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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독립공원에서 바라본 하동읍 전경. 사진 가운데 부분 맨 아래쪽이 하동청년회관이다. 사진 오른쪽 끝 쪽에 보이는 하동읍교회 일대가 3·1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던 옛 하동장터 자리다. |
하동독립공원에서 채 200m도 안 되는 거리에 옛 하동청년회관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1919년 3월 18일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하동장터 일대는 300여m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1929년 하동농업보습학교와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일본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해 수십 개 신등을 파괴한 하동신사 터 역시 이곳에서 300m 남짓 떨어져 있다.
일제강점기 하동읍이 하동지역 민족, 사회, 학생운동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동독립공원은 이처럼 하동읍 내 항일독립운동 사적지와 연계한 역사 학습과 기억을 더듬는 데 최적화한 장소라 볼 수 있다. 하동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는 취재 발걸음도 여기서 시작했다.
◇지역을 넘어 세계로 향한 하동 3·1만세운동 = 하동독립공원을 내려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옛 하동장터 일대다.
현재 하동읍 공설시장은 하동우체국 앞 거리에 조성돼 있는데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 소장 말을 빌리자면 옛 하동장터는 현 하동읍사무소 일대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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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독립운동기념탑에 대해 설명하는 정재상 소장. |
1919년 3월 18일 이곳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는 하동지역 3·1독립만세운동 효시로 기록된다. 당시 적량면장이던 박치화는 전국적인 만세 운동 소식을 듣고는 하동읍 장날에 맞춰 거사를 준비했다. 장터에 도착한 그는 태극기를 장대에 달고 소금가마니 위에 올랐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품에서 꺼내 낭독한 이후 큰 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선언서 낭독 이후 일대 군중이 일제히 만세를 부르기 시작하더니 시위 인파가 이내 1500명을 훌쩍 넘겼다. 위기를 느낀 일본 경찰은 군중을 해산하고 박 면장을 검거했다.
경성이 아닌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작성해 낭독한 사례는 하동독립선언서를 비롯해 2~3개에 불과하다고 전해진다.
이날 만세 이후 양보면 장암리 일진학교 교원 정섬기는 같은 마을 정성기와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논의했다. 이들은 양보면 우복리 정이백, 고전면 성천리 이경호 등을 규합해 다음 하동 장날인 23일 수백 명 군중과 함께 만세 시위를 펼쳤다. 4월 7일에는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 박문화, 염삼섭, 정점금, 전석순 등 130여 명이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학교를 뛰쳐나와 하동장터를 향해 구보로 독립만세 행진을 진행했다. 이 같은 독립 만세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북천과 옥종, 고전, 청암, 화개, 진교 등 하동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금남면 출신 정낙영과 이범호, 정희근 등은 남해읍에까지 가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특히 하동지역 독립만세는 비단 국내에만 그치지 않았다. 이곳 유림 정규영 선생은 1919년 파리민족평화회의에 보내는 대한독립선언문인 '파리장서'에 서명한 전국 유림대표 137명에 이름을 올렸던 것이다. 아들 정재완 선생은 상해임시정부 독립자금 모금을 주도하는 등 전 재산을 항일독립운동에 바쳤다.
이제 더는 이들 하동 독립만세 현장에서 일제강점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하동항일독립운동기념사업회에서 이를 기억하는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항일 의병 기운이 하동 독립정신 기틀로 = 한말부터 일제강점 초 지식인과 청년층이 주도한 의병운동은 하동지역민들 항일독립에 대한 열망과 정신을 더욱 단단하게 했다. 이는 하동 전역에 들불처럼 일어난 3·1독립만세운동과 함께 해방 7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계속되는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 활동 등을 보면 알 수 있다.
하동읍사무소에서 걸어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는 하동청년회관이 있다. 만세운동으로 표출된 항일독립 열망은 1920년 청년운동으로 확산하는데, 이를 상징하는 건물이 하동청년회관이다. 하동청년회가 앞장서고 지역 독지가들이 출연해 하동읍 읍내리 441-1번지에 건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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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운동 거점이었던 하동청년회관. |
하동지역 청년지도자들은 이곳을 3·1정신을 계승한 민중 계몽, 독립정신 함양 등 향토의 민족교양강좌를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이 회관에서 '하동청년동맹'과 '하동여자청년동맹'이 창립됐다. 하동 최초 신문인 벽보신문(壁報新聞) 〈뭇소리〉 1호도 이곳에서 발행돼 청년운동단체 대변지 역할을 했다.
전국 처음으로 좌·우파 계열이 통합해 발족한 '신간회' 하동지부 결성식도 이 회관에서 열리는 등 하동지역 청년·독립운동 거점 역할을 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본은 청일전쟁 승리 이후 항일독립운동 탄압을 강화해 청년회관을 빼앗을 계획을 세웠다. 이를 안 청년회는 일제가 불교에 유화적이라는 점을 이용해 회관을 일시적으로 쌍계사 포교당으로 사용하도록 해 위기를 넘겼다. 청년회관 터도 개인이 아닌 하동청년동맹 소유로 등기해 특정 개인이 처분하지 못하도록 한 것도 효과를 봤다.
이곳을 포기하지 않은 일제는 1939년 회관을 접수해 '공회당'(公會堂)으로 명칭을 바꿔 각종 집회 장소로 활용했으나 다행히 건물 자체는 살아남았다. 해방 이후 재건학교로 이용됐는데, 한국전쟁을 전후해 '국민보도연맹' 사무실로도 쓰인 아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로는 하동문화원이 입주해 지역 문화공간으로 이용돼 오다 1971년 하동청년회관으로 원상회복했다. 1973년에는 청년회관관리위원회가 출범, 건물을 개·보수하고 하동항일청년회관으로 바꿨다. 이 과정에서 쌍계사와 소유권 다툼이 있었는데 하동군 부산 향우들이 중심이 돼 소유권 되찾기 운동을 벌여 법적 다툼 끝에 승소, 소유권을 되찾았다. 2001년에는 하동항일청년회관보전회가 발족하면서 보존에 체계를 갖추고 2009년 하동항일청년회관으로 등기를 변경해 지금에 이른다.
지금은 보전회와 하동지역자활센터가 함께 공간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곳은 일제강점기 건립된 것으로 알려진 전국 청년회관 26곳 중 지금까지 보존된 유일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외관은 리모델링되었으나 지붕과 벽 안에 예전 건물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회관 앞에는 지난 1989년 6월 10일 6·10독립만세 항쟁기념일을 맞아 관리위원들이 성금을 내 세운 '우국항일'(憂國抗日) 비석이 있다.
이렇듯 활발한 청년운동은 이곳 학생들에게도 영향을 줬다. 하동신사에서 일본의 우상숭배 강요를 참다못한 하동농업보습학교와 하동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시위도 이 연장선에 있다 하겠다.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싸운, 항일운동에서도 가장 급진적이고 극렬한 저항 투쟁인 의병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된 곳이 하동 지리산 일대라는 점이 이 지역 항일독립운동 정신 바탕을 이루고 있다"면서 "이 의병운동에서부터 심연이 깊어진 항일정신이 하동 전역 3·1독립만세운동, 지금도 계속되는 청년회관 보전, 군민 자발적 항일독립 기억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