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군들이 월남전에 파병하기로 결정할 당시는 17도선 휴전선 남쪽 자유월남이 월맹군과 베트콩들에게 많은 지역이 침락을 받아 국토 절반이 점령당한 상황이었다. (1965년1월상황 ---> 클릭!)

월남전에서 미군들의 전략은 탐색과 섬멸(Search and Destroy)이라서 우세한 화력으로 적을 찾아 돌아다녔고, 한국군은 중대전술기지(Company Tactical Base)로 중요한 길목을 지키며 적을 차단하여 주민을 지키고 평화유지에 힘썼다.
월맹군은 처음에 휴전선을 침공하여 한국군을 만만하게 보고 한국군 중대기지에 야간기습으로 치명타를 입히려고 포위하여 기습공격을 벌렸으나 한국군은 호락호락한 군대가 아니었다.
1966년 8월9일 맹호기갑연대 9중대지역에서 접전을 벌인 월맹군은 일격에 코피 터지고 후퇴했다. (두코전투 ---> 클릭!)
1967년 2월15일 새벽 청룡11중대기지를 포위한 월맹군은 철조망은 뚫었으나 해병대 용사들의 두려움 없는 육박전에 완전히 초전박살이 나고 말았다. (짜빈동전투 ---> 클릭!)

그후 월맹군에겐 다음과 같은 훈령을 내려졌다.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 -호지명- "
1972년 4월 월남전이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월맹군은 집요하게 침락을 가해 오면서 캄보디아 국경을 넘어 19번 국도를 타고 군사요충지 퀴논을 향해 침공해 왔다.
퀴논으로 갈려면 안남산맥을 넘어야 하는데 맹호기갑 1중대기지가 19번도로 안케고개 정상을 지키고 있으니 한국군과 접전이 불가피 하였다.
안케전투 전초전, 1972년 4월11일 야간에 적 세이파 6명은 맹호기갑1중대 철조망으로 침투를 시도하다가 1중대 초소에서 6명 모두 벌집이 되고말았다. 그것이 안케전투 시발점이었다. (황진순 수기 ---> 클릭!)
안케패스에 집결한 월맹군은 1중대기지를 점령해야 퀴논으로 진격이 가능해서 대대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안케패스전투는 월맹군과 한국군 사이의 피 터지는 15일간의 혈투였다. 월맹군은 안케패스를 통과하는데 실패하고 후퇴를 했지만 맹호사단의 병력손실도 컸다. (안케전투 전사 ---> 클릭!)

그런데 그 당시 638고지 능선에 투입되어 전투를 했던 전투원들은 지금도 의문점이 많다. 고립된 6중대를 구출하러 특공대로 출동했던 5중대 분대장 정현후 하사는 구더기가 들끓는 한국군 시신을 영현빽(시신을 담는 자루)에 담아서 자신이 헬기로 실어 보낸것만 30여구인데 동작동에 묻혀있는 전체 안케전투 전사자가 75명뿐이라니 말도 안된다는 증언입니다.
안케전투 내내 맹호기갑1중대기지에서 박격포 세례를 당했던 황진순 전우도 한국군 시신 무더기를 시누크 그물망에 실려보낼때 검은 피가 줄줄 흩날리던 악몽을 이야기 하는데...
그때 맹호기갑 1대대 연병장으로 실어가서 눕혀놓은 한국군 전사자 인원파악을 했던 전우나 또는 목격을 했던 병사들은 왜 말이 없는지?
그 중요한 사실을 증거로 남길 사진도 분명히 찍어 놨을텐데 아직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다. 그 사진들은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아직도 묻혀져 있는 극비문서가 있는것 같다.
만약 '72년 그당시 안케전투 상황이 요즘처럼 메스콤을 탔더라면 국내에선 온통 난리 났을테지.
안케전투 참가자 전우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상황이 궁금하여 최근 10년동안 안케 638고지를 세 번이나 올라가서 주변 고지를을 살피며 전사기록을 추적해 봤다.

파월용사로써 많이 아쉬운 것은 월남전을 조금만 더 끌고 갔더라면 월맹이 전쟁할 물자가 소진되어 항복했을텐데, 거짓 휴전조인에 속아 평화유지군이 철수한지 2년만에 휴전을 어기고 월맹군이 다시 무력남침해서 적화통일 되었다는 겁니다.
겉으로 통일되어서 좋은 것 같이 보이지만, 주민 서로가 감시하는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월남전의 공산화 내력를 답습하는 북한의 대민심리전을 경계해야 됩니다.
(월남전과 한국 베트벳 최진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