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명의 모씨(毛氏)에 놀아난 조선(朝鮮)의 비극
1.
인류(人類)가 만들어낸 모든 학문(學問)중에 인간(人間)이라는 생명체의 탄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를때까지의 인생(人生)여정을 연구(硏究)하고 추론(推論)하는 학문이 이른바 명리학(命理學)이다. 일반적으로 사주(四柱)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의 기록이나.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1880-1936-의 기록을 통해 보면, 사주(四柱)를 보는 기초이론인 오행(五行)론은 조선(朝鮮)에서 나온 것이고, 주역(周易)의 근간이 되는 팔괘(八卦)론은 주(周)나라 문왕에 의해서 집대성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주(四柱)를 분석할 때 겨울생이거나 사주명조에 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많이 있을때는 이성(理性)이 감성(感性)을 앞선다고 볼수 있고, 반대로 따뜻한 여름의 기운이 많을 때는 감성(感性)이 이성(理性)을 앞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술인(藝術人)은 여름생이 많은 것이고, 정치인(政治人)이나 기업총수들은 겨울생이 많은 것이다.
아무튼 사람이 무슨 일을 하던간에 이성(理性)이 감성(感性)을 앞서야 실수가 적고, 일의 성취가 많아짐은 당연하다 하겠다.
역사상에 이성(理性)이 감성(感性)을 압도했던 인물로 모택동(毛澤東)과 모윤숙(毛允淑)이라는 두 모씨(毛氏)는 우리 근세 조선(朝鮮)역사(歷史)에서 나라의 앞길을 좌지우지한 방향타를 쥐고 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2.
모택동이 대륙을 통일한 후 문화혁명(文化革命)을 통해 대륙에 남아있던 대륙조선(大陸朝鮮)의 흔적을 완벽하게 지워버린 것은 우리로서는 이미 다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조선(朝鮮)을 반도로 옮기면서, 대륙 현 사천성(四川省)과 귀주성(貴州省) 그리고 감숙성(甘肅省)에 존재했던 진(秦),한(漢)당(唐)송(宋)명(明)청(淸)의 유적지를 대륙의 중동부로 이동시켜 역사를 조작했던 것이고, 더군다나 대륙조선(大陸朝鮮)의 동부해안은 명확히 거대한 장강(長江)과 황하(黃河)에 의해 해안선(海岸線)이 들쑥날쑥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사(朝鮮史)를 지우기 위해 수천만의 인원을 동원하여 대륙동해안을 내륙쪽으로 100km정도를 간척하여 현재의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이 내용은 대륙에서 반도로 이주하셨던, 현재는 작고하신 분의 증언입니다.)
그래서 장강(長江)이북의 동해안(東海岸)에서 내륙쪽 120km까지는 산이 없이 평평한 것이고, 현 산동반도(山東半島)는 조선(朝鮮)의 울릉도(鬱陵島)였는데, 역시 역사를 지우기 위해 섬이었던 울릉도를 모두 흙으로 메꾸어 육지로 연결해 버렸던 것이다.
공자(孔子)가 올랐다는 현 산동(山東)의 태산(泰山)은 1500m로 우리나라 소백산정도의 크기다. 그런데 공자(孔子)는 이 태산(泰山)이 매우 높아서 천하를 굽어본다고 했다. 얼마나 우스운 말인가? 더군다나 공자님이 아니시던가?
또한 양사언(楊士彦)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詩)를 통해 태산(泰山)은 무척이나 높은 산이었음을 말하여 주고 있다.
공자(孔子)나 양사언(楊士彦)이 말한 태산은 이른바 조선(朝鮮)의 백두산(白頭山)인 현 4500m의 알타이산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본다.
즉, 현 산동(山東)의 태산은 공자(孔子)나 양사언(楊士彦)이 말한 역사상의 태산이 아니고, 조선(朝鮮) 울릉도(鬱陵島)의 성인봉(聖人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를 모택동(毛澤東)은 완벽하게 역사(歷史)를 조작하여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모택동은 이성(理性)이 치밀했던 두 모씨(毛氏)중의 한명이다.
3.
모윤숙(毛允淑)
1909∼1990. 시인·친일반민족행위자.
1909년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1925년 함흥 영생보통학교(永生普通學校), 1927년 개성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好壽敦女子高等學校)를 졸업하고, 1927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예과에 입학했다. 1931년 영문과를 졸업했으며, 4월 북간도 용정(龍井)에 위치한 명신여학교(明信女學校)에 교사로 재직했다
같은 해 12월 잡지 『동광(東光)』에 시「피로 색인 당신의 얼굴」을 발표했다.
1934년 보성전문학교 교수였던 안호상(安浩相)과 혼인했다.
1940년 2월 조선문인협회 주최로 평양에서 열린 문예경연대회에서 시를 낭독했고, 같은 해 10월 조선문인협회 주최 문사부대(文士部隊)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에 참여했다. 1940년 11월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맡아 1943년 4월까지 활동했다.
해방 후인 1947년 시집 『옥비녀』를 출간했고, 10월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다
1960년 국제펜클럽 한국위원장을 맡으며, 수필집 『포도원』을 발간했고, 1961년 이화여자대학교 문화공로상을 수상했다
1979년 『황룡사 9층 석탑』으로 3·1문화상을 수상했다. 1980년 문학진흥재단 이사장을 맡았다.1987년 대한민국예술원 원로회원이 되었다. 1990년 6월 7일 사망했으며, 다음 날 대한민국 금관문화훈장이 추서되었다
모윤숙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90∼335)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1947년 유엔임시조선위원단 단장으로 인도대표(印度代表) K.P.S.메논이 임명되었다.
1948년3월12일 서울에서 실시될 조선위원단 8개국중에서 프랑스와 러시아와 시리아는 기권을 표명했고, 중국(대만),필리핀, 엘살바도르, 호주, 캐나다. 인도의 6개국이 어떻게 나오는냐에 따라 우리나라 남북의 운명이 좌우되는 상황이었다.
중국(臺灣),필리핀, 엘살바도르 3개국은 미국의 말에 무조건 추종하는 나라이고, 호주와 캐나다는 반대하는 입장이어서, 결국 印度 대표 메논의 입장에 따라, 부결이 되면 남한 단독선거를 통한 정부수립은 재차 유엔총회로 반려될 것이고, 유엔감시선거로 수립된 남한의 정통정부를 옹호한다는 구실로, 유엔이 6.25戰爭에 뛰어드는 세계사의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3월12일 표결에서 메논은 찬성표를 던져 4대2의 多數決로 단독선거가 가결되었다. 반대는 호주와 캐나다 였고, 찬성은 인도,대만,필리핀,엘살바도로의 네표였던 것이다.
이후 호주와 캐나다는 1948.8.15.대한민국(大韓民國)정부수립기념일에도 축하사절을 보내지 않았다. 그들은 한국전쟁을 이미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메논은 인도가 파키스탄 분리문제로 고통을 겪던 시기였고, 조선 또한 南北으로 분리대립상태에 들어가는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있었다)
메논의 변심은 여류시인 모윤숙(毛允淑)의 미인계(美人計)가 주요했던 까닭이다. 모윤숙 자신의 증언(證言)이 있다.
"만일 나와 메논 단장의 友情關係가 없었더라면 단독선거(單獨選擧)는 없었을 것이며, 따라서 李承晩 박사가 大韓民國 대통령 자리에 계셨다는 것도 생각할 수 없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신동아2월호,1983)
다음은 메논의 말이다.
"외교관(外交官)으로 있던 오랜기간 동안 내이성이 심정(心情-heart)에 의해 흔들린 것은 내가 유엔임시조선위원단 단장(團長)으로 있던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나의 심정을 흔들었던 女性은 한국의 유명한 女流詩人 메리언 모(모윤숙)이었다.(메논 자서전, 런던,1974)
이와 관련한 호주 대학교수의 코멘트는 적절한 비유로 보여진다.
사소한 우연이 어떻게 한 민족(民族)과 국가(國家)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좌우할 수 있는가에 대해 메논과 모윤숙(毛允淑)의 치정(癡情)관계는 매우 적절한 일례를 남겨주었노라고,
호주 國立大學 매코맥 교수는 말하고 있다(1987.10. 씨알의 힘 9호)
명확히 메논은 평생 이성(理性)이 감성(感性)을 앞서왔는데, 모윤숙(毛允淑)과의 관계에서 감성(感性)이 이성(理性)을 앞섰노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모윤숙(毛允淑)씨가 메논의 가슴을 요동치게 할 정도의 그런 미인(美人)이었는가 하는 의아한 생각이 든다.
2019.12.12.松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