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채봉 동화연구를 위한 자료

[김영훈]

문학기행 / 동화작가 정채봉

“동심이 세상 구원”… 순천만에서 만난 ‘오세암’의 작가

법정 스님 “그 선량하고 투명한 정서, 할머니 사랑으로 빚어져”
가정불화와 이혼 고통 겪어… “그의 언어는 고통과 눈물을 거름으로 삼아 피운 꽃”

입력 2013-08-05 22:02:25 | 수정 2013-10-15 오후 8:52:00

▲ 정채봉은 할머니를 따라 근처 선암사에 자주 갔다. 이때 몸에 밴 친숙한 불교 정서는 그의 문학의 한 저류를 이룬다.

“ (adsbygoogle = window.adsbygoogle || []).push({}); 동심이 세상을 구원한다.”

동화작가 정채봉이 즐겨 했던 말이다. 어린이를 닮은 깨끗한 눈과 마음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작가의 신념을 느낄 수 있다.

정채봉(1946~2001)은 ‘오세암’ ‘초승달과 밤배’ 등 정갈한 동화로 1980~90년대 한국아동문학의 한 정점을 보여준 작가다. ‘느낌표를 찾아서’ 등 생각하는 동화 시리즈는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자리 잡게 했다. ‘스무 살 어머니’ 등 감성 어린 수필과 시집 ‘너를 생각하는 것이 나의 일생이었지’도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 전남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안에 자리한 정채봉 문학관.

정채봉의 고향은 전남 여수와 순천의 중간쯤에 있는 승주군 해룡면 신성리다. 툇마루에서도, 골목에서도, 학교에서도 눈앞에 바다가 보이는 마을이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마음이 메마를 때마다 그가 바다를 찾아가 동심을 수혈받을 수 있었던 것은, 태어나면서부터 바다를 호흡했기에 바닷가만 가면 몸속 어린 시간이 저절로 깨어난 때문이리라.

“동무들끼리 술래잡기를 하다가 골목길을 달리다 보면 골목 끝을 봉해 있던 푸른 바다. 그렇다, 내 어린 날의 바다는 어디에고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뒷간에 들어가 있을 때는 하다못해 갈매기 울음소리라도 보내왔다.”( ‘유년의 바다’에서)

정채봉의 유년기는 순탄치 못했다. 세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여동생을 낳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어린 남매를 남기고 스무 살 어머니는 차마 하늘로 갈 수 없었던지, 비바람 속에서 며칠이나 심하게 울었다고 한다. 그래서 한동안 무덤 주위를 지나다닐 수도 없었노라고, 훗날 어머니 묘를 이장할 때 묘지기가 그에게 말해주었다.

일본서 유학을 하다 잠시 나와서 결혼했던 아버지는, 아내가 죽자 다시 일본으로 가버렸고 남매는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어린 정채봉을 문중 행사에 데려가고 족보도 보여주며 가문의 자긍심을 갖게 했고, 충무사나 왜성 같은 인근 유적지를 다니며 역사적 유래도 알려주었다. 부모 없이 자라는 손자의 정체성을 확고히 해주려는 배려였으리라.

부처님을 믿었던 할머니를 따라 정채봉은 근처 선암사에 자주 갔는데, 이때 몸에 밴 친숙한 불교 정서는 그의 문학의 한 저류를 이룬다. 대표작 ‘오세암’도 옛 설화에서 얻은 아이디어를 단순히 창작 동화로 빚은 것이 아니라, 그의 생을 오롯이 실은 작품이다. 관음보살탱화를 엄마라 부르며 모든 마음을 다해 따르는 고아 길손이의 모습을, 그가 아닌 누가 그토록 진실하고 간절하게 그려낼 수 있었을까.

9세 때까지 그래도 큰 어려움 없이 자랐으나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정채봉은 10세 때 광양으로 이사해 그곳에서 초등학교를 마쳤으나 중학교에 바로 가지 못하고 일 년 동안 신문 배달, 우편 배달, 풀빵 장사, 엿 장사 등 온갖 행상을 했다. 작고 소외된 이에게서 눈길을 거두지 못하는 정채봉 문학의 특질은 이때 많은 부분 형성되었을 것이다.

선장이 되고 싶었던 정채봉은 해양고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손자를 위험한 바다에 보낼 수 없다는 할머니의 고집으로 광양농고에 들어갔다. 훗날 그는 덕분에 사람들의 ‘마음의 선장’이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선배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책을 빌려 읽고, 수없이 많은 편지를 쓰는 가운데 문학 수련을 탄탄히했기 때문이다.

▲ 정채봉의 유년기는 순탄치 못했다. 여동생과 함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충무사 같은 인근 유적지를 다니며 역사적 유래도 알려주었다.

▲ 정채봉의 유년기는 순탄치 못했다. 여동생과 함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손자를 왜성 같은 인근 유적지를 다니며 역사적 유래도 알려주었다.

“정채봉님의 그 선량하고 투명한 정서는 고향과 할머니의 사랑으로 빚어졌을 것 같다. 남도의 정답고 끈끈한 언어와 인정이 그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한 법정 스님의 글귀는 정채봉 문학의 핵심을 짚고 있다. 그의 글 곳곳에 등장하는 할머니는 서럽고, 아름답고, 지혜롭고, 정겹다. 얼마나 많은 모습을 가진, 천수천안관음보살 같은 여인인지! 그 무릎에서 세상을 배웠기에, 정채봉의 글에는 사랑을 받은 이만이 되돌려줄 수 있는 눈물 그렁그렁한 사랑이 배어 있다.

재수 끝에 동국대 국문과에 들어간 정채봉은 문학 강의를 들으며 본격 창작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소설을 썼으나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읽은 후 동화의 힘을 깨닫고 장르를 바꾸었다. 대학 3학년이던 1973년 정채봉은 ‘꽃다발’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화부문에 당선됐으나, 졸업 후 취직하고 가정을 꾸리며 생활에 쫓겨 글을 거의 못 썼다. 1978년 직장을 샘터로 옮긴 뒤 그의 삶은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특유의 감수성으로 잡지 발행 부수를 기록적으로 경신시키고 동화도 열심히 써 출판했다.

첫 창작집 ‘물에서 나온 새’로 그는 대한민국문학상(1983)을 받았고 새싹문학상, 불교문학상, 세종문학상을 받는 등 펴낸 책마다 좋은 평가를 받았다. ‘어른을 위한 동화’ 시리즈는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각종 심사 활동과 방송 매체 출연, 대학 강의 등으로 90년대에도 활발히 움직였다. 그러나 가정불화와 이혼의 고통을 겪으며 홀로 남매를 돌보느라 남모르게 가슴이 새까맣게 타들어간 시간들이었다. 사람들은 정채봉의 맑은 글에 감탄하지만, 그의 언어 대부분이 고통과 눈물을 거름으로 삼아 피운 꽃임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98년 간암 판정을 받은 작가는 수술 후 회복했으나 재발해 2001년 1월 9일 결국 세상을 떠났다. 순천 용수동 가톨릭 묘지에 그립던 할머니와 어머니 가까이 묻혔다. 가파른 산비탈에 있는 작가의 유택은 찾아가기 녹록지 않은 편인데, 순천만자연생태공원 안에 정채봉문학관이 있어 작가의 향기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순천시와 여수문화방송 주관으로 정채봉문학상이 10월에 시상되고 있으므로 때맞춰 방문하면 더욱 뜻깊겠다. 문학기행 시 해룡면 생가와 함께 선암사와 낙안읍성, 광양장도 한 바퀴 둘러보고, 작가가 생전에 자랑하던 이름난 순천백반도 먹어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