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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바라보자(히 12:1-3)
할렐루야! 하나님이 항상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좋아하던 “사군자”가 있습니다.
그것은 “매, 난, 국, 죽”입니다. 즉,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입니다.
그런데 사군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참음과 기다림과 인내를 대표하는 나무와 꽃입니다.
매화는 추운 겨울이 지나면서, 눈이 채 녹기 전에, 가장 먼저 피는 꽃입니다.
난초는 새싹이 나오고, 꽃망울이 생기고, 꽃이 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춘란은 3년, 한란은 7년이라는 세월을 기다려서, 꽃을 피웁니다.
국화는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라는 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봄부터 소쩍새가 울고, 천둥이 구름 속에서 울어야, 한 송이 국화꽃을 피울 만큼,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 꽃입니다.
대나무는 처음에는 죽순만 나오고, 자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5년째가 되면, 갑자기 무럭무럭 자라서, 20m 이상을 성장합니다.
담양의 “죽녹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엄청 큰 대나무들을 실컷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오랜 기다림과 시련과 인내를 통해서, 싹이 나고, 잎이 자라고, 꽃을 피우는 것이, 사군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 감옥에 갇혀, 네로 황제에 의하여, 순교를 당하기 전,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 4:6-8)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 4:9-11)고 말했습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그의 곁에는 여러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바울이 감옥에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바울 곁을 떠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사람이 “데마”입니다.
바울은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말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났습니다. 믿음을 버렸습니다. 교회를 떠났습니다. 바울과 함께 믿음의 길을 걸었는데, 끝까지 완주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해야 합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오랜 기다림과 시련과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중도에 포기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데마처럼,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면, 주님 곁을 떠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에게 편지하면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고 말했습니다.
믿음의 경주란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경주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빌 3:14)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아멘.
버울은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에녹은, 믿음으로 노아는,......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및 사무엘과 선지자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히 11:4-5,7,32)
7일, 금요일 저녁,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서, 한국과 호주의 A매치 축구 평가전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아, 관람했을까요?
5만 5천명이 관람했다고 합니다. 부산 사람들만 축구장을 찾은 것이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축구팬들이 경기장을 찾았습니다. 왜 경기장을 찾았을까요? 우리나라 선수들을 응원하려고, 전국 각지에서 그 먼 거리까지, 찾아왔을 것입니다.
썰렁한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선수들의 모습을 보면, 보는 사람들도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소리 지르고, 함께 응원하는 모습을 보면, 보는 사람들도 힘이 나고,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도 힘이 납니다.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시청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경기장에 축구선수들만 있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비록 텔레비전으로 본다고 해도, 재미도 없고, 힘도 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홀로 믿음의 경주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간 믿음의 선배들도 있었고, 지금 함께 달리고 있는 믿음의 사람들도 있고, 앞으로, 우리 뒤를 따라 달려올 후배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도에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이 믿음의 경주를 달려가야 합니다.
반드시 결승선을 통과해야 합니다.
여러분! 마라톤 경기처럼,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해서도, 준비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울은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라”고 했습니다. 버릴 것은 버려야 합니다.
그냥 달려도 힘든데, 무거운 것을 들고 달릴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달리기 선수가 양복 입고, 구두 신고, 넥타이 매고, 달리면 되겠습니까?
수영 선수가 오리털 파카 옷 입고 수영하면 되겠습니까?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 11:45)고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하지 않는 것은 모두다 버려야 합니다.
바울은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고 말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다”(사 59:2)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죄는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나 사이가 하나되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용서해 주셨습니다. 깨끗하게 씻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더 이상, 죄 가운데,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바울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 4:22-24)고 말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서, 이사를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 살고 있는 집에 있는 음식물 쓰레기, 생활 쓰레기들을 다 싸 들고, 이사 갈 사람이 있습니까? 최소한 쓰레기는 버리고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쓰레기는 가지고 가면 안됩니다. 또한, 이사 간 다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쓸고 닦고, 청소해야 합니다.
청소하지 않고, 음식물 쓰레기들을 버리지 않고, 계속 쌓아놓으면, 그 집은 금방 더러워질 것입니다. 지저분하고, 더럽고, 냄새나고, 그러면, 안됩니다.
서울에 가면, 청계천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입니다.
며칠 전 신문을 보니, “휴식처로, 산책로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청계천에서, 코를 찌르는 악취가 장기간 방치되면서, 시민들의 불편이 커지는 것은 물론, 인기 관광코스로 청계천을 찾는 외국인들도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는 글을 읽었습니다.
바닥에 쌓인 퇴적물을 제때에 청소하지 않음으로, 악취가 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아름다워 보여도, 가까이에 가서 볼 때, 악취가 난다면,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버릴 것은 버리고, 치울 것은 치워야 할 것입니다. 깨끗하게 청소해야 합니다.
냄새를 제거해야, 더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머물게 될 것입니다.
겉이나 속이나 깨끗해야 합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사람이나 속사람이나 깨끗해야 합니다.
지금 인천시에는 지난 달, 30일에 발생한 붉은 수돗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하고, 그리고 피부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합니다.
시민들이 오염된 물에 대한 대책을 호소하는데도 시 당국은 “피해지역이 아니다. 음용기준 범위 안에 있어 마셔도 된다”는 방식의 접근으로, 시민들의 불만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왜 붉은 수돗물이 나오겠습니까? 수도관 속에 들어가서는 안될 이물질이 들어갔기 때문에, 물이 붉게 나오는 것입니다. 그 이물질을 깨끗하게 제거해야만 합니다.
그 이물질을 제거하지 않고, 그대로 방치한다면, 붉은 수돗물은 계속 나오게 될 것입니다.
제거해야 하는 것은 제거해야 합니다.
수도관이 아무리 단단하고 튼튼하여도, 그 속에 이물질이 들어있으면 물을 마실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달리기 선수가 양복 입고, 구두 신고, 넥타이 매고, 달릴 수 있습니다.
수영 선수가 오리털 파카 옷 입고 수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달릴 수 없고, 오래 헤엄칠 수 없을 것입니다.
끝까지 달리려면, 벗어 버릴 것, 다 벗고, 달려야 합니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걸치고 있으면 안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믿음의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대충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들음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또 기도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멘.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이 부분을 새 번역으로 읽어보면,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입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도 훌륭하고, 모세도 위대하고, 다우시도 멋지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돈을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학문적인 성취를 바라보고, 어떤 사람은 높은 자리를 바라보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등바등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간에, 세상에서, 사람들이 바라보는 그 무엇도 영원한 것은 없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영원할 것 같지만, 결코 영원하지가 않습니다. 금방이라도, 당장, 내 손에 잡힐 것 같지만, 잡히지 않습니다. 흔적도 없이 안개처럼 사라져버립니다. 때로는 “내가 무엇 때문에, 지금껏 살아왔는가?”, “왜 아등바등 살아왔던가?” 허무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 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행실의 결말을 주의하여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으라”고 말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히 13:7-9)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천년만년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 같은 것들은 다 사라졌습니다.
광야에서,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할 때,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줄 것처럼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세상은 우리의 것을 다 빼앗아 가기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이 땅에 오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생명까지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기쁨을 내다보고서, 부끄러움을 마음에 두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우리는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길만이 살 길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앞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애굽의 바로 군대가 이스라엘을 추격해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고 말했습니다.
모세는 백성에게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고 말했습니다.(출 14:11-14)
가만히 서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그러나 멈추어 서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홍해를 갈라, 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셨습니다.
뒤에 따라오는 애굽의 병사들은 갈라진 홍해에 들어왔지만, 홍해를 끝까지 건너지 못했습니다.
기쁠 때에나, 슬플 때에나, 변함없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건강할 때나, 아플 때에나, 한결같이,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모르거나, 가슴이 답답하거나, 항상,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딴 데 보면, 안됩니다. 딴 데 가면, 안됩니다.
위험합니다. 미혹 당하거나, 유혹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살 길이 생깁니다.
지금 당장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께서 우리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우리의 형편을 너무나도 잘 아시는 주님께서 그냥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하게 주시고자 오신 주님께서 우리의 나아가는 길을 인도하여 주셔서, 마침내, 푸른 풀밭과 쉴만한 물가에서 쉴 수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는 복음성가가 있습니다.
1절: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평화의 주님 바라보아라
세상에서 시달린 친구들아 위로의 주님 바라보아라
2절: 힘이 없고 네 마음 연약할 때 능력의 주님 바라보아라
주의 이름 부르는 모든 자는 힘 주시고 늘 지켜주시리
후렴: 눈을 들어 주를 보라 네 모든 염려 주께 맡겨라
슬플 때에 주님의 얼굴 보라 사랑의 주님 안식 주리라
여러분!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주님의 얼굴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아멘.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윗은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 나를 대적하는 자 많더니 나를 치는 전쟁에서 그가 내 생명을 구원하사 평안하게 하셨도다”(시55:16-18)고 말했습니다.
다윗은 기도의 사람입니다.
다윗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한 마디로, “저녁에도 아침에도 한낮에도”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한다는 말입니다.
근심하여 신음할 수밖에 없는 문제를 만났을 때,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기도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거든, 주님을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좋은 일이거든, 주님을 찾아, 주님께 감사드려야 합니다.
나쁜 일이거든, 주님을 찾아, 있는 그대로를 아뢰고, 기도해야 합니다.
여러분! “바라본다”고 하는 말은 “고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눈을 주님께 고정해야 합니다. 우리의 눈을 십자가에 고정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피곤하여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새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 40:28-31)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새 힘을 얻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는 자는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도합니다.
은혜의 주님! 주님만 바라보오니,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주님만 따르오니, 풍성한 복을 내려 주옵소서.
주님의 은총과 복이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우리 한마음교회에 넘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하며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