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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 에스더 : 역사 섭리를 통한 언약 | ||
창세기 1장 ~ 36장 : 하나님의 언약 섭리 창세기 37장 ~ 민수기 30장 : 자손언약 성취 섭리 | ||
창37장~출18장 : 언약자손의 번창 | ||
37장~50장 자손의 보호와 형통 | ||
37장~38장 언약자손들의 범죄 | 39장~45장 요셉과 형들의 화친 39,40장 애굽에서 수난당하는 요셉 | 46장~50장 언약자손들의 형통 |
39장부터 45장까지의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언약자손들을 시험하여 사죄하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으로 말미암아, 요셉을 죽이려다가 애굽에 팔아 넘긴 형들의 죄를 요셉으로 용서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이스라엘 족속으로 애굽에 내려가 생육하고 번성하며 살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와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언약자손의 죄가 아무리 추하고 크다 할지라도 멸하시지 아니하시고 모두 사죄하여 주십니다. 일찍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창15:13)라고 말씀하신 바를 이루시려는 뜻이 담겨진 섭리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형들의 잘못을 용서하게 하셔서(창45:8,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그들로 죽지 아니하고 살아서 더욱 번창하여(출1:12, 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성하여 퍼져나가니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여), 그들의 자손들이 애굽에서 사백 년 동안 애굽 사람들을 섬기며 살 수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39장과 40장 말씀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형제들에 의하여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으로 보디발의 집의 고용인이 되었다가, 그의 처의 모함으로 투옥되어 애굽의 관원장들의 꿈을 해몽하여 주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하여 언약 자손을 어떠한 고난 중에도 지키시며 보호하시는 여호와이심을 계시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모든 일을 형통하게 하시는 가운데에 요셉으로 많은 고난이 따르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면, 고난은 언약 자손에게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관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요셉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바로 그 표본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자손으로 오셔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실 것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1절에서 6절까지의 말씀은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팔려 간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그 집의 총무가 된 때부터 그 집에 복을 내리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요셉이 애굽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보디발에게 팔렸다는 본문 1절과 37장36절에 차이가 발생합니다. 판 사람에 대한 내용입니다.
37장36절에서는 ‘그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요셉)~보디발에게 팔았더라’고 하는데 본문 1절에는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차이는 ‘미디안 사람’과 ‘이스마엘 사람’입니다. 이스마엘 사람(족속)과 미디안 사람(족속)은 모두 아브라함이라는 한 사람에 의해 나누어졌는데, ‘이스마엘’은 사라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에 의해 만들어진 부족이고 ‘미디안’은 아브라함의 세 번째 아내 그두라에게서 난 네 번째 아들로 만들어진 부족이며, ‘미디안’은 아브라함에 의해 가나안의 동쪽 곧 동방 혹은 동국으로 보내졌습니다(창25:6).
미디안 족속이 정착하게 된 ‘동방’은 에돔과 모압에 이르는 사막 지대였을 것이며 모세 때에는 시내 반도의 남부와 동부에도 정착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스마엘 역시 창16장12절(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과 25장18절(그 자손들은 하윌라에서부터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주하였더라)에서 볼 때, 미디안과 가까운 곳에서 지냈을 것으로 보여지며 그리고 같은 무역업 등을 통하여 살았으므로, 요셉의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다가 유다의 청으로 인해 은 이십에 팔 때에 함께 동행하였습니다(창37:28).
이들이 함께 동행하며 함께 장사하였기에 창37장28절에는, “그 때에 미디안 사람 상인들이 지나가고 있는지라~은 이십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인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37장36절에서는 “미디안 사람들은 그를 애굽에서~”라고 하고 본문 1절에서는 “그를 그리고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라고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2절)라고 하십니다. 이는 요셉의 전 생애가 여호와의 주권적인 능력에 지배되고 있음을 분명히 밝혀주는 것입니다. 언약 자손은 물론 선악간에 모든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에 따라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신 것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전에 아브라함에게 계약과 함께 약속하신 말씀대로 이스라엘 자손들로 애굽 사람을 사백 년 동안 섬기며 살게 하시려는 계획아래 이루어진 섭리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여 그를 형통하게 하시는 것은, 언약자손을 보호하여 이스라엘 열조와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요셉을 위하여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여호와께서는 언약 자손에게 곤고한 날과 형통한 날을 병행하게 하셔서 작정하신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전7:14).
하나님께서 요셉의 꿈에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계시하시고 그리고 그의 삶에 함께 하시므로 만사를 형통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의 주체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에게 형통케 하시는 것을 그의 애굽 주인도 보았습니다(3절). 보디발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눈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4절에는 요셉이 그 ‘주인으로부터 은혜를 입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주인에게서지만 근본적으로는 여호와께서 요셉으로 형통하게 하시고 그가 하는 일도 형통하게 하셨기 때문에 주인인 보디발이 요셉으로 은혜를 입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합니다. 여기서 ‘그의 손에 위탁하니’라는 것은, 요셉에게 힘과 권력 그리고 책임 모두를 맡겨 위임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치게 됩니다(5절). 요셉으로 애굽에 종으로 팔리게 하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 뿐만이 아니라 요셉이 가정 총무로 섬기는 보디발의 집과 밭에 복을 주시며 형통케 하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보디발은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않고 모두 요셉의 손에 위탁합니다(6절).
여기서 성경은 요셉의 모습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6절). 요셉의 외모에 대한 이러한 묘사는 다음 서술되는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하는 장면의 배경 역할을 하고자 서술한 것입니다. 즉 요셉이 보디발의 가정 일을 처리하면서 보여 준 지혜로움과 성실함 그리고 외모의 아름다움은, 한 집안에 머물며 매사를 눈여겨 볼 수밖에 없는 보디발의 아내의 마음을 끌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부터 18절까지의 말씀은 요셉이 동침하자는 주인 처의 요청을 거절하자 그가 거짓 모함을 꾸며서 그 주인으로부터 고발을 당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그 후에’(7절)라는 것은, 위의 일들 후 즉, ‘요셉이 주인의 절대적인 신임을 얻고 계속적인 형통한 일들이 이어지는 후에’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을 하며 동침하기를 청합니다(7절). 여기서 ‘눈짓’은 요셉에게 관심을 가지며 추파를 던지는 모습을 뜻합니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한 요셉은 주인의 처로부터의 유혹을,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는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하며 거절하며 물리칩니다(8,9절). 자신의 안위를 사람에게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 의지하며 경외함으로 유혹을 이기는 것입니다.
위의 본문에서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는 이유를 주인의 신뢰로 들면서 이를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지으리이까’에 대한 원어는 ‘하타(חטא)’인데 뜻은 ‘벗어나다’, ‘빗나가다’입니다. 이는 요셉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빗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자체가 하나님께 범죄한 것으로 인식하였던 것입니다.
요셉은 어릴 적 형제들에게 드러낸 두 번의 꿈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계시하신 것이었으며 이로부터 요셉은 신본주의적 세계관과 가치관이 확고하게 정립되었습니다. 이를 증명하는 것이 창45장 5절입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래서 요셉은 하나님을 빗나가거나 벗어나지 않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의지하고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인생이 유혹을 이기며 시험을 견디는 것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으로든 한계가 있으며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한 두 번은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반복되는 시험이나 유혹에는 결국 넘어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이를 넘게 하고 즐거이 극복할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님이며 그를 믿는 믿음뿐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처의 유혹을 다른 이유에서 이겨나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하며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대적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죄의 성질은 하나님을 대적하게 만듭니다. 요셉은 자신의 편안과 생의 즐거움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죄를 싫어하고 미워하며 죄를 저주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와 동침하는 것을 보디발에 대한 죄라고 생각하기에 앞서 하나님에 대한 범죄로 본 것으로서, 그가 신본주의적 가치관에 정립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주인의 처는 날마다 계속하여 요셉에게 끈질기게 요구하였으나 요셉은, 그 여인과 함께 침실로 가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 여인과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10절). 하나님을 경외한 요셉은 그 여인에게 조금의 여지도 남기거나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주인의 처와 가까워지면 자신의 신분이 더욱 공고해짐에도 단호히 거절함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미움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이 원하지도 않고 있어서도 안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11절 서두에 ’그러할 때에‘라고 하는 표현에서 요셉의 생이 새로운 국면으로 전개되어 가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계속적이며 끈질기게 유혹과 거절의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보디발의 아내와 요셉 사이에 새로운 사건이 펼쳐질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11절)
그때 보디발의 처가 요셉의 옷을 붙잡고 이르기를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간 것입니다(12절). 요셉은 자기의 일을 하러 보디발의 집에 들어갔는데 그 집에는 텅 비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간적 상태에서 보디발의 처는 지금까지 눈짓만 하다가 동침까지 매일 요구하는 상태였는데, 마침 이날은 아무도 없는 집안 상태가 되었고 이에 요셉의 옷을 붙잡기까지 하며 동침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놀란 요셉은 그만 붙잡힌 자신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다급하여 뛰쳐 나오게 됩니다.
혼자 남게 된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13절) 집 사람들을 불러다가,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하고 말합니다(14~15절).
요셉의 ’도망‘은 전쟁터에서 병사가 위험에 쫓기는 것처럼 급박하고 필사적인 태도로 도망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도망하는 요셉을 본 보디발의 처는 돌변합니다. 그리고 남겨진 요셉의 옷을 증거물로 삼아 분노와 수치와 미움으로 변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요셉을 모함하여 궁지에 빠트리게 합니다.
보디발의 처는 요셉을 향하여 ’히브리 사람‘으로 지칭하며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는도다‘하며 죄는 자신이 짓고 남편으로 먼저 갈등을 일으키도록 하여 요셉을 고소합니다.
자신들을 희롱하고자 주인이 이 히브리 사람을 데려왔다고 하며 보디발이 가정 총무로 세운 의도를 이런 표현을 통해 왜곡시켜 주인의 마음을 흔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 사람 요셉에 대한 파격적인 대우에 대한 불만과 시기심을 집안 사람들로 충동시키면서 자극하여 희롱의 대상을 집안 사람 모두를 대상삼아 확대하고 공격합니다.
이러한 히브리 사람 요셉이, 혼자 집에 있었던 자신을 겁탈하고자 달려들 때에 자신이 소리를 질렀더니 그의 옷을 버려두고 도망하였다고 합니다. 옷까지 벗겨지면서까지 보디발의 처의 손에서 벗어나려 했던 ’그 옷‘이 도리어 누명을 덮어쓰는 증거물이 되고 만 것입니다. 꼼짝없이 걸려든 신세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 자손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일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꼼짝없이 감옥으로 들어가게 되는 환경이 조성된 것입니다. 보디발의 처는 집안 사람들을 불러모아 놓고 요셉을 옷과 함께 죄인을 만들어서 자기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16절). 그리고 주인이 돌아오자 그에게 일러 바치는데,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17,18절)라고 합니다.
’히브리‘란 명칭의 원뜻은 ’이주자‘, ’낯선 자‘, ’이방인‘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경멸하려고 의도적으로 이 단어를 요셉의 사회적 신분을 지칭하는 ’종‘이라는 단어와 함께 사용하여, 요셉이 애굽인과 다른 천한 종족일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종‘이라는 사실을 은근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요셉에게 덧씌운 누명의 무게를 더욱 무겁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19절부터 23절 말씀은 여호와께서 주인의 노여움을 받아 옥에 갇힌 요셉에게 함께 하셔서, 전옥에게 은혜를 입게 하시고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시는 섭리 내용입니다.
여인의 말을 들은 보디발은 심히 노하고(19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20,21절)십니다.
당시 애굽의 법률에 의하면, 간음자나 간음을 하려고 한 사람은 천 대의 매로 다스렸고, 더욱이 자유인 여자에 대한 강간은 심하게 다스려 요셉과 같은 협의에 대해서는 즉각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귀족의 부인을 강간하려다 미수로 그친 죄목으로 고발된 요셉을, 옥에 가둔 것으로 그친 것은 아주 가벼운 처벌이었다고 보여집니다.
요셉이 갇힌 감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입니다. 이 감옥에 요셉이 갇히게 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보디발이 아내가 겁탈당했다고 믿었다면 당장 요셉을 사형에 처하거나 다시 노예로 팔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옥에 가두고, 또한 요셉은 왕의 죄수가 아님에도 왕의 감옥에 갇히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될 수 있게 하시려는 여호와의 섭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셔서, 감옥의 죄수들을 맡아 다스리는 간수장이 요셉에게 은혜를 베풀게 하시고 그로 형통하게 하십니다.
*왜 이렇게 요셉을 어디서나 형통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언약자손 요셉을 보호하셔서 요셉에게 꿈으로 계시하여 주신 뜻을 이루어 주시고, 나아가서는 이스라엘의 열조와의 언약을 이루어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사실 아무런 죄도 없이 억울하게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갈등을 일으키는 때는 억울한 일을 당하는 때입니다. 그 갈등은, 선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택함을 받은 성도를 억울하게 하는 자가 저주라도 받아야 하는데, 그들이 저주를 받지도 아니하고 도리어 세상적으로 더 잘되는 것을 보게 될 때에 일어납니다.
죄 없는 요셉을 애굽으로 팔아넘기고 아버지를 속이기도 한 형들은 마땅히 저주를 받아야 하고, 거짓으로 요셉을 모함하여 감옥에 갇히게 한 주인의 처도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저주는 임하지 아니합니다. 공의의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 계시다면 이 세상에서 왜 악인들이 왕성하게 되는 것일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사신신학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언약자손 요셉으로 애매히 고난을 당하지 아니하게 하시고 언약을 이루어 주실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언약 자손에게 세우신 언약을 이루어 주실 때에 반드시 고난을 겪게 하셔서 이루어 주십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언약 자손에게 언약대로 주시는 복이 그들 스스로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언약에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다‘라는 내용은,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도 형통한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21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라는 말씀은, 2절과 마지막 절에도 똑같이 반복하여 말씀하십니다. 2절은 요셉이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왔지만 그곳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셨다‘는 것이며, 21절에서는 집의 가정 총무에서 감옥으로, 더 위험하고 불안한 곳으로 옮겨졌지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인 23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어디에서나 함께 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요셉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동행‘이며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언약 자손들이 형통하지 아니한 일은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다 형통한 일 뿐입니다(롬8:28 참조). 그래서 택함을 받은 성도는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살전5:18). 그런데 우리는 형통하다는 것을 인간 육신의 욕심대로 순조롭게 잘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 육신의 욕심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형통입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형통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인간 편에서는 자기가 하는 사업이 잘되고 건강한 것만이 형통한 것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모든 범사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어지면, 모든 일이 다 형통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성숙된 신앙인은 만사가 다 형통하다고 믿기 때문에 항상 기뻐하며 쉬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범사에 감사하게 됩니다(살전5:16~18). 그런데 인간이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역사를 보는 시야가 좁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전체적으로 보지 아니하고 부분적으로 보게 되는 결과로 인하여, 하나님 섭리의 진행 과정에서 형통한 것으로 받아 들이지를 못하고 불행한 것으로 받아들여 불평과 짜증과 원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는 부분적으로 평가할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평가를 하여야 하기 때문에, 부분적인 과정을 보고 불행한 것으로 평가를 하여서는 아니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부분적인 불행은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실제로 요셉이 감옥에 들어가는 부분적인 불행이 없으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온 가족을 기근에서 구원하는 행복은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고통스러운 현실만을 바라보고 낙심하는 것이 아니라, 내일의 소망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인내하는 것입니다(롬5:3~5 참조).
하나님에 의해 간수장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요셉은 옥중 죄수들의 제반 사무을 처리하게 되고(22절), 간수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은 무엇이든지 참견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가 하는 일은 범사에 형통하게 하십니다(23절).
여기서 ’범사에‘라는 말의 뜻은, ’그가 하는 일은 무엇이나‘라는 뜻이지만, 더 깊은 의미는, 하나님께서 요셉이라는 언약 자손과 어디서나 늘 함께 동행하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 야곱의 집이나 구덩이에서나 보디발의 집이나 그리고 감옥에서나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