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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궁극이
45편 8절-10절: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8절: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왕의 모든 옷’이라고 했으니 왕의 옷이 한 벌 만이겠느냐? 그 모든 옷에 여러 가지의 향기가 복합적으로 난다는 거다.
왕이 입는 옷에 여러 가지 향기를 뿌리면 향기로운 냄새가 난다. 그러면 가난한 사람의 옷에다 향기를 뿌리면 가난한 사람의 옷이기 때문에 향기가 안 나느냐? 같은 향기가 난다. 그런데 향수는 비싸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은 향수를 사서 자기 옷에 뿌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본 절이 왕이라야 만이 옷에 향수를 뿌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이걸 신앙적인 면으로 깨달아야 한다. 그러니까 왕이 입는 옷에서 여러 가지 향기가 난다는 것은 왕의 행동, 활동, 모든 이력과 업적을 말하는 거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볼 때 옷을 단정하게 입으면 보기 좋듯이 사람의 행동이 옳고 좋고 바르면 그 사람을 다시 한 번 쳐다보게 된다. 그리고 향기가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듯이 행동이 옳고 바르고 선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보고 기뻐하게 된다.
그러면 왕의 옷에 무엇이 뿌려졌느냐? 첫째로 몰약이 뿌려졌다. 몰약은 아라비아산으로, 방부제로 쓴다고 한다. 그러니까 왕의 활동이 썩지 않는 요소로 되어있다는 말이다. 우리 주님의 활동도 영원히 썩지 않는 영생의 요소로 되어있다. 이게 몰약 향이다.
그 다음에 왕의 모든 옷에 침향이 뿌려졌다고 했다. 침향은 인도에서 나는 고급 향이라는데, 왕이 도덕적으로 최고의 고상한 활동을 했다는 거다. 우리 주님의 도덕성의 활동은 질적 가치적으로 최고의 경지의 도덕성이다. 예수님의 활동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영생으로 다 통과가 되는 삶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마다 죄와 사망을 이기고, 유혹과 미혹을 이기고, 환난과 핍박을 이기고, 마귀를 이기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활동마다 우리의 성화구원의 이치까지 복합적으로 들어있는 최고급의 향기로운 삶이다. 주님의 한 발짝 한 발짝마다, 한 행동 한 활동마다 구석구석이 영생의 향기다. 우리는 예수님의 이 고상한 도덕성의 향기를 맡고 느낄 수 있겠느냐? 여호와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향기를 맡을 수 있겠느냐?
그 다음에 보면 육계의 향이 뿌려졌다. 육계는 열대지방에서 나는 나무로서 기름을 짜서 사용하기도 한다. 기름은 그 나무가 쥐어 짜여져서 압축이 되어 나온 그 나무의 진액이다. 그러니까 이 진액은 희생이 되어야 나오는 거고, 압축이 되어야 나온다.
예수님의 모든 활동은 당신의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랑과 희생으로 압축된 기름처럼 달달 달여진 당신의 진액이다. 예를 들면 끙끙 앓는 어린아이 옆에서 그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는 프라이팬에 기름이 닳듯이 그 마음이 닳는 것과 같다.
이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정신과 마음을 느끼고 우리의 행동 구석구석마다를 살펴보면 나에게서 썩은 시궁창 냄새가 나지는 않느냐? 많은 사람의 상을 찡그리게 하고 도망을 가게 만든 언행심사가 참으로 많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행동 구석구석마다 향기가 나는 사람이 있다. 그런가 하면 사귈수록 고상한 맛이 나는 사람이 있고, 사귈수록 저질스런 맛이 나는 사람이 있다.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글자 그대로 보면 왕이 맨날 술판을 벌리고 춤판을 벌리며 노는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게 아니라 최고의 고상한 기쁨을 말하는 거다. ‘상아’란 코끼리의 뿔이다. 그러니까 왕궁을 상아로 만들었다는 거다.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라고 하는 것은 최고 수준급의 삶의 경지를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악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정의의 삶을 실천하는 왕은 신령천국이 주는 기쁨을 맛보며 사는 것을 말하는 거다. 이제 자기도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싶으냐?
‘왕의 모든 옷은 몰약과 침향과 육계의 향기가 있으며 상아궁에서 나오는 현악은 왕을 즐겁게 하도다.’ 본 절을 보고 ‘내가 정의의 삶을 실천하면 세상에서 육신적으로 최고의 행복의 절정, 기쁨이 절정, 쾌락의 절정을 맛볼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을 한다면 이건 누림의 사상이요 육의 사상이다. 본 절의 삶이 이 땅에서 최고이듯이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며 사는 사람에게 하늘의 기쁨을 맛보여 주겠다는 거다. 하늘의 기쁨이라면 최고의 경지다.
세상 통치자들은 하나님의 진리인격은 없다. 그러나 우리교회 교인들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말씀을 실천해서 자기를 먼저 정의의 사람으로 인격화 시키게 되면 모든 왕들보다 높이 올려진다. 질적인 면을 말하는 거다. 그리고 활동하는 구석구석마다 성령으로 된 향기가 뿌려지고, 이로 인해 나와 내 주위의 사람들이 하늘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이렇게 살지 않고서 하늘의 최고 수준급의 기쁨을 어디서 맛볼 수 있겠느냐? 맛볼 수가 없다.
9절: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왕의 귀비’란 궁녀를 말한다. 궁녀들은 왕궁에 있는 처녀들인데, 아무 처녀나 ‘내가 왕의 궁녀가 되겠습니다’ 라고 하면 궁 안에 들여보내겠느냐?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다’는 것은 세계 각지에서 뽑혀온 처녀들이라는 말이다. 세상적으로 말하면 신분을 심사하고, 내적 교양적 지적인 면을 심사하고, 건강을 심사하고, 무슨 질병이 있는지 심사하고, 유전병이나 속병은 없는지 심사하고, 자면서 이빨을 갈지는 않는지 심사하고, 배를 내놓고 코를 곯며 자지는 않는지 심사하고, 자다가 헛소리는 하지 않는지 심사하고,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공동묘지로 뛰어가지는 않는지 심사하고, 속은 얼마나 좁아터졌는지, 얼마나 넓은지를 심사를 한다.
그리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지, 아니면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는지 심사하고, 걸음걸이가 단정한지 심사하고, 부지런해서 살이 토실토실한 건지, 아니면 게을러서 움직이지 않아서 살이 찐 건지 심사하고, 목청이 얼마나 고운지 심사하고, 옷은 단정하게 입고 다니는지, 아니면 칠칠맞게 입고 다니는지 심사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할 줄 아는지 심사하고, 욕심이 목구멍까지 차 있지는 않은지 심사를 해서 거기에서 추리고 또 추려서 궁으로 들어온 처녀들이다. 하루 온 종일 오고 가는 사람을 다 쳐다보며 침을 흘리고 앉아있다면 이런 처녀를 뽑겠느냐? 이것을 영적으로 생각을 해서 자기도 이런 사람들 중에 들어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이 사람은 관찰력이 좋은 성도다.
뽑혀서 일단 궁 안에 들어오면 신분이 높은 거다. 궁 밖의 처녀들과는 신분이 다르다. 그럼에도 왕궁에 들어오기 전처럼 짜증을 내며 성질이나 부리고, 상스런 욕을 하고, 남과 머리를 잡고 싸우고, 손톱을 길러서 남의 얼굴에 고랑을 파 놓고, 편당을 만들고, 음모를 꾸미고 했다가는 곤장을 맞거나, 감옥에 가거나, 사형을 당하게 된다. 또 아무나 보고 히죽히죽 웃었다가는 미친 사람으로 취급이 되어서 궁 밖으로 쫓겨난다. 신분이 높을수록 그만큼 도덕성이 높아야 한다. 그리고 일단 왕궁에 들어왔다면 교양과 덕을 더 쌓기 위해서 묻고 배우고 해야 한다.
‘왕의 귀비 중에는 열왕의 딸이 있으며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왕의 귀비나 왕후는 모두가 동네에서 선발이 되고, 국가적으로 선발이 되고, 세계적으로 선발이 된 최상급의 여자들이다. 믿는 우리 성도들이 그렇다는 말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만 해도 전국 각지에서 선발이 되어서 나온 거다. 안 믿는 사람들 중에서 선발이 되었고, 여러 동네에서 선발이 되었고, 한국이라는 땅덩어리 속에서 선발이 되었다. 그리고 특별히 진리이치를 배우는 우리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과는 그 수준이 다르다. 수준이 높다 그 말이다. 최상급 최고급 여자들이라 그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더 올라가기 위해 배우고 갉고 닦는 거다.
우리교회 교인들은 최고급적인 신분들로서 저질적으로 놀지 말아라. 아예 저질로 됐으면 ‘저질이니 그렇겠거니’ 하겠지만 최상급 교훈을 받으면서 저질로 나간다면 이건 왕따 당한다. 그래서 우리교회에는 일반정신을 가지고는 못 온다. 자기를 갉고 닦고 자기 힘을 올려야 한다. 질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정신과 사상을 집어넣고 올려야 한다.
왕의 귀비들은 모두 구별되고 분별되고 선택된 여자들이다. 그런데 그 중에 최고의 여자는 왕후다. 이 왕후가 뭘로 꾸몄느냐? 오빌의 금으로 꾸몄다. 오빌의 금은 멀고 먼 남아프리카에서 생산이 되는 금이다.(왕상9:27-28. 욥22:24) 금은 그 특성이 변치를 않는다. 아무리 불 속에 집어넣어도 금이라고 하는 그 질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더 뜨거운 불에 넣을수록 더 빛이 난다. 쇠에 열을 가해서 녹일 때 열을 더 세게 가하면 가할수록 쇳물이 빛이 더 난다. 그런데 세상적인 교인은 고통이라고 하는 열을 가하면 가할수록 더 빛이 나야할 텐데 타버리고, 재가 돼 버리고, 흔적도 없어져 버린다.
‘여자 중의 왕후’란 지혜지식적인 면이나, 도덕성적인 면이나, 능력성적인 면이 모두 영원히 변치 않을 것으로 꾸며진 사람을 말하는 거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도 교인들 중에 엘리트요, 신자들 중에 엘리트요, 성도들 중에 엘리트 성도를 말하는 거다. 또한 그 어떤 환난과 핍박과 사건이 몰아쳐도 그 와중에 신앙 믿음에 변질이 없고, 변색이 없고, 요동이 전혀 없는 성도를 말한다. 아무리 비교하고, 달아보고, 재어보고, 견주어 보아도 어느 목사나 어느 박사보다도 특수한 신앙을 가진 성도가 바로 왕후다. 주님이 제일 사랑하는 성도다. 왕이 누구를 사랑하겠느냐? 황후다. 이런 성도가 우리교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독하게 심술이 많고, 게으르고, 미련하고, 칠칠맞고, 성질이 고약하고, 욕심이 많은 등 나쁘다고 하는 것은 모두 가지고 있고, 더럽다고 하는 것은 전부 가지고 있는 세계에서 제일 못된 교인이 우리교회에 있다’ 라고 하면 그 교회 목사님은 그 날로 드러누워 버릴 거다.
‘왕후는 오빌의 금으로 꾸미고 왕의 우편에 서도다.’ 지혜지식 면에서 뽑히고, 도덕적인 면에서 뽑히고, 능력적인 면에서 뽑히고, 마음이 넓고, 이해심이 바르고, 경건하고, 부지런하고, 눈치 빠르고, 싹싹하고, 음식솜씨 좋고, 바느질솜씨 좋고, 정결하고, 순결하는 등 좋다고 하는 것으로 똘똘 뭉쳐진 것이 왕후다. 이 왕후는 다른 여자들이 따라오려야 따라올 수 없는 최고의 고상한 신앙정신, 신앙사상을 가졌기 때문에 왕과 의사가 잘 통한다.
왕과 의사가 잘 통하는 왕후라야지 의사가 안 통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러니까 소원도 왕과의 단일성, 목적도, 취미도, 간구성도, 추구성도, 지향성도 왕과의 단일성이요, 오각과 오감성도 왕과의 단일성이다. 왕의 우편에 섰다고 하는 것은 모든 성도들보다 특수요, 특상이요, 특강(强)이요, 특능(能)이요, 특미(美)요, 특고(高)요, 특출한 것을 말하는 거다.
타락되고 속화된 세상은 외모 모양을 보고, 또 ‘재산을 얼마나 가졌느냐? 세상학벌을 얼마나 가졌느냐? 월급을 얼마나 많이 타느냐?’ 이런 것을 본다. 사람을 사랑하는 기준이 이런 게 전제가 붙었다. ‘그래야 너를 사랑한다’ 이렇게 돼 있다. 사랑하는 기준이 그렇고, 자식을 낳는 기준도 그렇다. 그리고 사람을 사귀는 기준이 그렇고, 사람을 가치판단 평가하는 기준이 그렇다. 전부는 물질성이 기준이다. 세상은 그렇다.
우리교인들은 이러면 안 된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같은 기준과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예수 믿기 전의 수준과, 예수 믿은 후의 수준이 땅과 하늘의 차이가 되어 있어야 한다. 믿어갈수록 차이가 나야 한다. 만일 똑같다면 이건 분명히 헛 밥 먹고, 헛 살았고, 헛 믿었고, 헛 질한 거다. 모든 게 허망하다 그 말이다.
10절: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찌어다. 네 백성과 아비 집을 잊어버릴찌어다.’ 시집간 딸은 소속이 바뀌었으니 입장도 바뀌는 거다. 시집을 갔는데 날마다 친정집에 와서 먹고 자고 한다면 문제가 있다. 시집간 딸은 소속도 바뀌었고 입장도 바뀌어야 하는 건데, 소속은 바뀌었는데도 입장이 안 바뀌면 어떻게 되겠느냐? 성경에 뭐라고 했느냐? 합방하라고 했느냐, 분방하라고 했느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되면 하나님의 자녀요, 천국백성이요, 천국에 소속이 되었으니 모든 성격 성질이 천국의 입장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님을 수 년, 수십 년을 믿었는데도 이방풍속, 습관, 버릇, 성격, 성질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 이는 고통의 연속이다. 가령 예를 들면 하늘나라에는 모든 사람들이 영원한 생각, 영원한 이해타산, 영원한 평가를 하며 살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임시적인 이해타산 평가를 가지고 주장을 한다면 그곳에서 이 주장이 받아들여지겠느냐? 그래서 그곳에서 왕따가 되어서 그곳이 싫다고 땅으로 내려와서 보니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와 똑같아서 짝짜꿍하며 산다면 이건 마귀가 공중싸움에서 패배해서 내쫓긴 것과 어찌 그리 그 성질이 똑같으냐?
그러니까 이걸 이치적으로 말을 하면 자기가 아예 처음부터 마귀새끼라면 ‘자기 아비가 하는 대로 하겠거니’ 하겠는데 하나님의 자식이 마귀에게 붙어서 마귀와 합작을 해서 하늘나라 백성을 쳐들어 올 때는 하나님께서 누구부터 쳐 죽이겠느냐? 하나님의 괘씸죄에 마귀가 들어가겠느냐, 마귀 편에 붙어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겠느냐? 저질적인 자기를 고차원적인 자기로 바꾸지 않고 땅의 생각으로 언제까지 그렇게 살까?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 화 화가 있다’고 했다. 땅이 불사름을 당할 때 땅에 소속이 되고, 땅에 입장을 하고 있는 자는 불에 다 타버린다는 거다.
본 절은 일반적인 것을 들어서 우리 기독자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자 함이냐? 일반적 세상 것을 들어서 하늘의 영적인 이치를 가르치고자 함이다. 그런데 이 세상은 원래가 타락된 세상이지만 지금은 더 타락이 되어서 교회가 신앙도 아니고 세상도 아닌 기이한 현상이 돼버렸다. 일반 도덕성도 아니고 신앙도 아닌 이상한 괴물들이 돼버렸다. 기이한 괴물들의 성질을 가진 자들이 교회의 인도자가 되어서 교인들을 또 그렇게 만들어 내고 있다.
성경에 보면 기이한 짐승들이 있다. 한 몸인데도 머리도 다르고, 몸도 다르고, 발도 다른 기이한 형상을 가진 짐승이 있는데 이게 다 사람의 성격 성질을 말하는 거다. 성경은 이걸 사람인데 짐승이라고 한다. 다니엘서에 몸은 표범 같은데 날개가 달린 짐승도 있고, 또 곰이 발 하나는 육지에 두고, 하나는 들고 있는 것도 있다. 그리고 염소 뿔이 두 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뿔이 나서 한없이 길게 뻗혀나가는 것도 있다. 이게 다 사람의 사상과 성질을 말하는 거다. ‘어떤 성질을 가지고 뭘 정복하느냐?’ 이걸 말해주는 거다.
‘딸이여,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일지어다.’ 딸이란 성도를 말하는데, 귀를 기울일 의무가 있다. 성도인 나는 장차 신령천국에 들어갈 나인데 전에는 무엇을 듣고 배웠으며, 지금은 또 무엇을 듣고 배우느냐? 그리고 무엇을 고치고, 무엇을 성장시키고 있느냐? 그리고 어떻게 살다 가야 할 나인지 신중히 생각을 해야 한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