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1879년 독일에서 태어나 1955년 미국에서 타계했다. 칠십 년 넘게 지속된 그의 삶은 그의 위대한 업적에 비하자면 매우 평탄하고 평범한 것이었다. 아인슈타인 인생의 위기라면 학교 다닐 때 라틴어, 지리, 역사 과목에서는 낙제를 받았다는 것과 대학 입학 시험에 떨어졌다는 것, 스물네 살 때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했다가 결국 이혼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그는 노벨상으로 받은 상금 모두를 위자료로 털렸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알렉산더 대왕처럼 인도 정복에 나서지도 않았고 나폴레옹처럼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하지도 않았다. 브르노처럼 지동설을 주장하다가 화형 당하지도 않았고, 다윈처럼 생명의 진화과정을 살피기 위해 남아메리카, 남태평양, 오스트레일리아를 여행하지도 않았다. 그의 중요한 모험들은 실제 세계가 아니라 그의 머릿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사고 실험을 통해, 상대성 이론이라는 것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바꾸어놓았다. 그 결과 그는 지난 20세기 동안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옛날 옛날 아주 먼 옛날, 멀고 먼 나라에 임금님 한 분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임금님은 심심했던지, 신하들에게 코끼리와 눈먼 장님들을 데리고 오라고 시켰다. 임금님은 장님들에게 코끼리를 만져보게 한 뒤, 물었다.
실제세계가 아닌 머리속에서 이뤄진 사고 실험을 통해 상대성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대들이 만져본 코끼리는 무엇과 비슷한가?” 귀를 만져 본 장님은 코끼리가 부채와 비슷하다고 말했다. 이빨을 만져본 장님은 무와 비슷하다고 했고, 다리를 만져본 장님은 절구와 비슷하다고 했다. 등을 만져본 장님은 침상과 같다 했고, 배를 만져본 장님은 큰 항아리와 같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꼬리를 만져 본 장님은 새끼줄과 같다고 했다. 서로의 말이 다르자, 그들은 자기 주장에 옳다고 싸우기 시작했다. 그 장님들이 관찰한 것은 모두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관찰한 코끼리의 모습은 그들이 서 있던 위치에 따라 달랐으며, 진정한 코끼리의 모습과도 사뭇 멀었다.
지난 20세기 우리가 부딪힌 문제도 이와 비슷했다. 전 우주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법칙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가 관찰한 우주의 모습은 우리의 입장에 따라 달라진다. 진리는 보편적이고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관찰한 것이 유일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이러한 지식의 상대성과 인식의 불확실성이 20세기 지성사의 가장 큰 흐름이다. 이러한 흐름의 근원에는아인슈타인이 있다. 20세기가시작될 무렵인, 1905년 그는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리고 1916년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그는 상대성 이론을 통해서 진리는 절대적이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우리의 인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 이제 상대성 이론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아르키메데스 지점'과 상반된 갈릴레오의 '상대성 이론'
기원전 2세기경에 살았던 아르키메데스는 지렛대의 원리를 발견하고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 지구 밖의 한 지점과 긴 지렛대를 달라, 그럼 나는 지구를 들어 올리겠다.” 이 말은 아르키메데스가 지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한 호언장담이었지만, 꽤나 여러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던 모양이다. 그 후 지구를 들어 올릴 수 있는 가상의 한 점을 ‘아르키메데스 지점’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말은 본래의 뜻과 약간 달라져, 관찰자가 객관적으로 관찰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지점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아르키메데스 지점에 서면,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구름 위에서 세상을 내려다보듯이, 어떤 착오나 오차 없이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르키메데스 지점에서 관찰한 것은 절대적인 진리이다. 따라서 이곳에서 관찰한 것은 항상 옳으며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 16세기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는 이 우주 어디에도 아르키메데스 지점은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이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운동하기 때문에 완전히 멈추어진 지점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관찰자의 관찰 결과는 그가 운동하는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기차가 일정한 속도로 기차역 안으로 들어온다고 하자. 기차 역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은 멈추어 있는데 기차가 다가오고 있다고 관찰할 것이다. 그러나 기차 안의 사람은 자신은 멈추어 있는데 기차역이 다가온다고 관찰할 것이다. 관찰자가 기차 역 위에 있느냐 기차 안에 있느냐에 따라 그들의 관찰 결과는 달라진다.
그러나 어떤 물체가 있다면, 기차역에서 관찰하는 그 물체의 가속도나, 기차 안에서 관찰하는 그 물체의 가속도는 동일하다. 왜냐하면 가속도는 시간당 속도의 변화율이기 때문에 속도 차체에는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물체의 질량이 어디에서 측정하나 동일하다고 ‘가정’하면, 기차역 위에서나 기차 안에서나 F=ma (힘=질량x가속도)라는 역학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된다. 다시 말해 서로 등속도로 운동하는 관찰자에게는 똑같은 물리 법칙이 적용된다. 이것을 갈릴레오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한다. 갈릴레오의 상대성 이론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의 바탕이 되는 첫 번째 가설이다.
특수상대성 이론, 절대적이라 생각했던 시간과 거리가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달라진다
상대성 이론은 다음 두 가지 가설을 출발점으로 한다.
1 갈릴레오의 상대성 이론: 모든 운동은 상대적이며, 등속 운동을 하는 모든 관찰자에게는 같은 물리 법칙을 적용된다.
2 광속 불변의 법칙: 빛의 속도는 관찰자가 정지해있거나 운동 상태에 있거나, 또 어떤 방향에 있거나 상관없이 일정하다.
1930년경 연구실에서 포즈를 취한 아인슈타인
2번 광속 불변의 법칙은 우리 상식을 깨는 관측결과이다. 일반적인 상황과 비교해보면, 이 가설이 얼마나 이상한지 금세 알 수 있다. 기차가 20m/s라는 속도로 기차역에 들어오고 있다고 하자. 그런데 기차 안에서 있던 한 사람이 기차역을 향해 1m/s라는 속도로 걷기 시작했다. 역 위에서 관찰한 그의 속도는 얼마일까? 정답은 기차와 그가 걷는 속도를 더한 21 m/s이다. 자 이제 다른 문제를 내보자. 기차가 정차했다면 이 기차의 헤드라이트에서 나오는 빛의 속도는 얼마일까? 정답은 빛의 속도인, 약 300,000,000m/s이다(만일 기차 주변이 진공이라면, 정확히 300,000,000m/s이다). 그런데 이 기차가 20 m/sec 속도로 기차역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고 하자. 그럼 이때 기차역에서 관찰한 헤드라이트의 빛의 속도는 얼마일까?
우리는 쉽게 빛의 속도에 기차의 속도를 더하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답은 300,000,020m/s가 아닌 300,000,000m/s다. 움직이는 기차에서 나온 빛의 속도는 멈추어진 기차에서 나오는 빛의 속도와 똑 같다. 도대체 무슨 조화란 말인가! 알다시피 속도란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것이다. 빛의 속도가 일정한 상수가 되려면 시간과 거리는 상황에 따라 변하는 변수가 되어야 한다. 요컨대, 우리가 불변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시간과 거리는 관찰자의 운동에 따라 달라진다. 이것이 바로 특수상대성 이론이다. 특수상대성 이론을 요약하면 빠른 속도로 등속운동을 하면 시간은 느려지고 거리는 짧아지고 질량은 늘어난다. 갈릴레오의 ‘가정’과는 다른 결과이다.
일반상대성 이론, 중력에 의해 시공간이 휜다
특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지, 11년 만에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 이론을 발표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으로 아인슈타인은 등속 운동계 안에서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이제 범위를 넓혀, 가속 운동계 안에서도 동일한 물리적 법칙 적용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그렇게 그는 관찰자에 따라 관찰결과는 달라져도, 우주는 동일한 법칙에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아인슈타인은 한 가지 마술을 부리는데, 그것은 가속 운동에 의한 관성력과 중력이 같다는 것이다. 동시에 중력의 원천이 되는 중력 질량과 관성의 정도를 나타내는 관성 질량도 같은 것이 된다. 이것을 등가의 원리라고 한다. 등가의 원리가 성립하려면 중력이 시간과 공간을 휘게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휜 시공간에서는 그 시공간을 지나는 빛도 휘게 된다.
모든 관찰결과는 상대적이고 개개인의 관찰능력에 한계가 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말하는 것은 우주의 모든 것은 보편적인 법칙에 지배를 받지만, 관찰자의 입장에서 따라 관찰 결과는 달라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코끼리를 만지는 장님의 입장에 처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입장(중력장)에 따라, 서로 다른 관찰 결과를 말한다. 그리고 서로 자기가 관찰한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누구의 관찰 결과도 옳다고 할 수 없고 누구의 관찰 결과도 틀렸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관찰 결과는 그가 처한 입장(중력장)에서는 옳은 것이지만 다른 사람의 입장(중력장)에서는 틀린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지식(관찰결과)은 상대적이고 우리의 인식(관찰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문득 필자의 스승인 켄튤 나왕 룬드룹(Kentrul Ngawang Lhundrup)이 한 말이 생각난다. 사십 년 가깝게 수행하신 이 티베트 승려는 이렇게 말했다. “다르마(보편적 법칙, 혹은 절대적인 진리)는 누구의 것도 아니에요. 그러나 모든 존재들은 다르마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요. 아무리 못나고 비루해 보이는 사람들도 그러한 정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르마에 대해 알려면, 우리는 그들이 가져오는 정보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존재들은 우리의 스승이지요.” 만약 코끼리를 만진 장님들이 싸우지 않고 서로 둘러 앉아 토론을 시작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랬다면 그들은 퍼즐을 맞추듯, 그들이 관찰한 정보들을 모아 전체의 코끼리 모습을 그려내지 않았을까? 확실히 진리는 너의 것도 나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쩌면 진리는 우리 모두의 것일 수 있다.
역사적 사건도 그렇듯이 과학 이론도, 그 이론만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그 이론의 의미는 역사적 맥락 안에서만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성 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성 이론만 다루는 책보다는 물리학 전반을 다룬 책을 읽은 것이 좋다. 내가 대학에 들어와 처음 읽었던 물리학 책은 로버트 M. 마치의 <시인을 위한 물리학> 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인문학도도 물리학 공부를 할 수 있어 하고 좋아했던 것이 기억난다. 요즘 나온 <최무영 교수의 물리학 강의> 도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읽기 좋은 책이다.
상대성 이론이 지닌 철학사적 의미는 배중률에 대한 반성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세 가지 형식논리 중 하나인, 배중률은 한 명제가 진리이면서 동시에 거짓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관찰자의 입장에 따라 동일한 현상에 대한 관찰 결과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어, 괴델, 화이트헤드-러셀, 하이젠베르크도 이러한 배중률에 대한 반성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것은 20세기 지성사를 가로지르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다. 20세기 들어 배중률에 대한 반성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알고 싶다면, 펠레우어 그라우의 <괴델과 아인슈타인> 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