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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신명기30장1~20절
제목 : 회개, 회복의 길
모세는 회개하고 돌아와 순종하면 생명과 복을 받고, 그러지 않으면 사망과 화가 있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복과 저주 앞에서 바른 선택을 하라고 권고합니다.
1. 회개와 회복(1~10절).
1) 회개에 따른 귀환의 약속(1~8절)
(1) 모든 복과 저주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현실화하면, 불순종한 결과 저주들이 모두 그들에게 쏟아 진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떠올려야 할 것입니다(1~2절).
“[1]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가 네게 임하므로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로 부터 쫓겨간 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 일이 마음에서 기억이 나거든 [2]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것을 온전히 따라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내가 네게 진술한 모든 복과 저주. – 모세가 이미 28, 29장에서 언급한 축복과 저주, 곧 하나님 말씀에 순종할 때 임할 복과 불순종할 때 임할 저주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복'이라는 말을 생략하는 것이 오히려 본문 이해에 자연스럽습니다.
기억나거든(슈브). - 본 뜻은 '원래의 장소로 돌아가다'(3:20), '원상태로 회복되다'(삭 15:19)입니다.
그러나 이 말이 마음에 적용될 경우에는 '뉘우치다'(렘 8:6)란 의미를 지닙니다.
2절의 '돌아와'의 원어가 바로 이 '슈브'입니다.
그리고 이 '슈브'는 왕상 8:47에서 '스스로 깨닫고' 및 '돌이켜'란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와…청종하면. – 참된 회개가 어떠한 것인지를 일깨워 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즉 회개란 단순히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거나 뉘우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회개란
① 먼저 자기의 잘못을 겸손히 깨닫고 뉘우치는 것입니다.
② 다음으로 과감히 그 죄악의 자리를 떠나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좇아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골 3:1-10).
(2)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마음과 뜻을 다해 순종한다면, 하나님께서도 ‘돌아올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3절).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휼히 여기사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
마음을 돌이키시고. – 이 말은 결코 하나님의 섭리나 뜻의 변개(變改)를 의미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저주를 거두시고 인간을 향해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의인화하여 묘사한 말일 뿐입니다.
흩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 여기서 '흩어진다'는 것은 이스라엘 편에서 볼 때 선민(選民)의 자격이 상실되는 것을 뜻합니다.
반면 다시 '모아진다'는 것은 선민의 자격이 회복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편에서 이를 설명하자면 '흩는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귀한 보배, 26:18)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반면 '모은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의 소유로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3) 그들이 하늘 끝까지 내쫓겼을지라도 데려오실 것입니다(4절).
“[4] 네 쫓겨간 자들이 하늘가에 있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모으실 것이며 거기서부터 너를 이끄실 것이라 ”
하늘가에 있을지라도...이끄실 것이라. –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아주 먼 곳에 끌려가 살고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시 불러 모아 자신의 소유로 회복시키겠다는 뜻입니다(Lange).
회개한 자에게 임할 이 회복의 메시지는 훗날 선지자들 이 포로 생활 중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고 희망을 일깨워 주는데 자주 사용하였습니다(렘 32:37-44;겔 34:13;36:24).
그리고 후일 이스라엘의 포로 귀환에 크게 기여했던 느헤미야 역시 본 메시지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긍휼을 간구한 바 있습니다(느 1:8, 9).
(4) 그들에게 순종의 대가로 약속된 모든 복을 다시 쏟아주시고, 그들을 번성하게 하실 것입니다(5절).
“[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 이 예언은 이스라엘 역사상 3차 걸쳐 실제로 성취되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남북 왕조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한 후 그곳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은 바벨론이 바사에 의해 망하자 바사 왕 고레스(Cyrus)의 칙령에 의하여 3차에 걸쳐 고토(故土) 팔레스틴으로 귀환하였습니다.
그중 1차 귀환은 B.C.537년,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인솔하에 이루어졌습니다(스 2:1-70). 그리고 2차 귀환은 B.C.458년, 에스라의 인솔하에(스 7:1-10), 그리고 마지막 3차 귀환은 B.C.444년, 느헤미야의 인솔하에(느 2:9-11) 각기 이루어졌습니다.
너를 네 조상들보다 더 번성하게 하실 것이며. – 물론 본절의 1차적 의미는 '육적 이스라엘의 번창'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모든 유대인들이 모두 가나안 땅으로 귀환할 경우, 가나안 땅이 그들 모두를 넉넉히 수용할 수 없다는 점에서(Keil), 본 절은 반드시 문자적으로만 이해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를 영적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영적 이스라엘 자손의 수효가 엄청나게 급증하리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그의 로마서 서신 11장에서 논한 바, 꺾이운 바 된 참감람 나무의 가지에 먼저 이방의 돌감람 나무가 접붙임 바 된 일이 있고 나서야 비로소 유대인의 진정한 회복이 있게 되리라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됩니다.
(5)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분명히 명시합니다(6절)
“[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 '할례'(割禮)는 본래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를 나타내는 상징적 징표였습니다(창 17:11).
즉 이것은 이스라엘이 모든 죄악된 것을 제거해 버리고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할 것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식이었습니다.
따라서 옛 언약 하에서 이루어졌던 이러한 '육신의 할례'는 어디까지나 새 언약 하에서 이루어질 '마음의 할례'를 예표 했던 그림자였습니다(렘4:4;롬 2:28, 29).
그렇다면 결국 본절은 하나님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 영을 부어 주고 새 마음을 심어 주사(겔 36:26, 27). 그들을 다시금 새 언약하의 새 백성으로 삼으시겠다는 은총의 선포인 셈입니다.
그런데 이 새 언약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최종 완성됩니다(히 8:6-13).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 6:5 참조.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 – 여기서 '생명'에 해당하는 '하이'는 '생명'을 뜻하는 일반적 용어인 '네페쉬'(12:23;13:6)와는 달리 '신선한 생명', '힘있는 생명'이라는 뉘앙스(nuance)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단어입니다(15, 19, 20절;28:66;32:47).
따라서 본절에서 말하는 '생명'을 단순한 육적인 목숨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합니다.
구약 시대 당시 경건한 히브리인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참 생명의 본질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시 27:1).
그리고 신약 성경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곧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요 3:16).
(6) 백성은 결국 생명을 얻을 것이나 그들을 압제했던 적군과 원수들에게 그 모든 저주들이 퍼부어 질 것입니다(7절)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네 적군과 너를 미워하고 핍박하던 자에게 이 모든 저주를 내리게 하시리니 –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핍박했던 모든 대적들은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들어 쓰인 도구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이스라엘보다 의로 왔기 때문에 선택된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그들 역시 자신의 죄 값에 대하여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본절의 의미는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시 62:12;렘 17:10).
(7) 하나님과 관계회복의 지침입니다(8절)
“[8] 너는 돌아와 다시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 모든 명령을 행할 것이라”
이는 하나님의 심판의 채찍을 맞은 이스라엘이 다시금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계속적인 저주를 면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 지침입니다.
즉 그것은 마음에서부터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온 후 그분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2) 순종에 따른 축복의 회복(9~10절).
“[9]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여 이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를 지키고 네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여호와 네 하나님께 돌아오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과 네 몸의 소생과 네 가축의 새끼와 네 토지 소산을 많게 하시고 네게 복을 주시되 곧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을 기뻐하신 것과 같이 너를 다시 기뻐하사 네게 복을 주시리라 [10] (9절과 동일)”
율법책에 기록된 그의 명령과 규례. – 이것들은 결단코 인간을 얽어매는 속박과 사슬의 법조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은혜 언약의 일환으로 율법을 자기 백성들에게 주셨을 뿐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의 속성을 깨닫게 하고 또한 자신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 하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생명의 등불'인 것입니다(시 119:105;잠 6:23).
그 뿐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은 인간들이 그것을 잘 지켜 행할 때, 복에 복을 더하시기 위하여 주신 '축복의 방편'인 것입니다(28:1-14;출 19:5, 6).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복을 주시리라. – 비록 교만과 허영으로 집을 떠났던 탕자라 할지라도, 다시금 돌아오면 각양 모든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구절입니다(눅 15:22-24).
한편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풍성한 축복들에 대하여서는 이미 28:1-6에 상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2. 가까이 계신 말씀(11~14절).
1) 모세는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이 결코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라고 말합니다(11절).
“[11]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 '어려운'에 해당하는 원어 '팔라'는 인간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삼하13:2) '기이하거나', '놀라운 일'(잠30:18)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절은 '율법의 평이성(平易性)', 즉 '율법은 너무 어려워서 인간이 그 도(道)를 깨달을 수 없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의 말씀은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 비밀스러운 것이 아니라, 이미 인간에게 밝히 계시(啓示)되어 있는 것입니다(29:29).
그러므로 누구라도 쉽게 깨닫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요일 5:3).
물론 이는 상대적이긴 합니다.
왜냐하면 심령이 완악한 자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마 13:13).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함에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어린 아이와 같은 가난한 심령이 필요합니다.
먼 것도 아니라. - '먼'에 해당하는 '라호크'는 거리적으로 먼 것(13:7)과 시간적으로 오랜 것(왕하 19:25), 그리고 친밀한 정도에 있어서 먼 것(시22:1)을 다 뜻하는 말입니다.
여기서는 그 모든 면에서 '율법의 인접성(隣接性)'을 의미하기 위하여 사용되었습니다.
2) 그는 비유를 들어 이 말씀을 소유하기 위해 하늘에 올라가 그것을 가져오거나, 바다 밖의 먼 곳에 가서 가져와 들려주어 행할 필요가 없다고 설명합니다(12,13절).
“[12]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이 아니요 [13]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의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하랴 할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 율법은 우리가 닿을 수 없을 만큼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사 45:19), 우리 곁에 가까이 있어 우리의 현실 삶에 구체적이고도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딤후 3:16,17).
실제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과 함께 거하며, 인간의 실제 생활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통해서 잘 알 수 있습니다(요 1:14).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이 '저기 저곳'(over there)에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 이곳'(here)에 있다 해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어려워서 그것을 지킬 수 없다"든가 또는 "하나님의 말씀을 도저히 접할 수 없어서 그것을 지킬 수 없다"라는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자신 곁에 있기 때문입니다.
3)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으므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14절).
“[14] 오직 그 말씀이 네게 매우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네 입에 있으며. –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가 읽을 수 있으며 강론(講論)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는 뜻입니다(Lange).
그러므로 다윗은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입에 담아 두었더니 그 말씀이 '송이꿀보다 더 달았다'(시 19:10)라고 고백까지 하였었습니다.
네 마음에 있은즉. –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늘 묵상하여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둘 수 있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6:6)라고 명하셨던 것입니다.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은 빈부 귀천이나 남녀 노소에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깨달을 수 있고, 또한 그 말씀대로 순종할 수 있는 성격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지키는 것이라"(요일 5:3)라고 하였습니다.
3. 복과 저주 앞에서(15~20절)
1) 모세는 다시 백성들 앞에 양자 택일의 선택지를 내놓습니다(15절).
“[15]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보라(라). - '볼지어다'(be hold) 정도로 번역될 수 있는 감탄사 '헨'과는 달리 '직접 눈으로 확인하다', '주목하다'란 뜻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생명과 사망, 복과 화 이 두 가지 중에서 그들이 양자를 똑똑히 주목하여 살펴 관찰한 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예비해 놓으신 길은 '생명 및 복(福)의 길'과 '사망 및 화(禍)의 길'이라고 하는 단 두 갈래 길밖에 없음을 보여 줍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서는 후일 예수께서도 '좁은 문'과 '넓은 문'의 비유로써 우리들에게 명확히 교훈하셨습니다(마 7:13, 14).
그러므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벗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자는 더 늦기 전에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을 향하는 길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약 4:8).
2)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켜 행하면 복을 주실 것입니다(16절).
“[16] 곧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모든 길로 행하며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하는 것이라 그리하면 네가 생존하며 번성할 것이요 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가 가서 차지할 땅에서 네게 복을 주실 것임이니라 ”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 말씀에 순종하라는 명령보다 이같은 권고가 먼저 나옴에 유의해야 합니다.
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성도의 마땅한 본분입니다(마22:36-38).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자연스런 외적(外的) 표현입니다(요일 5:3).
그 모든 길로 행하며. –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삶, 곧 그와 동행하는 삶을 살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동행의 삶을 살기 위하여서는 반드시 나를 쳐서 나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의합(意合)치 아니하고서는 둘이서 동행한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암 3:3).
명령과 규례와 법도. – 사실상 모두 동의어로서 반드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다양한 표현입니다. 4:1;5:31 주석 참조.
3) 그러나 네가 불순종하면 반듯이 망할 것입니다(17,18절)
“[17] 그러나 네가 만일 마음을 돌이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18] 내가 오늘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너희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유혹을 받아. – 대부분의 영어 성경은 이를 '어쩔 수 없이...하다'(be impelled to) 또는 '이끌림을 받다'(be drawn awa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KJV, NIV, Living Bible, RSV).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 곧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주위의 유혹에 대하여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가를 잘 나타내 줍니다.
실제로 그들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으며(시1:4), 또한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과 같아서 모든 일에 정함이 없습니다(약 1:6, 8).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그를 섬기면. – 이러한 우상 숭배 행위는 사망과 저주에 이르는 치명적 단계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면서 또한 질투의 하나님이십니다(6:15;출 20:5).
그러므로 자기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다른 헛된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것을 결단코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4:19;13:2-16;17:2-7;18:20-22).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선언하노니. - '선언하다'에 해당하는 '나가드'는 본래 '정면에 두다'란 뜻입니다.
여기서부터 여러 가지 의미가 파생되었는데, 주로 상대방의 입장 혹은 다수의 주장에 대해 반대 견해를 담대히 피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분명히 알린다'는 의미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시 따르게 되는 사망과 저주에 대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가서 차지할 땅에서 너희의 날이 길지 못할 것이니라. – 요단 건너편 가나안 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들이 들어가 살 거룩한 언약의 땅입니다.
따라서 그 땅에는 온갖 더러운 죄악이나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 행위가 결코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 땅에서 그러한 자들이 생겨날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들을 제거할 것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 가나안(창 12:7)에서 오래도록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잘 지켜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 뿐임을 보여 줍니다.
한편 구속사적 관점에서 그 같은 가나안 땅은 하늘 가나안, 즉 천국을 예표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자 역시 하나님의 새 언약대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주(主)로 모시고, 그분의 말씀을 청종하는 자들 뿐입니다(히 5:9).
4)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여 생명을 택하라(19절).
“[19]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에 맺은 축복과 저주의 언약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모세가 천지(天地)를 증인으로 삼았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합니다.
(1) 지금 맺고 있는 언약이 마치 언제나 요지 부동한 천지처럼 확실하고 불변하며 영구하다는 점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4:26).
(2) 또한 이 언약 체결이 전우주적인 관심사가 될 만큼 중차대한 사건이란 점을 나타내기 위함입니다(4:26).
아뭏든 이처럼 하늘과 땅을 의인화한 표현은 구약 성경에 종종 나타납니다(창 4:11;시 19:1;사 1:2).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 인간이면 누구나 죽음과 저주를 반길리 없습니다. 모두가 다 생명과 행복을 추구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정작 참 생명과 참 행복을 향유(享有)하는 자는 매우 드뭅니다.
그것은 곧 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시 27:1),
그리고 참 행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시 16:2)을,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삼는 자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 생명의 도(道)를 따라 걷는 자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라(20절).
“[20]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그에게 부종하라. - '부종(附從)하다'에 해당하는 '다바크'는 '굳게 연합 하다', '착 달라붙다', '밀접히 결합하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각별한 애정이나 우정을 나누는 사이를 의미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 언약을 맺고 있는 자들이 형식적으로 또는 엄격한 규정에 얽매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루기보다는 친밀한 관계 속에서 하나님과 연합해야 함을 교훈해 줍니다(10:20).
이처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속에서 그분께 가까이하여 그의 말씀을 굳게 붙드는 것- 바로 이것이 모세 설교의 핵심으로서 곧 축복과 생명을 길이 누리는 참된 비결임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한신 땅. – 실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란 민족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그들의 3대 열조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거듭거듭 맹세로 약속하셨습니다(창 12:7;13:14, 15:7,18;17:8;26:3;28:13).
따라서 이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서 길이 장수하며 복 받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소망이요 뜻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처럼 길이 복 받고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만 가지로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호 8:12).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지키면 생명과 복이묘, 불순종하면 사망과 저주입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마음은 오직 생명과 복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약을 캔 우리를 향한 변함없는 사랑을 선택하셨고, 우리 곁에 거하시려고 성육신을 선택하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의 뜻을 따라 진정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을 선택할 때입니다.
주의 말씀을 청종하므로 약속하신 복을 받는 모두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이스라엘이 마음을 다해 돌아오면 하나님도 이스라엘에게 돌아오실 것입니다(1~5절).
포로에서 돌아오게 하시고, 저주를 복으로 돌려놓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절망적인 상황은 없습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회복은 가능합니다.
심판도 경고도 모두 그들을 돌이키기 위한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진심(眞心)이 느껴지십니까?
그 진심(盡心, 마음을 다함)이 나를 회심(回心)으로 이끕니다.
2) 회복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6,7절).
하나님은 돌아온 자의 빈 마음을 그분을 향한 사랑과 순종의 열망으로 채우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전심으로 그분께 돌아와 그 말씀에 사랑으로 충성하는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 회복의 목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이고 목표입니다.
이 목표를 따라 하나님을 알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에 미련을 남기지 않고 마음 다해 주께 돌아오고 있습니까?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참된 회개는 참다운 순종을 동반합니다(2, 8~10절).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믿음이 듯, 순종이 수반되지 않는 회개는 진정한 회개일 수 없습니다.
회개는 사랑의 대상을 바꾸는 일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사랑하는 이의 음성을 듣고 행하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아직도 ‘뉘우침’만 있고 ‘돌이킴’이 없는 후회만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닙니까?
2) 말씀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11~14절).
순종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말씀은 무거운 짐도 아닙니다.
문제는 말씀이 아니라 마음이고, 하나님의 의지가 아니라 우리의 의지입니다.
말씀 묵상이 어려운 것은 ‘시간 부족’보다 ‘애정 부족’ 떼문 아닙니까?
3) 이스라엘 앞에 두 갈림길(하나님과 우상, 순종과 불순종, 축복과 저주)이 놓여 있습니다(15~20절).
선택은 우리의 몫입니다.
선택은 강요된 명령이 아닙니다.
인격을 가진 자들에게 기대되는 마땅한 반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