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년 다해 2월24일 사순 제2주일
[청주] 초막을 지어라.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독서 : 창세 15, 5 - 12. 17 - 18
† 독서 : 필리 3, 17 - 4, 1(또는 3,20-4,1)
† 복음 : 루카 9, 28ㄴ - 36
은혜로운 회개의 여정이 시작된 지도 어느새 열흘이 지나
사순 제2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룩하게
변모하시며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에게 미리 보여
주십니다. 이는 당신의 삶이 수난과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천상 영광의 복이 따름을 알려 주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의 고통에 동참하여 몸소 밀알이
되시고 영광의 열매를 누리신 것을 되새기며 우리 또한
다른 이들을 위한 작은 밀알이 되기로 다짐합시다.
★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별처럼 많은
후손과 넓은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다. 자식 없이 늙어만
가며 나그네살이하던 아브람은 이 약속을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운 가운데서도 믿었다(제1독서).
★ 많은 사람이 이 세상의 것만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원수가
되고 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지상의 것에만 머무를
것이 아니라 천상 영광을 희망하며 하늘의 시민답게 살아가야
한다(제2독서).
★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와 함께 산에 오르신 예수님께서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하셨다.
이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의
신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셨다. 이에 놀란 제자들은 곧이어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며 이러한 물음을 던져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도 이렇게 영광스러운 모습을
갖추셨다면 더 많은 사람이 믿지 않았을까?’, ‘산에서
변모하실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 변모하셨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그 순간
회개하지 않았을까?’
과연 그랬을까요? 어쩌면 모두들 믿기는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었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오늘 복음에 등장한 베드로와
다른 두 제자는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를 보았고,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를 들었으면서도 나중에 예수님을 배반하여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곧 예수님께서 아무리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드러나신다고 해도 그것 자체가 힘을 불어넣어 주지는
않았습니다. 비록 황홀한 체험을 안겨 주셨다고 해도 신앙을
한층 굳건하게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멋진 예수님, 절대적 권능의 예수님,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모습만 보고 사람들이 믿었다면, 그들은 그러한 예수님을
통해 삶의 고통과 역경을 이겨 낼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분 앞에서 진정으로 눈물을 흘리며 죄를 고백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위의 보잘것없는 사람들에게 시선조차
돌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바로 앞 구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와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에는 고통
안에서 당신의 진면목을 발견하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부활하신 뒤의 모습은 철저한
고통과 죽음을 전제합니다. 고통과 죽음이 배제된 영광스러운
모습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매일 미사 -
◈ [청주] 초막을 지어라 / 반영억라파엘 감곡매괴 성모성당
2013년 다해 2월24일 사순 제2주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 루카 9,28ㄴ-36
초막을 지어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지난 주일에
유혹도 은총이라고 말씀 드렸는데 유혹을 많이 받으셨죠? 사순절을
맞아 희생 봉사, 극기 절제의 삶을 살려고 하니까 왜 그렇게 없던
일이 생기는지…그래도 나름대로 절제된 삶을 통해서 기쁨을
간직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번 주간은 베드로가 짓고자 하였던
초막을 지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산에
오르셨습니다. 성경에서 산은 하느님께서 현존 하시는 곳,
하느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그분과의 일치를 나누는
곳을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 내려오셔서 말씀하셨고
하느님의 영광이 시나이 산에 머물러 모세가 사십 주야를 그
산에서 지냈습니다(출애24,15-18.) 그리고 십계판을 받은 곳
(신명5,22)도 산입니다. 엘리야도 호렙산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12제자를 부르신 장소도 산입니다 (루카6,12).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산에 올라야 합니다. 등산을 하라는 말씀입니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이룰 수 있는 곳, 고독한 장소를 찾아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음을 떠나
때때로 침묵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도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성체조배를 한다든지, 피정을 한다든지 고요한 시간을
만들어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갖으라는 말씀입니다.
하루의 시작을 주님의 이름으로 하십니까? 끝맺음에 기도하십니까?
자동차를 운전하면서 묵주기도 하지 말고 별도의 시간을 만들어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자투리 시간에 기도하려 하지 말고
온전히 바치는 시간을 마련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한마디로 얼굴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사람은 나이 40이 되면 얼굴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링컨).고 합니다. 사실 탐욕으로 가득 찬 사람의 얼굴은
독살스런 모습으로 변합니다. 분노로 가득 찬 사람은 살기가 도는
얼굴로, 절망감이 가득 찬 사람은 수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슬픔으로 가득 찬 모습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얼굴에 나타나는 만큼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얼굴이 바뀐 것은 기도하시는 가운데 바뀌었습니다.
나의 얼굴도 기도하는 가운데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가끔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나의 모습은 어떻게 변하고
있는가? 좀 더 거룩하고 빛나는 모습으로,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해야 합니다.
하안주 신부님께서는 시를 쓰셨는데 ‘임쓰신 가시관’ 이라고
있습니다. “이 뒷날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하소서, 이 뒷날 나를
보시고 임 닮았다 하소서. 이 세상 다할 때까지 당신만 따르리라.”
고 하셨습니다(노래 한번 할까요?) 우리도 임이 보시고 날 닮았다.
임 닮았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옷이 하얗게 빛났다는 것은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흰옷을 입습니다. 그것은
거룩함의 상징이고 예수님으로 온 몸을 무장한다는 의미
(로마13,14)를 담고 있습니다. 요한 묵시록을 보면 하느님의
옥좌에 “희고 긴 겉옷을 입은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서
왔느냐?” 는 질문과 함께 그 대답이 나옵니다. “저 사람들은
큰 환난을 겪어낸 사람들이다. 저들은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있고 그분의 성전에서 밤낮으로 그분을 섬기고 있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께서 그들을 덮는 천막이 되어 주실
것이다. …. 하느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묵시7,13-17).
결국 흰옷은 아름답게 빛나는 모습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를 통해 이미 흰옷을 입은 사람이니 만큼 지금
어려움이 있더라도 “모든 눈물을 닦아주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가정에서 사회에서 나의 삶의 자리에서 빛나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아름답고 빛나는
모습을 보여 주신 것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앞두고 영광스러운
모습을 미리 보여 줌으로써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림 없는 믿음을
지키라는 위로였습니다. 우리도 세상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명하셨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나서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여기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저희가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스승님께,
하나는 모세께, 또 하나는 엘리야께 드리겠습니다”(루카9,33).
하고 말하였습니다. 좋은 것을 보았으니 그 자리에 머물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시편에 보면 (“오직하나 주께 빌어 얻고자
하는 것은 한평생 야훼의 집에 산다는 그것, 당신의 성전을
우러러보며 주님의 사랑을 누리는 그것이오니”) “주님께 청하는
것이 하나 있어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며 주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보고 그분 궁전을 눈여겨보는
것이라네”(시편27,4).하며 자신의 갈망을 표현하였습니다.
그분 안에 머물고 싶은 것은 자연스런 바람입니다.
초막을 지어서라도 함께 머물고 싶어 하였는데 초막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거처하시는 초막을
짓기 위해서는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소리가 들려 왔는데
바로 ‘그의 말을 듣는 것’입니다. 누구의 말입니까? “이러한
소리가 울린 뒤에는 예수님만 보였다”(루카9,35). 모세도
엘리야도 사라지고 “예수님만 보였다” 결국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거처, 초막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사는 곳에 지어지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제발, 말 좀 들어라!”했을 때 말 듣는 것이 귀로 듣는 것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들었다는 것은 부모의 뜻대로 하였을 때
비로소 ‘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 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들은 대로 행동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손에 펴들고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기초 삼아 주님의 초막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머물고 싶었던 곳, 그곳을 생각하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들을 이겨낼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우리 동네에는 다른 곳에 비해 기름 값이 저렴한 주유소가
있습니다. 그곳은 운전수가 스스로 주유를 하는 셀프주유소로,
겨우 리터당 1~20원 저렴한 것이 아니라 웬만한 주유소보다
1~200원까지 저렴하니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이용합니다.
그러다보니 근처의 주유소들은 얼마 못가 기름 값을 내리기
시작하더니만, 요즘에는 문제의(?) 셀프주유소보다 딱 10원
비쌉니다. 그렇다면 이제 사람들은 어느 주유소를 이용할까요?
10원이라도 저렴한 셀프주유소를 이용할까요? 아니면 10원
더 내고 주유원이 기름을 넣어주는 편한 곳을 이용할까요?
저는 다른 주유소에서 가격 인하 정책을 써서 이 셀프주유소가
곧 망할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다른 주유소보다
더 잘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유하는 것을 그렇게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 푼이라도 저렴한
셀프주유소를 이용하는 것이지요.
스스로 하는 것과 남이 대신 해주는 것. 과연 어떤 것이 더
행복할까요? 사실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사람은 불행하다고
합니다.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예로 군 생활을 들 수가
있지요. 대한민국 남자라면 의무적으로 군 생활을 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남자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곳이 군대라고
하지요. 그래서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큰
악몽이 다시 군대에 가는 꿈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이 선택한 길은 어려워 보여도 행복해 합니다. 등산을
생각해 보세요. 등산을 싫어하는 사람은 이렇게 말하지요.
‘어차피 다시 내려올 건데 왜 땀 흘려 올라가는 거야?
다리도 아플 텐데....’
바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 때문에 어렵고 힘들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 안에서도 당연히 스스로 선택한
일을 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세상의 유혹은 편하고 쉬운
일을 선택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사순시기가 시작한지도
벌써 2주가 되었습니다. 첫 주에는 우리들의 유혹에 대해서
그리고 이번 주에는 쉽고 편한 것에 안주하려는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라는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산에 가신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거룩하게
변모하십니다. 특히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도 그 자리에 함께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당시 어렵고 힘들게 전교활동
하던 것을 제쳐 두고 이곳에 안주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대표로 말하지요.
“스승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때 하늘에서는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라는 소리가 들렸고, 곧바로 산에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자리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유혹하고 있는 편하고 쉬운 길만을 선택하려는
어리석음을 이제 버려야 할 것입니다. 비록 어렵고 힘든
길이라도 주님의 뜻이 담겨 있기에 우리 스스로 기쁘게
선택할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길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은혜로운 사순시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랑은 사랑스럽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미덕이 아니다(G.K.체스터튼).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인 자유공원. 추워서인지
사람이 없어요.
나를 인정하고 귀하게 여기자.
전에 있던 성당에서 어떤 학생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신부님, 사람들은 저를 미워하는 것 같아요. 집에서도 제게
관심을 갖는 가족이 없고, 또 학교나 성당에서도 저는 늘
혼자에요.”
그런데 저는 이 친구에게 “너는 너를 사랑하지 않니?”라고
물었지요. 사실 남으로부터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스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있어도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어떻습니까? 기쁘지요?
단순히 공짜로 하나 얻었다는 생각 때문에 기쁠까요?
아닙니다. 그보다는 나를 인정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고
보상해 준다면 어떨까요? 저는 오래전부터 제 자신에게 스스로
선물합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제가 좋아하는 책을 줍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잘 지냈어. 그러니까 책 사 준다.’
‘이번 달은 왜 이렇게 형편없이 살았니? 다음 달은 열심히
하라고 선물로 책 사 준다.’
한 달이 지나 책을 받을 때면 기분이 무척 좋아집니다. 비록
제 자신이 저에게 선물을 하는 것이지만, 어떻게든 보상을
받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 보상의 힘으로 한 달을 또 열심히
살자고 스스로 다짐하고 힘을 냅니다.
남이 나를 인정하기보다 내가 나를 인정하고 보상해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 삶에 있어서 가장 귀한 사람은 내가
아닙니까? 내가 나를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다른 누가
나를 귀하게 여기겠습니까?
- 인천 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은갈치 눈동자와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
2013년 다해 2월24일 사순 제2주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 9,28ㄴ-36
은갈치 눈동자와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
당신 수난에 대한 첫 번째 예고 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기 전에 하느님 나라를 볼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 예수님의 말씀이 오늘 타볼산 위에서 실현되고 있습니다.
수석 제자단격인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만을 데리고 타볼산
정상에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깊은 기도 중에 예수님께서는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옷을 하얗게
번쩍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변모 중에 율법을 상징하는 모세와
예언자를 대표하는 엘리야가 나타납니다.
이 특별한 광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잠깐
동안이나마 하느님의 나라가 제자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 안에 깃들어있는 진정한
신성(神性)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제자들이 보고 있는 하느님 나라는 아주 잠깐
동안입니다. 그들은 아주 ‘살짝’ 하느님의 나라를 맛본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와 광채 역시 한시적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치러내셔야 할 수난과 십자가 죽음을
거쳐야 항구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모세와 엘리야와 이야기하고 있었던 중심 대화는 머지않아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겪으셔야 할 일, 고통과 십자가
죽음에 대한 대화였습니다. 지금의 이 변모는 시편의
서곡과도 같은 것입니다. 언젠가 부활과 승천 이후 완전한
변모로 변화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잠깐 동안 맛본 황홀한 하느님
나라에 완전 취해버린 베드로는 지금 이순간의 찬란한
모습을 계속보고 싶은 인간적 욕구로 인해 초막 셋을 짓고
싶어 합니다.
그러한 베드로의 간절한 염원과는 아랑곳하지 않고 즉시
베드로를 휘감은 것은 짙은 구름이었습니다. 영속적인
승리와 영원히 계속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짙은 구름 속을 헤쳐 나가는 일이 아직 남아있음을 암시하는
구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참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은 아직 보류된 상태입니다. 지금 우리 앞에 주어지는 현실은
단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짙은 구름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기꺼이 막막한 현실을 견디는 일이며 여러 가지 부당한
현실이나 고통과 십자가 앞에 침묵하는 일입니다. 언젠가 활짝
갠 하늘이 열릴 그날이 올 때 까지 참고 또 참을 일입니다.
우리네 한평생 빛과 어두움이 언제나 교차합니다. 우리네
인생 하느님 나라의 빛나는 광채와 인간 세상의 비루함이
공존합니다. 우리의 일상은 하느님 나라의 찬란한 영광과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감내해야할 고통이 수시로
반복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원한 생명과 유한한 생명
사이를 매일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 도래할 빛나는 하느님 나라를
꿈꾸며 침묵의 행군을 계속해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타볼산에 오르셔서 간절히 기도하시던
가운데 얼굴이 변하셨습니다. 진심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열렬히 기도할 때 우리의 얼굴도 변화될 것입니다. 기도의
대가였던 성인들의 얼굴은 광채로 빛났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은 충만한 기쁨으로
빛납니다. 그들의 눈빛은 총기와 생명력으로 반짝거립니다.
마치 갓 낚아 올린 싱싱한 은갈치 눈동자처럼 신선합니다.
그러나 기도나 영적생활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에 푹 파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마치 한물
간 고등어 눈동자 같습니다. 초췌하고 무기력합니다.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얼굴입니다.
자주 우리 얼굴을 바라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진지하고도
충실한 기도생활을 통해 반짝 반짝 빛나는 얼굴인가?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얼굴, 대체 세상 언제 끝나나 하는
울적한 얼굴인가, 수시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도 타볼산의 예수님처럼 열렬하고도 진지한 기도를 통해
얼굴이 변화되고 삶이 변화되고 인생관이 변화되는 은총을
맛보는 이번 한주가 되길 바랍니다.
-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묵상 - 살아있는 표징
2013년 다해 2월24일 사순 제2주일
<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 >
복음 : 루카 9, 28ㄴ-36
보통 사순절이 시작하면 저절로 힘든 일이 생겨 노력하지
않아도 고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번 사순절도
저는 장염으로 고생하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조차
받아들이기를 힘겨워하고 있을 때, 저보다 더 큰 고통으로
시작하시는 한 분을 만났습니다.
주일 미사를 끝내고 신자분들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먼저
성당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이 손을
다치셨는지 깁스를 하시고 안수를 청하며 저에게 다가
오셨습니다. 저는 손을 어쩌다 다치셨냐고 일상적으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기계에 두 손가락이 으스러져서 절단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순간 놀라서 안수도, 말도 할 수 없이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형제님이 오히려 웃음을 지어보이시며,
“아니에요, 전 하느님께 감사드려요.”라고 놀란 저를
위로하셨습니다.
“기계에서 손을 빼내고 손가락이 두 개만 잘린 것을 바라보며
바로 하느님께 감사를 드렸어요. 한 손을 다 잃을 수도
있었잖아요.”
저는 눈물이 나오려고 했습니다. ‘만약 나였다면...?’이란
의문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그 신자분께 강론에 당신 이야기를 써도 되느냐고 여쭈어
보고, 신앙생활을 어떻게 해 오시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매일 감사일기를 쓰고, 성경도 꾸준히 읽었는데
얼마 전까지 주춤 하시다가 손이 다치기 전에 굉장히 많이
읽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분들을 ‘살아있는 표징’이라고 합니다. 표징이란 보이지
않는 존재에 대한 가시적 증거를 말하는데, 그 증거가 되기
위해서는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어떻게 저럴 수 있나?’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그 힘이 있는 것입니다.
고정원씨의 예를 들어봅니다. 그분은 자신의 가족의 생명을
무참히 앗아간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의
딸들까지도 아버지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냥 그러는 척 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분이
유영철씨를 자신의 양아들로 삼으며 편지를 보내고
사형폐지 운동 등을 하는 것을 보면서 조금씩 그분의 진심을
믿어가게 되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시고 계시기에 표징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분을 보면서, ‘아! 무언가 있구나!’
라고 보이지 않는 것을 그분을 통해서 조금씩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어딘지 모를 존재에게서 오는 나에게는
없는 ‘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함께 산에 오른 세 사도들에게
하느님 현존의 표징이 되십니다. 왜냐하면 사람이라면 그렇게
희게 빛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표징은 앞으로
보여주실 표징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표징 중 가장 큰 표징은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십자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신들은 대부분 자비와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세상 어떤 신이 그 자비와 사랑의 힘을
보여주었습니까? 하느님이 죽으실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람의
수준으로는 절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랑의 힘’, 바로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하느님이 오늘 타볼산에서 변모한 것과 같이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의자에 편히 앉아있거나 칼을 들고 있거나
저울을 들고 있는 등의 인간의 상상으로 충분히 그려낼 수 있는
분이셨다면 그것은 저에게 어떠한 표징도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람을 위해서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죽임을 당하고 사탄의 세력 속에서 3일 밤낮을
갇혀있어야 했다는 것, 이것이 사람의 수준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가장 완전한 하느님 사랑의 표징인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 즉 표징이
되시기 위해 ‘힘’을 얻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은 타볼산에 오르십니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기도’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때 산에 올라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모세는 구약의 핵심은 율법서인 모세오경을, 엘리야는 예언서를
대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예언서에서 당신에 대해 나와 있는 것을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셨을 때 그들이 빵을 떼어 나누어주시는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듯이, ‘모세와 엘리야’는 ‘성경 전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즉 성경을 통해 당신이 앞으로 당하게 될 ‘Exodos’,
즉 ‘출애굽’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31절을 직역하면,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즉 ’탈출’ 관한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입니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실
때,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도 산다.”라고 하실 때, 그 ‘말씀’이 여기서는 모세와
엘리야로 대변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시기 직전에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강화시키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표징은 ‘힘’이
있어야합니다. 표징에 ‘힘’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곰과 같이 겨울을 나야 하는 동물들은 몸속에 6개월 동안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영양분을 축적합니다. 우리 인생에도
겨울과 같은 어려운 때가 반드시 오게 되어있습니다. 평상시
영양분을 잘 비축해 두었던 사람들은 이 겨울을 잘 견뎌낼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겨울을 제대로 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맙니다. 기도 또한 꼭 절실해서 하기 보다는 앞으로
올 겨울에 대비하는 의미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기도에서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
기도합니다. ‘오늘’이란 뜻은 ‘매일’ 양식을 달라는 것이고, 우리에게
양식은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가 미사 때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에서 보듯이, ‘성경말씀과 성체’로 우리
앞에 현존하십니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 혹은 유령과의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유령은 음식을 먹지 않습니다. 육체가 죽어버렸으니 육체를
살게 하기 위해 굳이 음식을 먹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먹어 보이시며
당신은 육체까지도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영혼이 살아있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말씀을 양식으로
끊임없이 먹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성경을 읽거나 묵상하거나
공부하려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의 영혼은 이미 양식을 먹어야 할
의미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즉 죽은 영혼이란 뜻입니다. 우리는
육체가 살아있어서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하는 것을 알듯이, 우리
영혼을 위해서라도 매일 양식을 먹어야 하는 필요성을 느끼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우리 영혼은 어쩌면
영적 양식을 필요로 하지 않게 죽어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은 것은 힘이 없어서 어떠한 표징도 되지 못합니다.
저는 지금도 기도의 힘을 잘 느낍니다. 강론이나 강의를 할 때,
성체조배를 하고 하는 것과 하지 않고 하는 것과는 비록 내용이
같더라도 결과적으로는 큰 차이를 냅니다. 기도하지 않고 시작한
하루는 말도 실수하고 판단도 잘못 할 때가 많지만 충분히 기도하고
시작한 하루는 영적인 힘을 하루 종일 느끼며 살아가게 됩니다.
저는 영혼이 배고파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에 기도를 하게 됩니다.
말씀도 읽고 묵상하고 성체도 영하고 다른 기도도 합니다. 그리고
영적인 배고픔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제 영혼이 살아있고 힘이
있고 표징이 되고 있다는 증거임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살아있기에
먹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세상은 예수님의 가장 큰 표징을 보고도 믿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손가락이 잘려서 감사기도를 해도 콧방귀를
뀌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살아있는 표징이 되어가면서 내 영혼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행복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힘이 없으면 배고파서 살아갈 수 없는 살아있는 표징들이 됩시다.
- 수원 교구 오산 성당 전 삼용 요셉 신부 - -
◈ [기타] 언뜻언뜻 보여주시는 하느님
2013년 다해 2월24일 사순 제2주일
<예수님게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졌다.>
(루카 9, 28-36)
언뜻언뜻 보여주시는 하느님(루카 9, 28-36)
믿는 이들에게 영원한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여
주시고, 이 세상에서부터 믿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언뜻언뜻 보여주시는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찬미와 영광
받으소서.
이른 새벽에 기도하러 성당에 갔을 때의 일입니다. 제대와
감실쪽이 온통 안개로 뒤덮여서 감실이 제대로 보이질
않았습니다. 성체등만이 비치며 희미하게 감실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한 신자분이 앞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기 때문에 저도 조심스럽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몇 분 지나자 그 안개는 사라졌습니다.
언제나 주님께서는 감실 안에 계시지만, 그 때 문득 주님의
현존을 더 강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신자 분에게 기도 중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을 정도로
그렇게 강한 주님의 현존이었습니다. 그리고 옆에서 바라보았던
저 자신도 깊은 감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에 CD로 된 메주고리예 성모님 메시지를 자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내용은 언제나 “사랑하는 자녀들아!” 하고
시작하고 또 마칠 때는 “내 부름에 응답해주어 고맙다.” 하고
끝을 맺습니다. 처음 들을 때는 내용이 비슷비슷하게 느껴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고, 단어 하나하나에
어마어마한 내용이 담겨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어느 부분에서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기쁨이 될까?” 생각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정말 기도가
기쁨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아, 성모님께서 이래서 기도가
기쁨이 될 때까지 기도하라고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감실 앞에서 성체조배나 묵주기도를 바칠 때 가끔
특별한 체험을 합니다. 기도를 하다보면 마음의 평화가
느껴지고, 어떻게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과 주님의 현존이
내 가슴과 마음에 느껴집니다. 그럴 때 그 감동에 젖어서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자비로우신 하느님께서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 언뜻 언뜻 주시는 선물처럼 생각됩니다.
그러한 체험들은 하느님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되고,
하느님 나라를 더 열망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리하여
세상에 발을 딛고 살지만 언제나 마음과 희망은 하느님의
뜻, 하늘나라를 향하게 하여줍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구세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합니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굳건히 서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라고 호소합니다.
우리의 영이 깨어 있으면 영적인 기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가 자신의 배를 하느님으로 알고 육체적인
기쁨에 빠져들게 되면 세상 것에서 오는 기쁨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오감을 자극하는 TV, 영화, 컴퓨터 등과
세속적인 취미나 스포츠에 온통 관심이 다 쏠리게 됩니다.
오관을 극복하기 위해서 단식을 하고, 눈을 자극하는
전파매체를 멀리하며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께 달려갑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나라의 시민으로서, 아브라함처럼,
사도들처럼 마침내 영광스러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아멘.
- 희망 신부님의 묵상 글 -
◈ [서울] 안 믿으면 불안하고 믿으면 편하지요.
2013년 다해 2월24일 사순 제2주일
안 믿으면 불안하고 믿으면 편하지요.
하늘의 구름 속에서 ‘너희는 예수를 믿어라! 영원히 살 것이다!’
라고사람들이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매일 소리 난다고 상상해
봅시다.그 말이 진짜라면 인간들은 자유가 없어지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이런 소리가 하늘에서 안 들리니
안심하십시오. 그래서 하늘 무서워 떨지 않고 자유를 만끽하며
오늘 이렇게 삽니다. 2000년 전에 한 번 들렸다는데 안 믿으면
불안하고 믿으면 편하지요.
“이어 구름 속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났다.(루카 9,35)”
- 이기정 사도 요한 신부님의 묵상 글 -
◈ [기타] 2013년 다해 2월24일 사순 제2주일 복음묵상
나는 힘을 달라고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나를 강하게 만드는 어려움들을 주셨다.
나는 지혜를 달라고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주셨다.
나는 부유하게 해달라고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일할 수 있는 체력과 두뇌를 주셨다.
나는 용기를 달라고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넘어서야 할 위험들을 주셨다.
나는 인내를 달라고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들에 처하게 하셨다.
나는 사랑을 청했으나,
하느님께서는 도와야 할 문제 있는 이들을 주셨다.
나는 은혜를 청했지만,
하느님께서는 기회들을 주셨다.
내가 원하는 것을 아무 것도 받지 못했지만,
내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받았다.
나의 기도는 모두 응답을 받은 것이다.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루카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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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라는 말을 모르는 이는 없다. ... 하지만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 시원하게 대답하는 이는 적다. 기도의 필요성에 대해서
모르는 이들도 없다. 하지만 기도가 쉽다고 하는 이는 드물다.
오늘은 기도에 대해 간단한 묵상을 시도해 본다..
기도란 무엇인가? 우리는 쉽게 기도라 하면,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을 꺼내어 말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청하는 것을 기도라고 생각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가장 쉽게 생각한 기도에 대한 이해이다.
하지만, 정확한 대답은 아닌 듯싶다. 그 실마리를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찾아보자.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그렇다. 기도란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그분께 귀를 기울이는 것을 기도라 한다. 모든 것을 우리가 청하기
전에 다 아시는 분이 하느님이시라 했다. 이것 저것 말하지 않아도
우리가 그분께 왜 무릎을 꿇고 있는 지 다 알고 계신다.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
(마태오6,8)
우리는 그분께 얼마나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아니 듣고자 하는 마음은 얼마나 있었던가?
마음이 시끄러워서는 안 된다. 고통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늘 어떤 상황에서도 조용한 마음으로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뜻에 귀를 기울이려는 우리여야 한다.
그분께서는 기도하는 마음을 절대로 외면하시지 않는다.
-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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