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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밀양사람 원문보기 글쓴이: 龍雲(칠득이)
어변당(魚變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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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설명 어변당(魚變堂)은 조선초기의 장수였던 어변당 박곤(朴坤)장군이 무예와 학문을 닦던 곳이다.
그는 밀성 박씨 태사공파(太師公派) 박언부(朴彦孚)의 11대손으로 연상리로 이주해온
박의번(朴義番)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양왕 3년(1391년)에 태어났다. 박곤은 무과에 응시하여 초시(初試), 복시(覆試), 전시(殿試)를 두루 거쳐 21세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종 1년(1419년) 최윤덕(崔潤德) 장군의 막하(幕下)로서 대마도 정벌 및 남해 왜구를 토벌 하였고, 34세인 세종 11년(1429년) 순문사(巡問使)로 북방의 성(城)들을 살피고 국방정책의 입안에 참여 하였다.
그 후 공조(工曹), 호조(戶曹), 예조참판(禮曹參判) 및 한성판윤(漢城判尹) 등을 거쳤고,
특히 축성(築城)을 맡거나 진지(陣地)를 심사하고 국방의 자문에 치중 하였다. 세종 18년(1436년) 명(明)나라 영종(英宗) 즉위시 하례사(賀禮使)로 갔다가 황제가 그의 사람됨을 보고 벼슬을 내렸을 때 거절하였는데, 대신 미인 3인을 얻어 그곳에서 일걸(一傑), 이걸(二傑), 삼걸(三傑)의 세아들을 낳았고, 이들은 표(瓢)씨의 성을 얻어 중국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귀국후 다시 한성판윤을 지냈으며, 40대 중반에서부터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 돌아와 연못앞에 어변당을 짓고 여기에서 여생을 마쳤다. 어변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서 별당채로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건물은 박곤이 중국에서 돌아온 1440년경에 건축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으며,
1841년에 다시 중수하였는데 이호윤(李顥潤)이 쓴 그때의 중수기(重修記)를
편액(扁額)에 기록하고 있다. 배치는 앞에 방지(方池)를 두고 그 폭에 맞추어
3칸의 어변당이 서향(西向)하여 있고, 그 앞에 박곤이 심었다는 500년 수령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역사를 말해주며 서 있다.
평면은 2칸 대청과 온돌방 1칸을 두었는데 대청의 남쪽을 개방하여 측면 진입을 만들었고, 전후로는 툇마루를 두었는데
앞에만 계자각난간(鷄子脚欄干)을 하였다.
기둥은 전부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민도리의 3량(樑) 맞배 구조에 연등 천장을 하고 있다. 현재는 주위의 영역이 정화되어
중앙에 충효사(忠孝祠)가 들어서 있으며 그 오른쪽에 유물관(遺物館)이 있고
왼쪽에 어변당(魚變堂)이 있는 배치 형태이다.
출처 : 밀양시청 홈페이지
어변당 박곤 장군의 설화
지금부터 오백여년 전 이조 세종 때 무안면 상당동에 박곤(朴坤)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가난한 살림 속에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효성 또한 지극했다. 늙은 어머니의 밥상엔 고기가 빠지지 않을 만큼 그는 홀어머니를 모시는데 정성을 다했다.
어느 이른 봄날, 높은 산에 잔설이 아직 남아 있을 때였다. 박곤은 작살을 가지고 강으로 고기잡이를 나갔다. 어머니께 드릴 고기를 장만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은어 잡이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살이 갈라져 흐르는 큰 바위 밑에 왔을 때였다. 얕은 물밑을 내려다보니 솥뚜껑보다 큰 자라가 황금빛이 찬란한 금붕어의 지느러미를 뜯어먹고 있었다. 그는 금붕어가 너무 아름다워 한참이나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금붕어는 박곤을 올려다보며 애원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그는 자라의 위험에서 구출해주시를 바라는가보다 하고 금붕어를 구하기를 마음먹으며 “저렇게 귀한 금붕어를 마구 뜯어 먹다니 ‥‥‥” 그는 작살로 자라의 목을 향해 힘껏 찔렀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자라는 물었던 금붕어를 내놓으며 순식간에 깊은 물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자라의 위험에서 벗어난 금붕어는 지느러미에서 선혈을 흘리며 박곤의 다리 가까이를 맴돌았다. 박곤은 금붕어를 살렸다는 안도감에 금붕어를 뒤로 하고 강가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그런데, 그 금붕어는 박곤의 뒤를 따라 강가에 까지 와서 뭍으로 올라오려고 애를 썼다. 박곤은 이상한 일이라 여기며 금붕어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렸다. 손을 대기가 아까울 만큼 귀한 금붕어였다. 그래서 그는 금붕어를 집에 까지 갖고 와서 집안 연못에 넣어 주었다. 어머니도 아들로부터 금붕어를 잡아오게 된 내력을 듣고 “보통 물고기가 아닌 것 같구나 연못에서 고이 자라도록 해야겠구나” 하고 금붕어에 대한 걱정을 했다. 그후 금붕어는 박곤이나 어머니가 나타나기만 하면 물 위에 솟구쳐 오르며 반가는 듯 했다.
어느날 잠을 자는데 꿈속에서 “주인님. 주인님” 하며 부르는 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 박곤은 누구인가 싶어 밖으로 나가보았다. 그것은 연못에 있는 금붕어였다. “아니 네가 말을 하다니” 박곤은 너무나 이상한 일이어서 물가에 나온 금붕어를 쳐다보고 있었다. “주인님. 그동안 저는 주인님의 은혜로 잘 지냈읍니다. 목숨을 구해주신 주인님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조금 후에 저는 용이 되어 등천 할 것입니다. 제가 등천하는 동안 날씨가 험해질 것입니다만 주인님은 놀라지 마십시오. 주인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연못가에 표적을 남겨 두겠습니다. 그것을 갖고 주인님이 성공하시는데 사용하옵소서! 주인님, 안녕히 계십시오” 박곤은 너무 놀라운 일에 눈을 번쩍 떴으나 꿈이었다. 꿈이 너무 이상해서 연못가로 나가 보았다. 어느 때 같으면 박곤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수면으로 나올 금붕어가 박곤이 연못가에 서있어도 아무 기척이 없었다. 그런데, 하늘을 올려다보니 갑자기 맑던 하늘에 먹구름이 덮이고 사방이 캄캄해져 오더니 번개가 치고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가냘픈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님의 크신 은혜를 입고 저는 지금 등천하옵니다.” 꿈속에서 듣던 바로 그 목소리였다. 높은 하늘에서 들리던 목소리가 사라지자 비가 멎고 하늘이 다시 열리며 사방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하늘을 우러러보던 박곤은 그때서야 정신을 차리고 연못을 쳐다보았더니 금붕어의 흔적은 하나도 없고 발 앞에 금붕어의 가죽이 놓여 있었다. 꿈속에서 말한 금붕어가 등천한 표적이었다.
그런일이 일어난 후 몇 년이 지났을 때 후 조정에서 과거를 본다는 소문을 듣고 박곤도 과거에 응해 보고자 하였다. 갑옷과 투구를 만들어 금붕어가 남긴 가죽을 조금씩 붙였다. 그랬더니 금빛 찬란한 갑옷과 투구가 되었다. 그것을 입고 과거장으로 갔다. 과거에는 팔도에서 올라온 담력 크고, 힘이 센 장사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박곤을 따르는 자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무과에서 장원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 후 그는 함경도 병마사가 되어 변방의 양민들을 보호하고 오랑캐를 물리쳐 큰 공을 세웠다. 오랑캐들은 박곤 장군의 갑옷과 투구만 보아도 싸우기를 꺼리고 도망을 쳤다. 이리하여 박곤 장군의 뛰어난 전공은 온 조정에 알려지고 임금은 장군을 친히 불러 큰 상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해 그는 왕명을 받들어 명나라에 동지사로 가게 되었다. 명나라 황제가 박곤 장군의 늠름한 모습을 보고 탄복하여. “조선에는 과연 훌륭한 인재가 있었구나.” 하고 큰 상을 내렸다.그리고 황제는 명나라에서 뛰어난 장수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고 박곤 장군과 명나라 장군의 대결 시킨 결과 명나라 장수들이 박곤 장군 앞에서 칼을 뽑기가 무섭게 패하는 것을 보고 다른 장수들은 겨뤄볼 엄두도 내지 못했다. 칼싸움 뿐만이 아니라, 궁술이며, 창술이며, 온갖 무예를 겨뤄도 박곤 장군을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이에 감탄한 명나라 황제는 “박장군! 그대의 신술을 일찍이 들었지만 이렇게 뛰어난 줄은 몰랐소. 조선의 왕은 이처럼 훌륭한 장수를 두고 있으니 부럽기만 하구려. 그대에게 명나라 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상으로 내릴 터인즉, 그 여인과 길이길이 행복하게 지내시오” 하고 아주 기쁜 표정을 지었다. 박군 장군은 상으로 내린 미녀를 맞아 결혼식을 올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명나라 장수를 꺽긴했지만 그는 조금도 오만하거나 자랑하는 빚도 나타내지 않고 겸손해 할 뿐이었다. 그런데 박곤 장군에게 패한 명나라 장수들은 분함을 참지 못하고 원통해 했다. 더구나, 명나라 제일가는 미녀를 박곤 장군에게 빼앗긴 것이 더욱 억울했다. 이날 밤 박곤 장군이 미녀와 함께 잠들고 있을 무렵이었다. 복면을 한 자객이 박곤 장군이 거처하는 담을 넘어 침실로 숨어들었다. 명나라 장수들이 보낸 자객이었다. 깊은 잠속에서도 방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발자국 소리를 어렴풋이 듣고 있었다. 또한 누군가 잠을 깨우는 것 같아 눈을 떴다. 그리고 시커먼 그림자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어둠속에서 볼 수 있었다. “누구냐 이 밤중에” 박곤 장군은 자리를 차고 일어나 자객을 노려보았다. “내가 누구냐고? 네 목숨을 가지러 온 명부(저승)의 사신이다. 네가 갑옷을 입었을 때는 날고뛰는 용맹한 장수이지만 지금은 별수 없을 것이다” 자객은 시퍼런 칼로 장군의 가슴을 향해 찌르려고 했다. “이 비겁한 놈! 너의 죄를 뉘우치고 돌아서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어서 물러나지 못 하겠느냐?” 박곤 장군은 위엄을 잃지 않고 자객에게 호통을 쳤다. “흠, 죽기 전에 큰 소리 한 번 치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군. 자, 내 칼을 받아라.” 자객은 칼을 휘두르며 박곤 장군 앞에 성큼 다가섰다. 그리고는 장군의 목덜미를 내려 쳤다. 순간 자객은 “으악” 하고 칼을 든 채 까맣게 타버리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놀란 것은 박곤 장군이었다. 자객의 시체를 내려다보고 있던 장군은 그때 옛날에 들었던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고 있음을 알아 차렸다. “주인님, 저입니다. 주인님의 은혜로 등천한 금붕어입니다.” 금붕어의 목소리였다. “오! 네가 여기까지 와서 나를 도와주었구나. 참으로 고맙구나.” 금붕어의 은혜로 살았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부디 만수무강 하옵소서, 저는 또 하늘나라로 가봐야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박곤 장군이 금붕어의 은혜로 살았다는 소문이 온 장안에 퍼지고 그 뒤로는 아무도 박곤 장군을 헤치려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며 모두 그를 존경하게 되었다.
그 뒤 장군 내외는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그 재질이 모두 뛰어나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일컬어 장종삼걸(將從三傑)이라 했다. 박곤 장군에 대한 또 다른 일설이 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500 여 년 전 무안면 상당동에 사는 박곤 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집 안에 연못을 파고 고기를 기르며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다. 그는 식사가 끝나면 항상 연못속의 잉어에게 밥을 주곤 했는데 어느 날, 밤 잉어에게 밥을 던져 주고 나서 살펴보았더니 그 잉어가 밝은 달빛을 받고 찬란한 광채를 띄고 있었다. 박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이상한 예감을 느끼며 그날 밤 잠이 들었는데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저는 주인님의 은혜를 받고 연못에서 자란 잉어입니다. 내일 정오에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등천하고자 합니다. 그런데 서남쪽 10정(町)쯤 되는 곳에 사는 도마뱀이 저의 등천을 방해하고 있사오니 도와주십시오. 은혜는 잊지 않겠사옵니다.” 하고는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박곤은 잠을 깨고 나서 정신을 가다듬고 이상한 일이라고 여기며 연못으로 나가 보았다. 연못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하여간 다음날 박곤은 활을 준비하여 꿈속에서 일러준 대로 뒷산 마루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정오쯤 되어 과연 자기집 연못에 무지개가 서더니 한 마리 용이 무지개를 타고 오르고 있었다. 이때 고개 마루 저쪽에서 큰 도마뱀이 꼬리를 치며 무지개쪽으로 날아들었다. 박곤은 이때다 싶어 겨냥하고 있던 활을 힘껏 당겼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한달쯤 되어 박곤은 무안 시장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 가는 도중에 어떤 노인 한 분이 삼치를 팔고 있다가 박곤을 보고는 반색을 하며 싼 값에 드릴테니 한 마리만 사라고 권했다. 박곤은 값이 너무 싸기도 하여 삼치 한 마리를 사들고 집으로 왔다. 그런데 박곤이 삼치를 장만하다가 머리에 박힌 화살촉을 발견했다. 가만히 보니 그것은 그전에 도마뱀을 쏠때 사용한 화살촉 임에 분면했다. 삼치는 먹지 않고 산에 가져다 묻었다. 며칠 후 삼치를 묻은 자리에 딸기나무 한 포기가 올라오더니 얼마 되지 않아 딸기가 주렁주렁 열렸다. 박곤은 그것을 보고 가족들에게 그 동안의 사연을 이야기 하면서 딸기를 따먹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시켜 딸기줄기를 불태워 버렸다. 다시 반 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박곤의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와 자기가 손수 만든 것이라며 자리 하나를 선사했다. 산에서 자라는 휜초(휜草)를 베어 만든 자리였다. 친구가 돌아가고 난 뒤 박곤은 그 자리를 깔고 낮잠을 자고 있을 때였다. 꿈속에서 뱀이 나타나더니 “이제야 원수를 갚게 되었구나 너 때문에 내가 등천을 못하고 말았지 않았느냐” 하고는 사라졌다. 이에 놀란 박곤이 벌떡 일어났는데, 등골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자리에 박힌 가시에 등이 찔린 것이었다. 그 후 아무리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았고 그는 그 병으로 인해 결국 목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다. 그래서인지 박곤장군의 후손은 얼마되지 않고, 또 그들은 제사때 삼치고기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지금도 상당동에는 그 옛날 박곤 장군이 살았던 곳에 어변당이란 사당이 있고 박곤 장군이 심었다는 큰 은행나무(높이 20여미터 가량 굵기가 3m 50cm)가 서있다. 박곤장군은 벼슬이 첨홀제(僉惚制) 호조참의, 호조참판, 충정도관찰사, 강원도 순무사등 조정의 요직을 두로 걸쳤으며 두만강과 암록강의 국경을 방비하고 서북양면을 개척하였으며 중국사신으로 가서 그곳 여자와 결혼 일걸, 이걸, 삼걸의 세 아들을 두기도 했다고 한다. 중국에서도 벼슬을 하였으며 거기서는 성을 표(瓢)씨라 불렀는데 그 아들이 우리나라 칙사로 와서 고향소식을 묻고자 하영남(下嶺南)에서 벼슬하려 온 사람이 없느냐고 묻자 누군가가 대답하기를 박곤장군의 자손들은 다죽고 없다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칙사를 영남 밀양까지 모실려면 거기까지 길을 딲아야 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다. 그 칙사는 그것을 그대로 믿고 돌아가버렸는데 지금도 만주 길림 근처에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끝)
[출처] 미리벌의 얼(문화공보실 발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