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약연목사(호:圭巖,규암) - 독립운동가, 명동교회 초대 목사
1868년 9월 12일 함경도 회령에서 태어난 김약연 선생은 31세에 다른 가문들과 북간도 장재촌으로 이주하여 명동촌으로 개명하고, 1901년 4월 이곳에 ‘규암재’를 설립한다.
1906년에 이상설이 명동촌에서 가까운 용정에 '서전서숙'을 설립해 신교육을 세웠으나 이듬해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문을 닫았다.
김약연은 서전서숙의 교사와 학생들을 받아들이고 규암재의 터를 확대하여 1908년 4월 27일에 '명동서숙'을 설립했고 이듬해에 명동학교로 개명했다.
항일독립운동가 양성의 요람이 된 명동학교는 정재면 선생이 부임하면서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상동교회의 청년학원에서 전덕기, 남궁억, 주시경 등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자가 되어 이준, 이동녕 등과 교제했던 독실한 기독교인 정재면 선생은 신민회에 가입하여 용정에서 활동하던 중 명동학교 교사로 초빙되었을 때 “학생들과 마을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다.
실학파였던 명동촌 지도자들은 며칠간 회의를 거듭한 끝에 용단을 내렸고, 김약연 선생은 1909년 6월경에 명동교회를 세웠다.
정재면의 부임으로 명동학교의 교장은 김약연, 교감은 정재면, 재정은 문치정이 맡게 되었다.
이때부터 명동학교는 '신(信)', '망(望)', '애(愛)'의 기독정신을 토대로 민족교육을 시행하게 되었다.
1910년 이동휘 전도사가 사경회에서 여성교육을 중요성을 강조하자 명동여학부를 세운다.
명동학교의 여학부는 한인의 중국 이주 역사에 첫 여성 교육터가 되었다.
정재면 선생에게서 민족구원의 기독교를 주목하고 희망을 찾은 김약연 선생을 통해, 명동촌은 교육과 기독교, 독립운동의 온상이 되었다.
또한 본래 기독교인이 아니었던 김약연은 정재면의 포교에 설복되어 개신교 신자가 되었다.
김약연 선생이 1913년에 조직한 북간도 최초의 조선인 자치기구인 ‘간민회’는 항일민족운동의 구심체가 된다. 선생은 만세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여 1919년 3월 13일, 용정 교회들의 종소리를 신호로 3만 여명이 만세를 외쳤다. 주동자로 일제에 체포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고, 일제 토벌대는 1920년 10월 20일 명동학교를 불태웠고 1925년에 폐쇄하였다.
선생은 61세였던 1928년,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한 후 이듬해 북간도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아 명동교회에 부임하였고, 계속 민족교육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죽기 직전 가족과 제자들로부터 유언을 부탁받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1942년 10월 24일, 74세로 존경스런 생애를 마감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김약연 목사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울 추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