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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사랑, 사랑
단지흥은 급히 피하면서 손가락을 치켜 세우고 사막 옥수 노파의 허점을 노렸다. 그러나 일순 그는 눈을 치뜨며 바위처럼 굳어져 한 곳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사막 옥수 뒤에 죽 늘어서서 구경하는 사람들 속에서 한 여인의 정든 얼굴을 얼핏 보았던 것이다. 단지흥이 멍청하니 서 있자 사막 옥수는 기회를 놓칠세라 용두 지팡이를 번쩍 쳐들었다. 그래도 단지흥은 눈 한 번 깜빡 않고 그 여인만 바라다보았다. 선비가 다급히 소리를 쳤다.
"폐하! 폐하!"
하지만 단지흥은 여전히 못박힌 듯 서 있을 뿐이었다. 사막 옥수의 용두 지팡이는 사정없이 단지흥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휙 바람소리가 일며 그 정다운 여인이 몸을 날려 노파를 막아 섰다.
"향녀, 왜 저 녀석 편을 드는 게냐?"
사막 옥수는 두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내질렀다. 그러나 향녀는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사막 옥수님, 죄송스럽지만 저는 이 단황 나으리와 약속했던 일이 있어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제게 좀 자리를 내주세요."
"얼빠진 년! 저따위 얼간이 같은 놈하고 약속은 무슨 약속! 보아하니 네 년이 저 녀석에게 치근대려고 그러는 모양인데 그러다간 끝이 좋지 못햇. 계집에겐 사내를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구."
그러나 등아는 아랑곳 않고 단지흥을 정겹게 쳐다보았다.
"단황 나으리, 저하고 한 약속은 어떻게 됐죠?"
단지흥은 등아가 일부러 저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약속이란 기실 향녀들의 비밀을 발설하지 않겠다는 것이지만 그에 대해서 이제 와 그녀가 왈가왈부할 리는 없는 것이다. 단지흥은 어색하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런 자리에서 등아를 만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었다. 그는 대답을 늦잡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등아, 난 그대와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소! 그러나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오!"
대환희 보살은 내내 입을 다물고 고소하게 지켜 보다가 이윽고 살살 눈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아유, 단황 나으리 역시 고운 여자한테는 오금을 못 쓰는구려. 이봐 향녀, 저렇게 살뜰하고 곱상한 사내는 아예 허리춤에 차고 다녀야 해! 그래야 남한테 앗길 염려도 없고 또 필요할 시에는 수시로 시중도 들게 할 수 있지!"
두 사람은 보살의 말에는 아랑곳 않고 계속 마주보고만 있었다. 단지흥은 등아를 대하자 다시금 연민이 솟구쳤다. 그는 결코 등아를 해치거나 시시비비를 가려 시끄럽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 일은 이미 끝난 일이고…… 무엇이든 새로운 요구가 있다면 어디 말해 보시오!"
향녀는 입을 달싹거릴 뿐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대환희 보살이 발을 동동 구르며 악에 받쳐 소리소리 내질렀다.
"그따위 사내한테 빠져 사정을 봐 주는 거야 뭐야, 향녀? 저 놈 은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허풍선이야, 허풍선이! 사정없이 뜯어놓지 못하고 왜 그러고 섰는 거냐구?"
대환희 보살은 두 남녀가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 자기가 어부지리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내심 고소해 하고 있었는데 의외로 향녀가 뜨뜻미지근하게 나오자 속이 바싹바싹 탔다. 그러나 향녀는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다소곳이 고개를 숙인 채 한참 무슨 생각을 하는 듯싶더니 문득 고개를 들었다.
"여러 사람들 앞에서 그 말을 하고 싶진 않아요. 훗날을 기약하지요! 전 이제 더 이상 여기서 머뭇거릴 필요가 없으니 그만 가보겠어요."
향녀는 적이 쌀쌀맞게 한마디하더니 홱 몸을 돌려 그대로 나가 버렸다. 그녀의 수하들도 묵묵히 뒤따랐다. 그러나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사막 옥수도 비웃음을 날리며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보아하니 단지흥과 향녀가 보통 사이가 아닌 듯한데 괜스레 나섰다가는 향녀한테든 단지흥한테든 봉변을 당하기 십상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단지흥은 머리를 숙인 채 그대로 있었다. 그는 잠시 마음을 진정하고는 홱 고개를 들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요즘 대리국 경내에서 연달아 아이들이 실종되는 통에 백성들이 아우성을 치고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소. 한데 이, 이렇게 통째로 삶아서……. 당신들은 대체 이 불쌍한 애들의 부모들이 얼마나 애타게 자식을 부르면서 통곡하고 있는지 알기나 아시오?"
좌중은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얼굴에 모닥불을 뒤집어쓴 듯 즉시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대환희 보살은 쓴웃음을 지으면서 단박에 대들었다.
"이보시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흉본다더니 정말 그 말이 하나도 그른 데가 없구먼요.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보다 못하게 여기면서 무수한 무림 호걸들을 잡아죽인 자가 그래 당신이 아니란 말이오? 황족이라고 뻐겨대면서 의지가지없는 백성들을 너무 괴롭히지 말란 말예요. 백성을 멀리하면 나라가 망하는 법이에요!"
"대환희 보살, 뜬금없이 그건 대체 무슨 소리요? 그따위 허튼수작으로 생사람 잡지 마시오. 오늘은 내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친히 나선즉, 결단코 보응을 받게 될 것이오!"
대환희 보살은 웃음보를 터뜨리며 바닥에 쓰러진 채 신음하고 있는 운풍 노인을 손가락질하며 비아냥거렸다.
"저 영감태기도 날더러 보응을 받을 것이라고 악다구니를 퍼부었지만 결국은 저절로 쓰러져 저 지경이오. 단황 나으리도 이 보살이 성을 내기 전에 어서 점잖게 물러가는 편이 좋을 거예요."
단지흥은 대뜸 운풍 노인에게로 다가가 쭈그리고 앉으면서 노인을 부축해 앉혔다.
"노옹, 저는 오래 전부터 노옹의 함자를 들어 왔습니다. 저 악귀같은 여인과 맞서시다가 욕을 보셨군요. 어서 몸을 추스르십시오!"
운풍 노인은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어서는 가쁜 숨을 몰아 쉬며 한마디, 한마디 겨우 더듬거렸다.
"단황 나으리, 저 악마 같은 년을…… 죽여…… 불쌍한 애들의 원을, 원을……."
운풍 노인은 끝내 말을 못 맺고 그예 숨지고 말았다. 단지흥은 그를 조용히 눕히고 일어섰다. 그의 두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이 요망스러운 계집년! 왜 이다지도 참혹하게 사람들을 죽인단 말이냐? 독약을 처먹고 죽어야 할 년은 바로 네 년이다!"
"허, 실없는 소리! 내가 왜 죽어? 뭣 땜에? 난 오래오래 살아서 천하 무림의 제일인자가 될 것이니 그때까지 천만 다행으로 목숨을 건진다면 두고 보거라!"
대환희 보살은 바싹바싹 약을 올렸다. 단지흥은 얼른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대 시위가 있을 뿐이었다. 그는 그들에게 의미심장하게 눈길을 던졌다. 그러자 네 사람은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살과 그녀의 수하들을 가차없이 죽여 버리자는 뜻이었다.
선비가 곧 큰소리로 외쳤다.
"이제 곧 단황 나으리께서는 무림의 명성에 먹칠을 하고 갖은 악행을 자행하는 대리국의 잡인들과 망나니들을 사정없이 처단할 것이오. 저 악독한 년에게 속아서 이 석량동으로 들어온 분들은 냉큼 저쪽으로 비켜서 주시오, 괜히 화를 당하지 말고!"
사람들은 황급히 한쪽으로 물러섰다. 그들 중에는 본디부터 심보가 고약하고 지독한 대환희 보살을 미워하는 자가 많았다. 단지흥이 급기야 그녀를 죽여 버리겠다고 하자 사람들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여차직하면 단지흥을 도와 합심하여 대환희 보살을 처치하겠다고 작심하는 것이었다.
단지흥은 준엄하게 호통을 내질렀다.
"잘 듣거라, 설사 저 보살 년의 수하라 해도 회개하고 자책하는자는 죄를 사하리라!"
단지흥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한 팔을 번쩍 쳐들어 손가락을 뻗쳤다. 무서운 힘이 뻗쳐 나갔다. 펑 소리가 진동하더니 맞은편 석벽에 휑하니 구멍이 뚫렸다. 좌중은 그만 입이 딱 벌어졌다. 저 무서운 힘이 사람 가슴에 닿으면 도저히 살아 남지 못할 터였다.
대환희 보살은 펄펄 뛰면서 악을 썼다.
"단황 나으리, 그따위 재주를 피운다고 누가 수그러들 줄 아는가? 이젠 내 솜씨를 보거라!"
대환희 보살은 느닷없이 앙칼지게 휘파람을 휙 불었다. 그러자 아까 음식을 나르던 사내들이 한 무더기로 달려들었다. 하나같이 눈동자가 게슴츠레해서는 꼭 술 취한 사람마냥 혹은 검을 뽑아 들고, 혹은 부엌에서 쓰던 시퍼런 식도며 쇠스랑을 거머쥐고는 물불 안 가릴 기세로 비칠거리고 있었다. 필시 무슨 극독한 약에 중독돼 환각 상태에 빠져 있음에 틀림없었다. 선비가 다급히 귀띔했다.
"조심하십시오. 아마도 놈들이 미혼탕을 퍼마신 듯하옵니다!"
사내들은 하나같이 낯에 울긋불긋 연지 곤지를 바른 것이 우스꽝스러운 몰골들이었지만 힘들은 장사인 것 같고 기세가 여간 사납지 않았다. 그들은 함성을 지르면서 삽시간에 단지흥 일행을 에워싸더니 사정없이 쇠스랑을 내지르고 칼을 휘둘러댔다. 단지흥 일행은 서로 등을 맞대고 서서 달려드는 사내들을 쳐 눕혔다.
그렇게 밥 한사발 먹을 동안이나 싸우고 나니 보살의 수하 사내들은 대여섯이나 넘어갔다. 그때 돌연 기분 나쁜 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단지흥이 얼핏 바라보니 충피가 낄낄거리며 사람들 속을 새앙쥐마냥 헤집고 다니면서 빨리 손을 써 달라고 아양을 떨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거개가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심지어는 사막 옥수마저도 팔짱을 낀 채 그저 관망하고만 있었다.
그때 문득 석량동 안에 화하는 소리가 차 넘치면서 음산한 기운이 돌았다. 사람들은 흠칫 놀라 일제히 동굴 어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동굴 어귀에는 어디서 왔는지 수많은 독사들이 기어 들어와 대가리를 쳐들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대환희 보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쾌재를 불렀다.
"아이고 어쩌나, 대리국의 호걸이요, 그 무슨 남제랍시고 거들먹거리던 양반이 이제 곧 독사의 밥이 되게 됐군요!"
독사 떼는 솨솨 음산한 소리를 내면서 곧추 굴 안으로 기어 들더니 대환희 보살네 패거리들을 살짝 에돌아 곧바로 단지흥 일행 쪽으로 기어와 혀를 날름거렸다. 그렇게 되자 단지흥 일행은 흡사 활활 타오르는 들불에 갇힌 격이 되었다.
충피가 톡 끼여들었다.
"단황 나으리, 독사 밥이 될 텐가, 곱게 사죄를 할 텐가?"
단지흥은 코대답도 않고 잽싸게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휙 칼바람이 일면서 독사 서너 마리가 대번에 뭉텅뭉텅 동강이 났다. 비릿한 냄새가 확 풍겼다. 그러나 독사들은 비린내를 맡자 더욱 기승을 부리면서 우글우글 몰려들었다. 그중 한 놈이 농부의 허리를 휘감고 올라가 그의 팔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충피는 팔짝팔짝 뛰어오르며 손뼉을 쳤다.
"어허, 이젠 끝장이다, 끝장! 골탕 좀 먹어 봐라!"
단지흥은 화급히 소리쳤다.
"모조리 요절을 내라!"
그 말을 신호로 단지흥 일행은 일제히 지풍을 날렸다. 그러자 독사들은 추풍 낙엽처럼 무리로 동강이 나서 널브러졌다.
시간이 갈수록 연지 곤지를 처바른 사내들과 뚱뚱보 여인들의 얼굴이 험상궂게 일그러졌다. 단지흥의 일양지가 이토록 위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독사의 허리가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것을 보면 미상불 칼날도 무색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독사들은 수천 마리가 넘는지라 마치 선발대가 넘어지면 후발대가 속속 돌진해 나가듯 한 형상으로 계속 혀를 날름거리며 달려들었다. 단지흥 일행도 역시 쉴새없이 지풍을 내쳤다. 얼마나 힘차게 지풍을 날렸는지 바닥엔 깊숙이 웅덩이가 팼고 그들은 웅덩이 안에 갇힌 듯한 형상이 되었다. 독사들이 웅덩이 턱으로 대가리를 기웃거리는 족족 그들은 일양지를 뻗쳤으나, 그들의 형세는 꼭독 안엔 든 쥐 꼴이었다.
대환희 보살은 그제야 얼굴이 펴지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단황 나으리, 이젠 함정에 빠진 꼴이나 다름없는 신세가 됐군요. 이제라도 사죄를 하면 용서해 주리다."
단지흥은 잠자코 고개를 숙였다. 눈으로는 마음을, 마음으로는 땅을 보면서 그는 조용히 삼라만상을 껴안았다. 그러자 세상의 모들 것이 공(空)으로 변하는 것이었다. 네 시위 역시 그가 하는 대로 고개를 숙였다. 네 사람도 잠시 모든 사념에서 벗어나 정신을 한데 집중시켰다. 그리고는 이내 다지 고개를 치켜 들고 매섭게 일양지를 팍팍팍 날렸다. 이상 야릇한 섬광이 번쩍이면서 독사들이 무더기로 나뒹굴었다. 매캐하고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렇게 일진광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지 한 시간쯤 흘렀을 때, 돌연 독사도 눈에 보이지 않고 고요히 정적이 감돌았다. 그쯤 되자 웅덩이도 꽤 깊이 파였는지라 밖이 잘 내다보이지 않았다. 농부가 선뜻 나서서 웅덩이 밖으로 조심스레 머리를 내밀었다. 그랬다가는 그만 진저리를 치며 도로 풀썩 주저앉았다.
"아이구 저게 뭐예요. 독사 떼는 온데간데없고 이젠 난데없이 독충들이 스멀스멀 기어오고 있네요!"
그 소리에 선비도 슬그머니 일어나 내다보았다. 그 역시 기겁을 하며 비명을 내질렀다.
"저런! 무지무지하게 큰 왕지네들이 새까맣게 몰려와요!"
단지흥은 겉으로는 추호도 흔들림이 없었으나 내심으로는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왕지네는 독사와는 다르다. 왕지네는 그야말로 미물에 지나지 않아 아무리 죽이고 죽여도 겁을 내지 않고 달려들어 물어뜯는데 그 독만큼은 독사 못지않게 독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한데 한두 마리도 아니고 몇 천, 몇 만 마리가 땅바닥을 새까맣게 뒤덮고 달려들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단지흥이 다급히 소리쳤다.
"빨리, 빨리 뛰쳐나가야 해!"
하지만 어디로, 어떻게 뛰쳐나간단 말인가. 아무런 방도가 없었다. 어느새 왕지네 떼는 웅덩이로 내려와 속속 일행에게로 기어오더니 온몸에 달라붙어 느물거렸다. 도무지 떨어뜨릴 수도 없고 막상 떨어뜨린다 해도 다시금 지겹게 달라붙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어디선가 단아한 학 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마치 산호채로 백옥을 두드리는 듯싶은, 그렇게 청아한 소리였다.
사람들은 일제히 동굴 어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여섯 마리의 학이 고운 날개를 유유히 펴고 굴 안으로 곧장 날아 들어왔다. 그뿐 아니었다. 뒤미처 또 대여섯 마리의 독수리가 돛처럼 큰 깃을 확 펴고 날아 들어와 허공을 빙빙 날았다. 이 독수리들은 하나같이 정수리가 벗겨진 민대가리였는데 그중 한 놈의 잔등 위에 예쁜 처녀애가 함박웃음을 머금고 앉아 있었다. 그 독수리는 곧추 단지흥 일행이 들어 있는 웅덩이로 날아갔다. 독수리 등에 앉은 처녀는 생글생글
웃으며 대뜸 단지흥에게 물었다. 자세히 보니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는데 부끄러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아니, 할머니는 어디 계시죠?"
단지흥은 일순 어리벙벙해졌다. 할머니라니 뉘를 찾는 것인가. 이 처녀는 누굴까, 단지흥은 영문을 몰라 두 눈을 슴벅거릴 뿐이었다. 그러나 선비는 이 처녀가 숙녀동 굴 안에서 뱀을 부리던 그 처녀임을 대번에 알아보고는 알은체를 했다.
"아이구, 요 깜찍한 계집애야, 여기는 웬일이냐?"
하지만 처녀애는 생글생글 웃을 뿐 선비의 말에는 가타부타 대꾸를 않고 대환희 보살 앞에서 우쭐대는 충피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충피, 이 박쥐 같은 놈아, 석동에서 동주 노릇이나 착실히 할거지 왜 여기 와서 대환희 보살과 치근덕거리며 맞장구를 치는 게냐? 아마 죽고 싶은 모양이지?"
충피는 언짢은 기색으로 투덜거렸다.
"요 얄미운 계집애야, 영고 아씨도 이미 숙녀동을 떠나간 마당에 중뿔나게 왜 떠들어대는 게냐? 남의 일에 참견 말고 썩 꺼져!"
"무슨 소리! 이왕에 내 눈으로 본 이상 그냥 스쳐 지날 수는 없어."
"야, 이 싱거운 계집년아! 여기서 싸우든 말든 너의 숙녀동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괜히 참견 말고 어서 꺼지라니깐!"
"쳇, 시답잖은 소리 집어치워라! 가고 안 가고는 내 맘이다! 아무튼 고맙게시리 우리 독수리와 학들의 먹잇감으로 왕지네까지 몰고 오시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정말 감사해. 호호호……."
"조그만 계집애가 말이 많구나! 오늘 네 년만 오지 않았다면 저 황제입네 하는 놈 코가 석 자는 빠질 텐데……. 어서 썩 물러가지 못햇!"
대환희 보살은 충피와 처녀애가 수작을 부리는 걸 보고는 가슴이 뜨끔했다. 아마도 이 발가숭이 계집애는 충피가 끌어들인 왕지네를 쉽사리 요절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능구렁이 같은 대환희 보살은 살살 눈웃음을 치며 사뭇 정겹게 계집애에게 말을 걸었다.
"얘야, 대관절 넌 사내애냐, 계집애냐?"
계집애는 야광주같이 빛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되받아쳤다.
"참 바보 멍텅구리로군. 그래 내가 계집애인 줄도 모르오?"
"아무리 보아도 계집애 같진 않구나. 계집애라면 어떻게 그런 모양새를 할 수 있겠느냐?"
"내 모양새가 어때서?"
"이 철딱서니없는 것아? 정녕 여자라면 사타구니와 젖무덤쯤은 가리고 다녀야지. 이 환한 대낮에 그게 무슨 꼴이냐!"
대환희 보살은 한 손으로 자기의 가슴과 엉덩이, 심지어 사타구니까지 징글맞게 척척 짚어 보이며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계집애는 두 눈을 휘둥그래 뜨고 물었다.
"아니, 뭐 그런 데를 다 드러낸다고 감기에라도 걸리나, 뭐?"
그러자 대환희 보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앙천대소를 했다. 뚱뚱보 여인들과 괴상망측한 차림새로 나선 사내들도 덩달아 음탕하게 웃어댔다. 사람들도 모두 눈앞의 광경에 얼이 빠져 있다가 그 말에는 비실비실 웃음을 흘렸다.
계집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단지흥을 쳐다보았다.
"단황 나으리, 저 보살의 말이 옳은가요?"
단지흥은 이 철없는 처녀에게 딱히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좀전에 충피의 말을 듣고 이 계집아이가 바로 숙녀동 동굴에서 자기를 골탕먹인 그 아이라는 걸 알아차렸었다. 어찌 됐든 숙녀동에서는 저렇듯 벌거벗고 다녀도 누구 하나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지만 바깥 세상에서야 통하지 않는 법이다.
그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일깨워 주었다.
"옷은 입어야 하는 게지."
"춥지도 않은데 공연히 옷을 입을 건 뭐예요?"
단지흥은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아니 어쩐지 세상물정도 모르고 남녀유별도 모르는 이 천진한 계집애가 얼핏 부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계집애는 그따위 쓸데없는 시비거리는 싹 걷어치우고 생긋 웃으면서 물었다.
"우리 할머닌 잘 지내시겠지요?"
단지흥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우리 할머니는 그다지 즐겁지는 못할 거예요. 숙녀동에 계실 땐 할머니 말 한마디면 누구나 다 꼼짝못했거든요. 한데 듣자니까 단황 나으리는 무슨 일이든 혼자 독단을 한다면서요? 어쩌면 그렇게 무지막지할 수가 있어요? 드문드문 우리 영고 할머니 말씀도 들어줘야지요, 뭐!"
계집애는 곱게 눈을 흘기며 종알거렸다. 단지흥은 그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세속의 티 하나 묻지 않은 이 발가숭이 계집애가 귀엽기만 했다.
대환희 보살은 어떻게든 이 처녀를 쫓아내려고 자꾸만 트집을 잡으며 또 걸고 넘어졌다.
"이 망측한 계집애야, 여기 이렇게 숱한 남정네들이 보고 있는데 정녕 부끄럽지 않다는 게냐?"
"내가 부끄러울 게 뭐야? 무예를 비겨도 보살한테 질 것이 없는데."
처녀는 픽 웃으며 대환희 보살을 노려보았다. 그쯤 되자 보살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처녀는 여전히 독수리 등에 올라앉아 대뜸 당돌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보살, 이 단황 어르신은 우리 숙녀동 동주셨던 영고 할머니의 서방님 되시는 분이야. 그러니 잔말 말고 놓아주란 말야. 내 말 안 듣고 계속 이렇게 고생을 시키면 내 그냥 보고만 있진 않을 테니깐!"
단지흥과 네 시위는 느물느물 기어오르는 왕지네들을 조심조심 떨어뜨리느라고 비지땀을 빼고 있었다.
대환희 보살은 능글맞게 웃으며 이죽댔다.
"그래 네 따위가 어쩔 셈이냐?"
"좋아 기어코 놓아주지 않고 나와 맞서겠다면 내 솜씨를 보여 주는 수밖에!"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휘익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계집애의 주위에 깃을 가다듬고 조용히 앉아 있던 학과 독수리들이 불현듯 무섭게 날아올라 무시로 땅에 내리꽂히며 왕지네들을 사정없이 쪼아먹기 시작했다. 아무리 지독한 왕지네라도 학과 독수리 앞에서는 맛좋은 먹이에 지나지 않았다. 학과 독수리들은 순식간에 왕지네들을 몽땅 먹어 없앴다.
그러자 처녀는 득의양양하게 충피를 내려다보았다.
"충피, 이 못난 녀석아! 네 놈은 그래 기껏 오복을 가지고 우쭐대느냐? 어떠냐, 나에게는 네 그 신주 단지 같은 독충들을 다 잡아먹을 수 있는 학과 독수리들이 있다. 이래도 마냥 독충을 내몰셈이냐?"
"요 괘씸한 계집년, 왜 번번이 나를 걸고 넘어지는 거냐? 내 언제고 너희네 숙녀동을 사정없이 짓뭉개 놓고 말리라!"
충피는 꽥 소리를 지르더니 한 마리 딱정벌레처럼 또르르 달려와 주먹을 쥐고 그녀에게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자 독수리들이 즉시로 퍼드덕 달려들어 그의 팔소매를 물어뜯고 머리를 쪼아댔다. 그는 급히 두 손으로 얼굴을 싸쥐고 달팽이처럼 몸을 오므렸다.
그 처녀는 손뼉을 치며 깔깔거렸다.
"아이고, 멋없어라. 난쟁이가 꼭 팽이처럼 잘도 도는구나!"
그러면서 그녀는 휘파람을 불어 독수리들을 물렸다. 독수리들이 물러서자 충피는 볼이 잔뜩 부어 퉁명스레 내뱉었다.
"요 앙큼한 것! 언제고 네 년을 잡으면 가만 안 둘 테다!"
"너 따위 난쟁이가 무슨 재간으로 날 가만 안 둔단 말이냐? 네놈이 날 때릴 수가 있나, 감히 욕할 수가 있나? 네 놈은 아무 재간도 없는 주제에 날 어떻게 하겠다고 그래?"
충피는 울상이 되어서는 꿀 먹은 벙어리마냥 입을 꼭 다물고 그녀를 빤히 노려볼 뿐이었다.
대리국은 중원 땅에 있는 나라들과는 어느 모로 보나 판이하게 달랐다. 대리국 황궁만 보더라도 비록 고래등 같은 집들이 들어서 있긴 하지만 우람한 성벽에 둘러싸인 으리으리한 중원의 황궁과는 비교도 안 되게 그저 재물이나 권세깨나 있는 벼슬아치들의 장원을 방불케 했다. 뿐만 아니라 황족들 사이에는 중원에서처럼 까다롭게 틀을 차리고 위엄을 부리는 법이 없고 흔히들 통쾌히 마음을 주고받으며 서로 무림없이 지내고 있었다. 다만 한 사람, 영고에게 만큼은 그
런 법도마저도 짐스럽기 그지 없었다.
주백통은 더욱이 황제의 손님으로 대리국 황궁에 온 이후 아무런 구속도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었다. 그는 가끔 종남산에 있을 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기분이 언짢았다. 그는 종남산의 무림 형제들 가운데서 지위가 아주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전진파의 계율은 엄격한 편이라 왕중양에게는 깍듯이 사형이라 불러야 했고 그런가 하면 사질(師姪)들 앞에서는 본의 아니게 거드름을 피우고 위엄을 부려야 했다. 주백통은 본디 솔직한 성품이라 위계질서가 분명한 종남산 생활
에 진절머리가 났다. 더욱이 자기를 추어올리며 아첨을 떠는 사제, 사질 들을 대할 때는 정녕 입이 써서 참을 수가 없었다. 한데 실로 구속이 없는 이 대리국은 얼마나 살기 좋은가!
주백통은 이 대리에서 영고에게 검술이나 가르치며 한가로이 소일하는 것이 못내 흥에 겨웠다. 하지만 이따금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절로 혀를 내두르게 되는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종남산에서는 누구도 선뜻 제자로 받아 주지 않았지 않은가. 무예를 배워 달라고 재삼 간청하는 이도 허다했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둘러대 그때마다 번번이 거절했던 것이다. 한데 대리국에 온 후부터는 자진해서 영고에게 검술을 배워 주게 되었고 또 그러면서 그럴 수 없이 재미
를 느끼고 있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하루는 영고의 침실 앞에서 검술을 배워 주다가 잠시 쉬게 되었다. 영고가 주백통을 쳐다보며 느닷없이 물었다.
"지금 제가 배우고 있는 전진 검법과 일양지를 비기면 어느쪽이 더 셀까요?"
"딱히 어느쪽이 세다고는 말할 수 없을 거요. 아마 비슷비슷하겠지."
주백통은 그다지 자신이 없어 대강 얼버무렸다. 그러나 영고가 방실 웃으면서 엉뚱하게 되받았다.
"전진 검법으로 일양지를 누를 수 있다니 이젠 됐어요!"
"뭐가 됐단 말이오?"
영고는 아무 말 없이 생긋 웃어 보일 뿐이었다. 사실 영고는 내심 단지흥이 은근히 미워지던 참이었다. 보기와는 달리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조만간 일양지를 누를 수 있는 무예를 배워 단지흥의 기를 꺾어 놓고야 말리라고 벼르고 있던 터였다.
주백통이 그러한 영고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다. 그는 지나가는 말투로 혼자 중얼거렸다.
"허 참, 종남산에 있을 땐 난 한 명도 제자를 받아 주지 않았었는데……."
그 말에 영고는 깔깔 웃어대다가 깜찍하게 대꾸했다.
"뭣 때문에 제자를 받아 주지 않았는지 다 알 만해요. 혹시 총명한 제자를 받아 두었다가 장차 사부의 무예를 뛰어넘는다면 망신살이 뻗칠까 봐 그랬지요?"
그러더니 그녀는 허리를 잡고 깔깔 웃어댔다. 웃느라고 그녀가 몸을 들썩거릴 때마다 봉곳한 젖]가슴이 탐스럽게 오르내렸다. 주백통은 슬그머니 눈길을 피하며 혼이 나간 듯 멍청히 서 있었다. 웬일인지 그때 그 대들보 위에서 보았던 그녀의 알몸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는 한참 만에야 한마디 내뱉었다.
"웃긴 왜 웃소?"
그러자 영고는 더욱 요란스럽게 웃어댔다. 저고리가 찢어질 듯 팽팽히 부풀어오른 그 몽실몽실한 젖가슴이 마치 손끝에 닿는 듯 해서 그는 사정없이 손이 근질거렸다. 일순 자기도 모르게 온몸으로 짜릿하게 그 무엇이 파고드는 것 같았다. 그는 홀린 듯이 영고의 가슴만을 건너다보면서 투덜거렸다.
"허 참,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보군, 실없이 웃기만 하는 걸 보니……."
기실 주백통은 여자의 몸을 한 번도 범해 보지 못한 동정남이요, 하룻밤 풋내기 사랑도 겪어 보지 못한 말 그대로 숫총각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이상하게도 영고와 함께 있게만 되면 괜스레 뿌듯하고 가끔 자기도 모르게 그녀의 아리따운 몸매를 흘끔흘끔 훔쳐보며 마냥 가슴이 뛰는 것이었다.
주백통은 홀린 듯이 영고의 가슴팍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문득 영고가 살며시 웃으며 수수께끼 같은 물음을 내놓았다.
"남자와 여자가 무엇이 다른지 아세요?"
주백통은 얼떨떨하니 대답이 없었다. 그러자 영고는 능금알같이 얼굴이 상기되어 고개를 숙이고 가볍게 키득거렸다. 영리하고 눈치 빠른 영고는 진작에 주백통이 자기에게 홀딱 반했다는 걸 읽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싫지 않았다. 주백통은 단지흥과는 영판 다른 사내였다. 그는 솔직하고 쾌활하며 남을 속이거나 억지를 부릴 줄 모르는 순박한 사내였다. 더욱이 자기처럼 번잡하고 까다로운 예절에는 딱 질색이고 속세의 예의 도덕을 도외시하는 그가 그녀 역시 새록새
록 좋아지는 것이었다.
영고는 주백통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길에선 애교가 흘러 넘쳤다. 주백통도 괜히 설레는 가슴을 억누르며 넋을 잃고 마주보았다. 그러나 그는 영고의 마음을 다는 읽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출렁거리는 가슴을 가까스로 누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남자든 여자든 다 사람인데 무에 다른 게 있겠소?"
영고에게는 그 말은 마치 남자든 여자든 번거롭게 서로 가릴 것이 없다는 뜻으로 들렸다. 그녀는 대번에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제야 주백통은 자기가 실언을 했음을 느끼고 다급히 용서를 빌었다.
"영고, 아마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것 같구먼. 내가 아니 말한 셈 쳐 주구려."
영고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가슴 아픈 옛일들을 돌이켜보고 있었다. 단지흥과 함께 지낸 그 잊지 못할 밤을 생각하노라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날 밤, 숙녀동 밤 하늘에 휘영청 솟아오른 보름달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그녀는 단지흥과의 사랑이 그날 밤의 보름달처럼 아름답게 둥그래질 수 있기를, 둘의 사랑이 고요한 보름달처럼 영원하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그녀의 자그마한 꿈은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단지흥은 결코 한 여인의 품에서 살 사내가 아니었다. 그는 한 여인과의 절절한 사랑보다도 대리국의 존엄과 사직을, 무림 고수로서의 체면과 명예를 백 배, 천 배 더 소중히 여기는 사내였고 뿐더러 부처님을 위해서라면 사랑도, 가정도 버리는 냉혹한 사내였다. 영고는 일순 그에게 버림받은 듯한 느낌이 들어 적이 가슴이 쓰렸다. 그녀는 문득 주백통의 손을 잡았다.
"저를 좀 따라와요!"
주백통은 어안이 벙벙해져서는 멍청히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손을 잡혀 있자니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도저히 뿌리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저 그녀가 잡아 끄는 대로 따라갔다.
영고는 그를 잡아 끌고 자기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녀는 들어가자마자 무엇을 찾는 사람마냥 이 구석 저 구석 샅샅이 살폈다. 휘장 뒤에라도 혹 누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자 그녀는 주백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신은 제 사부님이시죠?"
"그렇소만."
주백통은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 영고가 눈빛을 반짝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당신은 저의 사부님이에요. 당신은 참말 좋은 분이세요. 한데 금은보화도, 돈도 탐내지 않으시니 저로서는 은혜를 갚을 방도가 없군요. 오늘은 은혜를 갚는 뜻으로 한 가지만 보여 드릴까 해요."
주백통은 도통 영문을 몰라 영고의 얼굴만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대관절 뭘 보여 주려는 걸까? 정색하고 말하는 품이 꼭 무슨 진귀한 물건을 보여 주려는 것 같다. 다 관두고 뭐니뭐니 해도 방긋 웃어 주는 편이 훨씬 좋은걸! 너무 정색하고 말하니 괜히 가슴만 아프구나.'
영고는 말뚝처럼 서 있는 주백통을 침대 쪽으로 천천히 끌었다. 주백통은 마치 귀신에게라도 홀린 듯했다. 그는 그저 맥을 놓고 비척비척 끌려갔다. 느닷없이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무리 사부라 해도 필경은 외간 남자인 자기를 침대로 끌고 가는 영고의 마음을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영고는 침대 앞까지 바싹 다가서더니 갑자기 홱 돌아서서 주백통을 빤히 쳐다보았다. 서글서글한 두 눈에 촉촉히 이슬이 맺혔고 두 볼은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주백통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한동안 사내를 뜯어보더니 땀에 젖은 저고리를 벗기 시작했다.
"무예를 가르쳐 주신 사부님의 은공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저의 가장 아름다운 곳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주백통이 고개를 내두르며 뭐라 말하려는데 벌써 새하얀 젖무덤이 다 드러났다. 그 위엔 솟아오른 복숭아빛 젖꼭지까지……. 주통은 그만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려 했으나 두 발은 꼼짝을 안 하고 눈길은 자꾸만 영고의 젖가슴 쪽으로 쏠리는 것이었다. 그의 가슴은 심하게 두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무릇 사내들과 정을 통해 본 여인들은 이다지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인가? 영고는 눈 깜짝할 새에 옷을 다 벗고는 조용히 침대에 올라가 반듯이 누웠다. 그녀의 나체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신비롭고 매혹적이었다.
"사부님, 한번 찬찬히 보아요. 필경 사내들과 다르게 생겼을 거예요!"
영고는 착착 휘감기는 듯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속살거렸다. 그러나 주백통은 입도 벙긋 못하고 얼빠진 사람마냥 멍하니 서 있었다. 미리 속에서는 윙윙 소리가 나고 온몸이 나른했다. 자고로 남녀들이 왜 서로 살을 섞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 듯도 싶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길로 영고의 몸을 천천히 더듬었다. 영고의 알몸은 어디를 보나 신비롭기만 했다. 은잔을 엎어놓은 것 같은 하얀 젖무덤, 백옥 같은 다리, 그 사이에 펼쳐진 자그마한 수풀과 샘터…… 주백통은
그만 혼백이 달아나 버리는 듯싶었다.
세상에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남자가 어디 있으랴? 한 사내는 완고한 아버지가 무섭게 단속하는 바람에 열여덟 먹도록 담장 안에 갇혀 여자와 상종하지 못했다는 옛이야기도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담장 밖에 나갔다가 아장아장 걸어가는 여인과 마주쳤다. 그것이 너무나 신기하여 집에 돌아와 제 아버지를 보고 대뜸 그게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다. 그랬더니 그 아버지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지 않은가.
"그 놈의 짐승이 아기작아기작 걷지 않더냐? 그게 바로 거위는 거위로되 흰 거위라는 것이다."
그랬더니 그 철딱서니없는 아들 놈은 당장 거위를 사 달라고 제 아비를 못살게 굴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주백통이 그 옛이야기에 나오는 사내처럼 세상물정을 모를 리야 없지만 아무튼 남녀간의 정사에 대해서는 정말 숙맥이었다. 그는 가슴이 터질 듯 쿵덕거려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두 손에 땀을 쥐었다. 영고는 점점 더 점점 더 숨결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윽이 주백통을 쳐다보면서 속삭였다.
"아무데나…… 아무데나 만져 보아요. 자, 어서요!"
주백통은 이제 콩 튀듯 심장이 뛰어댔다. 정말 만져 보고 싶었다. 하지만 손은 얼어붙은 듯 아무리 해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영고는 주백통의 손을 잡아다가 가만히 자기의 가슴 위에 올려 놓았다. 그는 일순 가늘고 달콤한 전율을 느꼈다. 마침내 그의 손은 비단결 같은 영고의 몸을 천천히 더듬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세상에는 무예를 닦는 일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왜 계집의 살결은 사내들의 살결보다 한결 더 부드럽고 따뜻할까? 그는 점점 숨이 가빠지고 손놀림이 빨라졌다.
"나 원, 여자들의 몸이란 이토록……."
"이제부터 사부님은 계집의 맛을 알게 될 거예요."
그리고는 그녀는 소리 없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왜 우는 거지?"
주백통은 당황해서 손길을 멈추고 빤히 영고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대답 없이 갈수록 슬프게 울기만 할 뿐이었다.
'왜 울까? 내가 자기의 몸을 어루만져 보았다고 우는 걸까? 자기가 직접 내 손을 끌어다 어루만져 보게 해 놓고서는…….'
주백통은 그녀의 심사를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 안절부절못했다.
"됐어, 됐어. 이젠 더는 만지지 않겠으니……."
그러자 영고는 갑자기 울음을 그치고 그의 손을 더욱 힘껏 잡아 끌며 주백통을 정겹게 올려다보았다.
"저를 좋아하시겠죠?"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거요? 무예를 닦듯 날마다 어루만져 주면 좋아하는 거요?"
영고는 이 순진한 사내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방그례 웃으며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주백통은 단박에 싱글벙글하며 어린애처럼 말했다.
"좋아, 날마다 그대를 좋아해 주겠소."
한 여인을 좋아하는 게 대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사내, 이 어리숭한 사내가 영고는 미덥기 그지 없었다. 그녀는 와락 주백통의 품에 안겨 들며 가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께 여자가 무엇인지 알려 주고 싶어요."
향녀들은 들어갈 때와는 달리 걸어서 미고하 기슭에 이르렀다. 웬지 그녀들의 발걸음은 몹시 무거워 보였다. 강변까지 오니 어디선가 사내들의 웅글진 노랫소리가 들려 왔다.
파도 사나운 막조하에는
성미 사나운 하신(河神)이 살고 있고
부평초처럼 떠도는 고깃배마다엔
변덕스러운 아낙네들 도사리고 앉았네
이 배 위의 어부님은
하루 세 번 욕을 먹고
저 배 위의 어부님은
하루 세 번 뺨을 맞네
지독하다 막조하의 아낙네들
집집마다 남정들을 종처럼 다룬다네.
향녀 등아는 처연히 듣고 있더니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집집마다 남정들을 종처럼 다룬다니 참 멋진 고장이군. 어찌하면 남정들이 아낙네들의 말을 곰상곰상 잘 들을 수 있을까?"
"등아 향녀님, 당신의 그 단황 나으리도 이 고장의 남정네들처럼 손아귀에 쥐어야 해요. 그분은 황제라고 너무 우쭐대면서 거들떠 보지도 않으니……."
향녀들 중에 누군가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하나 그 말은 등아의 아픈 곳을 후벼파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등아는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아둔한 그 향녀는 눈치도 없게 종알거렸다.
"등아 향녀님, 단황 나으리를 한번 찾아가 물고늘어져 봐요. 이왕 정을 통한 이상 황비로 맞아들이지 않으면 큰일난다고 하면서."
등아는 고개를 숙인 채 혼자 말하듯 중얼거렸다.
"그 사람은 벌써 황비도 맞아들였고 또 여인들도 허다해."
"그따위 계집들은 나한테 맡겨요. 몽땅 죽여 버리면 돼죠, 뭐."
그 향녀는 분을 참지 못해 대뜸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등아는 어설프게 웃어 보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향녀들은 저마다 가슴이 뭉클해졌다. 등아는 조용히 고개를 들고 정겨운 눈길로 여러 향녀들을 둘러보았다. 향녀들은 늘 자기들끼리는 남의 서러움을 지나치지 않고 제 일처럼 발 벗고 나서곤 했다. 등아는 두 눈에 가랑가랑 이슬이 맺혔다.
"걱정하지 마, 헌 짚신도 다 짝이 있다는데 조만간에 시집을 가게 되겠지. 하지만 한 가지 조건이 있어."
향녀들은 의아한 눈매로 등아를 건너다보았다. 등아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건 바로 다름아니라 너희들 모두가 다 시집을 가야 한다는 거야. 너희들 모두가 좋은 사내를 만나 시집을 간 뒤에 난 맨 나중에 시집을 갈 테야."
등아는 기실 단지흥을 만난 이후로 마음이 돌아서 있었다. 한때는 스스로 유방까지 절단해 가면서 독하게 마음을 사려먹었지만 이제는 사내에 대한 덧없는 원망을 훌훌 털어 버리고 가슴 없는 여자라도 원하는 사내가 있다면 모두 짝을 맺어 줘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해 주고 싶은 것이었다. 향녀들은 그 말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히며 정겹게 등아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세상에는 점점 사내다운 사내들이 줄어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니, 믿을 만한 사내는 한 사
람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이제 누구한테 시집을 보낸단 말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아는 배은망덕한 사내들이 새삼스레 미워지는 것이었다.
등아는 얼른 말머리를 돌려 버렸다.
"얘들아, 실없는 말들일랑 그만 하고 어서 서두르자꾸나."
사내의 웅글진 노랫소리는 계속 구슬프게 들려 왔다.
향녀들이 한들한들 강기슭에 내려서니 한 사내가 배를 몰고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 노래를 부른 그 사내인 듯싶었다. 향녀들은 사내에게 눈인사를 보내며 배에 올랐다. 사내는 향녀들을 보더니 대뜸 희롱하듯 물었다.
"아마 석량동에 갔다 오는 아가씨들인 게지? 어떻게 잘들 놀았소? 음식은 무얼 대접 받았소?"
향녀들은 너나없이 입들을 꾹꾹 다물고 딴전을 피웠다.
하지만사내는 그러든 말든 저 혼자서 마냥 히죽거렸다.
"듣자니 대환희 보살네 석량동에서는 도리어 남정들이 호강을 한다더구먼. 대환희 보살은 끼니때마다 사내들을 무릎에 앉히고 갓난애에게 암죽 먹이듯 밥을 먹여 준다지 않아? 참 세상에 석량동 남정들 같은 상팔자가 그래 어디 있겠소?"
사내는 향녀들을 흘끔거리며 끝없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향녀들은 여전히 묵묵히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팔자야 영락없는 소 팔자라니까.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강위에서 살면서 배 빠지게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있지만, 어디 하루라도 배불리 먹을 수가 있나. 어쨌든 이날 입때껏 여편네 손에 쥐어 사는 신세니. 가끔 이따위 여편네가 없으면 못 산다더냐 하고 주먹을 부르쥘 때도 있지만 정작 여편네가 한번 소리치기만 하면 찍소리도 못하고 설설 기어야 하니, 이거 원……. 여기 풍속이 그러니 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
배가 대안에 닿았다. 향녀들은 한들한들 뱃머리에 모여 서더니 괜스레 호들갑을 떨며 뭍으로 뛰어내릴 염을 못 내고 부러 동당거렸다.
"아이구 무서워라, 어떻게 내린담?"
향녀들은 강물에 떨어질까 무서워하는 척하며 힐끔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사내는 얼이 빠져 멍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얼른 사위를 둘러보았다. 여편네가 보이지 않자 그 사내는 얼씨구 좋다 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꽃 같은 향녀들을 번쩍번쩍 안아다가 하나씩 하나씩 강기슭에 내려 주었다. 사내는 구름 위에 둥둥 뜬 기분이었다.
'아이구, 이 계집의 허리는 정말 날씬하기도 하다. 아까 저 계집의 겨드랑이에서는 향긋한 내음이 나더니만……. 어이구, 저 계집은 능금알 같은 볼에 쌍보조개까지 살짝 팬 절세 미인이로구나. 아이 참, 내 신세도 가련타, 하룻밤도 이런 계집들을 끼고 자 보지 못하고 허구한 날 암캐 같은 여편네에게 들볶이기만 하다니……."
사내는 속으로 장탄식을 하면서도 연신 입이 벙싯거렸다. 실로 돈 한푼 들이지 않고 톡톡히 재미를 보는 셈이었다. 한데 다 내려 놓고 보니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 버린 듯하니 허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내는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향녀들을 번갈아 보며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향녀 등아가 옳다구나 싶어 슬쩍 물었다.
"아저씬 아내가 계신가요?"
"있고말고."
그러나 사내는 뒤를 돌아보더니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목소리를 착 가라앉혔다.
"아이구, 이리로 오는구려. 저 여편넨 범같이 무섭다오. 난 저여편네 앞에서는 지레 죽었수다 하고 사는 처지라오."
등아 향녀는 씩 웃으며 그 말엔 코대답도 않고 아낙네가 다가오기를 가만히 기다렸다. 이윽고 그녀가 다가오자 그녀는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이 분이 댁네 주인인가요?"
아낙네는 함상궂은 눈길로 자기 남편과 향녀들을 쭉 둘러보더니 대번에 코방귀를 뀌었다. 등아는 아랑곳 않고 또 물었다.
"아저씬 참 좋은 분이시죠?"
"좋긴 뭐가 좋아요. 수캐처럼 그저 계집이라면 오금을 못 쓰는 놈팽인걸요. 일찌감치 죽어 버리기나 하면 속시원하겠어요. 어이구 내가 눈이 멀었지!……"
아낙네가 대뜸 성을 내자 등아는 빙긋 웃으면서 단박에 되받아 쳤다.
"좋아요, 그럼 오늘부터 남편은 잃은 셈 치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삽시에 칼날이 번쩍하는 듯싶더니 돌연 사내의 대갈통이 뎅겅 떨어져 백사장에 나뒹굴었다. 아낙네는 일순 무슨 일인가 싶어 두 눈이 휘둥그래졌다가 이내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그전 이미 향녀들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 뒤였다. 뒤이어 휑한 백사장에는 한 아낙네의 애달픈 넉두리가 처연하게 떠돌았다.
"아이구, 이를 어쩌나! 내 하늘 같은 서방님, 서방님을 앗아 가다니……. 부부 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고 했거늘, 누가 너따위 계집들더러 상관하라고 했더냐? 아이구, 이제 나는 누굴 믿고 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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