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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통로로 사는 사람들 / 성홍모 목사
나병이란 병명은 일반적으로 Leprosy(레프러쉬)라고 하는데 ‘한센’병이라는 학명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문둥병이라고 불렀으나, 듣기도 거북하고 말하기도 상스러운 말이 되어, 성경을 새롭게 번역하게 된 이유도 이런 상스러운 말들이 들어 있어, 부드러운 말로, 언어를 순화시키는 의미에서 개정역을 내게 되었습니다.
문둥이는 이 나병의 증상을 가지고 이름을 붙였다고 보아야 합니다. ‘둥이’라는 말은 사람을 뜻하는 동(童)에 다시 사람을 나타내는 접미사로 ‘이’가 결합된 것으로 특정한 사람을 말하고 있습니다. 동(童)이라는 말은 족보를 쓸 때에 결혼하지 아니한 미혼 남자를 가리켜 동(童)이라고 했습니다. ‘둥이’라는 말은 남자를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문”이라는 말은 ‘문드러지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드러지다’는 말은 “썩거나 물러서 힘없이 처져 떨어지다는”는 뜻입니다. “문드러진 살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문둥이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고어에 “문둥문둥”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살이 다 문둥문둥 처지고”그런 말이 있습니다. 이런 말은 문둥병의 증상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말에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을 비하하는 듯이 부르는 말들이 아주 많습니다. 설교 시간에 인용하기에 거북한 말들이 생각밖에 많았습니다.
지금은 나병, 또는 한센씨병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고, 국민 건강을 위한 보건복지제도가 잘 되어 정말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한센씨병은 정부가 팔을 걷어붙이고 무조건 격리 수용하다보니, 거의 완치된 질병입니다. 무서운 질병이라도 격리하면 없어집니다. 이 질병은 불치병이 아니고, 유전병도 아니고, 목욕하기를 싫어하는 미개한 사회와 날씨가 더운 지방에서 주로 발생하는 병입니다.
1874년 노르웨이의 한센(Hansen 1841-1912)이란 의사 선생이 나균을 발견하면서 치료의 길이 열렸습니다. 이런 훌륭한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 사회는 다 함께 잘 사는 사회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류평화와 복지에 이바지 하고 공헌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히브리어의 나병이란 말은 “차라아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매’, ‘징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나병은 하나님으로부터 매를 맞았다, ‘하늘의 벌’, ‘천의 형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 병에 들린 사람은 무조건 마을을 떠나서 외딴 동굴에서 살아야 하였고, 옷을 찢어 나환자인 것을 표시하고 그가 먼저 부정한 사람이라고 외치지 않으면 돌에 맞아 죽어야 했습니다. 사람이 저 앞에 오면 30m 전방에서부터 “나는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세 번 이상 외쳐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하게 해야지, 나환자가 먼저 소리치지 않아서 접촉하게 되었다고 하면 돌을 들어 치게 되어 있었습니다.
아람 나라 시리아제국에는 왕의 군사령관이요, 전쟁 영웅인 나아만이라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왕이 아끼는 신하요,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 전쟁에 승리하고 시리아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스라엘 나라만 축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방 나라, 불신의 나라도 축복하시고 있습니다.
나아만은 강한 용사요, 큰 용사인데 그만 나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나병이라는 병은 무서운 병이지만, 예전에는 죽어야 하는 병이요, 이 병에 걸리면 사랑하는 사람도 떠나가고 함께 있기를 싫어합니다. 이 나아만은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의사의 치료도 받았을 것이요, 좋다는 약을 다 써보았지만 전혀 좋아지지 않았습니다. 사람이 서서히 자기의 살이 문드러지고 썩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죽음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서운 공포였고, 하루를 보내야 하는 것이 고통, 아픔, 실의 그 자체였습니다. 그동안 장군을 했으면 무엇합니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면 무엇입니까? 그는 더럽고 무섭게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나아만의 집에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는 이스라엘 소녀가 있었습니다. 아람, 시리아가 군대를 일으켜 이스라엘 땅에 쳐들어갔을 때에, 그곳에서 어린 소녀 하나를 잡아왔습니다. 그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를 시중들고 있었습니다. 그 소녀가 나아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소녀는 비록 원수의 나라에 잡혀 와서 종으로 살고 있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만 기다리고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나아만의 아내 여주인에게 말하였습니다.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보시면 좋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축복의 통로가 되는 사람을 자세히 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어린 소녀는 적장의 집에서 고분고분하게 복종하고 있어야 먹고 살 수 있고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주인어른이나 여주인이 밉고 저주받으라고 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영광과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 그 소녀는 축복의 통로로 쓰임을 받고 있습니다. 사람이 억압을 당하면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 말하는 것을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이 말을 할 때에 입을 열고 닫지 말고 말을 해야 합니다. “네가 무얼 안다고 그러느냐?”고 야단칠지도 모릅니다. 이 소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냥 잡혀온 여자입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습니다. 여주인의 시중만 잘 들어주면 먹고 살 수 있습니다. 주인에게 잡혀왔는데 사실 저주하고 싶었고, 나아만이 나병에 들렸을 때에, 잘 되었다, 고소하다, 당연하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그를 그냥두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도 주인님이 그런 무서운 질병, 불치의 병, 천의 형벌에 거리시다니, 그래도 사마리아에 계시는 엘리사 선지자에게 가면 고치고 오실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종이요, 능력이 많으시고,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심이 함께 하시고 있었습니다. 어린 소녀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이 나아만의 고침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의 택하신 민족이라는 사실을 증거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어린 소녀가 얼마나 진지하게, 확신 있게, 분명하게 말하는지 여주인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주인은 지혜가 넘치는 여자였습니다. 그런 좋은 소식을 전해 듣고,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지혜라는 말은 듣는 마음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데, 이스라엘의 한 예언자를 만나보면 그가 고쳐줄 것이라고 하니,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기에 찾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 군대를 몰고 쳐들어오던 나라인데, 그런 나라에 신세를 지러온다는 것이 여간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절체절명의 순간이 오고 보니 체면이나 국적이나 신분을 내려놓고 우선 살고 보아야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나아만은 왕에게 나아가 이스라엘 땅에 잡아온 여종이 한 말을 들은 대로 보고하였습니다. 시리아의 왕은 기꺼이 이스라엘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왕은 “내가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써 보내겠으니, 가 보도록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나아만은 은 열 달란트와 금 육천 개와 옷 열 벌을 가지고 이스라엘로 와서 수도 사마리아로 와서 이스라엘 왕 아합의 아들 요람에게 찾아왔습니다. 나아만이란 장군이 왕에게 들어와서 시리아 왕의 친서를 내어놓았습니다. 그 편지에는 “내가 이 편지와 함께 나의 신하 나아만을 귀하에게 보냅니다. 부디 그의 나병을 고쳐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 요람은 우상숭배하는 아버지 어머니 아래서 자라서 사실 아무런 힘도 없었고, 나약하기만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은 그 편지를 읽고 낙담하였습니다. 그는 옷을 찢으며 “내가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신이라도 된다는 말인가? 이렇게 사람을 보내어 나병을 고쳐 달라고 하니 될 말인가? 이것은 분명, 공연히 트집을 잡아 싸울 기회를 찾으려는 것이니, 자세히들 알아보도록 하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이라는 자는 우상 숭배하던 자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가로막는 사람이요, 부정적인 말에 부정적인 생각만 가득한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어린 소녀를 통하여, 여주인을 감동시키시고, 시리아의 왕도 협력해주고 한 사람을 살리고,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여러 사람을 동원하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낙담하였습니다. 옷을 찢었습니다. 이런 소식이 사마리아에 펴져나갔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사람이신 엘리사는 종을 보내어 말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옷을 찢으셨습니까? 그 사람을 나에게 보내 주십시오.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있음을 그에게 알려 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옷을 찢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담대하게 자기에게 보내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능력을 믿는다고 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사람으로 잘 되어, 왕위에 올라앉아 있거나 용맹하여 장군이 되었거나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가 되었고, 누구도 올라갈 수 없는 권력을 잡았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다 죄인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나아만이 왕궁을 나와 군마아 병거를 거느리고 와서 엘리사의 집 문 앞에 멈추어 섰습니다. 그런데 엘리사 선지자는 나와 보지도 않고 사환을 보내어 나아만에게 하는 말이 “우리 선지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요단강으로 가서 몸을 일곱 번 씻으면 장군의 몸이 다시 깨끗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사환은 선지자께서 하시는 말씀을 받아 보태지도 않고 빼지도 않고 명령받은 대로 그대로 전하였습니다.
자기는 시리아의 최고 사령관이요, 국빈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사람을 문 앞에서 돌려보내다니, 괘씸한 것입니다. 기분이 상한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선지자라는 사람이 나와서 먼 길에 잘 오셨다고 영접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든지, 안수하든지, 할 것이었습니다.
요단강이라는 강이 그렇게 수질이 좋은 것도 아니요, 수심이 깊은 것도 아니요, 사람이 목욕한다면 좀 깨끗한 물에서 목욕해야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마스쿠스에 있는 아마나 강이나 바르발 강이 이스라엘에 있는 강물보다 좋지 않다는 말이야? 강에서 씻으려면 거기에서 씻으면 될 것 아닌가? 우리나라 강물에서는 씻기지 않기라도 한다는 말이냐”고 불평하였습니다. 불평불만에 차서 분을 참지 못하면서 돌아서고 있었습니다. 병 고치러 와서 사실 전쟁할 수도 없고, 속이 상했지만, 어찌합니까?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아만의 아래에 있는 부하들이 나아만에게 가까이 와서 말했습니다. 먼발치에서 소리친 것이 아니라, 가까이 가서 작은 소리지만 확신에 찬 말로 간곡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축복의 통로가 되고 있습니다. 이들이 한 술 더 떠서 돌아갑시다. 가서 군인을 다 이끌고 와서 사마리아를 치자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분을 품고 돌아서면 다시는 고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장군님, 그 예언자가 이보다 더한 일을 하라고 하였다면, 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만 몸이나 씻으시라는데, 그러면 깨끗해진다는데, 그것쯤 못할 까닭이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부하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면 힘이 드는 것도 아니요, 물질적인 손해가 되는 것도 아니요, 군마를 거느리고, 병거를 타고 권세를 부리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장군에게 걸 맞는 예우가 사실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나병에서 고침 받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닌 인생입니다. 지금 무엇을 따지고 가릴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엘리사는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려고 하면 자신을 낮출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요단강물이 문제가 아니고 그것은 한 방법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순종하는데 있습니다. 현대 의학적으로 보면 나병환자가 강물에 가서 몸을 씻으면 병세는 더 악화됩니다. 요단강에서 가서 씻으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 편에서 보면 좋지 않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 나에게 유익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좋으신 하나님이시다, 지금은 내가 순종하기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지금 엘리사는 나아만으로 하여금 스스로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려고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나아만이 고침을 받은 것을 사람에게 고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고침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고 요단강으로 내려 보내고 있습니다. 나아만으로 하여금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고 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이지, 자기의 얼굴이나 기억하고 돌아가게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사는 하나님의 참된 종이었습니다. 나아만은 사람을 만나러 갔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교회가 할 일이요, 우리 믿음의 사람이 할 일입니다. 우리도 사람을 만나러 왔다가 하나님을 만나고 가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역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쉬운 일을 시키시고 있습니다. 쉬워야 공짜요, 그것이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만은 부하들이 하도 간곡히 부탁하고, 선지자의 말대로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나아만이 요단강으로 내려가서 한번 두 번 세어보면서 일곱 번을 씻게 되었습니다. 여섯 번까지 씻을 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몸이 뜨거워진다거나, 무슨 느낌이 오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 씻고 보니 조금 낫고, 두 번째는 더 낫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여섯 번까지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속는 기분도 들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기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인데, 내가 지금 사람을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이 고쳐주시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일곱 번까지 순종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마음으로만 믿는 것이 아니라, 행동화하는 믿음, 곧 순종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나아만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 가셨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을 믿지 못하고 배척하는 것을 보면서 고사를 들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삼 년 육 개월간 닫히어 온 땅에 큰 흉년이 들었을 때에 이스라엘에 많은 과부가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음이 없었기에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과부들에게 가서 의지하지 않았고, 이방 시돈 땅에 있는 사렙다 과부에게 가서 의지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에 수많은 나병환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의 한 사람도 깨끗함을 얻지 못하고 오직 수리아 사람 나아만뿐이었다고 하셨습니다.
나아만은 요단강에 일곱 번 그 몸을 씻고 올라오면서 드디어 고침을 받았습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살같이 그 피부가 온전히 되살아나고 고침을 받았습니다. 나아만과 그 수행원들이 하나님의 사람인 엘리사에게 돌아와서 “이제야 나는 온 세계에서 이스라엘 밖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디 예언자님의 종인 제가 드리는 이 선물을 받아주십시오”라고 사례하게 되었습니다. 예언자는 끝내 거절하면서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감격을 안고 돌아가게 하였습니다. 그 때에 무슨 선물이라도 받았다고 하면 나는 할 만큼 하였고, 드릴만큼 드렸다고, 은혜는 무슨 은혜로 구원받았느냐, 값을 주고 당연히 고친 것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한 영혼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하여, 그로 영육을 고침받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 한마디가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값없이 주는 선물이지만,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실 때는 세상적인 명예와 부와 영광을 다 버리고 나는 구원받아야 할 사람이요, 치유되어야 할 사람이라는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말씀을 들고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고, 생각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라는 대로 하여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이 한 영혼을 살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어린 소녀도 잘 했고, 선지자도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다 사라져야 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남아 있어야 합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1:23)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벧전1:19)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축복의 통로로 살아가야 합니다. 고전1:21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전도하는 것은 좀 미련한 방법으로 보여집니다. 그래도 우리가 하는 것은 한 영혼을 살려보려는 운동입니다.
어린 소녀가 여주인에게 “주인어른께서 사마리아에 있는 한 예언자를 만나보시면 좋겠습니다. 그분이라면 어른의 나병을 고치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전도했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는 순간 이 소녀는 잡혀온 계집종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파송된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에서 시리아로 파송한 선교사요, 하나님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복음을 증거하는 순간 신분이 바뀌어 집니다. 한 생명을 구원하는 은인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요람 왕이 말한 것처럼 “사람을 죽이고 살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는 가서 요단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 네 살이 여전하여 깨끗하리라” 우리의 영원한 죄와 허물을 씻어주시는 우리 주님 예수님에게 완전히 맡기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을 모셔 들이고, 주님께 의탁하고, 100% 의존해야 합니다. 나는 죽고 우리 주님이 내 안에 사시는 완전한 의탁과 헌신으로 하나님의 구원과 치유하심이 여러분에게 넘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