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과 죽음은 모든 유기체의 운명입니다.
탄생의 축복처럼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남아 있는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삶은 얼마나 복될까 라는 생각은 누구나 하게 됩니다.
이번에 홀연 세상을 떠나신 장인 어른의 임종이 그러했길래 그 과정을
기록으로 남겨야 되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몇차례에 걸쳐 일상나누기를 합니다.
장인 어른의 임종을 대하면서 언젠가 나에게 다가올 죽음도 더도덜도 말고
이렇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가슴에 깊이 새겼습니다.
귀한 가르침을 주고 가신 아버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아버님은 예상보다 갑작스레 하늘나라로 가셨습니다.
대구의 모 대학병원 호스피스병동에 입원한 지 5일 만에 돌아가신 것입니다.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은 생전에 병원과는 담을 쌓고 사셨습니다.
평생 건강검진은 물론 위내시경조차 받아본 적이 없을 정도였으니까요.
소주 한두병 마시기를 수십 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으실 정도로 애주가였던 아버님이
올해 들어 자주 설사를 하자 스스로 절주를 하신 것은 불과 몇 달 전입니다.
그때부터 입맛이 없다시며 식사량을 줄이기 시작했고,
평소에 맛있게 드시던 음식을 앞에 두시고도 한두입 드시고는 숟가락을 놓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래도 김천의 대성암 초밥이나 진천동 돌솥밥, 그리고 삼계탕 등은 거뜬하게 그릇을 비우기도 하셔서
입맛만 돌아오면 원래대로 식사를 하시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간혹 찾아뵈었던 여는 식구와는 달리 연로한(79세) 어머님은
자식들에게 일일이 다 말할 수 없었던 고통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3개월여 동안 몸이 이상하다는 아버님을 한밤에 수시로 인근 병원 응급실로 데려가기를 반복하셨고,
기력이 날로 떨어져 급기야 대소변조차 혼자 거의 가릴 수 없게 된
아버님의 수발을 쇠약한 어머님 혼자서 다 들어야 했던 것입니다.
한달여 전 체력적 한계로 너무 힘들어했던 어머님이 하도 딱해서 인근 요양병원에 아버님을 잠시 입원시켰습니다.
그 병원에서 아버님은 밤만 되면 집에 가겠다고 하시며 소란을 수차례 피우시는 바람에
안전을 고려하여 가족의 동의하에 밤에는 두 손을 침대에 묶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습니다.
아버님은 아픈 데가 하나도 없는 당신을 강제로 병원에 격리시킨다고 여기시며,
그 조치를 마음의 깊은 상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힘든 요양병원 생활 하기를 일주일, 도저히 견디지 못한 아버님은 퇴원을 하셨는데,
문제는 퇴원 후에도 여전히 음식을 드시지 못하셨고, 수발을 들어야 하는 어머님의 힘든 나날은 계속된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은 의논 끝에 일단 잘 아는 2차병원으로 재입원시켰습니다.
아버님에게 필요한 검사도 하고, 기력을 회복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했기 때문입니다.
요양병원에서 받은 마음의 상처는 2차병원까지 이어졌습니다.
가족 중에 어느 누구도 간병할 수 없는 처지라 24시간 간병인을 둘 수밖에 없었는데,
밤마다 집에 가겠다는 아버님을 간병인이 그대로 돌보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불가피하게 밤에 손을 묶는 조치가 다시 아버님을 괴롭혔지만, 이대로 아버님을 퇴원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님은 식구들을 만날 때 마다 퇴원시켜달라고 했고, 퇴원이 하루 이틀 미루어지자 실망하는 빛이 역력했습니다.
그렇게 2차병원에서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아버님의 증상이 뇌 MRI 검사 등에서 아무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아버님이 간혹 어지럼증을 호소하자 내과 쪽에서 위에 문제가 있는 경우 빈혈 증상이 있을 수 있으니
위내시경이나 한번 해보자고 해서 대수롭지 않게 위내시경 검사를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