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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바이블 16 천지창조와 바빌론 신화
옮긴이 : 천리아허상탁
▶ 같은 사건에 대해서 일치하지 않는 성경
흔히들 성경의 첫 부분에 나오는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 '신명기' 다섯 개의 문서를
'모세 오경'이라고 한다.
일반신자들은 모세가 직접 기록했다고 철썩 같이 믿지만 학자들은 아무도 모세 오경을 모세가
기록했다고 믿지 않는다. 사실 기초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아무런 편견 없이 구약을 읽어보면
누구라도 그것이 모세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모세 오경의 제일 마지막 부분에는 모세가 죽은 후의 일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 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신명기 34장 5~6절]
그 뿐이 아니다. 창세기 36장 31~39절의 에돔왕들의 계보는 모세가 죽은지 한참 지나서야
등장했던 왕들이다. 또 창세기 21장 34절과 26장 14~18절, 13장 17절에는 블레셋 사람이
등장하는데 블레셋은 BC 1200년 경까지는 팔레스타인에 나타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각각 다른 이에 의해서 서술되었음이 증명된다. 예를 들어 유명한 모세의 바위 후려치기 사건을
보자. 출애굽기 17장 에서는 #모세는 여호와가 명령한 대로 지팡이로 바위를 후려쳐 물을 얻는데
그 곳을 므리바라고 불렀다고 한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가로되 우리에게 물을 주어 마시게 하라.....(중략)......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가서 이스라엘 장로들을 데리고 하수를 치던 네 지팡이를 손에 잡고 가라.
내가 거기서 호렙산 반석 위에 너를 대하여 서리니 너는 반석을 치라 그것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모세가 이스라엘 장로들의 목전에서 그대로 행하니라. 그가 그곳 이름을 맛사라 또는
므리바라 불렀으니." [출애굽기 17장 2~7절]
그러나, 민수기 20장에 따르면 그 사건은 여호와는 물을 얻는 방법을 알려 주지만 동시에 벌을 내린다.
"회중이 물이 없으므로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공박하니라....(중략)...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으로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울찌니라.....(중략).....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 물이 많이 솟아나오므로 회중과 그들의 짐승이 마시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와 다투었으므로 이를 므리바 물이라 하니라." [민수기 20장 2~13절]
모세는 지팡이를 두 번 쳐서 물을 얻는데 이것 때문에 여호와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모세와 아론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므리바라는 지명도 같다.
앞서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여호와가 보여 준 메추라기 기적도 출애굽기와 민수기는
서로 엇갈린 견해를 보이고 있다. 메추라기 떼는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의 자비로 등장하지만,
민수기에서는 불평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징벌이다.
학자들은 모세오경이 모세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 아니라 바빌론 유수 이후 전에 있던 여러 자료들을
참고해서 편집 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번에는 오경을 벗어나서 다른 구절도 살펴보자.
유대인들의 가나안 정복에 관한 내용들은 여호수아서와 사사기의 첫 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 두 내용들을 서로 비교하면,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발생함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 10장 36~37절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헤브론을 점령했다고 기록하지만,
사사기 1장 10절에서는 유다 지파가 이 성읍을 점령했다고 기록한다.
여호수아 10장 38~39절에 따르면 여호수아가 드빌(기럇세벨)을 파괴하고 그 성읍의 모든 거민들을
진멸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지만, 여호수아 15장 13~19절과 사사기 1장 1~15절에 따르면 그 공을
갈렙사람 옷니엘에게로 돌린다.
여호수아 12장 7~24절에는 여호수아와 유대인들이 요단 서편 레바논 골짜기의 바알갓에서부터
세일로 올라가는 곳 할락산까지 쳐서 멸한 왕들과 도합 31의 개의 성읍과 이름들이 나타난다.
하지만 이 가운데 예루살렘(수15:63), 게셀(수16:10), 다아낙(수17:11~13), 그리고 므깃도(수17:11~13)
등의 성읍들은 여호수아서의 다른 곳을 참고하면 유대인들에 의해 점령하지 못한 성읍들로 기록 되었다.
사무엘하 10장 17~18절에 따르면 다윗군에 의해 죽은 아람 병거는 700승의 사람이라고 기록 되었지만,
역대상 19장 17~18절에서는 다윗군에 의해 죽은 아람 병거는 7000승의 군사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소바 왕 하닷에셀과 다윗왕의 전투에 대해서도 사무엘하 8장 3~4절에는 마병이 1700이라고
기록되어져 있으나, 역대상 18장 3~4절에서는 마병이 7000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열왕기하 24장 8절에 따르면 여호야긴이 왕이 될 때의 나이가 18세였다고 하지만,
역대 하 36장 9절에 따르면 여호야긴이 유대의 왕이 될 때의 나이가 8세로 되어 있다.
아하시야가 왕이 될 때의 시기도 다르다. 열왕기하 8장 26절에는 아하시야가 유대의 왕이 될 때의
나이가 22세였지만, 역대하 22장 2절을 보면 아하시야가 유대의 왕이 될때의 나이가 42세로 되어 있다.
#열왕기상 4장 26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마구간을 4만을 소유하고 있다고 기록되어져 있지만,
역대하 9장 25절에서는 마구간이 4천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열왕기 7장26절에 따르면 솔로몬은 놋으로 바다를 만들도록 하는데 그 용량이 2000밧이었다고 하지만,
역대하 4장 5절에 따르면 그 용량은 3000밧이라고 기록되어져 있다.
이미 400여 년 전에 홉스(Hobbes, Thomas)는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여러 가지 자세한 이유를
들면서 오경은 모세가 기록하지 않았다고 밝혀 놓았다.
오경은 물론이려니와 오경이외의 구약 속에서도 일치하지 않는 사건기록들을 보면서 언제까지
성경은 무오하다고 주장할 것인가?
▶ 솔로몬 왕국은 허구였다
과연 성경속의 역사는 사실을 근거로 한 것일까, 아니면 단지 소설에 불과한 것일까?
당연히 성경의 무오성을 주장하는 신자들에게는 성경의 내용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여길 것이고,
필자와 같이 성경을 단순한 종교경전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성경속의 역사를 무시할 것이다.
사실상 구약성경은 바빌론 유수(Babylonian Exile) 이후에나 만들어 진 것이다.
그래서 #바빌론의 홍수 신화가 지혜 문학같은 것이 유대인들에게 유입되었고, 바빌론 유수
이전의 성경의 인물들과 사건들은 대부분 신화일 뿐이다. 역사가 아니라는 말이다.
다윗과 솔로몬 왕국도 예외일수가 없다. 성경에 따르면 솔로몬이 다스리는 이스라엘은
므깃도(Megiddo), 하솔(Hazor)와 게셀(Gezer)과 같이 전략적인 도시에 거대한 요새를 세웠으며,
수많은 부와 군사력을 갖추어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금으로 도금한 거대한 성전을 지었으며, 솔로몬은 파라오의 딸을 위시하여
적어도 700명의 부인과 300명의 첩을 두었으며, 시바(Sheba)의 여왕과 잠시 만난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의 훌륭한 지혜로 인해 지상의 모든 왕들이 신이 그에게 준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솔로몬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위대한 왕이 존재했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성경학자들은 솔로몬시대를
BC 10세기 정도까지 언급한다. 그러나 현존하는 수많은 BC 10세기 무렵의 이집트 비문에는
그들의 근처에 이와 같이 강력한 국가가 있었다는 것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학자들이
성지에서 150년 이상이나 고고학적 발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의 어떤 자취도 발굴되지 않았다.
1998년에 이스라엘의 한 유대인 신학자의 양심 선언적 논문 발표에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솔로몬왕의 통치 지역은 성경의 내용과 달리 현 이스라엘 영토에도 훨씬 못 미치는 한 부족국가 정도의
범위를 벋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고고학과 다종의 사서를 비교해 얻을 수 있는 결론이라는 것이다.
그 기사내용을 옮기도록 하겠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집트 탈출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여호수아는 여리고(제리코)의 성벽을 무너뜨리지
않았고 솔로몬 왕국은 작은 부족국가였다고 이스라엘의 한 고고학자가 성서의 내용을 반박, 파문이
일고 있는데,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인 제예브헤르조그는 하아레츠지에 기고한 글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 탄생과정을 언급한 성서의 내용은 고고학적 발견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경우 상치된다고 밝혔다.
그는 이제는 많은 고고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는 증거를 들어 성경에서 이집트탈출을 기록한 시기에
이집트에서 대탈출은 없었으며 여리고 성도 여호수아의 한차례 공격으로 붕괴된 것이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전쟁 끝에 함락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논쟁적인 주제인 이스라엘 국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기원전 9세기 구릉지대에 정착한
유목민들이 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두개의 경쟁국가를 만들면서 비롯됐다고 보았다.
그는 이보다 한세기 전인 다윗왕과 솔로몬 왕 시대의 도시들을 발굴한 결과 이들 도시는 이곳
저곳에 흩어진 건물들로 구성돼 있었고 왕국의 규모도 소규모인데다 중동 지역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지 못하는 지역 왕조에 불과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중동지역 대부분에 걸친
왕국을 통치하기 위해 다윗왕이 건설했다는 예루살렘은 기껏해야 작은 왕국에 불과했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헤르조그의 경쟁자이며 비판자인 히브리대학의 고고학자 암논 벤-토르는 성서에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의 과장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고대 히브리가 비록 거대한 규모는
아닐지라도 다윗, 솔로몬의 왕국을 가졌다는 고고학적 증거가 있다고 반박했다. 또 국회의원
토미 라피드는 헤르조그가 국가의 이념적, 교육적 기반을 훼손하고 있다고 공격하면서
성경이 많은 신화를 포함하고는 있으나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텔아비브 대학의 고고학자 모세코차비는 성서를 뒷받침하는 유물찾기 관행에서 벗어난
고고학자들이 지난 수 십 년간 이룩한 성과물들이 아직 일반 국민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이스라엘인들이 국민적 신화를 포기할 준비가 돼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스라엘국민들은 정기적으로 고고학적 유물을 돌아보면서 성서의 내용이 들어맞았다는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있으며 정부는 성서 내용을 입증하는 발굴작업에 만자금 등을 실질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한편 최근 현대 이스라엘 역사의 신화를 교과서에서 제외해야 한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킨
#요시사리드 교육장관은 헤르조그의 작업내용이 검토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다시 한 번 말하면 같은 동시대의 이집트인들은 솔로몬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고고학적으로도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솔로몬이 성경에서와 같이 그렇게 위대한 왕이라면 그들이 몰랐을리 없고, 또 알았다면 솔로몬이란
왕을 어떤 방법에서든 언급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록은 없으며, 또한 오랜기간 동안의
유적 탐사에도 그와 관련된 유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유적도 비교기록도 없는 솔로몬을
역사적 사실인물이라고 말하긴 힘든 것이다." [ Science.7 Jan 2000 Vol.287 No.5450] [예루살렘 AP=연합]
제5장 / 주변국의 문화에 영향 받은 구약
고대 니느웨(Nineveh)의 궁전터에서 아슈르바니팔(Ashurbanipal : BC 669~629)의 왕립 도서관이
발굴 되었다. 그곳에서 영국의 레이야드(Layard)가 1848~1876년에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점토판을
발굴했으며, 라삼(Rassam)이 1853년에 길가메쉬 서사시(The Epic ofGilgamesh)를 발굴 했다.
그 외에도 그곳에서 부조와 약 25,000개의 점토판이 발견되었고 출토된 유물은 대영박물관에
보관 되게 된다.
이곳의 유물들은 아슈르바니팔 왕이 고대 최초로 최대의 도서관을 세우고 그의 서기관들과 관리들을
고대의 여러 도시와 나라들, 즉 앗시리아, 바벨론, 구다, 니플, 악카드, 에렉 등지에 파견하여 기록물들을
수집하여 보관한 것들이다. 1862년에 대영박물관의 조지 스미스(GeorgeSmith)가 이 서판의 내용을
공표함으로써 전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BC 2000년경에 이룩된 것이라 하는데 각기 시대가 다른 별도의 이야기들을
한 사람의 인물인 길가메시에 통일시킨 것이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 길가메시서 사시 Gilgamesh Epoth 항목]
이것은 길가메시 서사시라고 불리며, 12판으로 된 것 중 11번째 판에 기록되었다.
고대 우룩(성경의 에렉-창 10:10)의 왕이요 영웅인 길가메시가 고생을 무릅쓰고 조상 우트나피쉬팀
(Utnapishitim)을 찾아가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묻고 답할 때 우트나피쉬팀이 들려 준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 것이다. 수메르의 자료에 의하면 길가메시는 우루크 제1왕조 제5대 왕이었으나 뒤에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어 부조(浮彫)와 원통(圓筒), 인장(印章) 등의 미술작품에도 가끔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길가메시 서사시도 수메르인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길가메시보다 앞선 홍수 설화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BC 1967년 또는 BC 21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여러 홍수 기록(니플의 문서)이
발굴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도시인 키슈(Kish)에서 파낸 점토 기록은 거의 BC 20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거기에는 홍수전에 살았던 통치자들의 이름이 적혀있고 "그런 후에 홍수가 세상을 흽쓸었다.
홍수가 흽쓴 후에 왕권이 다시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는데 첫째로 키슈에 왕권이 임했다"고 적혀있다.
#아슈르바니팔 도서관에서 길가메시 서사시와 함께 발견된 '에누마 엘리쉬'라는 뜻은
"태초에"(When above)라는 뜻이다.
아시리아를 포함한 바빌로니아 신화에 관하여 오늘날 알 수 있는 것은 주로 BC 7세기의 아시리아
후기의 문헌에 의한 것으로, BC 18세기의 바빌론 제1왕조로부터 그다지 멀리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는다.
즉, 거의 모든 신들 및 신화가 BC 25세기 무렵의 수메르 시대까지 소급한다는 것은 거의 정설로 되어
있다. 그래서 바빌로니아의 주신(主神) 마르둑과 아시리아의 주신아슈르를 제외한 많은 신들이
수메르식(式) 이름과 함께 셈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로마의 신들이 모두 그리스식 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과 사정이 같다고 볼 수 있다.
▶ 구약의 천지창조와 바빌론의 신화 비교
#창세기의 태초 이야기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에 영향을 받은 흔적이 있다.
#바빌론의 창조신 화에느 마엘리쉬Enumaelish는 바빌론판 창조 신화이다
이 신화는 먼저 우주 창조 신화로 부터 시작된다.
#태초에 티아맛Tiamat과 아프수Apsu라는 한 쌍의 우주신이 있었다.
#티아맛은 여성신이며 바다의 짠물을, #아프수는 남성신으로서 강에서 흐르는 단물을 상징하는
신이었다. 두 신 사이에서 먼저 라흐무와 라하무의 한쌍이, 그 뒤에 안샬과 키샬이라는 다른 한 쌍의
신이 태어났다. 그리고 수많은 신들이 태어났다고 한다.
주목할 점은 모든 것의 시초인 신이 바다와 강물의 신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즉 천지창조 이전에도
물은 애초에 존재했다는 말이다. 창세기 1장 2절에서도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기 전에 수면위에
운행했다는 구절로 볼 때, 창세기는 에누아 엘리쉬와 같은 관점에서 기록되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들이 많아지자 신의 세계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중, 바다의 여신 타마앗 여신과
그의 내연의 남편 킨구(Kin-gu)가 마루둑을 죽이려 전쟁을 벌였으나, 마루둑의 승리로 끝을 맺었고
반역자 킨구는 처형을 당한다.
마루둑은 타아맛의 시체로 천지를 창조한다. 마루둑은 티아맛의 시체를 머리에서부터 쪼개어
두 동강을 낸 후, 그 윗 몸체를 휘어 둥근 하늘을 밑에 있는 부분으로써 땅을 만들었다.
또 그는 하늘에 자신의 집을 짓고 나서 여러 별을 지었으며, 달력도 제정했고, 북극성을 제자리에
두었고, 달과 해가 운행할 길도 잡아 주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복할 점은 창공을 만든 뒤 그곳에 별, 태양, 달을 세우고 이를 절기와 날을 세는 징표로
삼았다는 것과 아래의 물을 모이게 하여 육지와 바다가 생기게 했다는 것 역시 구약과 똑같다는 점이다.
또, 구약의 창세기는 물을 혼돈, 흑암, 즉 테홈(Tehom)이라 하여 마루둑에게 전쟁을 걸어온 바다의 여신
티아맛과 그 어원을 같이하고 있다. 구약에서도 여호와가 혼동속에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마르둑은 자신과 함께 싸워준 여러 신들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인간을 만들어 신을
섬기도록 작정했다. 지혜가 많은 에아(Ea)는 킨구의 몸에서 피를 뽑아 진흙을 개어 인간을 창조했다.
반역자로 낙인찍힌 킨구의 피와 진흙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인간의 본질의 일부는 반란을
일으킨 악한 신에게서 유래되었는 원죄론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것은 성악설의 시작이기도 하다.
죄를 지어 사형당한 신의 피로 인간을 만들었다는 점은 "살의 혼은 피에 있다"는 레위기 17장 11절의
피에 대한 관념과 일치한다. 이러한 피와 관련된 인간의 원죄론은 유대인들의 염소의 피를 제단에
뿌려서 하는 번제의식(또는 '속죄례')라는 종교적 관습에 영향을 끼친 듯하며, 이것은 나아가서 오늘날
기독교의 예수의 대속적 죽음에 대한 속죄 신학으로 발전했다. 구약의 번제의식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진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크나큰 영향을
준 것이다.
인간을 만든 뒤에 신들은 휴식을 취하고 법석대며 축하했다고 기록되어져있다. 이것은 #창세기의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하고 난 후에 휴식을 취하고 안식일을 정해 거룩하게 했다는 것과 일치한다.
즉, '안식일'의 발상도 바빌론과 수메르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안식일의 유래를 창세기에서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한 후에 휴식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 한다. 그러나 #로린슨이 판독한 수메르의 점토판에는 아래와 같이 적혀 있다.
"제7일은 마르둑과 자르파니트의 축제일이다. 그 날은 악한 날이다. 위대한 백성의 목자는 연기 나는
숯불 위에 구운 고기를 먹지 말 것이니라. 그 몸에 겉옷을 갈아입지 말 것이요 깨끗한 것을 입지
말지니라. 그는 희생 제물을 드리지 말지니라. 병거를 탄 왕은 달리지 말 것이요. 그는 승리를 말하지
말 것이라. 선견자는 거룩한 곳에서 신탁을 말하지 말라. 의사는 환자 위에 그 손을 얹지 말 것이요,
악담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느니라. 밤에 왕은 마르둑과 이슈타 앞에 그의 제물을 드릴 것이며
관제(灌際)를 부을지니라. 그의 손을 쳐드는 것은 그 때에 그 신들에게 기뻐함이 될 것이라."
[Rawlinson's Cuneiform Inscription of Western Asia Ⅵ, 2nd ed.,pl. 32, lines 28-38]
아카드어 '샤파투'는 바빌로니아에서 정결례를 행하는 종교일이었는데 이스라엘의 안식일을 뜻하는
'샤바트'라는 단어와 유사성을 띄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전승에 따르면 정결례를 행하는 '샤파투'는
"신의 심장이 쉬는날"이라고 해석했다. 즉 신이 쉬는 날이 안식일인 '샤파투'였고, 유대인들은 이를
히브리어로 음역하여 '샤바트'라고 부른 것이다.
또 다른 점토판인 #지우쑤드라의 엔키와 닌후르사드의 신화에서도 창세기의 에덴동산과 유사한 신화가
발견된다.
태초에 낮과 밤이 생기고 해(年)가 결정된 뒤 큰 신이 생겨나고, 그들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은 뒤
기본적인 세상의 질서가 정해졌다. 태초의 낙원인 딜문(Dilmun)은 순결하고 찬란하며 성스런 땅이었다.
엔키(Enki)에 의해 축복받아 달콤한 물이 넘쳐 흘렀으며,풍성한 개펄과 야자나무로 채웠다.
동쪽에 자리잡은 에덴에는 물이 붇거나(riese) 범람하는 강이 하나 있었는데,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과
더불어 4대강을 형성했다. 그곳은 또한 푸르게 우거져 나무들에는 열매가 가득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강바닥을 파서 그 흙으로 강둑을 쌓는등의 고된 노역에 시달리던 작은
신(神)들이 불평하기 시작했고, 지혜의 신인 엔키를 저주하며 급기야 연장을 파괴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자 잠에 빠져있는 엔키에게 어머니 남무(Nammu)가 아들을 깨운다.
"여전히 누워 있느냐? 이런데도 너는 잠자고 있느냐?....너의 재간으로 신들을 대신할 것을 만들어
그들의 노역을 풀어 주어라."
엔키는 그의 어머니인 남무의 조언으로 인해 신들의 노역을 대신할 존재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우선 점토를 빚어 출산의 모신들을 창조하고, 그녀들과 의논한 끝에 인간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진흙을 빚어 인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신의 능력이 서려있는 '이름있는 피' 가 필요했다.
엔키는 반란을 일으킨 작은 신들의 우두머리 웨일라(We-ila)를 잡아 죽인 후, 그 피를 점토와 섞어
인간을 만들었다. 인간(awila : 아윌라)이라는 단어는 웨일라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한다.
엔키는 일곱 명의 출산 여신들의 도움을 받아 인간을 창조한 후, 인간들에게 대신 노역을 맡겼다.
#지우쑤드라에서도 에누마 엘리쉬와 같이 반역한 신의 피로써 인간을 창조했다고 나온다.
또, 지우쑤드라에서는 그동안 신학적으로 의문점이었던 #이브의 갈비뼈 탄생에 대해서 의문을
풀어줄만한 단서가 등장한다.
엔키와 닌후르사그(Ninhursag)의 사이에서 여덟 종류의 식물들이 태어났는데 엔키가 자식들인
식물을 먹어버렸다. 결국 그녀에게 저주를 받은 엔키는 먹어 치운 각 식물에 대해 하나당 하나씩의
상처를 입었다. 엔릴과 여우는 엔키 대신에 그 저주를 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엔키와 다시
결합하여 새로운 자식들 여덟을 낳았고 그들이 각각의 상처를 치료했다.
그의 갈비뼈를 치료한 딸을 닌티(Ninti)라고 불렀는데 달(months)의 여왕이고, 갈비뼈의 부인,
또는 생명을 주는 여인이란 의미이다. 수메르어로 '티'란 말은 '갈비뼈'와 '생명을 주다'라는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이런 연상은 이브에게로 이어진다. 창세기에서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지고
그녀의 이름인 하와 또는 생명(living)과 관련 있다.
#흙으로 인간을 창조했으며 인간 자체가 애초에 원죄(반역자 신의 피로써 창조되었다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는#메소포타미아와 수메르의 다양한 창조신화에서 발견된다.
또, 이브가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이유는 위에서 언급했듯이 수메르어로 갈비뼈가 생명을
주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일 것이다.
바빌론 유수당시 유대인들은 이러한 바빌론 사람들의 신화에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창세기의 에덴동산 역시 수메르 신화의 태초의 낙원 딜문과 유사하고, 그 이름 또한 수메르어
명사인 '간즈 에덴'(ganz eden:들판의 일궈놓은 밭)에서 나왔다. 수메르어 보통명사가 창세기에서는
고유명사로 사용된 것이다.
창세기의 뱀이 사악한 동물이라는 관점도 유대인들이 바빌론 유수당시 그곳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추측된다.
길가메쉬 신화(The Epic of Gilgamesh)에서의 뱀은 영생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 버린 악한 동물로
묘사되어진다.
이 신화는 친구 엔키두(Enkidu)가 죽게 되자 우룩 나라의 왕 길가메쉬는 죽음의 공포에 시달린다.
길가메쉬는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죽지 않는 법(不死永生)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만슈라는 산에 도착한 #길가메시는 대홍수 때에 유일하게 살아 남았다는 우트나피스팀이라는
전설적 인물을 찾아간다.
가까스로 우트나피스팀에게 영생할 수 있는 비법을 듣게 된 길가메쉬는 회춘하는 신통한 풀이 있는
곳으로 간다. 길가메쉬는 바닷속에 들어가 그 풀을 뜯어 가지고 물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는 몇 날 동안 길을 가다 한 곳에 맑은 연못이 있는 것을 보았다. 길가메쉬는 그냥 지나갈 수 없어
연못에 몸을 씻기로 생각하고 그 약초를 연못가에 놓아두었다. 그런데 그 연못에서 살던 한 뱀이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뭍으로 나와 순식간에 그 풀을 훔쳐 먹고는 껍질을 벗고 사라졌다.
그래서 길가메쉬는 영생의 기회를 뱀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한편, 대영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원주형 도장에 눌려 찍혀진 부각에는
거룩한 나무를 가운데 두고 두 사람이 앉아 있는 데, 왼편사람 뒤에는 뱀이 유혹하는 장면이 나온다.
대영박물관측에서는 이 유물에 '하와의 유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출처] 안티바이블 그 -16, 천지창조와 바빌론 신화|작성자 천리아허상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