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생과 환생
현성 성은 김수호
시간과 공간에 자유로우면 진정한 대자유인이다.
당신이 본 전생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만의 전생이 아닌 공유된 지위에 의한 전생일 수 있음을 살펴야 한다.
전생은 멀고 가까운 업의 형태에 따라 환생과 삶의 여정으로부터 다가와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삶은 공유된 전체 중 일부이다. 그런 연고로 공동의 업이 존재하니 이것이 부처를 이루는 연유가 된다.
전생의 기억이 겹쳐 보이게 되는 연유이기도 하다.
나의 전생이 또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존재함으로 다각화된 전생 기억들이 각자가 지님으로 혼돈의 분별 의식을 지니게 한다.
분명한 것은 전생의 기억에서 어떤 지위에서의 기억인지가 미세하게 살펴야 할 것이다.
한 공간에서 다른 시각화된 공동의 업상들로 하나는 수많은 존재 의식으로 새겨지는 것과 같다.
상대 된 것들은 나름의 의식 분별에 의해 판단함으로 다양한 이름 모습으로 재탄생된다.
전생과 환생 두 언어는 연결 지어진 행위에 대한 구분이다.
두 언어 의미가 지니는 가치는 지혜롭게 보아야 한다.
삶이란 무엇일까? 이 문제의식으로부터 전생과 환생의 의미를 살펴봐야 한다.
삶은 관찰자의 여정이다.
그러므로 관찰자의 행위에 따라 관찰 여정은 수없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하나의 눈으로 수천억의 모양을 보듯이 여섯 창문으로 보게 되는 여정들이 삶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다름 아닌 수많은 받아들임을 서로 다른 것이라는 분별 의식을 가짐으로 세상은 복잡한 관계 형성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관찰자가 수천억의 관찰자로 나타나고 보이는 대는 시간과 공간의 공덕이 있다.
의심과 확신 또는 관심과 무관심으로 모호한 위치에 있는 언어가 전생과 환생이라는 말인 듯하다.
나 개인은 두 언어에 대해 확실한 긍정을 한다.. 다만 두 언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해석해 볼 여지가 있다.
태어나고 죽는 것을 반복적 행위로 나타내면 환생이라 하고 현생 이전의 삶을 전생이라 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증명해 내는 것이다.
첫째 환생이라는 사실은 변화의 과정 또는 역할의 변경 정도로 해석할 필요가 있다.
현생에 몸을 받아서 운용하는 것이 통하여 환생을 증명한다. 그러기 위해 전생은 반듯이 따라 나온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환생 사실은 깊은 의식의 관찰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생이라는 행위를 알면 어떤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삶이라는 여정에서 어떤 가치를 지니게 하는지를 살펴봄으로 자기 관찰의 동기 부여가 일어나야 한다.
환생의 의미는 삶은 업의 지속성을 가지고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전생의 업력이 현생으로 이어져 현생을 이끌어감에 중요한 가치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먼저 깨우쳐야 한다.
이유 없는 것은 없다. 씨앗은 그 종을 확신시키는 것이듯 전생은 현생 업의 여정을 확인 시켜준다.
하나의 하나는 수천억으로 보이고 수천억은 또다시 하나 또는 수천억 조로 그 지위가 나타난다.
이것이 환멸이 생기는 연유이며 정해져 있는 대상으로 상대된 것이 아닌 연유이다.
하나는 수천억 억 조의 하나가 모여 이루고 이 모든 것은 공으로부터 변화 될 뿐이니 공의 공덕을 깨우는 것은 다름 아닌 한 생각 일어나므로 시작된다.
이것이 전생과 환생이 생겨나는 연유이며 전생과 환생이 본래 없는 이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신은 이 순간 전생과 환생으로부터 속박되어 있음을 알고 또한 벗어나 있음도 함께 보아야 한다
오직 관찰자로 머무른다면 당신은 확실한 증명함이 된다.
두번째로 전생은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좋을까? 생각해 본다.
생이란 행위의 구분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 한 생각 일어나고 꺼지는 것으로 살펴볼 수도 있고 하룻밤 자고 일어나는 것으로 살펴볼 수도 있다.
몸 운용의 현상으로 생멸이라 말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은 공통된 원리는 변화한다는 사실을 지녔다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생멸들이 쌓이고 있으므로 이것이 전생을 보게 하는 연유가 된다.
전생은 현생을 바탕으로 분별함이니 모두 시간이라는 틀에서 지속되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시간이 존재함으로 공간이 드러나 보이고 그 바탕으로 삶이 형태가 됨이다.
법당안에서 만나는 안과 밖 소식은 찰나 중에도 수많은 형태로 보여지듯 전생과 환생 역시 그와같아 모두 환영과 같음이다.
스스로 주인으로 관찰자가 되어야 한다. 그 지위를 놓치게 되면 전생 현생 내생으로 내몰려 꿈속에서 헤매는 것이 된다.
목표를 향한 정진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연유는 전생과 환생이라는 언어가 주는 지혜가 있기 때문이다.
착함으로 목표를 지니고 정진해야 한다.
즐거움을 향한 기쁨이 가득한 순간들은 한생각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너와 내가 하나임을 명심하여 본래 없는 생사의 강을 건너야 하리라.
월문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