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농일기
유병덕
<수필과 비평>등단
수필울회원, 수필과 비평 작가회원
행정학박사, 평생교육사, 자산관리사
충청남도 복지보건국장, 공주시 부시장 역임
오이, 고추, 상추 등 모종을 심었다. 육묘장에서 사 올 때 충분하다고 한 모종이 부족하다. 비닐하우스 한쪽 귀퉁이가 남았다. 촘촘히 심은 모양이다. 모종을 더 사다가 심으려다가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씨앗을 뿌렸다. 씨앗은 해를 넘기면 발아율이 떨어진다고 하여서 남기지 않았다. 물을 듬뿍 주어서인지 며칠 만에 배추, 열무 등 채소가 소복이 올라왔다. 눈을 뜨자마자 구름카페(농원 이름)로 달려가서 밤새 얼마나 자랐는지 살피는 게 새로운 일과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는 모습이 크는 아이를 보는 듯 재미가 쏠쏠하다.
농사랑 카페에 빼곡히 자란 채소의 모습을 사진에 담아서 올렸다.
“빨리 솎아주세요.”
회원들의 반응이 의외다. 아무리 훑어보아도 잘 길렀다고 칭찬하는 이 아무도 없다. 빨리 솎아내라는 글이 도배다. 잘 자란 채소를 뽑아내려고 하니 욕심이 생긴다. ‘그냥 기르고 싶네요.’ 한 줄달았다. 바로 아래 과수원을 한다는 이의 긴 글이 올라왔다. 이십여 년 가까이 복숭아 농사를 지었다는 농부가 첫해 시작하면서 낭패를 본 이야기다. 영농교육에서 복숭아를 크고 좋게 키우려면 가지당 한두 개만 남겨놓고 솎아내라고 했단다. 그런데 매달린 복숭아가 하나같이 예쁘고 튼실해 보여서 그대로 남겨두었다가, 그해 복숭아 농사를 완전히 망쳤다고 한다. 그는 채소든 과일이든 솎아내는 것은 같은 이치라고 적어놓았다.
초보 농부라 아는 게 없다. 욕심에 찬 무지가 가득하다. 솎는다는 것은 빽빽한 싹 중에서 크게 자랄 것만 빼고 솎아내는 일이다. 당장 좋아 보인다고 남겨놓았다 간 이것도 저것도 먹지 못하는 꼴이 될 거다. 과감하게 솎아내야 크고 좋은 열매를 얻는다.
할 일을 정리해 놓은 메모장을 꺼내 보았다. 빼곡히 적어놓은 걸 보자 머리가 지근거린다. 박사 논문 마무리, 대학이나 교육기관에서 들어온 강의 요청, 일간지나 문학 잡지사의 원고 청탁, 자산관리사로서 부동산 컨설팅, 옛날 살던 노후 된 집의 재건축, 상가 임차인의 관리비 처리, 선영 산소의 분묘기지권 정리 등 할 일이 부지기수다.
게다가 욕심까지 부린다. 방송 모니터까지 도전했다. 진행자가 정치 색깔을 드러내서 마음이 불편해서다. 어렵사리 방송 모니터로 합격하여 활동을 시작하자 꼼짝할 수가 없다. 진행자가 하는 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도 놓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녹음하여 다시 들어가며 보고서를 만든다. 선곡이 잘못되었는지, 정치 편향된 진행은 없는지, 출연자 섭외가 적절한지, 방송언어 사용이 적합한지 따지느라 일거리가 만만치 않다.
그 와중에 박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틈틈이 국회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을 오가며 문헌 조사를 하고 지방의회의 조례 발의와 심의 의결 과정을 샅샅이 뒤졌다. 연구자료를 통계분석 하느라 전문가를 찾아가서 도움까지 받았다. 하나 논문을 심사하는 이들은 분석의 틀을 뒤흔든다.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상관관계와 인과관계가 명쾌하지 않다고 보완요구다.
오늘, 강의하다가 졸았다. 지난밤 강의자료를 준비하느라 밤새워서다. 마음은 청춘이나 몸은 거덜 난듯하다. 강의 후 평가는 냉정했다. 집안 대소사도 내 몫이다. 예전 같으면 바쁘다는 핑계로 아내만 가도 이해했지만, 지금은 퇴직한지라 본가든 처가든 직접 가지 않으면 후사가 두렵다. 이뿐인가. 전 직장 동료들이 만나자고 부른다. 골프 모임, 부단체장 모임, 연수원 교육 동기 모임 등 여남은 개 되는 모임에서 호출이다. 육신을 무리하게 사용하여서 여기저기가 너덜거린다. 어디에 가나 앉기만 하면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조는 내 모습이 비루해 보인다. 지인은 머지않아서 산에 둥지를 틀 나인데 모두 솎아내고 편안히 지내라고 충고다
오지랖이 넓은 탓이 크다. 이제 몸이 버텨낼 재간이 없다. 이럴 거면 모두 그만두라고 자신을 향하여 투덜댄다. 과감하게 솎아내야 크고 좋은 열매를 맛볼 수 있듯 긴급한 일과 중요한 일을 따져서 정리해야 할 텐데 멍하니 서 있다. 포기는 동시에 선택이다. 남은 인생 즐거운 시간으로 채우기 위하여 내가 포기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지금처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며 욕심만 부리면 결국, 이도 저도 아닌 후회만 남을 것이다. 이제 삶을 어지럽히는 빼곡한 일들을 솎아내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
구름카페로 향한다. 비닐하우스 안에 잘 자란 아까운 채소를 솎는다. 절반 이상 솎아내자 촘촘했던 포기 사이가 틈이 생겨서 여유롭다.
수필과 비평 2024-09 제27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