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Ubiquitous 시대 중심에 설 The Forest Literature의
Globalization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소설가 한강의 Man Booker International Prize 수상을 계기로 해서 한국문학의 세계화가 느리지만 각 장르별로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다. 기존에는 시와 소설 위주로 전개되던 한국문학의 번역작업이 수필과 시조 분야에서도 활발하다는 것은 한국문학의 세계화에 청신호라고 하겠다. 우리나라가 K-문학 한류를 바탕으로 노벨문학상 a Nobel prize for literature 수상자를 확보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가지 방정식을 풀어야 할 것이다. 첫째, 좋은 작품의 발굴이 급선무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작품 생산이 절실하다. 둘째, 해외문단에 우리 문학을 알리기 위해 수준 높은 번역지원이 지속되어야 한다. 셋째, 세계적으로 유명한 출판사를 확보해 체계적인 홍보마케팅 작업을 펼쳐야 한다.
시와 소설의 경우는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대산문화재단의 지원으로 유명작가 또는 우수작품 위주로 꾸준히 번역작업이 되고 있으나, 시조와 수필의 경우는 장르 단위 협회 차원에서 번역집을 발간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문인협회 이광복 이사장호가 출범하면서 시조분과( 회장 김민정)에서 꾸준히 한국시조를 번역해서 발표하고 있으며, 시조 번역은 국제PEN한국본부 한국번역원 번역위원이자 시조시인인 우형숙 교수가 맡고 있다. 지금까지 영문번역시조집 <해돋이 Sunrise, 2019, 알토란출판사>와, 스페인번역시조집 <시조, 꽃 피다 Sijos en fior, 2021, 동경출판사>에 이어 영어아랍어번역시조집 <시조축제 Sijo Festival, 2021, 12, 22, 동경출판사>를 발간했다. 수필의 경우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위원장 권대근)가 중심이 되어 한국의 명수필 시리즈 <한국명수필영문번역선 The Art od the Korean Classic Essay, 2018, 해드림출판사>, <한국현대수필대표작선집 Birds fly on their left and right wings, 2020, 에세이문예사>에 이어 <영호남수필영문번역선 The Yeonghonam Essays, a Forest of the Prime of Life, 2020, 에세이문예사>를 발간하고 있고, 올해 초 또 <한국대표수필100인선집> 등 두 권의 영문수필번역집이 발간될 예정이다.
지금은 Ubiquitous시대다. Ubiquitous란 라틴어 ‘ubique'가 어원으로,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는, 편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네트워크에 접속하여 각종서비스를 활용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한다. 1974년 컴퓨터 과학자 네그로폰테 MIT 교수가 “우리는 유비쿼터스적이고 분산된 형태의 컴퓨터를 보게 될 것이다. 아마 컴퓨터라는 것이 장난감, 아이스박스, 자전거 등 가정 내 모든 물건과 함께 공간에 존재하고 될 것이다”라고 언급하면서 지금의 Ubiquitous computing 유비쿼터스 컴퓨팅 환경을 처음으로 이야기했다고 한다. 마크 와이즈는 1988년 Ubiquitous computer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그리고 1991년 과학 저널 <Scientific American>에 실린 논문 The computer for the 21st century에서 Ubiquitous computing 유비쿼터스 컴퓨팅 개념이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그렇다면 ‘Ubiquitous’란 단순히 컴퓨터 환경을 가리키는 용어인가에 의문을 품어볼 수가 있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Ubiquitous란 의미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이는 시공에 따라 그 개념을 달리한다는 것이다. 현대와 와서는 Ubiquitous 가 ‘컴퓨터’에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환경을 뜻하지만, 과거 다시말해 고대나 중세 시대에는 Ubiquitous가 언제 어디서든 ‘God’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을 의미했다. 즉 성당이나 예배당, 십자가가 놓인 공간이 Ubiquitous였던 것이다. 언어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면서 역사성을 갖는다는 걸 생각하면, 이런 해석이 이해가 갈 것이라 본다. 진리관의 변화와 함께 언어는 시공time and space의 변화에 따라 그 뜻을 달리해서 사용되고 있다. 부정적 의미로 쓰이던 것이 긍정적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지칭이 호칭으로, 호칭이 지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언어가 시공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는 것은 인지언어학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 역사성은 데리다의 해체주의 개념인 프랑스어 ‘차연’Différance의 등장으로 충분히 증명되었고, 후기구조주의와 함께 ‘진리는 변한다’는 식으로 언어도 변한다는 데 대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문제는 미래 사회, 미래 시대의 Ubiquitous는 과연 어떤 개념으로 이해될 것인가? 무엇이 미래에 God과 Computer와 같은 위치에 오를까 하는 점이다. 단언컨대, Ecophilia에코필리아 즉 ‘생태친화’가 미래 Ubiquitous 시대의 핵심개념으로 자리잡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 이유는 현대사회가 산업화되면서 도시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기능을 차츰 상실해 가고 있다는 데 있다. 사람과 사람의 단절이란 Modernity‘모더니티’가 도시와의 단절이란 의미로 바뀌어질 것이라는 추측이다. 이러한 징후는 SARS, MERS, COVID19 등의 가공할 만한 전염병을 겪으면서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생태친화라는 측면에서 좀 차원이 다르지만, TV프로그램 <자연인>은 앞으로 자연인이 많아질 조짐을 예견한다고 하겠다. ‘숲속으로, 또는 산속으로’라는 케치프레이즈 속 현대의 자연인은 사업이 망해서거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서 또는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해서,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아서, 살 집이 없어서 등의 연유로 숲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가 도시와 사회로부터 격리된 생활을 하지만, 앞으로 나올 자연인은 이런 사회로부터의 도피성, 사람으로부터의 기피성 자연인이 아니고, 자신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자연생태를 찾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하루하루를 숲이나 산에서 시작함으로써 수많은 생명체와의 교감을 통해서 자연인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고, 창궐하는 도시의 치명적 전염병으로부터 우선 안전하게 자신을 보호하며 생활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필자가 이서연 주간으로부터 ‘한국문학의 세계화와 산림문학의 번역 필요성’이라는 원고청탁을 구두로 받고, 이를 쉽게 승낙한 이유는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번역의 중요성은 지면만 주어진다면 늘 강조하고 싶었고, 나름대로 정리한 Ubiquitous유비쿼터스 개념과 산림문학의 친화성을 가지고 이와 관련된 시론을 한 번 써봐야겠다고 이전부터 마음을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런 현대인들의 자연생태친화적인 기호가 우리 <산림문학>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왜 미래 Ubiquitous유비쿼터스 시대 중심에 놓일 문학이 <산림문학>이며, 미래문학을 이끌어갈 문학인이 산림문학인이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 <산림문학>은 ‘숲사랑’ ‘생명존중’ ‘녹색환경보전’ ‘정서녹화’라는 지향점을 기반으로 해서 녹색문학상, 산림문학상, 2050탄소중립을 위한 그린그린+“쉬우나”켐페인 및 첼린지, 문학인 홍릉숲 걷기, 식목일 나무심기 등 다양한 행사를 펼치고 있다. 김선길 이사장은 작년 11월 18일 충남 보령에서 한국산림문학헌장비를 세우고, 7월 5일을 '산림문학인의 날'로 선포하였다.
그렇다면 미래 Ubiquitous시대의 주역이 될 산림문학이 국내용에 머물러서는 안 될 것이다. Globalization, 세계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당위명제가 아니겠는가. 문학의 세계화를 이루는 최적의 지름길은 번역밖에 없다. 우리 산림문학회도 한국문인협회 시조분과나 시분과가 시조와 시를 번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한국문학세계화위원화가 수필번역집을 시리즈로 계속 내고 있는 것처럼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한국산림문학회 내부의 번역할 수 있는 인재를 풀가동해서 우리 산림문학 정신이 전세계로 뻗어나가게 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우리 한국산림문학회는 정부 기관을 스폰서로 둔 유일한 문학단체로서 산림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조건이 어떤 문학단체보다도 유리하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집행부 의지가 강하다는 것도 번역사업의 Success성공을 예약한다. 변화와 개혁에는 반드시 진통이 따르는 법이다. 어떤 영역이고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진통과 저항을 헤치고 나아가지 않으면 미래문학의 중심에 설 산림문학의 세계화는 요원하다고 하겠다.
독해력이 남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소극적 활용의 힘이라면, 번역능력은 우리 것을 밖으로 알리는 적극적 활용에 없어서는 안 될 무기라고 하겠다. 번역의 중요성은 모든 문학 장르에 공통적이지만 특히 우리 산림문학의 세계화에서는 필수적이다. For us가 For earth가 되는 현실에서 ‘Forest'는 미래 시대 Key-word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늦기 전에 산림문학의 세계화를 구축하는 <산림문학> 작품도 영어로 번역하는 문제도 본격적으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공적인 부분에서의 번역화는 문턱이 너무 높으니 사적 영역인 산림문학회 내 인재를 잘 활용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리 산림문학의 국제적 교류와 활성화를 위한 산림문학 작품의 번역시스템 구축은 가장 시급히 뒷받침되어야 할 INFRA인프라라 하겠다. 게다가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할 만큼 그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하지만 번역 인구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지원이 미비할 뿐만 아니라 번역에 있어서 전혀 예기치 못한 함정들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관용법의 함정들은 외국인의 언어감각으로 포착하기 어려워, 적법인지 오류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런 점은 번역할 때 참고해야 할 것이다.
혁명은 썩은 문짝을 차는 것과 같다. 우리 모두 미래 Ubiquitous 시대를 선도할 산림문학의 세계화 작업을 위한 위대한 발걸음에 지지를 보내고 성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번역은 문학세계화의 지름길이다. 한국은 좋은 작가들, 훌륭한 문학 작품들을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전적으로 번역의 부재 때문이다. 나는 20여 년 전에 시와 수필을 묶어 영어번역선집 The Dream of Seagull을 발간한 적이 있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문학작품을 번역하려는 사람은 드문 실정이다. 시급히 우리 한국산림문학회부터 번역의 실상을 점검하고 적합한 목표를 제시해야 할 것으로 본다. 녹색문학상 수상자 일곱 시인의 영문번역집 <Korean Green Literature>가 산림청 지원으로 국제PEN한국본부 번역위원회에서 나왔는데, <산림문학>지에 실린 우수작들도 영문번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