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사색 의자 / 김혜정 (2024. 4.)
여름 끝자락이다. 긴 장마가 끝나자 40도에 가까운 무더위가 시작되더니 몸도 마음도 지쳐갔다. 에너지는 고갈되고 의욕마저 소진될 즈음 이래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그때 생각난 것이 합천 해인사 템플스테이다. 힘들고 지친 마음을 치유할 유일한 방법 같아 참가하기로 했다.
체험형과 휴식형이 있는데 나는 힐링을 위해 휴식형을 택했다. 산문을 들어서는 순간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녹음이 우거진 산사의 싱그러운 공기가, 더위와 도시의 매연과 피로에 찌든 폐부를 말끔히 씻어내는 느낌이다. 사찰에 도착하여 방을 배정받았다. 정성 들여 정돈한 깔끔한 민박집 분위기다. 천장과 벽은 피톤치드 향이 나는 편백으로 되어 있어 가만히 앉아 눈감으면 깊은 산속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든다. 벌써 치유가 되는 것 같다. 방문 앞의 ‘달빛 사색 의자’가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끈다. 노란 조끼와 통 넓은 회색 바지로 갈아입고 지정장소로 가니 참가자 십여 명이 모여 있다. 1박 2일 함께할 사람들이다.
첫날 프로그램은 가야산 홍류동계곡 ‘소리길 걷기’다. 계곡 길을 걷다 귀를 기울이면 물소리 새소리 바람 소리 세월 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여 ‘소리길’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산길로 왕복 6킬로면 만만한 거리는 아니다. 출발 후 한동안은 힘들었다. 풍경을 눈에 담고 소리는 귀에 담으며 한참을 걸으니 어느 순간부터 계곡의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가 내 안에 조금씩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면서 그 모든 소리와 풍경에 스며들어 나와 하나가 된 것 같다. 내가 살아왔던 시간, 웃고 울고 때로는 상처받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을 내 삶의 여정들이 떠오르고 지워지고 떠오르고 지워졌다. 6킬로의 여정을 마무리할 즈음 내 인생의 시간을 빠르게 한 바퀴 돌려보았다. 자연의 소리에 내 삶의 소리를 비춰보았다. 나는 순리를 얼마나 따르며 살았나, 긴 시간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여름에는 금강산 옥류천을 닮았다 해서 옥류동으로도 불린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오랜 세월 동안 계곡물에 깎이고 깎인 기암 사이를 흘러내리는 거센 물살 소리가 온갖 번뇌를 씻어주었다. 짙은 피톤치드 향에 내 몸과 마음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소리길 걷기를 마치고 명상을 주관하는 선생이 청진기를 하나씩 나눠주며 심장 소리를 들어보라고 했다.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심장에 청진기를 갖다 댔다. 살아서 숨을 쉬고 있지만 정작 심장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었던가. 청진기를 갖다 대니 고막을 뚫고 나올 정도로 힘찬 심장 소리에 놀랐다. 정말 경이로웠다. 내 몸의 박동은 고막이 터질 정도로 살아서 뛰고 있는데 그 생명을 품은 내 정신은 그동안 늘어지고 나약해졌다니.
이어서 청진기를 나뭇잎 뒷면에 대고 소리를 들어보았다. 집중하여 들어보니 윙~~윙~ 하는 미세한 바람 소리 같은 게 들렸다. 잎이 뿌리에서 물을 빨아올리는 소리였다. 나뭇가지에 청지기를 대고 들어보니 확연하게 슝~~웅 슝~~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온 다음 날은 더 또렷하게 들린다고 한다. 신기해 나무마다 청진기를 대보았다. 와! 하는 감탄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 나왔다. 참가자 모두, 놀이에 빠진 어린아이 같은 순진무구한 모습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는 않지만, 세상 모든 것이 살아있는 생명이구나! 생명 활동을 위해 작은 풀잎 하나에서 거대한 나무까지 최선을 다하는구나. 그걸 느끼게 되니 바위틈에 이끼, 이름 모를 작은 풀 하나까지도 소중하게 여겨졌다. 가슴속 깊이 뜨거운 뭔가가 솟구쳐 올라 나무를 꼭 껴안고 “고맙다, 고마워”라고 속삭여주었다. 크든 작든 모든 생명이 저마다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감사하지 아니한가. 숲길을 걷는 동안 혹시나 소중한 생명이 다칠까 봐 조심하며 환희에 찬 마음으로 걸었다.
숲을 빠져나오니 넓은 공터가 나왔다. 걷기 명상 시간이다. ‘명상’의 한자는 어두울 명(冥) 생각할 상(想)이라는 설명에 잠시 뇌가 정지된 듯 멍해졌다. 눈을 감고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생각한다는 뜻의 명상. 밝을 명(明)이 아니다. 명상이란, 어둠에서 밝음을 찾아가는 것임을.
다들 한 방향으로 서서 뒷짐을 지고 들숨 날숨을 쉬며 천천히 한 걸음씩 걸었다. 쫓기듯 바쁘게 살아온 나는 걸음걸이가 빨라 처음에는 다리가 꼬였다. 어색한 걸음걸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편안해져 향긋한 풀냄새, 시원한 바람 소리도 느낄 수 있었다.
계곡에서 마음에 드는 돌멩이 하나씩을 가지고 와 숲속 정자에 둘러앉았다. 각자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눈을 감고 돌멩이와 하나 되는 명상을 했다. 잡다한 생각들을 모두 쏟아내라고 한다.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족쇄에서 풀려나는 것처럼 조금씩 편안해졌다. 돌멩이에 ‘내 번뇌를 풀어주는 돌’로 이름 지어주고 지금도 보관하고 있다.
저녁 공양을 하고, 스님과의 차담에서 내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가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바쁘다는 것을 의미하는 바쁠 망(忙)자를 보면 잃을 망(亡)에 마음 심(心)이 합쳐져 생긴’ 한자라고 하셨다. 마음을 잃어버려 정신이 없는 상태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내 마음을 돌아볼 시간을 갖지 않았으니 참 여유 없이 살아온 것이다.
깊은 밤 홀로 ‘달빛 사색 의자’에 앉아 지금까지의 삶을 되돌아보았다. 쌓아두기만 했던 묵은 감정과 마음의 소리를 외면하며 살았다. 슬픔, 분노, 미움, 이 모든 것들이 날 이리도 힘들게 하나 보다.
내 삶의 신념이기도 한 ‘자리이타(自利利他)’를 잊고 살았다. 아니다. 실천하려 했지만 상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것인가. 내가 상처를 받았으니 주기도 했을 터. 지금 생각해보니 사람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웃이 없다면 나도 없다. 그들이 있어 나라는 존재가 성립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 것 같다.
마음속에 ‘사색 의자’ 하나 들여놓아야겠다. 달빛 아름다운 밤에 그 의자에 앉아 청진기로 마음 소리를 들으며 사색하는 시간을 갖는 여유를 누려보아야겠다.
첫댓글 김혜정 선생님, 신인상 수상을 축하드립니다. 카페에도 글을 올리게 되어 기쁩니다.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