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와 시기
한나 안 /글무늬문학사랑회
보랏빛 도라지 꽃이 필법도 한데 한여름이 지나고 찬바람이 아침저녁 이는 5월이 되어도(한국계절 11월) 꽃이 피질 않는다. 아파트 발코니에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텃밭을 생각하며 한 아름들이 초대형 화분 둘을 사서 화분 밑 부분에 자갈을 깔고 알맞게 흙을 채워 도라지 모종을 정성껏 심었다. 코스모스처럼 목을 쭉 빼고 줄기만 가느다랗게 자라 바람에 흔들릴 뿐 영 꽃 소식이 뵈질 않는다.
지난해 친구에게서 얻어온 까만 좁쌀 알 같은 도라지 씨를 소중하게 간직하면서 내년 봄에 씨 뿌려 잘 길러보아야지 했는데 너무 잘 두어서인지 도통 씨앗봉투를 찾을 수 없어 잊고 지내다 봄이 지나고 12월(한국계절 6월) 에서야 파종을 하게 됐다. 작은 컵처럼 생긴 플라스틱 묘목 판에 씨를 발아시킨 후 조금 더 자라면 모종을 해야지 했다. 보름쯤 지나니 샛노란 두 쪽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어린 도라지 모종들은 쑥쑥 잘 자라 연한 새싹들의 사랑스럽고 예쁜 모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아침마다 요 녀석들 보기 위해 일어나면 발코니로 먼저 나가 세심히 살피었다. 혹시나 밤 동안 쥐가 시식하지 않았나 하고 둘러보고 날마다 물을 주며 그 시중을 들었다. 발코니 화분 가득 보랏빛 꽃이 피면 무척 아름다울 거라는 기대 속의 꿈도 날로 커갔고 가을에는 도라지를 캐면 고추장에 박아 맛있게 먹어봐야지 하는데 꽃 소식은 영 보이질 않고 잎들만 무성하게 자란다. 씨를 나눠준 친구 집에 가봤더니 친구네 텃밭에는 투실투실하게 자란 꽃대에 도라지 꽃들이 만발했다. 친구 말인즉 파종시기가 늦어서 일거라 한다.
얼마 전 시내 조이지 스트리트 건널목에서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동안 건너편 에서 이쪽 편으로 건너오려는 사람들 속에 잡지책에서나 볼법한 패션모델 차림의 노랑머리 숙녀가 눈에 띄었다. 챙이 넓은 베이지색 모자에 가슴 쪽은 중국 전통 옷처럼 이쪽에서 다른 쪽으로 주름을 굵직하게 넣은 디자인 상의에 인어스타일 하얀 긴 치마는 발등까지 끌리고 있었다. 한눈에 봐도 어느 패션쇼가 끝나고 금방 나온듯한 차림이다. 옷차림이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신호가 바뀌고 이쪽으로 건너오는 그 여인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니 70세는 되어 보이는 주름투성이 할머니였다. 옷차림과 짐작되는 나이가 따로 노는 느낌은 멋스럽다는 생각은 싹 가시고 불편하고 답답할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힘든 것은 어느 때이던 바른 선택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여긴다. 결혼도, 사업도, 친구도, 직장도 잡아야 할 때가 있고 놓아야 할 때가 있는 것 같다. 어느 쪽을, 무엇을 잡고 무엇을 놓을 것인가 ?, 누구를 잡고 누구를 버리고 결혼 할 것인지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이 지배되는 것 같다. 친구 역시 마찬가지인 듯하다. 몇 일전 핸드폰 블록에서 읽은 기사에 <
파리의 뒤를 쫓으면 변소 주위만 돌아다닐 것이고 꿀벌의 뒤를 쫓으면 꽃밭을 함께 노닐게 된다> 는 글이 있어 혼자 빙긋이 웃었다. 바른 판단을 하는데 에는 문화와 교육도 한몫을 하고, 그 사람의 성품이 좌우 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 인생은 고스톱과 같다고도 했다. 고스톱 화투 게임에서 똑같이 분배하여준 패를 손에 들고 어느 패를 손에 들고 어느 패를 바닥에 놓느냐에 따라 승패가 정해진다는 말이다.
내게는 후회되는 선택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다시 시작한 학업을 포기 못하고 어찌 할 바 몰라 망설이는 동안 그 사람은 연기 같은 긴 한숨을 비행기 꽁무니로 내 뿜으며 하늘 길을 날아가고 말았다. 생각날 때면 어느 하늘 아래에 무엇이 되어 살고 있는 걸까? 가물가물한 기억이 오래된 먼지 속에서 꿈틀 이는 때가 가끔 있다. 때를 맞추는 게 매우 힘들던 시즌이 또 있었다. 서울 에서 회사에 근무하고 있을 때 일이다. 주식투자에 도사급인 K 과장의 주식강좌가 점심시간이면 회의실에서 있었다. 주식이라면 주자도 모르던 여직원들을 모아두고 처음에는 공모주 신청을 위주로 강의를 해주었다. 신통할 정도 재미있었다. 한전, 이동통신 주식 공모를 신청하였더니 겨우 3주, 5주 받았으나 금세 쑥쑥 올라가 몇 만원씩 되는 게 실감나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었다. 너무나 쉽게 돈을 버는 K과장의 설명에 푹 빠져 동료 몇 명과 주식의 늪 속에 점점 발이 빠져 들어갔다. 상한가를 쳐도 잠이 안 오고, 하한가를 쳐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주식의 움직임은 구름도 모르고 별빛마저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팔 때와 살 때를 머뭇거리는 동안 올라갔다가는 내려가고 내려갔다가는 어느새 올라가는 널뛰기의 주가는 오나가나 눈앞에 어른거리는 전광판과의 씨름이었다. 팔 때와 살 때를 맞추는 게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삶은 선택의 연속인 듯하다. 한국에는 지금 봄소식이 한창이고 이곳 저곳 꽃 잔치가 풍성하다. 티비에 비춰지는 탐스럽게 핀 벚꽃들 향연과 연분홍물감을 캔버스 가득 풀어 놓은 듯 만발한 진달래꽃 산들이 손짓 하며 가슴 설레게 한다. 호주에서 계속 살아야 하나 한국으로 가야 하나 요즈음 들어 다시 몸살을 앓고 있다. 때와 시기를 잘못 맞추어 입은 할머니 패션도 10월의 도라지도 되어서는 안 돼 하는 발걸음은 머뭇거리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