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를 굴려 보내려면 . 여호수아 5:9
오늘은 광복절을 기억하며 왜곡된 지나간 역사를 살펴 보고자 합니다. 올해의 광복은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은 지 78주년이 됩니다. 일제가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독립을 하였는데. 광복을 맞자 세계곳곳에서 독립 운동을 하던 분들이 속속 귀국하였고. 그리고 대한민국의 정부 수립을 준비하면서 국민들은 초대 대통령이 누가 될 것인가에 큰 관심을 가졌습니다.
당시 4명의 강력한 후보들이 경합을 벌이고 있었는데, 바로 여운형과 이승만, 김구, 김규식 등 네 분이었습니다. 이 네 분은 모두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이승만은 기독교인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김구와 여운형, 김규식과 같은 분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듯 합니다. 특히 김구선생님이 기독교인이라고 하면 잘 믿으려 하질 않습니다.
김구 선생님은 28세가 되던 해 1903년 11월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후 적극적으로 성경과 교리를 공부하기 시작하였고, 기독교 가치관을 바탕으로 한 지역 계몽과 교육운동에 활발히 참여하였습니다. 해방 후 1945년 11월 28일 정동교회에서 임시정부 요인과 미군을 환영하는 행사가 열렸습니다. 이때 김구 선생님은 ‘반석 위에 새 나라를 세우겠다’는 연설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경찰서 열 곳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 한 곳을 세우는 것이 낫다”
놀랍죠?
“김구는 건국대업을 앞두고 두 가지 방침을 세웠습니다. 첫째로 건국이요. 둘째로 건교(建敎)입니다. 종교 교화한 나라는 어떠한 강국이라 할지라도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찰서 열을 세우는 대신 예배당 하나를 세우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신 오직 이 성경 말씀에 의지해서 삼천만 동포가 살아야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대한이니 무엇이니 보다 먼저 모두 천국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은 십자가의 정병들입니다. 이 땅의 천국을 건설하는 천국백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옮겨온 글
어두움이 대지를 덮었을 때
이나라는 지적으로 무지했고 귀도 막고 눈도 감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노회의 김재동 목사님이 연재하시고 있는 한국의 그 현대사 바로알기에서 영상을 듣고 발췌한 것입니다. 저는 대한민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것이 이완용이라고 하면서 욕을 했었습니다. 그 영상을 통해 바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제발 왜곡을 하지 말고 사실을 가르쳐서 바로 역사를 알고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합니다.
서대문에 가면 독립문이 있습니다. 일본에서 나라를 되찾은 후에 독립을 기념해서 세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살펴보자면 1896~1898년 사이에 영은문 이라고 독립협의회에서 세워졌는데 지금은 독립문으로 명명하고 있습니다. 이 독립문은 일본이 아니라 청나라를 이기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 이것을 일본을 이기고 세운 것이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잘 아는 민비시해사건 일본의 소행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일본의 만행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의 빌미는 고종과 민비 자신들이 제공한 사건입니다. 당시에 러시아와 영국이 전쟁을 하면서 러시아와 한국이 연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이 일본과 손을 잡았습니다. 이때 고종이 러시아를 손절했으면 되는데 고종이 친 러가 되는 바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1896년 2월에 아관파천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고종이 러시아로 도망가는 사건입니다. 약1년동안 나라는 돌아보지 않고 고종 자신만 러시아 공사로 들어가서 잔치판을 벌이면서 숨어 지냈습니다. 백성들은 왕이 속히 돌아 오기를 원하는데 왕은 자신의 일상만 챙겼습니다.
1896년 2월 11일~ 1897년2월 20일 사이에 도피하면서 벌인일은
*일관 파천이란 일본대사관으로 피신하려는 것
1882년 일관 파천 하려 했으나 시행되지 못했음.
1883년 역시 일관 파천이 시행되지 못했음,
1894년 일관 파천하려 했으나 (영국대사관) 영관 파천이 거부했음
1895년 춘생문사건은 실패하였다,(춘생문사건(春生門 事件)은 1895년 11월에 조선 경복궁 춘생문에서 발생한 친러파, 친미파, 개화파 대 친일파 간의 무력 충돌 사건으로, 경복궁에 유폐되다시피 한 고종을 구출하여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시키려다 실패한 사건을 말한다.)
1896년 아관파천은 성공했습니다.
1904년 제2의 아관파천 실패했고 영관파천도 실패했습니다.
1905년 미관파천하려 했으나 거부당했습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왕궁을 지켜야 하는 데 고종은 자신의 안위만 챙기고 국민은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1897년10월12일~ 1910년8월29일, 이때 고종은 나라의 이름을 바꾸었다. 말하기를 근대적 제도와 상공업 진흥정책으로 부강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부강한 나라, 왕실과 국가의 권위를 바로 세우고 열강에 맞서는 자주적 나라를 이룩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잘한 일이었으나 왕권과 왕실을 먼저 세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못하였습니다.
이때 러시아와 전쟁이 일어났고 일본이 찾아와서 한국을 지켜 주겠다면서 왕궁 한복판에 군사 훈련장을 만들어 주면 왕궁에 쓰는 재정과 왕궁을 지켜 주겠다고 한것입니다. 이때 한일의정서 체결전 1904년 2월 17일 창덕궁 후원에 일본군 12사단에 내어 준다는 협약이 강압적인 것이 아니라 일본 이토히로부미가 한국에 와서 고종을 알현했고(이것은 영국 외무성 문서보관서에 보존되있음) 3월31일 민영환이 영국공사에 방문하여 그날의 일을 영국공사 조던에게 설명하였다.
이토후락은 메이지 천황의 선물이라면서 고종에게 주었고 30만엔을 주었고 또 경부선 철도에 고종의 지분을 보장하고 향후 경의선 철도의 지분도 보장한다고 확약했습니다. 이토후락은 같은 방식으로 50만엔을 궁중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뿐만 아니라 방문자들에겐 귀중품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을사조약전부터 고종은 돈을 받았고 러, 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6일전 일본으로부터 고종은 돈을 받았습니다.
주한일본공사 하야시곤스케가 을사조약전 대한제국 황제와 대신들에게 지급한 기밀비 기록(일본 공사관 기록전문 1905년 12월 11일) 일본은 조약체결을 하는데 드는 비용 2만원을 알아서 심상훈을 거쳐 전해 주었고 3000원을 왕의 시종들에게 구완희를 통해 나누어 주었다. 또 3000원은 법부대신 이하영에게 주고 2만원은 이완용, 이근택, 조인후, 이지용에게 주라고 지시했다. 또한 참정 박제순 및 한두대신에게 15000원을 주었다. 우리의 왕 고종은 나라를 팔아 먹었다. 슬프게도, 이완용이 팔아 먹은 것이 아니라, 이완용은 왕의 하수였지.
미국 부영사 휩라드가 새벽 2시에 잔디밭에서 중명전쪽을 보니 건물주변, 베란다까지 일본인들이 꽉차 있었다. 황제가 도망갈까봐, 이 상황은 참 놀랍다, 관을 쓴자들 가운데 왕관을 쓴자가 최악으로 비겁했고,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자신의 잘못으로 타인들을 고통속에 밀어 넣었다. 왕은 외부대신에게 서명하라고 지시하고서 자기가 지시하지 않았다고 말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외무대신은 자기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썼다.
이 체결을 반대하던 의정대신 한규설은 대신들로 하여금 나라를 배신하지 말라고 간청하다가 회담장에서 쫓겨나고 3년형을 받았다. 문제는 주변에서 이런일들을 이미 경고하였고, 그들은 타조처럼 머리를 모래에 처박고 사태를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고종에 대한 증언은 계속 되는데 러일 전쟁후 조선은 검은 먹구름이 몰려 오는데 오직 왕만은 정혀 알아 차리지 못하고 백성들은 술렁이는데 고종은 일본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고종의전 담당 독일인 엠마 크리멕)
청나라 공사가 고종에게 말했습니다. 청나라는 매관매직을 한지 10년도 안돼 천하가 난리를 겪고 종사가 위태로운데 그런데 귀국은 매관매직을 하고 30년이 되었는데 아직 옥좌가 건재하다. 운수가 왕성하고 풍속이 아름답지 못하면 어찌그리 될수 있는가? 그러자 고종이 크게 웃으며 부끄러워 할줄 모르자 서수봉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한국민은 슬픈 민족이다”라고 하였습니다.(청나라 공사 서수봉)
황제는 이나라의 끔찍한 해충이며 저주다. 그는 로마를 불태우며 놀아난 네로와 다를바 없다. 무희들과 놀면서 “시간을 축낸” 지도자다, 한국 국민이 가련하다. 9만리를 돌아 다니고, 상하 4000년의 역사를 봤지만 한국 황제와 같은 사람은 처음이다.(미국공사 호러스알렌)
결국 한일합방으로 대한제국은 멸망하고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고종과 조선황실은 일본에 속해 왕족, 공족지위를 누리고 일본으로부터 연봉을 받고 호의호식을 하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또하나의 팩트는 이나라가 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는데 백성들은 슬퍼하지 않았다. 왜, 고종보다 더 악한 왕이 또 있을까, 생각들을 했기 때문입니다. 고종은 나라의 안위, 즉 백성들의 안위보다 자신과 황실의 안위만 걱정을 하고 그러다가 나라를 팔아 먹은 것입니다.
우리는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알기 위함이고,
또한 역사를 통해 과거의 잘못을 뒤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함이며,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해야 합니다.
왕정 제도는 조선의 백성에게 종의 멍에를 씌워 노예를 삼았습니다.
이제 대한민국은 국민의 주권, 조선시대에 없던 주권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전체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마치려 합니다.
국민이 주인이 된 나라, 자유와 평등한 기회가 있는나라, 법으로 통치되는 나라, 대한 민국 민주 공화국, 우리는 이 나라의 과거를 정확히 알고 과거의 수치를 굴러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다시 찾게하신 하나님, 여기까지 인도하시고 창성케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래야 과거의 수취를 굴러내는 것이고 그것이 오늘 우리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김재동 목사님의 한국 근 현대사 연구를 발췌하였습니다. 하늘산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