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택을 찾아가는 것은 과거로 달려가는 시간 여행이다. 도시에 살고 있는 시골 출신일 경우 그 여행은 너무나 절절하다. 팥죽이 끓는 듯한 도시의 일상에서 정자나무 아래 나태에 가까운 시골의 한적은 그 거리를 셈할 수 없을 정도로 멀다. 그래서 고향은 이 땅 위에는 없고 다만 기억으로 존재한다고 흔히 말한다.
알랑 드 보통이란 프랑스 작가는 “첫 키스는 차가운 익명의 세상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나아가 “첫 섹스가 황홀한 까닭은 ‘고독으로부터 친밀함까지의 가장 먼 거리’(the maximum distance from loneliness to closeness)를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멘트 닭장과 같은 아파트를 떠나 초롱초롱 별빛 아래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고택의 불빛을 찾아가는 것도 어쩌면 고독으로부터의 탈출이라 말할 수 있다. 고독에서 친밀함으로 연결되는 그 먼 거리를 단축시켜주는 첫 섹스의 추억은 분명히 경이이자 환희다. 고택을 찾아가는 여정, 그것도 온 천지의 산과 들이 흰 눈으로 덮여 있는 겨울날 아침이면 그것 또한 기쁨의 절정이라 감히 말할 수 있다.
안동 길안의 천지갑산 천변에서 열리고 있는 얼음축제장을 둘러본 후 내친김에 청송군 파천면 덕천리의 송소고택으로 향한다. 큰 눈이 오고 며칠 지난 뒤여서 여태까지 눈을 뒤집어쓰고 있는 나무들은 없다. 그렇지만 먼 산은 아직도 백발이 성성한 채로 겨울을 붙들고 있고 가까운 야산의 음지 쪽 잔설은 잎을 떨어내 버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들의 하얀 배경으로 매우 잘 어울린다.
참 좋다. 도시의 눈과 농촌의 눈은 이렇게 다르다. 도시 길바닥의 눈은 미끄러운 얼음판으로 변해 간혹 넘어진 사람들로부터 욕지거리를 얻어먹어 추한 쓰레기로 변해가고 있다. 그러나 시골 산천의 눈은 아직도 동화 속 이야기처럼 아름답고 흑백사진 속의 흰 풍경처럼 멋지고 근사하다. 들판 밭둑 너머로 보이는 산기슭의 묘지들도 너무나 평온해 보여 사후의 세계가 그리 외롭고 쓸쓸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산을 등지고 앉아있는 양지바른 곳의 촌락들은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로 떠나버려 사람의 그림자조차 뜸하지만 눈 모자를 쓰고 있는 농가주택에 달린 닭장과 돼지우리까지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다.
우리가 찾아가는 송소고택은 청송읍 소재지에서 승용차로 10분 거리. 집 앞에 개울을 낀 그리 높지 않은 언덕 밑에 자리하고 있는 아흔아홉 칸의 고택은 130년 세월을 짊어지고 졸 듯 앉아 있다. 중요민속자료 250호로 지정된 이 고택은 조선조 영조 때 만석꾼인 청송 심씨 심처대의 7대손인 심호택이 지은 집이다. 그로부터 지금까지 내리 9대가 만석의 부를 이어와 경주 최 부자와 쌍벽을 이루는 영남의 토호 집안이다.
대부분의 고택이 다 그러하듯 문간에 발을 들여 놓으면 마음이 경건해진다. 그것은 고택의 골기와에서 흘러내리는 기운이 위엄으로 다가오고 정갈한 주변 환경이 선비정신을 일깨우는 듯하여 저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
가마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솟을대문의 높이와 치장으로 엮은 홍살문이 기부터 죽인다. 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 사랑채 사이에 ‘내외담’이란 작은 담이 가로막아 선다. 손님들은 왼쪽 큰 사랑채로 들어가야 하고 이 댁의 여인네들은 객(客)들과 마주치는 게 거북하여 담을 경계로 오른쪽 안 사랑채로 들어간다. 조선조 주택의 구조는 지역마다 특색이 있지만 생활공간 속에 과학이 스며 있어 예의와 편리를 동시에 갖추고 있다.
시집 안 간 딸이 기거하는 별당을 드나들 땐 대문에 삐걱 소리가 나도록 장치를 해 둔다. 문틈에 박아둔 삐걱 나무가 헐거워 소리가 약해지면 다시 갈아 끼워 그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했다고 한다. 또 누가 들고나는지를 알 수 있도록 밖에선 보이지 않는 구멍을 뚫어 잠망경 구실을 했다고 하니 과년한 딸 감시를 과학이 책임지고 있었나 보다.
요즘 송소고택은 고택 체험 공간으로 바뀌었다. 장작 군불을 때는 방을 포함하여 모두 14개의 방이 한옥스테이용으로 쓰이고 있다. 숙박객에겐 조식을 제공하며 숙박비는 3, 4인용이 15만원 내외.
그리고 고택 입구에는 소슬밥상(054-873-6300)이란 아주 멋진 한정식집이 있다. 기본상은 7천원이지만 이곳에서 나는 제철 채소전이 추가되면 1만5천원, 육해공군의 집단 사열 정식은 2만원이다.
특히 눈 오는 겨울 밤, 송소고택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군불 때고 남은 숯불에 감자와 고구마를 구워 먹으며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나누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