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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감사와 찬양 / 사무엘하 22:1-20
‘커밍 워크’라는 교수는 성공의 요인을 몇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그 첫째가 ‘지능’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각하는 능력, 아이큐(IQ) 곧 지능지수가 따라가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지식’입니다. 아무리 좋은 두뇌를 가졌다 해도, 그 두뇌에다 많은 지식을 입력시켜야 써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180이니 190이니 하면서 제 아무리 아이큐가 높다고 떠들어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멍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셋째는, ‘기술’입니다. 이것이 능력이자 실력입니다. 제 아무리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그 지식에 따라 행할 수 있는 실천 능력이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그리고 넷째로는, ‘태도’(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고 지식이 있고 기술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삶의 자세가 잘못되어 있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세는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학생은 공부하는 자세가 좋아야 되고, 직장인은 일하는 자세가 좋아야 됩니다. 신앙인은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자세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성실하게 임하는 바른 자세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커밍 워크’ 교수는 성공의 요인 마지막으로 ‘믿음’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믿음이 성공의 큰 요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은 전지전능하신 ‘엘로힘’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믿음은 생명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믿음은 고백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그 사람이 고백한대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의 영웅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이 시는 시편 18편과 거의 같은 내용의 시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10년 이상을, 사울의 추격을 피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사울이 죽고 난 후에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왕이 된 후에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주변 여러 족속들을 제압하고, 번성과 평화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바로 이 시절에 다윗은 지난 시간들을 돌아보면서, 크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으로 영광을 돌렸습니다. 그의 찬송 시는 오늘 우리에게 도전이 되고, 위로가 되며, 귀감이 되는 찬양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의 감사와 찬송이 우리의 것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22장은 1절의 “여호와께서 다윗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다윗이 이 노래의 말씀으로 여호와께 아뢰어”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여호와의 구원을 체험한 다윗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합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노래하는 이 표현들은, 여러분도 잘 아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 즐겨 사용하는 용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하나님이 나의 반석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면서, ‘나의 반석’이라고 외치고, 나를 고통과 위험에서 건져 주기를 기대하면서 ‘나를 건지시는 자’라고 외칩니다. 다른 표현들도 모두 하나님이 나에게 그런 분이 되어주기를 기대하며 외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도와주시고, 위험에서 건져주시고, 힘이 되어주시기를 기대하면서, 그러한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자로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3절의 마지막에 보면 “나를 폭력에서 구원하셨도다”라고 말하고, 1절에서도 하나님이 구원하신 그 날에 노래를 부르는 것으로 말하고 있음을 볼 때, 다윗의 노래는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구원을 경험한 자의 노래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노래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하나님’ 등으로 표현한다고 해서, 다윗과 같은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하나님을 노래하는 찬양은, 하나님께로부터 베풀어지는 구원을 경험한 자들만이 부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먼저 알아야 하는 것은,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 어떤 것인가를 아는 것이고, 여러분이 그러한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깊이 자각할 때, 다윗과 같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4절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
그런데 이 내용을 보면, 구원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구원하실 하나님으로 찬송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실 것을 기대하고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4절의 내용은 하나님의 구원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다윗이 자신의 남은 모든 일생이, 하나님의 구원 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날마다 계속되어지는 것임을 의미하는 내용인 것입니다. 따라서 다윗의 노래가 우리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다윗이 경험한 구원이 우리에게도 동일한 경험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구원’을 말할 때 ‘천국’을 연상하게 됩니다. 장차 천국에 가게 되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계시는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 구원인 것은 사실이지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이미 그 나라의 백성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된 것 역시 구원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구원을 장차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만 생각하면서, 마치 지금은 아직 구원 되지 못한 상태에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다윗이 경험한 구원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때는, 죽은 후에 천국을 경험하고 부르는 노래가 아닙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 날에, 하나님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으로 말합니다. 곧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은, 다윗의 원수와 연관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죽이고자 했던 원수, 그리고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이, 다윗이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하나님이 우리를 우리의 모든 원수와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것을 경험한다면, 다윗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아마 조금은 이해하기 힘들어 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 자신을 생각할 때, 나를 죽이고자 하는 원수도, 사울과 같은 존재도, 없다고 여겨진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전에도 누누이 말씀드린 것처럼, 여러분께 원수가 없다고 여겨진다면, 또한 여러분을 대적하는 사울과 같은 존재가 누구인지 아리송하다면, 여러분은 지금껏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마땅히 있어야 할,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전투가 없이 살아왔다면, 그것은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오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원수란 하나님 편에 서 있을 때, 그 실체를 알 수 있게 되는데, 항상 내 편에 서서 날 위한 삶에 몰두 했기에, 원수가 누구인지 조차 알지 못한 상태에서, 단지 입술로만 하나님을 부르는, 무늬만 성도인 삶에 머물렀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의 원수, 사울이 우리에게 밝혀주는 원수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먼저 다윗의 원수들을 보면, 반역을 한 압살롬이나, 세바, 다윗을 저주한 시므이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대표적으로 사울이 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다윗을, 백성들이 ‘다윗은 만만이요 사울은 천천이라’고 칭송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습니까? 백성들이 사울 자신보다 다윗을 더 칭송하는 것에서, 사울은 위태로움을 느꼈던 것이고 다윗을 시기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제거함으로써 왕의 자리를 보존하고, 다윗에 의해 상대적으로 추락하는 것 같은 자신의 위상을 지키고자 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울의 이러한 모습에서 누구를 볼 수 있습니까? 바로 여러분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역시 사울의 입장이 되면, 사울과 같은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지 않습니까? 다윗을 향한 사울의 미움이, 우리들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사울의 시기 역시 우리들의 모습 그대로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는 것 역시, 우리도 사울의 자리에 있으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또한 다윗을 반역했던 압살롬은, 권력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압살롬 역시 우리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세바나 시므이 이들 모두 역시, 내 속에 있는 나의 실체가 나와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결론은 우리에게 있어서 원수란, 외부에서 나를 괴롭히는 어떤 존재를 의미하기보다는, 내 속에 존재하며, 나를 붙들어 사울의 길로, 압살롬의 길로, 다윗을 대적했던 자들의 길을 가게 하는 세력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구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붙들고 있는 악한 세력에 의해, 끌려가고 있는 나를 구출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을 경험하는 것이 바로 다윗의 구원의 경험과 일치하는 것입니다. ‘나를 나의 원수의 손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성도라면 이러한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것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죄에서 구원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만드신다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성도는 모두 죄를 짓지 않는 자로 변해야 합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분명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성도는 예수님의 구원의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 경험이 있느냐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구원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막연하게 천국 가는 것만 생각하고 살았기에,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신앙 아닌 신앙에 머물러 살아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살인, 강도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이 죄가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죄로 인해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사람의 악함을 아시기에, 다시는 사람으로 인해 땅을 저주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악함은 정결한 제물의 희생의 피로 담당하게 하셨습니다. 누구든 희생의 피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언약으로 세우신, 희생 제물의 피도 멸시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심판 받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의 희생을 멸시하는 것이야 말로, 심판의 이유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세상의 죄는, 세상이 자신의 악함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내셔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신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악함을 깨닫게 하시고,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사울과 압살롬처럼, 다윗의 원수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나의 악함을 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악함을 보게 되면, 나 스스로의 힘으로 대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내 속에 있는 시기와 미움, 권력을 추구하고, 날 위해 살아가는 나의 본질을, 내가 상대하여 제거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십자가에 피 흘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로 노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구원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내 속에 있는 대적을 발견할 때마다,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는 노래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은 한번이 아니라, 날마다 계속되는 것이라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5-7절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이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이 노래가 우리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돈 벌어서 자식 키우고,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다. 그러한 현실은 하나님의 책임 아래 주어지는 것들입니다. 하늘의 참새까지도 하나님이 살게 하신 것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이라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각대로, 하나님의 의지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스올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른 것입니다. 과연 이런 현실은 보고 삽니까? 아니면 돈이 필요한 현실,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현실만 보입니까?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 진정한 현실은, 원수가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내 힘과 내 열심과 나의 의지로, 하나님을 믿을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만약 내 의지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는, 세력의 강함과 현실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날마다 구원이 필요한 자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날마다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의 악함을 알고, 나의 악함을 스스로 어찌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임을 알기에,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제도 나를 구원하신 구원자에게, 오늘도 구원해주기를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간의 열심을 강조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이 어떠한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맹인이기에 바리새인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신앙을 지키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수의 실체에 대해 무지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반석으로 존재하고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기특한 나를 도와주는 분으로만 여길 뿐입니다. 여러분 안에 존재하는 원수의 실체를 발견하고, 그 원수를 대적할 수 없는 여러분의 연약함을 깊이 절감하기 바랍니다. 그럴 때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자, 내가 피할 나의 반석의 하나님,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뿔, 나의 높은 망대, 그에게 피할 나의 피난처, 나의 구원자’라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가 부르는 찬양입니다.
7절 ‘내가 환난 중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아뢰었더니, 그가 그의 성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나의 부르짖음이 그의 귀에 들렸도다.’
다윗은 고난 중에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마침내 응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기도에 크신 권능과 위엄으로 역사하셨습니다. 8절 이하에서 다윗은 이때 경험한 하나님의 권능을, 우리 곁에 있는 자연 현상으로 생생하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은 지축을 흔드는 지진처럼 다윗에게 임하시고, 원수에게는 하나님의 진노를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코에서 연기가 나오고, 입에서 불이 나와 대적을 불사르는 것처럼 역사하셨습니다. 이것은 활화산을 연상하는 표현입니다. 활화산 봉우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용암이 솟아나고 불꽃이 일어나는 것처럼, 엄청난 위엄으로 역사하셨습니다. 맑은 하늘이 갑자기 변하여 검고 두터운 구름이 몰려와서는, 온 세상을 뒤덮고 어둑캄캄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왠지 모를 두려움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이 표현은 하나님이 불의한 자들을 향하여 진노하사, 그들의 얼굴을 덮어버리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만들며, 하나님의 심판 앞에 두려워 떨게 한다는 뜻입니다.
11절에서 그룹이란 하나님의 보좌 주변에서, 하나님을 모시는 천사들을 의미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룹들을 타고, 이 땅에 강림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람 날개 위에 나타나셨다는 것은,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잡기 위해서, 공중에서 지상으로 쏜살같이 내려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그룹 천사들을 타고, 이 땅에 쏜살같이 오시어 우리의 원수를 심판하신다는 뜻입니다. 12절에서 하나님은 이 땅에 내려오실 때, 불의한 자들에게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얼굴을 보이지 않으시려고, 흑암 곧 모인 물과 빽빽한 구름으로 얼굴을 가리십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칠흑같이 어두운 하늘 아래서, 더 두려움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13-15절에서 말하는 광채는 번개를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얼굴과 영광이 검은 구름으로 감추어져 있는데 구름 사이로 하나님의 권능이 번개처럼 번뜩인다고 하였습니다. 검은 구름 사이로 번개가 내리치면, 몇 초 후에 엄청난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습니까?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크신 권능으로 원수를 심판하신다고 찬양했습니다. 하나님은 화살을 날려서 원수들을 흩어지게 하시고, 번개로 그들을 무너뜨린다고 다윗이 고백했습니다. 16절의 꾸지람과 콧김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물 밑과 땅의 기초는 다윗 자신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원수를 심판하실 때, 환난을 의미하는 물에 눌려있던 다윗이, 물밑이 드러나듯 다윗이 자유롭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이처럼 크신 위엄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권능을 노래했습니다. 그 권능에 힘입어 자신이 구원을 경험했다고 간증했습니다.
17-20절 ‘그가 위에서 손을 내미사 나를 붙드심이여, 많은 물에서 나를 건져내셨도다. 나를 강한 원수와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지셨음이여, 그들은 나보다 강했기 때문이로다. 그들이 나의 재앙의 날에 내게 이르렀으나, 여호와께서 나의 의지가 되셨도다. 나를 또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나를 기뻐하시므로 구원하셨도다.’
17-20절은 다윗의 구원경험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위험의 수렁에서 붙잡아 올리시고 많은 물과 같은 위기에서 건져내셨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강한 원수와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건져내셨다고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재앙의 날을 맞이했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의지가 되어주셨다고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자신을 넓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구원해주셨다고 감사했습니다. 또한 다윗의 구원의 경험은 우리 모두의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원수 마귀 사탄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셨습니다.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져 올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생의 여러 가지 환난과 위험에서 구해주셨습니다. 내가 질병으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사건과 사고를 당하여 괴로워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음은, 우리 모두 다윗처럼 영혼과 육체의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그의 위엄과 능력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환난을 당했을 때,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바랍니다. 능력의 주님은 언제든지 크신 오른 팔을 펼치시어, 환난에서 건져주시고, 푸른 초장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다시 소리 높여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다 함께 다윗처럼 구원자 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피난처 되시고, 방패가 되시고, 요새와 산성이 되시니 감사합니다.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립니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도록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거하며 하나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를 베풀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의지하며 악한 세력들을 대적하게 하옵소서. 믿음으로 나에게 닥쳐진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믿으며, 주님의 보이지 않는 보호하심의 손길에 감사하면서, 당당하게 생활하게 하옵소서. 불안해하며 걱정하는 대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기도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