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날개와 여름이 만나 함께 건너가는 아포리아(aporia)
무수한 난제(aporia)가 존재하는 세상에서 날개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면서 저주이다. 날개는 대양을 건너거나 창공을 향하여 상승할 수 있지만 견고한 장벽이나 미친 바람을 만나면 한순간 추락하게 된다. 날개에게 있어서 하늘도 대지도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다. 나는 여름이 되어 내 발밑에 놓여있는 죽은 날개를 본다. 내 몸은 뜨겁지만 내 몸의 공기는 불안정하다. 내 몸에는 천둥과 번개가 숨어있다. 내 몸은 무언가 말을 하고 싶어한다. 그런데 내 앞의 새는 죽어있다. 죽은 새를 바라보는 내 눈은 점점 불온해진다. 썩기 위해 부패를 꿈꾼다. 썩어서 죽은 새 대신 냄새의 날개를 펼치기 위해. 나는 썩은 냄새를 풍기는 방법으로 공중에게 말을 건다. 루시앙 골드만이 소설 사회학을 이야기하면서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한 방법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음을 설파했듯이, 나는 부패를 꿈꾸는 여름이 되어, 썩은 냄새로 말을 하기 위해 죽은 새를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부패를 꿈꾸는 여름이 된 ‘나’가 추구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개미처럼 들끓는 말의 미래’이다. 그것은 신약성서의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리듯, 죽은 새를 살려내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신이 아니므로 생물학적으로 죽은 새를 살릴 수는 없다. 내가 죽은 새를 살리는 유일한 방법은 역설이다. 내 몸 자체가 역설이 되어 죽음 속에 내재하는 역설을 체득하는 일이다. 이미 부패를 체득한 여름에게 역설은 이상한 힘이다. 그 힘을 얻기 위해 위해서 내 몸은 봄을 버리고 다가올 가을과 겨울을 미리 한꺼번에 껴입었다. 그러므로 나는 아이러니하고 참으로 모호한 여름이다. 기묘하고 모호한 나의 눈으로 죽은 새를 바라보면 죽은 새는 꿈틀거린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꿈틀거리는 죽은 새가 되어 세상을 향하여 노래한다.
그런데 내가 여름이 되어 죽은 새를 꿈틀거리게 하는 일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 밖에는 지금 무수한 당신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은 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의 눈에 비친 나의 행동은 이상하고 낯설다. 그 낯설음의 간극 속에 내 시가 있다. 나는 오늘도 시를 쓰기 위해 죽은 새를 찾아 나선다. 내 몸과 생각은 점점 불온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