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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군 여행] 빈동재사/ 忠臣不事二君을 지킨 공북헌.........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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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동재사(賓洞齋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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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동재사(賓洞齋舍)
유랑자는 이제 봉화 선성김씨 빈동재사(賓洞齋舍)를 찾아가는 길이다.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문단리 962번지
(봉화읍 빈동재사길 122)에 있는,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인 김담(1416∼1464) 선생의 묘소를 지키기 위해 묘 아래
에 영조 29년(1753)에 지은 건물이다.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의 민속문화재 제97호로 지정되었고, 2017년
6월 29일 대한민국의 국가민속문화재 제292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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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의 호는 무송헌(撫松軒)이고 본관은 예안이다. 20세에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지냈다. 세종 17년(1435)
문과에 급제하고 경주부윤, 이조판서를 역임했으며 특히 천문학에 밝아 왕명을 받아 조선역학(曆學)의 기본이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역법인 [칠정산외편(七政算外篇)]을 만들었던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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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사는 앞면 5칸으로 왼쪽 둘째 칸에 대문을 달았고 문간의 왼쪽에 직각으로 누 4칸을 꾸몄다. 창틀의 구조 및
벽에 설치된 조명시설 등 우리나라 옛 생활과 관련된 양식이 잘 남아 있어 한국 건축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
는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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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담의 8세손인 이만(李曼)이 1754년에 서술한 「중건 빈동재사기(賓洞齋舍記)」와 「빈동재사중건후술회(賓洞
齋舍重建後述懷)」가 있어 그간의 경위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를 어쩌랴. 산길을 돌고 남의 집 마당을 거처 어
렵게 찾아갔는데 보수 공사 중이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려야하는 유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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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빈동재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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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공북헌(拱北軒)
*도촌리 마을 입구 소나무 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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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공북헌(拱北軒)
유랑자는 빈동재사에서 곧장 충절의 표상이자, 임을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절의를 지킨 공북헌을 찾아 간다,
왕위에서 쫓겨난 단종 하나만 바라보다 일생을 마친 평시서령을 역임한 이수형(李秀亨, 1435 – 1528)의 공북헌
(拱北軒)을 찾았다. 항상 이지만 시골 농촌 마을은 평화롭고 한가롭다. 봉화 땅에서 도촌리는 그나마 낙화암천
을 끼고 있어 농지가 꽤나 있는 들녘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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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헌(拱北軒)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있는 조선 전기의 건축물로, 조선 전기의 문신 도촌 이수형이 단종
을 추모하며 형생을 은거하던 곳이다. 2008년 5월 1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537호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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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랑자가 공복헌에 도착하고 보니 먼저 널따란 주차장이 반겨준다. 그러고 보니 봉화 여행 시에 각각의 문화재
건물들을 보면 거의가 이렇게 충분한 주차장들을 보유하고 있는 모습들을 볼수 있었는데 내심 부럽기도 하
고.....
공북헌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도촌리 454에 있다. 우계이씨 이수형(李秀亨,1435-1528)은 음보로 관직에 올
라 전생서령과 평시서령을 역임 하였으나 21세(1555년)에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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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불의를 참고 보며 세조의 조정에 머물러 있을 수 없어서 관직을 버렸다. 그리고 관란(觀瀾) 원호(元昊), 어
계(漁溪) 조여(趙旅)와 함께 원주 치악산에 있는 바위에 충절을 맹세하며 나란히 이름을 새겨 놓고, 처가가 가까
운 봉화읍 도촌리에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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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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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서쪽에는 이수형을 추모하며 1610년(광해군 2) 봉화군과 순흥부 유림이 세운 도계서원과, 건물 담장 밖으로는 이수형이 손수
심은 괴화(회화)나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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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 복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단종이 사사되자, 이수형은 3년상을 마친 뒤 산으로 들어가 3면은 벽이고
북쪽을 향해 창문을 낸 공북헌(拱北軒)이라는 집을 짓고 평생을 은거하였다. 단종에 대한 이수형의 충절은 자신
이 지은 가옥 구조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은거지인 도촌리의 지형을 고려할 때 동남향으로 방향을 잡는 것이
마땅함에도 이수형은 북향으로 집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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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집의 동편에 한가하게 지낼 장소를 마련하였는데, 1칸짜리 방이 남쪽에 위치하고 그 2배 크기의 마루는
북쪽에 자리 잡은 구조였다. 또 방의 동남쪽 벽은 2개의 채광만 가능하고 사람 통행은 불가능하도록 하였으며,
마루 또한 동서는 모두 벽으로 둘러막아 방에서는 오직 북쪽의 먼 산만을 볼 수 있게 했다. 이러한 이유는 장릉
(莊陵, 단종의 능)이 있는 영월 쪽을 바라보고자 하는 이수형의 일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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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다. 앞 쪽으로는 반 칸 규모의 뜰이 마련되어 있다. 앞 선으로 나와 선 기둥들은 원형이고,
건물을 구성하고 있는 기둥은 각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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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일사(見一祠)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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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은 도촌 이수형의 추모를 시작으로 단종을 기린 인물들인 정민공(貞愍公)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 1426~1457),
충장공(忠壯公) 이보흠(李甫欽, 1397~1457),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 1556~1631) 등을 추가로 배향하고 제향 드리는 곳이다.
도계서원은 불의에 굽히지 않고 자신의 뜻을 이행하며 한 평생 살다간 충의정신을 볼 수 있는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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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보고 후세의 교화를 위해 눌은 이광정(訥隱.李光庭)은 이 거실에 이수형이 단종을 깊이 사모했다는 뜻에서
우계이씨 공북헌(拱北軒)이라는 편액을 달면서, 유기와 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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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헌(拱北軒)
丈室沈沈小似盤(장실침침소사반) 좁은 방은 작은 반과 같은데
開門唯見越中山(개문유견월중산) 문을 열면 보이나니 영월 땅의 산뿐일세
東遊白馬何時返(동유백마하시반) 동쪽으로 백마 타고 간 님 어느 때 돌아올까
獨魄鵑聲夜夜寒(독백견성야야한) 두견새 우는 소리 차갑기만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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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道溪書院)강당 공극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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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공북헌(拱北軒)이란 마루를 두 손으로 맞잡고 평생토록 일편단심 단종에
대한 공경을 표 했다는 뜻이다. 당시 임금을 잃은 이수형의 슬픔에 얼마나 컷던 가를 보여주는 현판이 아닌가
싶어 유랑자의 마음이 짠했다.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충신불사이군, 열녀불갱이부)했던가, 충신은 두 임
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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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조금은 고리타분한 글귀라고 이야기 할지 모르겠으나 과연 그럴까요?? 요즘처럼 권모술수(權謀術數)
가 판을치고 사욕(私慾)을 따라 배신(背信)을 밥 먹듯 하고, 수시로 색깔을 바꾸는 한마디로 개 똥구멍을 핧타먹
는 개판인 세상, 아닌가? 이런 상황에서 오늘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유랑자는 반문하지 않을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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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계서원(道溪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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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이야기를 하다보니까 좀 본질을 벗어났지요? ㅎㅎ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기 공북헌 방에다가. 창설재
권두경(蒼雪齋.權斗經:1654년~1725년)은 천인실(千仞室)이라 이름 지어 현판을 붙이고 시한수를 남겼으니 다
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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避地何年寄此間(피지하년기차간) : 어느 때에 세상 피해 이곳에서 지냈나.
巋然丈室想盤桓(규연장실상반환) : 높다란 방안에서 배회하던 때를 생각해보네.
遺風曠世遙相感(유풍광세요상감) : 남긴 풍모는 시대가 멀어도 감응되어
高處曾將翠壁看(고처증장취벽간) : 일찍이 높은 곳의 푸른 절벽을 바라보았지
*千仞室(천인실) :천인(千仞)은 천 길이라는 뜻으로, 산이나 바다가 썩 높거나 깊은 것을 이르는 말로서,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높고 깊음을 기리는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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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헌(拱北軒) 이란 이름은 "이 방을 곧 높고 깊은 천인실(千仞室)이라 하고 저 마루를 두 손으로 맞잡고,평생토록 단종에 대한
공경하던 뜻"을 표해온 공북헌(拱北軒)이라고 하였던 것에서 유래 한다고 하며, 천인실 의 천인(千仞)은 천 길이라는 뜻으로, 산이
나 바다가 높거나 깊은 것을 이르는 말로서 "단종을 향한 일편단심의 높고 깊음을 기리는 집" 이라는 의미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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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헌(拱北軒)은 정면 1칸, 측면 2칸반 규모에 맞배지붕 구조로,맨 안쪽 남향에 온돌방 1칸을 놓고 그 앞쪽 북향에 마루 1칸 반을
두었으며,북향으로 집을 짓고 북쪽으로만 개방하여 마루와 실을 배치한 평면 구성과 3면을 벽으로 하고 북쪽으로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한 건물구성으로,불사이군(不事二君) 이라는 충절의 특수한 목적에 부합하도록 한 아주 독특한 구성이 특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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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이수형의 절의와 관련해 또 다른 일화도 전해 온다. 이수형이 낙향한 뒤 뒤뜰에 괴화나무 한 그루를 심
었는데, 이수형이 죽은 다음해 이 나무도 말라죽었다. 그런데 130여 년 뒤 단종이 복위된 다음해부터 다시 살아
나 잎이 돋고 꽃이 피었다고 전해진다. 지금도 이 괴화나무는 공북헌을 의연하게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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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괴화나무의 일화를 통해서도 이수형의 절의정신을 유추해 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여기에서 괴화(槐花,)는 회화(槐角)나무 꽃을 뜻한다, 꽃은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8월에 나비모양의 연노랑
꽃을 피우는데 한 번에 다 피는 것이 아니고 조금씩 피어나면서 오랫동안 꽃을 피운다. 동의보감(東醫寶鑑)에는
꽃을 괴화(槐花)라 하여 주로 장출혈이나 치질 지료제로 기록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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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괴화나무는 보기에는 두 그루 같지만 같은 뿌리에서 나온 한 그루다. 도촌 이수형이 손수 심은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이수형이
작고한 후 저절로 말라 죽었다가 1693년(숙종 24) 단종이 신원되자 다시 살아났다. 또 일본이 침략한 후 고사하였다가 1945년 해
방이 되자 되살아났다는 설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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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화(槐花,),회화나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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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북헌(拱北軒)의 주인공인 우계이씨 이수형(李秀亨,1435–1528) 집안 내력을 보면 수형의 고조부인 이억의 생
존 연대는 미상인데, 고려 말, 조선 초로 추정할 수 있다. 자는 신지(信之), 호는 퇴은(退隱), 본관은 우계(羽溪)이
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 급제하여 유장(儒將)으로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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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우왕 14년에는 강계 원수로 니철성 원사(泥鐵城 元師) 홍인계(洪仁桂)와 함께 선봉장으로 요성 지역으로
쳐들어가서 명나라 군사를 격파하고 돌아오니, 우왕이 크게 기뻐하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상을 내렸다. 이 해 2
월에 명나라 태조가 철성 이북 땅은 본래 원나라에 속하였던 곳이니 고려는 그 땅으로부터 물러나라 하며 철령
위를 두었던 것이 고려의 요동 출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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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화(槐花)는 회화나무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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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고려의 요동 출진은 명나라와 고려 사이의 갈등을 야기했을 뿐만 아니라 이성계 등 명나라와 우호적 관
계를 맺고자 하였던 신진 사대부 층과도 갈등하는 요인이 되었고,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불러오고야 말
았다. 조선이 개국되자 태조 이성계는 이억에게 도평의사사 겸 위흥친군위동절제사에 임명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소백산 아래 순흥 땅에 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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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는 특별히 원종공신 1등에 봉하고 논밭과 노비를 내렸다. 이억은 그것을 일절 받지 않았으므로, 일대 각 고
을에서 보내온 곡물이 해마다 아홉 무더기의 노적가리를 이루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이억이 거주하던 고을은
공세구구리(公稅九九里 : 현재 영주시 단산면 구구리)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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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촌 이수형은 단종에 대한 충신과 절의를 건물과 편액에 담아 평생동안 지키며 살아갔다. 녹을 먹는 관료라면 개인의 출세를 위해
권력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라, 옳은 생각과 옳은 판단으로 불의에 굽히지 않는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생
각해 보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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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 이성계가 내리는 재물을 하나도 손대지 않음으로써 고려 왕실에 대한 충성의 마음을 다하고자 하였다. 이
억은 초하루와 보름이면 소백산 국망봉에 올라가 개성을 향해 4배를 하고, 고려 왕실에 대한 절의를 다지기도
하였다. 이억의 관작은 고려 말 공민왕 시절(1390년 경)에 밀직부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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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형(李秀亨, 1435~1528)의 자는 영보(英甫), 호는 도촌(桃村) 또는 공북헌(拱北軒)이다. 밀직부사 이억의 현
손(손자의 손자)이며, 군자감 이경창(李景昌)의 아들이다. 밀직부사 이억이 우계이씨의 일파를 영남 순흥 땅에
자리 잡게 하였다면, 그의 현손인 이수형은 도촌 마을로 입향하여 우계이씨 공북헌의 역사를 출발시키는 역할
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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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질빵꽃: 꽃말은 '비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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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과 그의 현손인 이수형은 서로 비슷한 인격을 드러낸다. 이억이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을 자신의 가장 중
요한 덕목으로 갖추고 있었다면, 이수형은 단종에 대한 충절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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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억에게서 시작되어 이수형으로 이어진 이 우계이씨 일문의 충절의 의기는 두 번이나 죽었다 살아났다는 도
촌 마을의 회화나무에 의하여 상징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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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위질빵에는 숨겨진 깊은 뜻이 있다고 한다. 질빵은 짐을 질 때 사용하는 멜빵을 말하므로 사위의 멜빵이 된다. 한편 비슷
하게 생긴 덩굴로 할미밀망이 있는데, 사위질빵은 덩굴이 가늘고 약하여 큰 짐을 옮기는 멜빵으로 부적합하고, 할미밀망은
덩굴이 굵고 튼튼하여 무거운 짐을 나르는 데 제격이다. 귀한 사위가 힘든 일을 하지 않도록 지게의 멜빵끈을 끊어지기 쉬
운 사위질빵으로 만들어 조금씩 짐을 나를 수 있게 한 반면에 항상 들볶아대는 ‘얄미운 사람’인 시어머니에게는 튼튼한 할미
질빵으로 멜빵끈을 만들어 골탕을 먹였다는 이야기이다. 사위 사랑은 장모라는 속담을 덧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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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 공북헌(拱北軒)
경북 봉화군 봉화읍 사제길 12
(지번)봉화읍 도촌리 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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