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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하드록이 시의 꽃이 되는 순간들
----이향이의 시세계
이형권(문학평론가)
구겨진 마음을 반듯하게 펴주는 말/ 한마디 말로 천 냥 빚을 갚는 말은/ 봄비처럼 촉촉이 주변을 적시고// 따듯한 말에는 꽃이 핀다―이향이, 「말 농장」에서
1. 바람의 정원에서 하드록
이 시집을 펼치자 「바람의 정원」이 먼저 눈 앞에 펼쳐진다. 장미의 정원에서 주인공은 장미이듯이, 바람의 정원에서 주인공은 바람이다. 바람이란 무엇인가? 바람은 다양한 시적 비유나 상징으로 활용해 왔다. 폴 발레리는 「해변의 묘지」에서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시구는 잘 알려져 있다. 이때 “바람”은 삶의 시련이라고 할 수 있을 터, 그런 시련 속에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견고하게 간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윤동주는 「서시」에서 “잎새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노래한다. 이 시구에서도 “바람”은 시대적, 실존적 삶에 다가오는 시련을 의미한다. 아무리 작은 시련일지라도 그것을 감내하면서 부끄럼 없이 살아가고자 하는 시인의 마음이 정결하다. 이처럼 서양의 시나 우리나라의 시를 막론하고 바람은 보통 인생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시련을 비유해 왔다. 그런데 이향이 시인의 「바람의 정원」에서 “바람”은 인생의 시련과는 조금 다른 의미를 내포한다. “당신이/ 바람이 되어 서성이던 곳”(「바람의 정원」 부분)이라는 시구를 보면, “바람”은 마음속에 존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부재(不在)인 “당신”과 동일시하고 있다. 아마도 “당신”은 항상 떠도는 존재이거나 이상적인 존재로서 “나”의 곁에 머물 수 없는 대상이다. 그러한 “당신”을 향한 시인의 열망은 강렬하다,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때가 있어요
겉이 조용할수록 속은 시끄럽죠
내 안은 하드록 콘서트장
가슴을 긁어 토해내는 레드 프랜트의 목소리가
폭발적인 드럼 소리가
당신을 향해 쿵쿵 뛰고 있어요
아마 모르셨을 거예요(「바람의 정원」 부분)
이 시에서 “겉이 조용할수록 속은 시끄럽죠”라는 말은 시인이 지닌 내면세계의 역설적 속성과 관련된다. 하여 “내 안은 하드록 콘서트장”이라는 시구는 자기의 내면에 대한 시인의 자기 고백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즉 하드록(hard rock)이 그러하듯이 “하드록 콘서트장”은 매우 격정적이고 역동적인 시인의 내면세계를 비유한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러한 내면세계를 간직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이 시에서 “당신”은 바람(風)처럼 떠도는 존재지만, “나”는 항상 함께 있기를 열망하는 바람(願)의 대상이다. 이때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종교적으로 추앙하는 대상일 수도 있고, 궁극적 이념이나 가치가 될 수도 있다. 한 시인에게는 “당신”이 시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신”을 향한 열정이 “하드록 콘서트장”처럼 역동적, 열정적이라는 사실이다. 이 시집은 그러한 열정이 언어와 시심의 정련 과정을 거쳐 시의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들을 다양하게 보여준다.
2. 사랑, 그 불안한 기쁨
이향이 시인은 사랑의 시인이라 명명해도 좋을 만큼 사랑을 주제로 한 시편들을 빈도 높게 보여준다. 사랑에는 종교적 차원의 아가페(Agape)도 있고, 마음의 호감과 관련된 필리아(Philia)도 있고, 남녀의 욕망과 관련된 에로스(Eros)도 있다. 인간은 이러한 여러 가지 차원의 사랑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이 가운데 시인들이 가장 관심 있게 노래하는 것은 물론 에로스 차원의 사랑이다. 남녀의 사랑은 동서고금의 시에서 가장 빈도 높게 다루어지는 일련의 주제 의식이자 시적 대상이다. 이것이 시적 대상으로 자주 호명되는 것은 그만큼 불완전하고 순간적이고 휘발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완전한 사랑은 원래부터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그러한 사랑을 향한 인간의 욕망은 그칠 줄 모른다. 시인은 사랑을 노래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완전한 사랑의 시가 불가능한 줄 알면서 부단히 사랑의 시를 쓴다. 그 부단함이 한 인간으로서 혹은 한 시인으로서 할 수 있는 사랑에 대한 최선의 예의이다.
부는 바람 손잡고
길 만들어
똑똑, 문 두드릴 테지
흐드러진 봄꽃 앞세우고
얼음 속에 갇혔던 너
햇볕 한 아름 꺾어 안고
초록 들썩이며 내게로 오네
사랑, 그건 불안한 봄
낮엔 아지랑이 가면을 쓰고
밤엔 하얀 벚꽃 모자를 쓰네
봄비 내려 젖을 만하면
어느결에 비 멈춰 있고
꽃 피어 향기 맡을 만하면
벌써 지고 없는(「불안한 봄」 전문)
이 시에서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겨울 동안 얼어붙었던 대지에 봄바람이 불면 천지사방 대지에 새싹이 돋고 꽃이 핀다. 사람들의 마음도 겨울잠을 깨고 사랑의 시간을 맞이한다. 봄이 되면 겨우내 “얼음 속에 갇혔던 너”는 “흐드러진 봄꽃 앞세우고”서 “내게로 오”는 것이다. 그 결과 “너”와 “나”는 “사랑”의 자장 속에 한 몸, 한마음이 되어 공존하게 된다. 그런데 3연에서 시인은 “사랑, 그건 불안한 봄”이라고 말한다. 새싹 돋고 봄꽃이 흩날리는 계절에 찾아온 “사랑”이 “불안”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간직할 수밖에 없는 사랑의 한계를 깨달은 자의 언어이다. “봄”이라는 계절이 순식간에 지나가듯이, “사랑”도 어느 순간 나타났다가 곧장 사라진다고 본 셈이다. “봄비 내려 젖을 만하면/ 어느결에 비 멈춰 있”는 것처럼, “꽃 피어 향기 맡을 만하면/ 벌써 지고 없는” 것과 같은 봄의 생리가 사랑의 속성과 똑같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인간의 사랑은 금세 지나가는 봄처럼 순식간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마는 속성을 지녔다. 그러나 인간은 사랑을 거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사랑은 항상 불완전하고 결여투성이의 속성을 지녔지만, 그런 속성 때문에 사랑은 오히려 영원한 지향의 대상이다. 사랑의 결여와 불완전은 그 충족과 완전을 향한 부단한 지향을 부추기는 동력이기 때문이다. 이 시는 이러한 사랑의 역설을 노래한 것이다.
한편, 이향이 시인은 사랑이란 대상에 대한 포용과 배려의 마음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것은 당연한 말이지만 행동으로 실천하기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항상 이기적인 욕망에 지배당하는 존재로서 사랑과 관련해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기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사랑을 하지 않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진정한 사랑은 이기적인 욕망을 멀리하고 이타적인 마음으로 충만해지는 상태를 의미한다. 아래의 시에서 “꽃”은 그러한 사랑의 속성을 비유한다.
긴 긴 여름 그 뜨거운 볕을
온몸으로 견디는 배롱나무
부러질 듯 휘어진 가지에 진분홍 꽃들이 피어있다
너의 가슴에 안겨 흐드러진 꽃 무더기로
피어나고 싶었을 뿐인데
그저 그랬을 뿐인데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
바람 세차게 불어와
차라리
꽃잎 우수수 떨어져 내려
너, 가벼이 숨 쉴 수 있다면
너로 인해 빛날 수 있었던
나 기꺼이 낙화하리
온 힘 다해 안아 준
아름다운 너를 보리(「배롱나무」 전문)
이 시는 여름날에 여기저기서 풍성하게 꽃피우는 “배롱나무”를 노래하고 있다. “배롱나무”는 사랑의 대상인 “너”이고, “꽃”은 사랑의 주체인 “나”를 비유하고 있다. “나”의 사랑은 “흐드러진 꽃 무더기”가 되어 “배롱나무”와 같은 “너의 가슴에 안겨” 있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데 “나”의 진실한 사랑은 “꽃도 무거우면 짐이 되는가”라는 시구에 담겨 있다. “꽃”은 아름다운 꽃이라도 너무 많으면 무거워서 힘들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배롱나무”를 걱정하고 있다. 이는 과도한 사랑은 상대방을 구속하거나 불편하게 할 수 있다는 인식과 관련된다. 하여 “바람 세차게 불어와/ 차라리/ 꽃잎 우수수 떨어져 내려”서는 “너”를 가볍게 해 주고 싶다고 소망한다. 이러한 마음이 드는 것은 “나”가 “너로 인해 빛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꽃”이 “배롱나무”로 인하여 활짝 필 수 있었던 것처럼. 하여 기꺼이 “낙화”로 꽃의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너, 가벼이 숨 쉴 수 있”게 해 주고 싶다고 소망한다. 이는 자기희생을 감내하면서 사랑을 추구하는 인간의 아름다운 모습일 터, 그 구체적인 모습을 시인은 “배롱나무”에 붉게 피어나는 “꽃”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사랑에 대한 사유와 상상은 다른 시에서도 “한 번도 남자 아닌 적이 없었으면서도/ 한 번도 남자인 적이 없었던/ 그대가/ 오늘도 꽃으로 피어 있다”(「첫사랑」 부분), “그의 어깨를 누르던 시간이/ 가벼워졌으면 해요/ 멀리서 달려온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다정히 그의 손을 잡을 테지요”(「나무가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부분) 등의 흥미로운 표현을 얻는다. 앞의 시구에서 인간이면 누구나 마음 깊이 남아있는 첫사랑의 기억을 “남자”라는 이성적 존재이자 그 이상의 존재로서 “오늘도 꽃”이라는 현전의 대상으로 노래한다. “첫사랑”이 지닌 역설적 의미를 간파한 시구이다. 뒤의 시구에서 시인은 “나무”가 되어 “그의 어깨를 누르던 시간”에 희망의 “햇살”이 비추기를 소망하고 있다. 이러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세상은 온통 사랑으로 충만하지 않을 수 없다.
볼 붉은 봄비가 짓궂게
땅을 툭툭 치며
새초롬한 나뭇가지 살살 어르고
늦도록 고개 내밀지 못한 초록
손잡아 돋아주며
수줍은 꽃망울 터트리고
아찔한 꽃세상 만들어
하늘과 땅은 서로 달아올라
시방
천지사방은 대놓고 연애 중(「볼 붉은 봄」 전문)
“봄비” 내리는 봄 풍경을 묘사하고 있는 시이다. “봄비”는 온 세상에 “초록”이 돋아나고 “꽃망울을 터트리”게 하는 봄의 전령사이다. “초록”과 “꽃”이 어우러져 “아찔한 꽃세상을 만들어” 주는 것인데, “꽃세상”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 충만한 세상이다. 주목할 것은 봄의 풍경을 “하늘과 땅은 서로 달아올라” 있다고 묘사하는 부분이다. “봄비”로 인해 새 생명이 태어나는 모습을 “하늘과 땅”의 에로스로 상상하고 있다. 이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봄비”의 속성을 남녀를 하나로 이어주는 사랑의 행위로 상상한 결과이다. 사랑은 단지 남녀 사이의 에로스를 넘어 하늘과 땅, 음과 양의 조화를 의미하는 전 지구적 온 생명의 원리라고 보는 것이다. 하여 “시방/ 천지사방은 대놓고 연애 중”이라는 의미심장한 시구가 탄생한다. 사랑은 남녀 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세상과 우주를 지배하는 원리라는 “아찔한” 인식에 도달한 셈이다.
3. 너를 환대하는 마음
이 시집에 자주 나타나는 사랑의 시심은 타자를 향한 환대의 마음으로 확장되기도 한다. 타자는 주체와 상대적인 것으로 인간과 자연, 정신과 육체, 남성과 여성, 이성과 감정, 의식과 무의식, 정주민과 이방인 등에서 후자에 속하는 것들이다. 타자는 근대적 사유에서 소외된 존재이지만, 탈근대적 사유에서는 주체에 못지않은 가치를 지닌 것으로 중시된다. 해체철학자 데리다는 환대에 대하여에서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는 타자를 향한 환대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이름을 묻지도 말고, 나의 집을 열 것을, 자리를 내주고, 절대적 타자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조건부 환대를 넘어선 절대적 환대로서 현대 사회에서 이방인을 대하는 데 요구되는 정신적 자세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상을 주체와 타자의 우열적, 이원적 대립 관계로 보는 경직된 사고를 해체하여 타자를 함께 살아야 할 존재로 보는 것이다. 이 시집에서 노숙자(homeless)에 관한 시편들은 그러한 인식을 드러낸다.
번잡한 윌셔대로 옆 골목, 아스팔트 틈 사이로 불쑥불쑥 돋아나 늙어버린 들풀 같은 텐트로 지어진 집들이 물에 젖어 내려앉아 있다 바닥과 지붕의 경계가 모호한 어떤 집엔 자전거 한 대가 아슬아슬 매달려 있고 그 곁으로 물기 털던 강아지 한 마리 주인을 보며 꼬리를 흔들고 있다
물 귀한 엘에이에
반가운 비가 내린 뒤
종이상자와 비닐로 지은 집 앞
비에 퉁퉁 불은 걸인 여인
외출하려는지
물기를 닦아내며 화장을 하고 있다
고층빌딩 숲 윌셔대로
일회용 커피잔 든 정장 차림 남자들과
하이힐 신은 젊은 여인들의
수선스러운 대화가 이어지는데
이 길엔 선한 사마리아인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바리새인 같은 나는 스치듯 지나치고
햇빛의 눈길만 측은하고(「천사의 도시」 전문)
이 시에서 “번잡한 윌셔대로 옆 골목”은 화려한 도시의 뒷면이다. 시인은 “들풀 같은 텐트로 지어진 집들”이 즐비하게 서 있는 그곳에 눈길을 주고 있다.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은 “걸인 여인”인데, 그녀는 마침 오랜만에 내린 비의 “물기를 닦아내며 화장을 하고 있다”라고 한다. 비의 “물기”가 얼굴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거주지인 “들풀 같은 텐트”가 얼마나 부실한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도시의 뒷면과 달리 그 앞면인 “고층빌딩 숲 윌셔대로”에서는 “정장 차림 남자들과/ 하이힐 신은 젊은 여인들”이 “일회용 커피잔”을 들고 돌아다닌다. 이들은 “걸인 여인”이나 “들풀 같은 텐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 길엔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라고 말하고, 자기 자신도 “바리새인 같은 나는 스치듯 지나치고” 말았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성경에 의하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타자를 환대하는 사람이고, 바리새인은 타자를 배척하는 이기적인 사람이다. 따라서 이 고백은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타자를 따듯하게 품지 못하는 이기적인 미국 사회에 대한 고발의 성격을 지닌다. 이 고백은 성찰과 반성과 관련되는 것으로서 타자를 환대하기 위한 첫걸음에 해당한다.
노숙자의 삶에 관한 관심은 “내일은 이곳에 촛불 몇 자루, 흰 국화 몇 송이 놓이겠다/ 얽힌 눈물 흘려 줄 이도 없이/ 홀로 지고 만 꽃 앞에”(「꽃들 지는 건 다 같다」 부분), “어두울수록 환해지는 밤이 오면/ 한때 꾸었던 꿈들의/ 지나간 시간이 등뼈를 세우고/ 발끝 시리게 하는 냉기는/ 달그락거리는 관절을 더 단단히 움켜쥐고 있다”(「그로브 공원」 부분) 등의 시구에도 드러난다. 이들은 노숙자들이 처한 극한적 삶의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데, 심지어 타자를 가장 환대해야 할 종교 차원에서도 노숙자를 외면하는 상황에 주목한다.
살아있기는 한 걸까
한때는 빛났을지도 모를 시간의
흔적들을 베고
쓰러진 십자가처럼
교회 문 앞에 누워있는 걸인
비의 무게로 내려앉은 하늘
교회 종탑이 하늘보다 높았던 날
통성기도 소리는 예배당 안에 머물고
나는 그 곁을 무심히 지나가고
체온을 빼앗겨 가는 영혼 위로
허기로 허리를 묶은 바람 자꾸 부는데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오늘도 뉴스 한 줄 없었다(「노숙자」 전문)
이 시에서 “교회 문 앞에 누워있는 걸인”은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된 존재이다. 그는 “한때 빛났을지도 모를 시간”의 주인공이었을 터이지만, 현재는 “쓰러진 십자가처럼” 철저하게 버림받은 사람이다. 시인이 “교회 종탑이 하늘보다 높았던 날”을 생각해 보는 것은, 오늘날 진정한 믿음의 “하늘”을 외면하고 자본과 권력에 종속된 “교회”가 적지 않다는 점을 상기한 것이다. 실제로 “교회”가 본연의 인간 구원 역할을 하지 못하고 세속화되어 가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나” 역시도 “그 곁을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체온을 빼앗겨 가는 영혼”이 세상에 넘쳐나는데, “나” 역시 그런 사람에 무심하다는 점을 성찰하고 있다. “교회 문 앞”에서 죽어가는 “노숙자”는 “뉴스 한 줄”의 관심도 주지 않는 세태에 “나” 역시도 동조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한 셈이다. 이처럼 비정한 사회에 휩쓸리고 있는 “나”에 대한 성찰은 세상에 대한 비판의 토대가 된다. 하여 오늘의 사회에 대해 “모던과 클래식/ 부유와 가난/ 평등과 불평등/ 그 사이를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걷는다/ 상식적, 그 흔한 너를 기다리다 주위를 둘러보니/ 땅에 떨어져 밟힌 내 비겁이 비상식을 돕고 있네/ 그건 슬프고 고단한 일이지”(「참 어려운 말, 보편과 상식」 부분)와 같은, 자아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도달한다.
타자가 없는 세상, 타자를 환대하지 못하는 세상은 최근 들어서 더욱 문제시되었다. 얼마 전까지 기승을 부리던 코로나19가 팬데믹으로 이어지면서 전 세계를 질병과 죽음의 공포에 떨게 했다. 많은 사람이 코로나19에 감염되어 고통을 받고, 심지어는 예방을 위한 백신을 맞고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시인이 특히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병증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결핍된 사회 문제이다. 코로나19는 반역이라는 이름으로 가족, 친지, 지인들과의 만남을 근본적으로 차단하여 사람들을 “혼자”로 만들었다.
카트를 밀고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
마켙 진열대는 비어 있어요
마겥 밖으로 담장을 끼고 뱀 같은 긴 줄이 늘어서 있어요
구부러진 줄 사이로 스산한 기운이 피어올라요
도시 외곽으로 담장이 생기고
담장 안 사람들 발이 묶여 있어요
누군가를 경계해요
사회적 거리, 멀어져야 사는 길
서로 얼굴을 알 수 없도록 마스크를 써야 해요
이런 일 처음이에요
처음의 얼굴이 모호하네요
속이 안 보여서 두렵잖아요
삶의 절벽 앞에 마스크를 쓰고 있던
힘겨운 혼자를 벗어나기 위해 더 멀어져야 했던 이들의
무참한 시간 사이로 무너져 내린 목숨들이
살아있는 자들의 두려움이
갇히고 나니 보여요
먼저 갇힌 사람들 고통이
살아야만 하는 수백 가지 이유들이(「코로나19」 부분)
이 시는 앞부분에서 “마켙 진열대는 비어 있”는데, “마켙 밖으로 담장을 끼고 뱀 같은 긴 줄이 늘어서 있”는 풍경을 묘사한다. “줄 사이로 스산한 기운이 피어오”르는 분위기도 감지하고 있다. 생활용품을 구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사이로 불신과 불안의 기운이 퍼져 있는 것이다. 옆 사람이 내게 코로나19를 옮기지는 않을까 하는 불신, 누군가의 사재기로 인해 생활용품을 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도사리고 있다. “도시 외곽으로 담장이 생기”고 “누군가를 경계”를 하면서 “사회적 거리”라는 이름으로 “멀어져야 사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가 “멀어져야 사는 길“이 있다는 것은 “코로나19”가 가져온 삶의 아이러니이다. “서로 알 수 없도록 마스크를 써야”만 감염을 막고 살 수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웃이든 친지든 곁에서 “코로나19”로 인해 “무너져 내린 목숨들”을 보면서, 사람이 사람과 단절의 벽을 쌓고 누군지 알 수 없게 “마스크”를 써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인간다운 소통의 삶과 반대로 살아가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의 “두려움”이다. 이렇듯 “코로나19”는 타자 혹은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것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여,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한 이기적인 외톨이 삶을 살아가게 한다. 하여 다른 시에서도 “이 아득한 눈앞의 벼랑 끝 풍경/ 세상이 참, 수상합니다”(「수상한 세상」 부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 시와 함께 디아스포라
이향이 시인이 시를 쓰는 일은 사랑의 열정으로 가득한 내면세계를 성찰하고, 사회적으로 소외된 타자나 타인에 관심을 가지고 환대하려는 마음과 관련된다. 이것은 오랜 시간 동안 이민자로 살아온 삶과 무관하지 않다. 즉 “높이 날고 싶었던 열정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온통 빠져나간 것투성인데/ 왜 몸은 더 무거울까요”(「헬륨 풍선」 부분)와 같은 이민자의 삶을 견인(堅忍)하기 위해 사랑과 타자를 노래했기 때문이다. 사실 영어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한글시를 쓰는 일은 그 자체가 디아스포라 의식과 관계가 깊다. 한글은 마음의 모국의 언어로서 마음의 안식처 역할을 하는 언어이고, 그것으로 쓴 시는 마음의 동반자 역할을 충실히 하기 때문이다. 가령“옛 봄에 덧입혀진 새봄이/ 당신과 나를 보며/ 봄꽃 향기로 시를 씁니다// 말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고/ 보이지 않아도 볼 수 있다”(「겹싸이는 봄」 부분)라는 시구는 시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새봄”은 항상 “옛 봄”을 전제로 한다는 인식은 이국에서의 새로운 삶은 모국에서의 지나간 삶과 밀접히 관련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시”는 그것을 통해 삶의 깊은 의미를 통찰하는 매개이다. 하여 “시”는 “나”의 정신과 영혼의 정체성을 일관되게 유지해 주는 소중한 존재이다.
시 쓰는 네가 좋아서
시집올 때도 혼수처럼 같이 왔지
네가 쓴 시집
누렇게 바랜 책갈피, 그 속엔
푸른 바람 찬란히 불고
연녹색 새잎 같은 네가 있네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
낮과 밤, 날이 다른 이 땅
내가 가는 곳 어디든 같이 다녔지
낯설고 물 다른 이곳에서
손거울처럼 수시로 너를 보네
거기엔
미처 챙기지 못한 네가 보여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내가 있어서(「시집」 전문)
이 시에서 “나”는 “네가 쓴 시집”을 삶의 동반자처럼 여기면서 살아온 사람이다. “나”는 “너”의 “시집”을 “시집올 때도 혼수처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내가 가는 어느 곳이든 같이 다녔”다고 한다. “내가” 살아가는 곳은 “모래바람 날리는 사막/ 낮과 밤, 날이 다른 이 땅”인데, 이곳은 이향이 시인의 삶과 연관 지으면 “사막”의 도시 LA이거나 그 언저리 어디쯤일 것이다. LA 혹은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것은 여간 고달프고 외로운 일이 아닐 터이다. “너”의 “시집”은 “나”에게 아주 소중한 삶의 동반자이다. “나”가 “시집”과 함께 한 이유는 “푸른 바람 천천히 불고/ 연녹색 새잎 같은 네가 있”기 때문이다. 즉 “너”의 “시집”은 “나”에게 “사막”과도 같은 삶에 “연녹색 새잎”의 희망과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의 결구에서 “너”의 “시집”을 일평생 동반하여 살아온 이유는 무엇보다도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 내가 있어서”라고 한다. 결국 이향이 시인에게 “시집”은, 혹은 시라는 것은 “나”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켜주는 존재였던 셈이다. 이것은 이향이 시인의 자전적 고백으로 읽을 수 있을 터, 일상의 고달픔 속에서도 시 쓰기의 지난한 작업을 지속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이처럼 이향이 시인에게 시라는 것은 내면에 들끓는 열정과 사랑과 고독을 아우르고, 홈리스로 상징되는 사회적 문제를 비판하면서 타자를 향한 환대의 마음을 드러내는 매개이다. 사실 영어가 지배하는 미국 사회에서 한글시를 쓴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한인으로서 언어적, 문화적 뿌리를 놓치지 않고 살아가려는 매우 유의미한 작업이다. 한글시는 고향의 자연과 어머니가 살아 숨 쉬는 영혼의 장소이자. 소수자로서의 소외감이나 고달픔을 극복하게 해 주는 삶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은 “억센 풀은 여리디여린 꽃 피우고 / 나비 날아들고/ 열매 맺고// 모래바람 거세게 불어대던/ 나의 사막에”(「나의 사막에」 부분) 하는 존재이다. 또한 “길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다가왔던 우울이/ 별빛과 뚝향나무 향기가 다가오자/ 슬그머니 자리를 털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어둠과 손잡고 있던 페르소나를/ 뚝향나무 향이 벗겨 주었지/ 무거웠던 시간이 잘 말려진 머리카락처럼 가벼워졌어(「뚝향나무와 별빛」 부분)와 같은 시구에 응축되어 있다. 시는 이향이 시인의 내면에 가득한 “우울”과 “페르소나”를 극복하게 해 주는 “별빛과 뚝향나무 향기”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 이 시집은 이 글의 모두에서 말했듯이, “하드록”과 같이 들끓는 내면세계가 시의 꽃으로 피어나는 순간들의 기록이다. “사막”과 같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별빛과 뚝향나무 향기”로 가득한 순간들 말이다. 그 주인공은 물론 이향이 시인이다. 그 뜨겁고 치열한 내면을 따듯하고 차분한 시의 꽃으로 피워낸 솜씨가 오롯하고 마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