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지겸사당 무공사
충남 당진시 순성면 양유리 677-3
복지겸은 태조(918년) 왕건을 도와 고려를 건국하는데 공을 세운 무공공 복지겸 장군은 궁예의 폭정에 항거, 동료 장군인 홍유, 신숭겸, 배현경과 함께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가 죽은 후에 제6대 성종 13년인 994년 복지겸은 세 공신과 함께 태사에 추증되고, 태조의 사당에 배향되었다.
태조 원년(918년) 8월에 개국1등공신에 책봉되었고 혜성부원군(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당진 면천지역의 토지 300경(약 180만평)을 하사 받았으며 자손대대로 세습되었다. 개국의 위업을 이룩한 장군은 고려왕조가 안정되자 고향인 면천(혜성·城)으로 낙향하여 지역 고을들을 다스리며 마지막까지 백성과 더불어 일생을 봉사한 위대한 분이시다.
고려 개국공신 태사 무공공 복지겸장군 사적비
복지겸 장군은 사후(死後)에도 배향공신(配享功臣)이 되어 고려왕조와 더불어 추앙을 받아왔으며, 후손들도 주요 직위에 등용되어 고려를 위해 충성과 봉사를 다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고려 왕족과 공신들은 철저한 박해와 홀대가 있었다.
복지겸장군홍보관
홍살문, 외삼문, 무영사(좌), 추원재(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문종(文宗, 1414∼1452)대에 이르러서는 복지겸 장군을 비롯한 고려의 16공신이 숭의전(崇義殿, 경기도 연천소재)에 배향되는 등 일부 명예가 회복되기도 하였다. 한편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 ?∼927)의 관향인 평산(平山 : 황해도 평주)에서는 태백산성사(太白山城祠)에 신숭겸, 복지겸, 유금필, 배현경 등의 철상(鐵像)을 만들어 이들의 업적과 충절을 흠모하며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외삼문 창의문
창의문 들어서면 좌측 무영사, 우측 추원재
고려의 추앙받는 충신(忠臣)인 복지겸 장군은 일생을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헌신하였으나 관향인 충청남도, 당진, 면천 등으로 부터는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1995년부터 장군을 숭모(崇慕)하고 충청인의 정신문화 회복을 위해 면천지역에 진달래를 식재하였는가 하면 당진의 군화(郡花)를 개나리에서 진달래로 변경하였으며, 학술세미나 및 진달래 축제 등을 통해 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 있다.
내삼문 정충문, 뒷쪽은 복지겸장군 묘역
무공사(武恭祠)는 2007년 8월 26일 건립 기공식을 시작해 홍살문, 창의문, 추원재, 무영사, 정충문, 숭모당(관리사), 신도비, 준공비, 기념관 등이 건립되었다. 이는 2009년 3월 27일 준공 및 영정봉안식을 가졌다.
정충문
내삼문 정충문을 들어서면 복지겸장군의 사당인 무공사와 뒤로 묘멱이 조성되어 있다.
사당 무공사
복지겸장군 영정
복지겸장군 전설
신선과 바둑을 두다
소년 복지겸이 17살 때 아미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아미산 산산봉에서 바둑을 두던 신선들이 소년 복지겸에게 머리가 명석하니 나라 일을 해보라고 권했다는 전설이 있다. 그 일로 인해 정치를 하게 되었고 고려개국1등공신이 되었다.
도당굴과 아내
도당굴에 살던 복지겸의 아내가 혼인날 축하객으로 온 복지겸 장군을 보고 전생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던 복지겸 장군을 알아보고, 그 혼사를 파하고 복지겸에게 시집을 왔다는 이야기이다.
은행나무와 안샘
1,100년 된 면천은행나무는 당진군 면천면 면천초등학교 교정에 두 그루가 있다. 복지겸 장군의 딸이 아버지의 병환을 고치기 위해 집 뜰에 심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 곳이 복지겸 댁의 장독대였다고도 한다. 지역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상당부분 은행나무 밑이 땅에 묻혔다고 하며 이 은행나무는 두견주와 더불어 복지겸의 천식을 다스리기 위해 심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안샘은 내정(內井), 꽃샘, 화정(花井)이라고도 부른다. 복지겸 장군이 병들어 위독할 때 그의 딸 영랑이 아버지의 병환을 치료하기 위해 100일 정성으로 현몽을 받아 아미산 진달래로 술을 빚어 드렸다는 전설의 샘이다. 이 샘물로 1930년도부터 박성흠이 두견주를 빚어 무형문화재 86-나호로 지정을 받았다.
면천초등학교의 은행나무
[출처] 당진 가볼만한 곳 두견주의 전설이 있는 고려개국공신 복지겸 사당|작성자 낭만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