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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도서관에서 2016년09월28일(수)에 대출했다가 2016년10월12일(수)에 반납해야 할 ‘레이먼드 카버’의 소설집《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hwp
내 친구 멜 맥기니스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멜 맥기니스는 심장 전문의였다. 때로
는 그 직업 때문에 덕을 보는 경우도 가끔 있긴 했다.
우리 네 사람은 지금 진(술의 일종)을 마시며 멜의 집 주방 식탁에 둘러앉았다. 싱크대 뒤의 커다란 창문을
통해 햇살이 주방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멜하고 나, 그리고 멜의 두 번째 아내인 테레사 - 우리는 그냥 ‘테리’
라고 불렀다 - 와 내 아내 로라, 이렇게 네 사람이 같이 앉아 있었다. 우리는 그때 앨버쿼키에 살고 있었지만,
고향은 다들 제각각이었다.
식탁 위에는 얼음 통이 하나 놓여 있었다. 진과 ‘토닉 워터’(술의 일종)를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멜은 진실한 사랑이란 정신적인 사랑에 다름 아니라고 믿는 친구
였다. 자기는 의대에 들어가기 전에 5년 동안이나 신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돌아보면 그 시절이 자기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던 것 같다고 했다.
테리는 멜과 재혼하기 전에 같이 살던 남자는 너무나도 자신을 사랑한 나머지 자기를 죽이려고까지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테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어느 날 밤 그는 나를 심하게 때렸어요. 발목을 붙잡고 거실
안을 질질 끌고 다니더군요. 그 동안 계속 이렇게 지껄이는 것이었어요.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구, 이년아.’
그러면서 그는 계속 나를 끌고 거실 안을 돌았어요. 내 머리가 여기저기 부딪힌 건 물론이죠.” 테리는 우리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당신들은 그런 사랑을 어떻게 생각해요?”
테리는 뼈만 앙상한 체구에 예쁘장한 얼굴, 짙은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가진 여인이었다.
그녀는 터키옥(터기玉 _ 보석의 일종)으로 만든 목걸이와 기다란 펜던트 귀걸이를 좋아했다.
“맙소사, 한심한 소리하지 말라구. 그건 사랑이 아냐. 당신도 잘 알잖아.” 멜이 말했다. “당신이 그걸 무어라
부르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이라고 부르지 않으리라는 건 알아.”
“당신이 어떻게 말하건 상관없어요. 하지만 난 그게 사랑이었다고 믿어요.” 테리는 그렇게 말했다. “당신에
게는 미친 소리로 들릴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생각이 달라지는 건 아니에요. 사람들은 저마다
달라요, 멜. 물론 그는 때때로 미치광이 같은 행동을 했어요. 그건 나도 인정해요.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했어
요.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나를 사랑했다구요. 거기엔 사랑이 있었어요, 멜.
그렇지 않다고 말하진 마세요.”
멜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잔을 집어 들고 로라와 나를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나를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어.” 멜의 목소리는 격앙된 목소리였다. 잔을 비운 멜은 다시금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테리는 낭만주의자야. 테리는 ‘나를 걷어차 주세요, 그러면 당신의 사랑을 인정해 줄게요’ 라고 하는
주의자라구. 이봐, 테리.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라구.” 멜은 테이블 너머로 손을 뻗어 테리의 뺨을 살짝
건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아주 없는 이야기까지 꾸며내는군요.”
“꾸며내다니?” 멜이 말했다. “꾸며내고말고 할 게 뭐 있어? 난 내가 아는 걸 말한 거야, 그것뿐이라구.”
“그나저나 우리가 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 거죠?” 테리는 그렇게 말하며 잔을 들어 술을 비웠다.
“멜은 언제나 가슴속에 사랑을 담고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멜?” 그녀(테리)는 미소를 지었고, 나는
그걸로 그 이야기는 끝난 거라고 생각했다.
“나로서는 에드의 행동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없어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그것뿐이라구.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멜이 로라와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들이 보기엔 그게 사랑인 것 같아?”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 보나?” 내가 되물었다. “나는 그 친구를 알지도 못하잖아. 이따금 지나가는
말로 그 사람 이름을 들어 보기는 했지만, 그것만 가지고 왈가왈부할 처지는 못 되는 것 같군. 자세한
것은 자네가 알고 있을 것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자네가 말하는 건 절대적인 사랑이 아닐까 싶어.”
멜이 말했다.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는 건가? 내가 말하는 사랑은, 적어도
사람을 죽이는 사랑은 아니야.”
내 아내 로라가 (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에드에 대해서 전혀 아는 바가 없어요. 지금 상황이
어떤 아는 바가 없어요. 지금 상황이 어떤 건지도 모르구요. 다른 사람이 처해 있는 상황을 어떻게 남
들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겠어요?”
나는 로라의 손등을 가볍게 건드렸다. 그녀도 나를 바라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로라의 손을
가볍게 잡아 보았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고, 완벽하게 매니큐어가 칠해져 있었다. 나는 내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목을 감사쥐고 그녀를 껴안았다.
“내가 떠나 버리자 그는 쥐약을 먹었어요.” 테리가 말했다. 그녀(테리)는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산타페에 있는 병원으로 데리고 갔죠. 우린 그때 거기서 십 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거든요. 결국 그는 목숨은 건졌어요. 하지만 그 일 때문에 그의 잇몸은 엉망이 되어 버렸죠. 잇몸이
다 들떠서 난리도 아니었으니까요. 그 후로는 그의 이빨이 마치 짐승의 송곳니처럼 보이더군요. 세상에.”
테리가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그녀는 한참 동안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 있더니, 천천히 팔짱을 풀어
자기 술잔을 집어 들었다.
“하나님(하느님) 맙소사!” 로라가 말했다.
“걱정할 것 없어요. 지금은 꼼짝도 못하거든.” 멜이 덧붙였다. “그는 죽었소.”
멜은 나에게 라임 접시를 건네주었다. 나는 라임 한 조각을 내 술잔에 다 대고 즙을 짠 다음, 손가락으로
얼음 조각을 휘휘 저었다.
“사태는 점점 더 나빠졌어요. 입에 총을 물고 방아쇠를 당긴 거예요. 하지만 그것조차 뜻대로 안 되었어요.
불쌍한 에드.” 테리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쌍하긴 뭐가 불쌍해.” 멜이 말했다. “위험천만한 작자였지.”
멜은 금년에 마흔다섯 살이었다. 훤칠한 키에 멋진 곱슬머리를 가졌다. 틈이 날 때마다 테니스를 치기 때문에
얼굴과 팔이 구릿빛으로 그을려 있었다. 술을 마시지 않았을 때는 동작 하나하나가 그렇게 정확하고 신중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했어요, 멜.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말아 줘요.”
테리가 말했다. “내가 당신한테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물론 그는 당신과 같은 방식으로 나를 사랑하지는
않았어요. 나도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그는 나를 사랑했어요.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말라구요, 멜.”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다니, 그게 무슨 뜻이지요?” 내가 말했다.
로라는 잔을 든 채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녀는 팔꿈치를 테이블에 댄 채 두 손으로 자기 잔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멜과 테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무슨 소리가 나올지를 기다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당혹감이
이 잔뜩 어려 있었다. 자기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그런 일을 겪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자살을 시도했는데 실패한 겁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된 건지 내가 설명해 주지.” 멜이 말했다. “그 친구는 테리와 나를 협박하기 위해 22구경짜리
권총을 하나 구했어. 아, 이건 절대로 농담이 아닐세. 그 친구는 늘 우리를 협박했다고. 그때만 해도 우린
사는 게 정말 사는 게 아니었지. 마치 탈주범 같은 심정이었다고나 할까. 하는 수 없이 나도 총을 하나
구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어. 그걸 믿을 수 있겠나? 나 같은 사람이 총을 가지고 다녔다니 말야.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호신용으로 하나 사서는 언제나 내 차 사물함에 넣고 다녔지. 때로는 한밤중에 아파트를
나와서 병원으로 가야 할 때도 있잖아. 그때 테리와 나는 결혼을 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전처가 집과
아이들, 개와 그 밖의 모든 걸 다 차지하고 있었지. 그래서 테리와 나는 이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거든.
아까도 말했지만 난 새벽 두세 시에도 병원에서 전화가 걸려오면 곧장 뛰어가야 하는 처지가 아닌가.
그럴 때 주차장에 나가 보면 사방은 칠흑처럼 어둡지,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줄줄 흐르더군. 그 녀석이
어디 수풀 뒤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차 뒤에 숨어 있다가 언제 튀어나오며 총을 쏘아댈지 모르는 일이잖나.
내가 그런 걱정을 할 만큼, 그 녀석을 완전히 미쳐 있었어. 심지어는 폭탄 다루는 법까지 안다고 하더군.
그는 시도 때도 없이 병원으로 전화를 걸어서 나를 찾는 거야. 어쩌다가 내가 받아 보면 이렇게 지껄이곤
했어. ‘이 개 같은 자식, 너도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어.’ 정말 등골이 오싹하더라고.”
“난 아직도 그이에게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테리가 소리를 낮춰 조용히 말했다.
“마치 끔찍한 악몽처럼 들리는군요.” 로라가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데 그가 총을 입에 물고 방아쇠를
당긴 다음에 어떻게 됐어요?”
로라는 법률 회사의 비서였다. 우리는 서로의 일 때문에 처음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미처 자신들(나와
그녀)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로라는 금년에 서른다섯 살이니 나보다 세 살이
더 젊다. 일단 사랑에 빠지고 나니 우리는 함께 있는 시간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로라는 같이
있는 사람에게 전혀 부담을 주지 않는 편안한 상대였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로라가 또다시 물었다.
멜이 대답했다. “그는 자기 방에서 그런 짓을 했어. 누군가 총소리를 듣고 매니저에게 알렸던 모양이야.
비상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그런 지경이 되어 있더라는 거야. 그들은 당장 구급차를 불렀지. 마침
나는 그 친구가 있는 병원으로 실려 올 때 현장을 지켜보게 되었어. 결국 사흘 뒤에 그는 숨을 거두고
말았어. 머리가 어찌나 부어올랐는지, 정상적인 사람의 두 배는 족히 될 것 같더군. 난 그런 끔찍한 장면
은 일찍이 본 적이 없어. 앞으로도 보고 싶은 마음이 없고 말야. 소식을 듣고 달려온 테리는 병실에서
그 친구와 같이 있겠다고 떼를 쓰더군. 우리는 그 문제 때문에 대판 싸우기까지 했어. 지금 그런 상태가
되어 있는 그 친구를 이 사람이 꼭 봐야 한다고는 생각되지 않더라고. 다시 말해 테리는 그런 끔찍한
장면을 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어. 지금 생각도 마찬가지고 말야.”
“그래서 그 싸움에서 누가 이겼어요?” 로라가 물었다.
“그이가 숨을 거둘 때 난 그와 함께 있었어요. 죽기 전까지 한 번도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지만, 어쨌
든 나는 그의 곁에 앉아 있었어요. 돌봐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그는 아주 위험한 자였어.” 멜은 답답하다는 듯 덧붙였다. “굳이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면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그건 사랑이었어요.” 테리가 말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비정상적인 것으로 보였겠죠. 하지
만 그는 그 사랑 때문에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되었어요. 결국 실제로도 그것 때문에 죽었고 말이에요.”
멜이 내뱉듯이 되받았다. “나 같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지는 않을 거야. 그러니
까 내 말은,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거야. 나는 자살한 사람을 많이 봤어.
하지만 자기가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보지 못한 것 같아.”
멜은 목 뒤로 두 손을 깍지 끼더니 의자를 뒤로 기울였다. “난 그런 종류의 사랑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어. 정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겠다면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우린 무척 겁이 났어요. 멜은 심지어 유언장을 써놓고, 캘리포니아에 있는 공수부대 출신 동생한테
편지를 쓰기까지 했어요. 자기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뒷일을 부탁한다면서 말이에요.”
테리는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멜의 말이 옳아요. 우린 마치
탈주범 같은 생활을 했죠. 우린 두려움에 떨고 있었어요. 멜 역시 마찬가지였구요. 그렇지 않아요, 여보?
한 번은 경찰에 전화를 하기까지 했지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더군요. 그(=경찰)들은 에드가 실제로
어떤 행동을 취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어요. 웃기지 않아요?”
그녀는 마지막 남아 있던 술을 자기 잔에 마저 따른 다음, 빈병을 흔들어 보였다. 멜이 식탁에서 일
어나 찬장으로 가더니, 새 병을 하나 가지고 왔다.
“글쎄요, 닉과 나는 사랑이 뭔지 알 것 같아요. 적어도 우리 같은 경우에는 말이에요.” 로라는 그렇게
말하며 무릎으로 내 무릎을 툭 건드렸다. “지금쯤 당신이 뭐라고 한 마디 해야 할 시점 아니에요?” 그녀
는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나는 대답 대신 로라의 손을 잡고 내 입술을 그녀의 손등으로 가져갔다. 손에 키스 한 번 하는 것치고
는 대단히 과장된 동작이었기 때문에 다들 넋을 잃은 듯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린 운이 좋았어.”
“당신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테리가 말했다. “보고 있으려니 속이 거북하네요. 아직 신혼여행이 다
끝나지 않은 모양이죠? 그렇담 제정신을 차릴 때가 아니죠. 조금만 더 기다려 보세요. 두 분이 결혼한 지
얼마나 됐죠? 일 년? 일 년이 더 됐나요?”
“일 년 반쯤 됐어요.” 로라가 얼굴을 붉혔다.
“오, 저런.” 테리는 계속 비꼬는 말투였다. “조금만 던 기다려 보라고요.”
테리는 술잔을 들고 로라를 바라보았다.
“농담이에요.” 테리가 말했다.
멜이 새 병을 따더니 테이블을 한 바퀴 돌며 술잔을 채웠다.
“자, 여러분.” 멜이 자리에 앉으며 술잔을 들었다. “우리, 건배 한번 합시다. 사랑을 위해서, 진실된
사랑을 위해서 말입니다.”
우리는 서로 잔을 부딪쳤다.
“사랑을 위하여.” 우리는 한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뒷마당에서 개 한 마리가 짖기 시작했다. 미루나무 이파리들이 창문에 스치며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오후의 햇살이 부담없는 넉넉한 빛으로 주방을 비추고 있었다. 우리는 마치 어딘가 대단히 신비로운 마법
의 땅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 되어 다시 한 번 잔을 치켜들었다. 다들 금지된 장난을 하기로 약속한 개구
쟁이 같은 표정으로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들한테 진정한 사랑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지. 그러니까 내 말은, 대단히 그럴 듯한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는 거야, 결론은 각자 알아서 내리라구.” 멜은 자기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그가 거기다 얼음 조각과 라임을 넣는 동안 우리는 각자 자기 잔을 홀짝거리며 그의 얘기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로라가 다시 한 번 내 무릎을 건드렸다.
그녀의 허벅지에 손바닥을 대보니 따뜻한 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러고 있었다.
“우리들 가운데 진정한 사랑이 무언지 아는 사람이 있을 것 같은가?”
멜이 말했다. “내가 보기에 우린 모두 사랑에 관한 한 초보자나 다름없어. 우리는 서로 당신을 사랑한다
고 말하곤 하지. 그건 사실이야, 그것까지 의심하지는 않아. 나는 테리를 사랑하고 테리는 나를 사랑해.
당신네도 마찬가지고. 당신들은 지금 내가 어떤 종류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 거야. 육체
적인, 그러니까 당신이 특정한 어떤 상대방을 향해 물불 안 가리고 돌진하게 만드는 충동 같은 것을 그런
사랑이라고 할 수 있겠지. 세속적인 사랑, 아니 감각적인 사랑이라고 하지. 하루하루 상대방을 향해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그런 사랑 말야. 하지만 나는 때때로 내가 내 전처를 얼마나 진정으로 사랑했었나 하는
생각 때문에 고민스러운 적이 있어. 물론 나는 그녀를 사랑했었나 하는 사실을 알고 있어. 적어도 그런
면에서는 나도 테리와 다를 바가 없는 셈이지. 테리와 에드처럼.” 멜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말을
계속했다. “한때는 내가 내 전처를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 하지만 지금 나는 그녀
생각만 하면 욕지거리가 나올 만큼 그녀를 미워하고 있어. 그걸 어떻게 생각할 수 있겠나? 그 사랑은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난 그게 알고 싶어. 누가 속 시원히 나한테 설명을 좀 해주시면 좋겠단 말야. 자,
그런 상태에서 에드 생각을 해 보자고. 좋아, 다시 에드 얘기로 돌아가고 말았군. 그(=에드)는 테리를
말 그대로 죽도록 사랑했어. 그래서 그는 테리를 죽이려 했고, 결국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지.” 멜은 말을 멈추고 술잔을 비웠다. “당신들은 같이 산 지가 이제 십팔 개월 됐다고 했지? 당신들
은 지금 서로를 사랑하고 있어. 그냥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다고. 얼굴에 다 쓰여 있으니까. 하지만
당신들은 서로를 만나기 전에 각자 다른 사람을 사랑했었어, 우리처럼. 당신들도 둘 다 전에 다른
사람과 결혼한 경험이 있지. 아마 틀림없이 당신들도 그 전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을 거야. 테리와
나는 같이 산 지 오 년이 되었고, 결혼한 지는 사 년째야.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 뭔지 아나?
가장 끔찍하면서도 어떻게 보면 더없이 다행스러운 일일 수도 있겠지. 예를 들어서 말야, 내일 당장 우리
가운데 한 사람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 이런 얘기는 하는 게 아닌데, 정말 미안하네 ― 어떻게 되겠
나? 물론 처음에는, 그러니까 당분간 혼자 남게 된 사람은 슬픔에 젖어서 어쩔 줄을 모르겠지. 하지만
머지않아 그 사람은 다시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거야. 지금까지 우리가 얘기한 사랑, 그런 사랑
은 한낱 과거의 추억으로 묻혀 버리는 거야. 어쩌면 추억 거리초자 되지 않을지도 모르지. 내 말이
틀렸나? 내가 너무나 기본적인 전제조차 무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해? 만약 내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솔직하게 얘기를 좀 해줘. 난 정말 알고 싶어. 그러니까 내 말은, 난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거야. 난 그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어.”
“멜, 세상에!” 테리는 멜의 팔목을 잡았다. “당신 취했어요? 너무 많이 마신 것 아니에요?”
“여보, 난 그저 얘기를 하고 있을 뿐이야.” 멜이 말했다. “무슨 얘긴지 알아? 난 내 생각을 말하기 위
해서 반드시 술에 취할 필요는 없어. 그냥 얘기를 하고 있는 것뿐이라구, 알아?” 멜은 테리를 똑바로
쳐다봤다.
“여보, 당신더러 뭐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테리가 말했다.
그녀는 자기 잔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병원에서 전화도 오지 않는 날이야.” 그렇게 말한 멜은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싶어. 오늘은 완전히 자유라구.”
“멜, 우린 당신을 사랑해요.” 로라가 말했다.
멜은 로라를 멀거니 응시했다. 마치 처음 보는 여자라는 듯이, 처음 보는 여자가 왜 여기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로라. 물론 자네도 사랑한지, 닉. 사랑해. 무슨 얘긴지 알아? 당신들은
우리 친구라구.”
그러면서 멜은 다시 잔을 집어 들었다.
멜이 잔을 비웠다. “내가 얘기 하나 해주지. 결정적인 예를 하나 들어 보겠다, 이런 얘기야. 그러니까
벌써 몇 달 전에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는 일이기도 하지. 아마 이 얘기를 들으
면 다들 지금까지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들이 하는 이야기를 창피하게 생각할 거야.”
“여보, 왜 그래요?” 테리가 말했다. “정말 안 취했으면 괜히 취한 척 하지 말고 제대로 얘길 해 봐요.”
“제발 당신 인생에 단 한 번만이라도 입 좀 다물고 있어 봐.” 멜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에게 은혜를 베푼다고 생각하고 제발 잠시만 그렇게 좀 해줘. 무슨 얘긴고 하니, 고속도로에서 교통사고
를 당한 어떤 노부부가 있었어. 어떤 애가 그 부부 차를 받은 거야. 다들 엉망진창이 되어서 누가 봐도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가로저을 지경이었어.”
테리는 우리를 한 번 힐끔 쳐다보더니 다시 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약간 걱정스러운 표정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는 건 너무 심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
멜이 다시금 술병을 돌렸다.
“그날 밤 병원에서 긴급 호출이 왔어.” 멜이 말했다. “오월인가 유월 쯤의 일이야. 테리하고 같이
막 저녁을 먹으려고 앉아 있는데, 병원에서 연락이 왔더군.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다는 거야. 술에
취한 십대 아이가 자기 아버지 픽업 트럭을 몰고 나왔다가 그 노부부가 타고 있던 캠핑카를 들이받은
거야. 칠십 대 중반의 할머니, 할아버지였지. 아이는 열 여덟인지 아홉쯤 됐는데,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어. 흉골이 핸들에 부딪혀서 박살이 나 버린 거지. 노부부는 간신히 목숨만은
붙어 있더군. 하지만 거의 살아 있다고 하기 힘든 상황이었어. 복합 골절에다가 장기 파열, 뇌출혈에
타박상, 찰과상 등등 어디 한군데 멀쩡한 데가 없었다니깐. 둘 다 뇌진탕 증세까지 보이고 있었어.
어쨌건 지극히 끔찍한 상황이었지. 게다가 나이가 그렇게 많으니 이미 투 스트라이크를 먹고 들어갔다
고 할 수밖에. 할아버지보다는 할머니 쪽이 조금 더 심각한 상태였어. 비장까지 파열되어 있었으니까.
무릎 연골도 양쪽 다 박살이 놨어. 하지만 그들은 안전벨트를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장에서 즉사
하는 지경은 면한 거야.”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국립안전위원회의 광고를 듣고 계십니다.” 테리가 말했다. “지금까지 대변인
멜빈 R. 맥기니스 박사의 말씀이었습니다.” 테리는 웃음 터뜨렸다. “멜, 당신은 가끔 지나치게 심각해
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난 당신을 사랑해요, 여보.”
멜이 식탁 너머로 몸을 구부리자, 테리도 반쯤 마중을 나왔다. 두 사람은 그렇게 키스를 나누었다.
“테리 말이 맞아.” 멜은 다시 자세를 바로잡았다. “당신들도 꼭 안전벨트를 매라구. 하지만 그
늙은이들은 정말 심각한 상태였어. 내가 병원에 도착했을 무렵, 십대 아이는 아까 말했듯이 이미
숨이 끊어져서 한쪽 구석의 침대에 누워 있더군. 나는 그 노부부의 상태를 한 번 살펴보고는 즉시
응급실 간호사에게 신경 전문의와 정형외과 전문의, 그리고 외과 전문의를 불러 달라고 지시했어.”
그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간단하게 얘기하지. 그래서 우리는 그 두 노친네를
수술실로 옮겨서 밤을 꼬박 새우다시피 하며 수술을 했어. 뜻밖에도 둘 다 목숨이 아주 질기더군.
이따금 그런 사람들이 있잖아. 아무튼 우리는 필요한 조치를 취했고, 아침이 될 무렵에는 살아날
확률이 반반 정도는 되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구. 물론 할머니 쪽이 조금 더 위험한 상태이긴 했지
만 말야. 그렇게 해서 그들은 다음 날 아침까지도 숨이 붙어 있었어. 그래서 일단 중환자실로
옮겼지. 거기서 꼬박 두 주 동안 집중적으로 치료를 하고 나니까, 점점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하는
거야. 그래서 나중에는 일반 병실로 옮겼지.”
멜은 잠시 숨을 고르고는 말머리를 돌렸다. “자, 우리 이 싸구려 진(술의 일종)을 얼른 마셔
버리자구. 그런 다음 식사를 하러 나가는 거야, 어때? 테리와 내가 좋은 데를 한군데 봐두었어.
거기로 가서 멋있게 저녁을 먹자, 이 말이야. 하지만 그 전에 이 싸구려 진을 마저 마시자구.”
테리가 잔을 들어 마시며 설명했다. “우린 아직 한 번도 거기서 음식을 먹어 보진 않았어요.
하지만 겉에서 보기에는 그럴 듯해 보이더군요.”
“난 음식을 좋아해.” 멜이 빙그레 웃었다. “만약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난 요리사가 될 거야.
어때, 테리?”
멜은 그렇게 말하더니 자기 잔에 든 얼음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테리한테는 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당신들한테도 말해 둘 것이 있어. 만약 내가 다른 인생으
로, 다른 시대에 새로 태어날 수 있다면, 나는 기사가 되고 싶어. 그 튼튼한 갑옷을 입고 있으면
얼마나 안전하겠나. 화약이 나오고 총이 발명되기 전까지만 해도 기사 노릇하는 것도 괜찮았을
거야.”
“멜은 말을 탄 채 창을 휘두르고 싶대요.” 테리가 말했다.
“여자 스카프를 목에 두르고 말이죠?” 로라가 미소를 지었다.
“아예 여자를 태우고 다니지 뭐.” 멜이 말했다.
“어휴, 창피해.” 로라가 말했다.
“그러다가 노예로 태어나면 어쩔려고(‘어쩌려고’가 올바른 표기) 그래요?” 테리가 말했다. “그
시절의 노예들도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나는 기사가 어떤 사람들한테 충성을 다해야 하는 고신일 수도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렇지 않겠어? 그렇지만 그렇게 따지면 누구나 다 다른 어떤 사람의 고신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렇지 않아, 테리? 하지만 내가 기사를 좋아하는 건 많은 여자를 거느린다는 건
차치하더라도, 갑옷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야. 그런 갑옷을 입고 있으면 좀처럼 상처를 입지 않을
것 아냐. 그 당시에는 자동차도 없었으니, 술 취한 십대 아이가 박치기를 해오는 일도 없을 테고․․․․․․.”
“가신家臣이에요.” 테리가 말했다.
“뭐라고?”
“가신이라구요. 고신이 아니라 가신이라고 해야죠.”
“고신이든 가신이든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당신은 내 말을 알아들었잖아. 그래, 좋아. 난 무식한
놈이야. 물론 공부는 할 만큼 했지. 심장 전문의이기도 하고. 하지만 난 어디까지나 기술자일 뿐이
야. 수술실에 들어가서 이것저것 잘라내고 뜯어 고치는 게 내가 하는 일이지.”
“너무 그렇게 겸손한 척할 필요는 없어요.” 테리가 말했다.
“이 친구는 하찮은 칼잡이일 뿐이에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멜, 때로는 기사들이 그 갑옷
때문에 질식하는 경우도 있다는 걸 알아야지. 갑옷이 햇빛을 받으면 너무 뜨거워져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어. 게다가 그 무거운 갑옷을 입고 다니려면 얼마나 힘이 들겠나? 어디선가
기사가 말에서 한번 떨어지면 갑옷이 너무 무거워서 혼자 힘으로 일어날 수가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어. 때로는 자기가 타고 있던 말한테 밟히기도 했다는 거야.”
“끔찍한 일이군.” 멜이 말했다. “정말 끔찍한 일이야, 닉. 그렇게 혼자 땅바닥에 누워서 버둥
거리고 있으면 누군가 다른 놈이 다가와서 불고기를 만들어 버리겠지.”
“다른 고신 말이에요?” 테리가 일부러 고신이라는 말을 썼다.
“맞아.” 멜이 대답했다. “다른 가신이 와서는 ‘사랑의 이름으로’ 하고 외치며 창으로 찔러 버리
겠지. 물론 그들은 사랑 때문에 그런 전투를 벌이지는 않았겠지만 말야.”
“예나 지금이나 전쟁을 벌이는 이유는 다 똑같겠죠.” 테리가 말했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어요.” 로라도 한 마디 거들었다.
로라의 뺨에는 아직도 홍조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밝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로라는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멜은 다시금 자기 잔에 술을 따랐다. 그리고는 마치 아주 많은 자릿수의 숫자를 읽기라도 하듯,
술병의 라벨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는 천천히 술병을 테이블에 내려
놓고 ‘토닉 워터’(술의 일종)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노부부는 어떻게 되었어요?” 로라가 물었다. “아까 하던 얘기를 마무리짓지 않았잖아요.”
로라는 담배에 불을 붙이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성냥불이 자꾸 꺼져버렸다.
방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이제 와서는 아까와는 많이 달라져서 훨씬 옅어져 있었다. 하지만
창문에 바스락거리는 이파리는 아직도 그대로였다. 나는 그 나무 이파리들이 유리창과 호마이카
카운터에 드리우는 그림자의 형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물론 그 형태도 아까와 똑같지는 않
았다.
“그 노부부는 어떻게 됐어?” 이번엔 내가 물었다.
“늙은 사람일수록 더 현명한 법이죠.” 테리가 말했다.
멜은 그녀를 똑바로 노려봤다.
“계속 얘기해 봐요, 여보. 난 그냥 농담을 한 것뿐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테리, 때로는 ․․․․․․.” 멜이 말했다.
“여보, 제발. 너무 심각하게 말하지 마세요. 농담도 못해요?”
“무슨 농담 말야?” 멜이 말했다.
멜은 잔을 든 채 끈질기게 자기 아내를 노려보았다.
“어떻게 됐어요?” 로라가 물었다.
멜은 로라를 향해 눈길을 돌렸다. “로라, 만약 나에게 테리가 없었다면, 또 내가 그녀를 이토록
사랑하지 않았다면, 또 닉이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아니었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말았을 거요.
내 말[馬]에 당신을 태우고 다녔을 거다, 이런 얘기요.”
“아까 그 얘기나 마저 해 봐요.” 테리가 말했다. “그리고 나서 새로 발견한 레스토랑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자구요.”
“좋아. 아까 어디까지 얘기했지?” 멜은 한동안 테이블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그들을 보러 갔어. 어떨 때는 하루에 두 번씩도 가보았지. 둘 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온통 석고와 붕대 투성이였어. 당신들도 영화에서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있을 거야.
정말 영화에 나오는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어. 얼굴에는 그저 조그만 눈구멍, 콧구멍과 입구멍이
있을 뿐이었지. 게다가 할머니는 다리를 높이 매달아 놓아야 했어.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났
는데도 그 할아버지는 그렇게 우울해할 수가 없는거야. 자기 마누라가 이제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난 다음에도 좀처럼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 모양이더군. 그는 그런 사고를
당했기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었어. 한번은 그의 입구멍에 내 귀를 갖다대고 (그의) 얘기를
들어 보았지. 그랬더니 그는 사고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라, 자기 눈구멍을 통해서 아내의
모습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우울하다는 거야. 그것 때문에 견디기 힘들 만큼 기분이 좋질
않다는 거였어. 무슨 말인지 알아? 그 영감은 고개를 옆으로 돌려 빌어먹을 마누라를 볼 수가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우울해하고 있었다, 이런 얘기야.”
멜은 테이블을 한 바퀴 둘러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망할 놈의 할망구를 보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그 영감탱이는 그렇게 우울해했단 말이야.”
우리는 모두 멜을 쳐다보았다.
“무슨 얘긴지 알아들어?” 멜이 말했다.
아마 그때쯤 우리는 다들 약간씩 취해 있었던 모양이다. 눈에 초점을 맞추기가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제 햇빛은 처음 들어왔던 창문을 향해 빠른 속도로 물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자리에 일어나 머리 위에 달린 전등을 켜려 하지 않았다.
“내 말 좀 들어봐.” 멜이 큰소리로 덧붙였다. “어서 이 빌어먹을 놈의 ‘진’을 마저 마셔
버리자구. 이제 다들 한 잔씩만 더 마시면 병을 비울 수 있겠군. 그런 다음 식사를 하러
나가자, 이런 얘기야. 새로 발견한 레스토랑으로 말이지.”
“이이도 기분이 우울한 모양이에요.” 테리가 말했다. “멜, 진정제라도 한 알 먹는 게
어때요?”
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정제는 다 먹고 없어.”
“우린 모두 이따금 진정제 한두 알쯤 먹고 싶을 때가 있지.” 내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사람도 있대요.” 테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묻은 무언가를 문지르고 있었다. 한참만에야 그녀는
그 손길을 멈추었다.
“우리 애들에게 전화를 하고 싶어.” 멜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댄 자세로 말했다. “그래도
괜찮겠지? 내가 우리 애들한테 전화를 하는 것 말야.”
테리가 말했다. “그러다가 머조리가 받으면 어떡하려구요? 당신들도 머조리 이야기는
들었죠? 여보, 당신 머조리하고는 얘기를 하고 싶지 않다고 했잖아요. 그녀(머조리)가
전화를 받으면 괜히 당신 기분만 더 우울해질거예요.”
“난 머조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진 않아.” 멜이 말했다. “하지만 난 우리 애들과
얘기를 하고 싶다고.”
“멜은 하루도 빼지 않고 그녀(머조리)가 다시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하곤
해요. 아니면 차라리 죽어 버리기라도 하라고 말이에요.” 테리가 말했다. “우린
정말이지 그녀(머조리) 때문에 파산할 지경이에요. 멜은 그녀(머조리)가 우리를 엿먹이
기 위해서 일부러 재혼을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그녀(머조리)는 아이들
과 함께 (그녀의) 남자 친구를 데리고 살고 있죠. 그러니 멜은 (그녀의) 그 남자까지
먹여 살려야 하는 셈이에요.”
“그녀(머조리)는 벌 알레르기가 있어.” 멜이 말했다. “그녀가 재혼을 하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지 못할 거라면, 빌어먹을 놈의 벌한테 쏘여 죽어 버리라고 기도를 할 거야.”
“어떻게 그런 말을 ․․․․․․.” 로라가 말했다.
“부우우우우웅.” 멜은 손가락으로 벌 흉내를 내며 테리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두 팔을 옆으로 축 늘어뜨리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주 못된 여자야.” 멜이 말했다. ‘이따금 나는 내가 양봉꾼 옷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하지. 얼굴을 가리는 철망이 달린 핼멧 같은 모자를 쓰고,
손에는 커다란 장갑을 끼고, 솜을 넣은 두툼한 겉옷을 입은 그런 모습 말야. 그리고는
그녀의 집 대문을 두들겨 벌통 하나를 던져 넣는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먼저 우리
아이들은 바깥으로 불러내야지.”
그는(멜은) 다리를 서로 꼬고 앉았다. 그 간단한 동작조차 그(멜)에게는 몹시 힘에
겨운 것 같았다. 잠시 후 그는(멜은) 두 발을 마룻바닥에 내려놓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 몸을 앞으로 기울여 두 손으로 턱을 고였다.
“어쩌면 우리 아이들한테 전화를 걸지 않을지도 몰라.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닐지도
모르니까. 아마 우리는 그냥 식사를 하러 나가게 될 거야. 어때?”
“좋은 생각이군.” 내가 말했다. “저녁이야 먹거나 말거나 상관없어. 나가서 계속
술을 마실 수도 있겠지. 어쨌건 나는 석양 속으로 똑바로 걸어 나갈 수 있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여보?” 로라가 물었다.
“그냥 말 그대로야. 계속 앞으로 걸어 나갈 수 있다, 이런 얘기라구. 다른 뜻은
없어.”
“난 아무래도 뭘 좀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로라가 말했다. “내 평생 이렇게
배가 고팠던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주전부리할 거라도 좀 없나요?”
“치즈하고 크래커를 좀 가져올게요.”
하지만 테리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멜은 자기 잔을 거꾸로 뒤집었다. 남아 있던 술이 테이블에 쏟아졌다.
“진이 다 떨어졌어.” 멜이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하죠?” 테리가 물었다.
나는 내 심장이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심장이 뛰는 소리도
들렸다. 나는 주위가 캄캄해진 다음에 아무도 움직이지 않고 죽은 듯이 앉아 있는
그 주방 식탁에서, 사람이 내는 소음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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