
66. 깟사빠여, 외도 유행승들이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을지 모릅니다.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러나 도 닦음을 성취한 분을 만족하게 하지는 못한다.'라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이 내가 그들에게 하려는 말입니다. 깟사빠여, 그들에게 나는 '사문 고따마는 사자후를 토한다. 그것도 대중들 가운데서 그렇게 한다. 아울러 그는 용맹스럽게 사자후를 토한다. 그에게 질문을 한다. 그들의 질문을 설명한다. 질문에 대한 설명으로 그들의 마음을 만족하게 한다. 들어야 할 만한 것으로 생각한다. 듣고서 청정하게 믿는다. 청정한 믿음을 행한다. 올바른 길을 닦는다. 닦음과 익힘을 완성한 분을 흡족하게 한다.'라고 말합니다,
67. 깟사빠여, 한 때에 나는 라자가하에서 독수리봉 산에 머물렀습니다. 거기서 니그로다라는 어떤 고행자가 높은 금욕에 대해서 질문을 하였습니다. 나는 그가 질문한 높은 금욕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습니다. 내가 설명해 주었을 때 그는 마음이 기뻐서 크게 감동한 것 같았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세존의 법을 듣고 마음이 기뻐서 마치 크게 감동한 것 같지 않은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68. "경이롭습니다, 세존이시여, 경탄할만 합니다, 세존이시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혹은 감추어져 있는 것을 드러내듯이,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던 사람에게 길을 가르켜 주시듯, 또는 '눈 있는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서 등불을 가져오듯, 세존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법(진리)을 밝혀주셨습니다.
저는 이제 세존께 귀의하옵고,
또한 그 가르침(법)에 귀의하옵고,
또한 그 제자들의 모임인 승가에 또한 귀의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는 세존께 출가하고자 합니다. 저는 구족계를 받고자 합니다."
*** 지금까지 본경에서 나체수행자 깟사빠가 세존을 부를 때 사용한 호칭은 고따마 존자(bho Gotama)' 아니면 '도반 고따마(avuso Gotama)'였다. 이제 그는 세존께 대한 믿음이 굳건해져서 마침내 세존을 반떼(bhante)라고 부르고 있다. 반떼(bhante)는 초기경에서 세존이나 스승이나 주인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 가장 높은 존칭이다. 외도들도 세존께는 항상 도반(avuso)라고 부르고 있으며, 세존을 스승으로 존경할 때만 반떼(bhante)라고 부른다.
69. "깟사빠여, 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서 출가하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의 견습기간을 거쳐야 합니다. 넉 달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한다. 물론 여기에 개인마다 차이가 있음을 나는 인정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전에 외도였던 자가 이 법과 율에서 출가하기를 원하고 구족계를 받기를 원하면 그는 넉 달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여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하신다면 저는 4년의 견습기간을 거치겠습니다. 4년이 지나고 비구들이 동의하면 출가하게 하시어 비구가 되는 구족계를 받게 해 주십시요."
70. 나체 수행자 깟사빠는 세존의 곁으로 출가하였고 구족계를 받았다. 구족계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깟사빠 존자는 홀로 머물며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정진하며 지냈다. 그는 오래지 않아 좋은 가문의 아들들이 성취하고자 집에서 나와 출가하는 그 위없는 청정범행의 완성을 지금 여기에서 스스로 깨달아 알고 체득하고 성취하여 머물렀다. '태어남은 다했다. 청정범행은 성취되었다, 할 일을 다 해 마쳤다. 다시는 어떤 존재로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알았다.
깟사빠 존자는 아라한들 중에 한 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