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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도주일
신앙 성숙과 종교 중독 사이에서
사무엘상 15장 18-23절, 호세아 6장 4-10절, 요한복음서 4장 21-26절
한 문 덕 목사/ 채 경 숙 장로
[평신도 설교의 의미]
제가 우리 생명사랑교회의 첫 담임목사로 취임한 공식적인 날짜는 2015년 11월 22일입니다. 그런데 제가 공동의회를 통해 담임목사로 확정되고 난 이후에 우리교회에 처음 출석해서 했던 첫 설교는 10월 18일 추수감사주일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넉넉한 마음”이라는 제목으로 여러분에게 설교를 했습니다. 그날 주일예배 기도는 채경숙 장로님이었습니다. 물론 그 때는 집사님이셨지요! 그 기도문의 일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돌이켜 보건데, 3년 전 교만하고 이기적이었던 우리의 모습은 참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서로 다른 생각에 귀 기울이고, 기다리며, 시간이 걸려도 함께 가고자하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이제 주님, 우리 교회가 한문덕 목사님과 함께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려 합니다. 애써 뿌린 씨앗이 추수를 앞두고 가을가뭄으로 쭉정이가 되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는 농부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3년의 시간을 씨 뿌리고 가꾸었던 목사님과 장로님, 성도들의 그 공들인 정성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이제는 우리 모두가 가을비가 되고 추수꾼이 되어 풍성하고 아름다운 열매를 주님 앞에 드릴 수 있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지금까지는 힘들었던 우리의 신앙을 다잡고, 갈등의 마음들을 화합해가며 내적인 힘을 키우는 시기였다면, 이제는 우리들만 행복하고 우리끼리 만족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우리의 신앙의 눈을 밖으로 확장하는 시작이 되게 하옵소서. 크고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양심으로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을 작기 때문에 할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게 하옵소서.
이 기도는 생명사랑교회가 산고의 아픔을 겪고 3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더 성숙한 공동체로 나아가고 있음에 감사드리면서, 생명사랑교회가 교회구성원들끼리만 만족하지 말고 그 선교의 역량이 더욱 확대되기를 간구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올바르게 성장하고, 세상의 어둔 그늘을 비추는 참 빛이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와 교인들의 신앙적 성숙이 필수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평신도 중심의 사역이라는 목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여신도 주일로 예배를 드리면서 처음으로 평신도 설교를 시도합니다. 우리는 제직이면 누구나 주일예배에서 목회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생명사랑교인으로서 예수님을 진실되게 따르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깊이 묵상했던 말씀을 삶에서 실천했던 경험을 중심으로 설교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전문적으로 신학적 훈련을 받은 목사와는 여러 지점에서 다를 것입니다. 설교를 하는 당사자는 많은 부담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이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은 말씀을 훨씬 다양한 관점에서 묵상하고, 교인들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하나님의 마음에 더 깊게 다가가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목회자의 도움을 받아 진지하게 준비해 보면 평신도 설교는 신앙 성숙에 큰 도움이 됩니다. 따라서 저는 앞으로 우리 교인들이 주체적인 신앙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읽어내며, 하나님 나라를 실천하는 다양한 삶의 경험들을 나누는 시간들을 기회가 되는대로 가져 보고자 합니다. 새로운 시도는 언제나 설레면서도 한편으로 두렵기도 하지만, 이런 노력들이 우리교회가 세상의 변화에 적절히 대응하는 훈련이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것]
우리가 오늘 함께 읽은 두 본문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는 이 유명한 말씀의 근거가 되는 사무엘상의 오늘 본문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좀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하나님은 오늘 사울 왕에게 못된 아말렉 사람들을 진멸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사울은 약탈하는 데만 마음이 쏠려서 하나님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다고 사무엘 예언자에게 꾸짖음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말대답을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께 순종했고, 다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진멸할 짐승들 가운데서 좋은 것을 가지고 왔다고 말합니다. 이 본문의 앞 뒤 맥락을 생각하면서 가만히 읽어 보면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를 우리는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매우 높은 도덕성을 추구하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변 국가의 못된 가치관이나 습성, 분위기에 물들까 염려하여 그것들을 전부 제거할 것을 사울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마음은 다른 것에 있었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앞세워 자신의 유익을 위한 약탈에 나섰고,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한 것들을 자기의 소유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래놓고 예언자가 책망하니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가져왔다고 뻔뻔하게 둘러댔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악을 제거하라는 것이었는데, 사울은 폭력을 일삼으면서 자신을 위한 약탈을 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처럼 속였던 것입니다. 호세아 예언자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랑이지, 제사가 아니다. 불살라 바치는 제사보다는 너희가 나 하나님을 알기를 더 바란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폭력이 난무한 세상에 대해 한탄하십니다. 즉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랑과 평화를 이뤄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구약의 말씀은 명백히 하고 있습니다.
혹시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잘못을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심히 두렵고 떨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너희는 나를 제대로 알고 있느냐? 내 마음이 어떤지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라고 물었을 때, 정말로 옳게 대답하고 하나님 앞에서 흠 없이 의롭다는 말을 들을만한 교인들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이제 이어서 요한복음서의 말씀을 중심으로 신앙 성숙과 종교 중독 사이에서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자리를 찾아야 하는지 채경숙 장로님의 설교를 통해 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한문덕 목사)
[여신도 주일과 여성 장로의 책임]
안녕하세요? 매주일 뵙는 얼굴이고 분기별로 이 자리에서 예배를 인도하지만 설교자로 이 자리에 서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오늘이 여신도 주일이라 여성 장로인 제게 평신도 설교를 부탁 하셨을 텐데요. 부족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고 함께 공감해주시기를 바라면서, 설교를 시작하기 전에 언젠가 꼭 드리고 싶었던 말씀이 있었는데 이 자리를 빌어 하는 게 좋겠다 싶습니다.
생명교회에서부터 여성 장로에 대한 기대가 무척 컸음에도 불구하고 참 오랜 시간이 걸려 우리 교회 첫 여성 장로가 된 저는 책임이 무거운 만큼 부족함을 많이 느낍니다. 사실 특별히 여성 장로로서의 역할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아직 제 역할을 못하고 있는 저를 보시고 굳이 여성 장로가 필요한가? 하시며 회의적으로 생각하시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전국 기장 노회 26개 중에서 여성 은퇴 장로 수보다 시무 장로가 적은 노회가 6개가 있는데 수도권에서는 유일할 뿐 아니라 그 비율차가 가장 큰 곳이 바로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서울북노회입니다. 은퇴 장로가 24분이신데 시무장로가 14명뿐입니다. 저는 다른 어떤 교회보다 민주적이고 진보적이라 자부하는 우리 교회에서부터 여성 장로의 진출이 더 많이 확대되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만이 아니라 노회, 총회에서도 활발히 활동할 여성 장로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많은 여성 장로 대기자들에게 부탁드립니다.
[믿음과 중독 사이]
오늘 설교는 지난 11월 평신도 강단교류로 용인에 있는 고기교회에서 했던 내용을 하려고 하였으나, 지나고 다시 보니 많이 부족하기도 하고, 그곳 교인들과 나눈 이야기와 우리교인들과 나눌 이야기가 다르기도 해서 많이 수정하였습니다.
지난해 제가 설교했던 평신도 강단 교류의 주제가 <종교중독과 관련하여 그리스도교의 본질에서 너무 이탈한 한국교회와 교인들의 신앙을 점검하고 “바로 알고 옳게 믿도록 돕는 것”> 이었습니다. 이 주제를 듣고 저는 그동안 막연히 거부감을 가졌던 열성적인 신앙인들의 부정적인 모습들이 떠오르더군요. 교인들 스스로는 구원의 확신에 차 열성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믿고 있지만, 왜 우리들의 신앙은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기독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차가울 뿐 아니라 예수까지 부정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오늘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기 위해 가져야할 본질적인 가치! 교회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그 가치를 제대로 알고, 우리 삶의 지표로 삼고, 그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타인을 대할 때 우리가 비그리스도인과 구분이 되겠지요. 이 가치 기준이 바로 서지 못하거나 흔들릴 때, 그리스도인들이 사회의 지탄이 되는 종교 중독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 요한복음의 본문 말씀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이 만나서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이 본문 내용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눈여겨보고자 하는 것은 이 사마리아 여인의 변화 과정입니다. 유대인들이 상종하기를 꺼리는 사마리아 사람에다가, 남편이 여섯이나 되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우물에 나오지 않는 정오에 마실 물을 길러 나온 이 여인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구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옳게 예배하고 있는지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다”, “예배드리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이다”, “네가 기다리는 메시아가 나다”라고 말입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그동안 혼란스러웠던 자신의 삶과 신앙을 다시 점검하게 됩니다. 신앙의 본질에 대한 고민이 예수님을 만나 해답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죄인 취급하던 그 동네로 들어가 사람들에게 당당히 말합니다. 여기 그리스도가 있다고.
[세상을 향하여 – 생명, 평화, 정의]
극단적인 표현이기는 하지만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그리스도 교회가 이웃사랑을 줄기차게 외치면서도 동시에 배금주의와 지독한 집단 이기주의적인 행태까지도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대부분의 그리스도교 신도가 마치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교회 안에서는 천사요 밖에 나가면 악마’로 행세하는 이중인격자」라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것이 최근에 논란이 되고 있는 교회와 관련된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그리스도교가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하나의 이익집단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선택이 옳았다고 믿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회의 비판을 <사탄의 박해>라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는 성령이 충만한 신앙인일지 몰라도 세상도 예수님도 인정하지 않을 그들의 신앙은 분명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진리가 결여되면 맹목적인 중독이 되기 쉽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사회에서 종교중독으로 지탄받는 교회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그 진리가 결여된 것이 아닐까요? 그들에게 부족한 진리란 무엇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저는 예수님이 이 땅에서 몸으로 보여주신 생명과 평화,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생명, 평화, 정의>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보다 먼저 구하라고 하신 “그 나라와 그 의”에 가장 합당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고, 예수님의 삶이 그러셨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우리는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하고 능률과 업적을 올리기 위해, 효율과 합리라는 아주 그럴듯하게 포장된 말로 세상에서 소외시킨 사람들의 눈물에 무심합니다.
우리는 능력에 따라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남녀의 차이, 학력의 차이, 지위의 차이가 차별이 되어도 인지하지 못하고 넘어갑니다. 오늘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사고, 폭력과 차별의 대상이 내가 아닌 것에 감사할 뿐이고, 그 피해자들의 아픔은 외면합니다. 미친 집값을 비판하면서도 내 집값은 오르기 바랍니다.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사회복지가 확대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내가 세금을 많이 내야한다면 싫어합니다. 내가 좀 더 편해지고 이익이 된다면 남들도 다 하는 약간의 불법과 편법은 괜찮겠지 하고 생각합니다. 자본의 가치는 높게 평가하면서 노동의 가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사람보다 돈을 우선하고, 불편하고 손해 보는 정의보다 간편하고 이익이 되는 불의를 쫓는 것이 현실적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생명, 평화, 정의와 같은 가치를 말하면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거나, 아직 배가 덜 고파서 그렇다고 핀잔을 합니다. 이렇듯 우리 안에는 끊임없이 세상적인 속성들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지난번 제가 가서 이 말씀으로 설교했던 고기교회 홈페이지에는 2016년 6월 50주년에 맞춰 <희년을 맞이하여 고기교회가 드리는 공동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생명의 하나님,
고기교회가 처음자리의 작은 생명들을 보듬어 주님 나라의 온전함을 닮은 아름다운 생명세계를 가꾸어 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주님의 창조 질서를 어그러뜨리는 무분별한 개발과 핵발전소의 건설이 멈추어지고, 모든 생명들이 주님의 섭리아래 조화롭게 공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정의의 하나님,
저희로 하여금 자본을 숭배하는 세상에 맞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의 소중함을 알게 하시며 고난 받는 이들의 애통함을 위로하며 그 어둠 속에 함께 있을 수 있는 힘을 주시옵소서. 고향을 등지고 떠도는 난민들, 삶의 터전에서 밀려난 이주민들, 길거리의 노숙자들, 경쟁으로 시들어가는 청소년들, 빈곤하고 외로운 노인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을 돌아보고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이웃의 곤궁함을 보살피며 저희의 밥상을 덜어낼 수 있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세월호 유가족들의 억울함과 고통을 기억하시는 주님, …… 저희가 그 곁을 떠나지 않고 함께 기도하게 하여 주소서.
평화의 하나님,
70년 동안 분단된 채 서로를 미워하는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인권과 자유를 억압당한 채 곤궁한 생활을 하고 있는 북한 동포들을 위로하시고 남북이 평화를 향해 민족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도록 이끌어주소서. 저희와 함께 하시어 형제를 향한 적대감과 증오를 자식에게 물려주지 않게 하소서.
저는 이런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공동의 기도문을 만들어 낸 고기 교회가 참 부러웠습니다. 이러한 가치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한국 교회가 지향해야할 신앙의 모습이 아닐까요?
[타인을 향하여는 사랑, 나 자신을 향하여는 귀족적 자의식]
“대인춘풍(待人春風) 지기추상(持己秋霜)” 남에게는 봄바람 같이 나에게는 가을 서리처럼 즉 타인에게는 따뜻하게 자신에게는 엄격하게 대하라는 채근담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 저부터도 거꾸로 행하는 모습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타인에게는 준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타인을 대할 때의 기준이 봄바람같이 따뜻한 사랑이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명확하고, 그동안 들은 말씀이 넘치고 넘쳐서 굳이 이 자리에서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보다 더 엄격하고 더 높은 도덕적 기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침마다, 대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하고 시작하겠지만, 세상은 우리에게 세상의 가치 기준에 따라 살라고 끊임없이 압박합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라고 오늘도 파이팅을 외칩니다. 그것이 권력이든, 명예든, 재물이든. 만나는 모임마다 부동산과 주식, 재테크 이야기입니다. 이웃 누군가의 합격과 승진, 성공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결국 세상이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은 집과 차의 크기, 사회적 지위와 학력, 직업-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했느냐 인 것 같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대접 받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기준에 좀 더 다다르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이 원하는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귀하고 거룩한 존재>로서 스스로의 가치를 평가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품격 있는 절대적 존재로 성숙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의 기준에서는 조금 부족하더라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기 스스로를 존귀하게 여기는 귀족적 자의식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를 통하여 드러나는 하나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두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자하는 작정한 이상 세상의 가치보다 더 우월한 자의식으로 품위 있는 사람, 품격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다는 것]
여러분의 올해 목표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기도 제목은 무엇인가요? 지난 주에 만난 친구와 어떤 대화를 나누셨나요? 여러분이 검색하고 관심 있게 보신 기사나 글은 어떤 내용이었나요? 아마도 그것이 여러분의 삶을 주관하는 생각과 가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아닐까요?
어느 누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실천을 신앙의 최우선으로 삼고, 어느 누구는 생명을 살리고 평화로우며 정의로운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일을 신앙의 가치로 삼고, 어느 누구는 자신의 신앙성숙을 위해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며 경건한 삶을 살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 것들은 어느 하나 소홀히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기본 가치이기에, 이것들이 서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어느 하나에만 매일 때, 자칫 우리도 신앙 성장과 종교중독 그 사이 어딘가에서 혼란스러워하는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세상에 대해서도 늘 깨어있는 마음으로 돌아보며, 관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세상의 지탄을 받는 종교중독자가 아니라 올바른 신앙인으로서 세상에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채경숙 장로)
다함께 기도하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하나님, 우리의 삶이 주님께서 삶으로 보여주신 생명과 평화와 정의를 기준 삼아 세상에 휘둘리지 않게 하시고, 타인에 대해서는 사랑으로 섬기며, 스스로는 귀족적 자의식을 품은 품격 있는 사람이 되어 세상에서 귀히 여기는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감사기도
하나님!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올 한해, 우리의 삶이 분주하고 여유가 없을 지라도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게 하소서. 살다보면, 슬픈 날도 있고 기쁜 날도 있고, 죄의식을 느낄 때도 있고, 고마움을 느낄 때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이 품고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면서 자신의 일에 취하여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거나 세상이란 벽에 자신을 걸어 놓고 불안에 빠져 있지 않게 하소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는 말씀에 따라 이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단순함과 순결함을 유지하되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모든 어려움을 잘 헤쳐 나가게 하여 주소서. 우리가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자매로 서로 사랑하게 하시고, 서로 사랑함으로 늘 행복하게 하소서. 우리의 사랑이 힘 있고 아름답게 피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주님의 전에 나올 때에 우리의 몸과 마음과 예물을 가지고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한 없는 사랑에 감사하여 우리의 전 삶과 모든 것을 바친다는 의미로 당신께 예물을 드립니다. 이 예물을 받으시고 이 예물이 생명사랑교회의 사역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데에 올바로 쓰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 파송사
사랑하는 생명사랑교우 여러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걸어 나가십시오. 올해도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여러분의 선한 삶으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십시오.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성숙한 신앙으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선교 사명을 감당하려는 생명사랑 교우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