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암 바위 위의 각명(刻銘)
임병식 rbs1144@hanmail.net
길을 거닐다 보면 사람과 동물의 행동이 아름다워 보일 때도 있고 추하게 보이는 때도 있다. 사람의 경우 추한 행동으로는 사람으로서 도리를 못하는 때와, 남들이 보기에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모습을 보일 때이다. 여기에는 모범을 보여야 할 사회지도층이 그렇지 못한 것을 보게 되거나, 품위를 지키지 못한 행동,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은 행동 등이 두루 포함된다.
내가 걸어서 출퇴근 하는 외곽 뒷골목은 가정에서 내어 놓은 음식쓰레기를 모아둔 곳이 있다. 그곳에는 들쥐와 들 고양이가 수시로 나타나 포장지를 물어뜯어 놓고서 들락거린다. 그런데 그중 어느 고양이 한 마리는 아예 터를 마련하고 사는 지 노상 눈에 띈다. 그 고양이는 무척 말라있다. 그토록 음식물을 탐하건만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서인지 빼빼 말라서 여간 추해보이지 않는다.
그 꼬락서니를 보면 나는 부지불식간에 떠올려지는 것이 있다. 전에 어디서 바위위에 새겨놓은 이름을 본 것인데 그것이 마치 지금 마주치는 마른 고양이의 몰골을 보는듯한 것이다.
어느 해에 나는 강진 수인산을 올랐다. 함께 등산을 하는 고운회 산악회원과 함께한 산행이었다. 때는 늦은 가을. 쌀쌀한 기운이 목덜미를 파고든 때였다. 우리 일행은 사전에 이곳의 지리정보를 공유했다. 저명한 수필가이며 등산가인 송규호(宋圭浩) 선생이 추천한 코스를 택한 것이었다. 안내한 대로 따라서 가니 들녘에는 조선 태종 때 설치했다는 병영성이 있고 후방에 목적지인 수인산이 나타났다. 이 곳은 왜구들이 강진만을 침입하면 반드시 그곳을 거쳐 넘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이곳에 병력을 배치하고 경계를 서왔단다.
아니나 다를까 정상에 오르니 예전의 절터와 봉수대가 보였다. 사방은 훤히 트여 조망이 잘 되는 것으로 보아 한눈에도 전략적 요충지임을 알게 했다. 산정의 높이는 561m. 초입으로부터 2시간 반 남짓한 거리였다. 나는 정상에서 수많이 병사로부터 사열을 기분을 느꼈다. 정상의 분지에는 지천으로 많은 억새가 하얀 꽃을 피우며 마치 환영하듯 비춰졌던 것이다.
경치 또한 뛰어났다. 큰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우뚝 서있는데 그 가상이 여간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이것들이 전시에는 방패역할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더욱 각별하게 느껴졌다.
이때까지는 기분이 좋았다. 역사의 아픔을 되새기는 마음은 무겁게 만 보였지만 경치 그야말로 비경이었던 것이다. 한데 그것은 잠시, 하산을 위해 다른 길로 나오다가 보니 눈앞에 병풍 같은 큰 바위가 압도하는데 그곳에는 비문이 즐비했다. 수직절벽이 그대로 두기에는 아까워서 인지 몰랐다. 그것에 새겨진 것을 대충 일별했다. 모두가 병영성과 이것의 수비를 책임진 벼슬아치들의 것들이었다. 병마절도사 이 아무개. 광양군수 송 아무개 등의 이름이 보였다. 그런데 나의 눈에 그중에서 어떤 비문에 시선이 꽂혔다. 그걸 보고난 나는 절망하고 말았다. 비문 중에는 하필 임진년(壬辰年)에 새긴 것이 있었던 것이다.
머리를 쇠망치로 맞은 듯 아찔했다. 이럴 수가 있는가. 1592년이라면 토요토미히데요시가 소위 정명가도(征明假道)구실로 5월4일 부산을 쳐들어온 해가 아니던가. 그들은 파죽지세로 거의 한달 만에 한양도성을 점령했다. 이때 이순신장군을 전라 좌수사로서 왜적이 막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왜적이 남서바다로 침입해 오자 해로를 가로 막고 있었다.
그 바람에 육지의 방어선은 무너졌지만 남서해안의 바다는 온전히 지킬 수가 있었다. 이때 연안에서는 비상이 걸려 수군을 정비하고 육군은 무너진 성을 보수하고 진지를 구축하기에 여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병력을 빼내어 자기 비문이나 새겨놓다니. 한가한 장수가 제 손으로 그랬을 리는 만무하고 석공을 시켜서 새겼을 것이다. 얼마나 정신머리 없는 자의 짓인가. 그래서 그걸 보는 순간 절로 혀가 차졌다.
아니, 면죄부를 주는 심정에서 달리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꼭 1592년이 아니고 60년 전이나, 그 이후의 60년을 상정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우연의 일치 치고는 공교롭기도 하거니와 무슨 60넌 후에 부임한 장수가 감회가 있어 뒤늦게 새겨놓았겠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우리나라가 그간 991회의 외침을 당하면서 희생이 많았는데, 그런 데는 이런 얼빠진 장수들이 한몫을 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도 김자점 같은 자는 병자호란을 당하여 임경업장군이 함경도 국경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지만 적과 내통하여 경계를 물리고 최후에는 최후 방어선까지 뚫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그러고서도 반정공신이란 이유로 인조의 배려하에 자리보존을 하였다.
아무튼 그런 사람들이 나라를 제대로 지켰을 리가 없다. 정약용선생이 지은 <애절양>을 보면 가혹한 군역에다 무리한 인두세 과세로 양물을 자르는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데, 그런 자 일수록 자기 일신만 돌보지 않았을까. 그런 씁쓸한 생각까지 유추해 보게 된다. 그런 자들이 아니고서는 전란 중에 비석을 새길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나는 모처럼의 산행의 흥취를 잃고 말았다. 차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것만 같아서 돌아오는 여간 무겁지 않았다. (1995)
첫댓글 전란중에 비석을 새기다니요..금강산에 김일성 찬양글을 새긴 것 만큼이나 어이없네요.
예전에 강진 수인산을 산행하며 바위에 새긴 글을 둘러보다가 임진년에 새긴 공적비가 있어 읽어보면서 수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정말 1592년 그 임진년에 새긴 것이라면 정신이 바로 박힌 자인가 하는 생각때문이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