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남의 얼굴을 벗고 나의 얼굴을 찾아야 한다
"코를 높여도 될까요?"
내가 진행하고 있는 라디오프로그램에는 크고 작은 일로 고민하는 청취자의 사연이 들어온다.
어느 날 코를 높여도 되겠느냐는 제목의 사연이 왔다.
나는 마음껏 높이라고 했다.
코를 높이고 내리고는 자기 마음이고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연을 보낸 청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상에 있는 동식물 가운데 자기 모습을 바꾸려는 것들이 있을까요?"
민들레는 들국화가 되려 하지 않고 고양이는 개가 되려 하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는 하늘에서 받은 작품이다.
그것을 세상의 기준에 따라 바꾸는 순간 제품이 되고 만다.
내 얼굴을 가꾸면 작품이 되지만 바꾸면 제품이 된다.
얼굴만 성형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성형수술이라면 세상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 삶의 성형이다.
성형수술이 세상이 아름답다고 말하는 기준에 맞춰 신체 부위를 고치는 것이라면 삶을 성형하는 것은 세상이 가치 있다고 말하는 기준에 맞춰 사는 것이다.
몇 해 전 일흔의 노신사가 불면증을 호소하며 상담실을 찾아왔다.
"어린 시절부터 저는 부모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학생 때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고 해서 노력했고 이름난 대학에 들어갔지요. 그러고 나니 결혼하라 해서 선을 봐서 결혼했고 결혼하면 아이가 있어야 한다고 해서 자식들을 낳았습니다. 또 안정된 직장에서 돈을 벌어야 한다기에 최고 자리에 오를 때까지 일해서 돈을 벌 만큼 벌었습니다."
"그러시군요. 남들 입장에선 충분히 잠이 잘 올 것 같은 부러운 삶을 사셨는데 선생님은 잡을 못 이루시네요. 그렇게 잠 이 안 올 때는 어떤 마음이 드십니까?"
"나에겐 왜 평생 설레는 일이 없었는지를 되묻고 있습니다. 20대부터 50년 동안 스스로 이렇게 계속 질문하고 있어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지?'라고요."
세상이 부러워하는 모든 걸 가지고 있는 노신사가 우울해 하고 있었다.
나는 한눈에 이분이 남의 얼굴로 평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기 얼굴로 산 적이 없기에 늘 '나는 지금 무얼 하고 있나?' 자문하고 살았으며 설레지도 않는 공허감과 우울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선생님께 한 가지 숙제를 드리겠습니다. 이곳 서울에서 땅끝 마을 해남까지 시내버스만 이용해서 다녀오시면 어떻겠습니까."
노신사의 눈이 반짝였다.
"시내버스로만 그 먼 곳까지 가는 게 가능합니까?' "가능하지요. 한 번에 쭉 가지 않으니 여러 버스를 타셔야 할 겁니다. 가다가 배고프면 아무 데나 들어가 밥을 드시고 졸리면 아무 데나 내려 근처 숙소에서 주무시면서 다녀오십시오."
보름 뒤 노신사가 상기된 표정으로 상담실에 들어오더니
내 손을 덥석 잡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내 생애 처음으로 설레는 여행을 했습니다. 남에게서 찾은 이유가 아니고 나만의 이유로 자유롭게 여행을 한 건 처음입니다."
그는 시내버스 여행에서 겪은 에피소드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털어놓았다.
한 달 뒤에 다시 상담실을 찾은 그는 더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번에는 부산까지 시내버스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자전 거도 샀어요. 이제야 설레고 사는 맛이 납니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환한 햇살이 가득했다.
들의 꽃이 산의 나무가 가르쳐 줬어요.
그 흔한 꽃과 나무가 가르쳐 줬어요.
나처럼 사는 건 나밖에 없다고.
-홍순관, [나처럼 사는 건]
나이 오십에 접어들면서 이 가사를 삶의 나침반으로 삼고 있다.
남의 이유로 살면 그건 내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사는 것이다.
남의 삶을 살면 세상의 기준으로는 잘 사는 것처럼 보여도 끝내 공허함과 울적함이 찾아온다.
나의 삶은 세상의기 준으로는 못 사는 것처럼 보여도 나답게 살아왔기에 후회가 없고 충만하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도 나만의 방식으로 하려고 했다.
우선 교재부터 없앴다.
기존의 다른 수업들처럼 남이 쓴 교재를 암기해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수업을 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복지론 수업 첫날 학생들에게 이렇게 수업을 안내 했다.
"이번 학기는 다른 사람 가족 이야기 말고 우리 집 가족 이야기를 해봅시다. 어떻게 더 편한 가족이 될 수 있을지 깨닫는 것이 이번 학기의 목표입니다. 시험은 없지만 매주 하나의 주제에 대한 생각을 적어 와야 합니다. 첫 주제는 부모님이 바라는 나의 배우자 조건입니다."
다음 수업 시간에 엄마와 인터뷰하면서 울고불고 난리가 난 사연들이 등장했다.
사람만 좋으면 된다던 엄마는 키는 얼마 이상, 집안은 최소 어느 정도 등 조건을 주르르 읊었단다.
딸은 반발했고 엄마랑 한바탕했다는 내용이 보고서에 빼곡했다.
이후로도 결혼 비용 조사를 비롯해 출산 후 산후조리 계획, 남편이 바람을 피울 때 대처 방안, 가정폭력 발생 시 대응 법 등 현실적인 과제를 냈다.
학기가 절반 정도 지나자 학생들은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가 얼마나 고생하며 사는지 조금은 이해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내게 가족복지 수업이 가장 즐거웠으며 새롭게 삶을 살게 하는 계기였다고 말한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내용과 경험하지 못한 방식으로 수업을 하다 보니 내가 얻은 별명은 '괴짜 교수'였다.
그런데 학생들은 늘 만원이었고 수업 중에 조는 학생도 없었다.
그때 나는 우리 사회의 학생들이 얼마나 남의 공부를 하느라 지치고 지루한 삶을 살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도 나는 나만의 수업을 한다.
그래서 늘 수업이 설레고 기다려진다.
내가 남의 얼굴이 아닌 나의 얼굴이 되어 사는 삶은 설렘과 두근거림의 연속이다.
남의 얼굴은 재미없다.
이 세상에서 재미있는 건 내 얼굴뿐이다.
오십, 나는 재미있게 살기로 했다 중에서
이서원 지음
첫댓글 아침을 여는 글....
바쁜 일상에 한 줄기 쉼과 여유로 다가오는 글...
감사합니다 ^^
카페지기가 올려주는 글만 읽고 읽어도
마음이 부자될 지경입니다.
너무 멋진 카페지기님...감사합니다. 가끔 글 올리는 것도 쉽지 않은데 이렇게 꾸준히....
모두 부자되세요!
변미순 전 협회장님 말씀 완전 동감 입니다 댓글조차 쉽지 않은일인데 늘 좋은글 올려 까페 부자로 만들어 주시는 두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