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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성총관부의 허와 실 <함경도 영흥설은 교치된 지명>
명색이 사학계가 공인하고 있는 함경도에 원나라가 세웠다는 쌍성총관부가 고려사연표에는 기록이 없습
니다. 그러나 원나라는 1258년 철령북부에 쌍성총관부를 세운 3년후 요양으로 남하하여 1261년 요양
(遼陽)의 고성(故城)을 수리하고, 안무고려군민총관부(安撫高麗軍民摠管府)를 두었습니다.
그들은 요동에 있던 고려땅을 침략하여 그땅에 살던 고려민을 달래기 위한 총관부를 둔것입니다.
그리고 누차에 걸쳐 <원사>는 원나라 쌍성총관부가 요동에 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도 막무가내로
함경도설을 고집하는 태도는 심히 유감스럽습니다.
원나라는 10여차에 걸쳐 한반도를 침입하여 서기 1273년 제주도에 그들의 다루가치총관부(탐라총관부)를
두었던 기록까지 있지만 함경도의 쌍성총관부 기록은 찾아볼수 없습니다.
단 한국사 연표를 다루고 있는 엔싸이버 두산 세계대백과에서는 1258년 영흥에 쌍성총관부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258년 : [고종 45년] 3월, 유경(柳璥)·김준(金俊), 최의를 죽임 : 최씨 정권이 끝나고 왕정이 복고됨.
12월, 몽고, 영흥에 쌍성 총관부(雙城摠管府)를 설치.>
*<고려사>권137 신우 5 창(昌)에는 함경도의 쌍성은 위칭(胃稱)즉 사칭이라는 기록이 상세하게 밝혀저
있습니다.
삼국사기와 고려사, 세종실록 지리지등은 고려의 영토강역이 요동의 개원까지 진출했던 사실을 전연히
고려치못한 상태에서 기록된것들입니다.
당시 기록자들이 몰랐을 리가 없지만 고의적으로 왜곡시켰다고 인정할수 밖에 없는 증거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고려사에서 쌍성총관부 최초 설치 지명을 고화주(古和州)로 하였다가 다시 화주로 기록한것은 교치된
지명을 의미한것으로 보입니다.
아래지도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고려강역도인데 지금까지도 강단사학계는 후손들에게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교육하고 있습니다.
고려의 북방한계선이 북쪽으로 천리밖에 있는데 이게 무슨 망령입니까?
우리가 확인하고 제시한 자료들은 정말 잘못된 근거일까요?
아니면 기득권자들이 철밥통을 지키기 위해서 눈이 뒤집힌 까닭일까요.
이 지도는 함경도 함주(함흥) 남쪽으로 쌍성총관부를 두고 안변 남쪽으로 철령을 그려놓고 있습니다.
이곳을 적어도 99년동안을 원나라가 통치하고 있었다면 지금의 함경도 사람들은 몽골어가 주어가 되었을
것입니다.
왜정(倭政)은 36년인데도 그들이 남긴 영향력은 지금까지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서기 1269년 이연령.현원렬과 최 탄 이란 자가 고려의 60여개 성을 들어 원에 항복했을때
서경도 그 강역 안에 포함 되어 있었으니 이 지도는 잘못그려진 지도지요.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설치한지 10년만에 최탄이 항복하였으니 서경이 반환될때 까지 적어도 수십년
동안 원나라의 통치를 받았다는 얘기가 됩니다.
지도를 서경에서 안변 철령으로 선을 그어놓고 보면 한반도의 35프로는 원나라의 땅이 되었다는것이고
백두산의 소유권 마져 주장할수 없게 됩니다.
만약 서경까지 원이 진출하였다면 개경은 지척인데 그 위치에서 천도를 하지않고 버틸수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억울하더래도 이것이 진실이라면 어쩔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이 아니기에 밝혀서 역사의 정체성을
찾자는 것입니다.
서경이 원나라의 동령부가 되었다는 사실을 부인하는게 아닙니다. 서경의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따라서 원나라의 쌍성총관부를 부인하는게 아니라 그 위치가 잘못되었다는 주장입니다.
서경을 위시한 최탄등이 상납했던 60성은 고려가 자력으로 회복한게 아니라 원나라가 자진하여 반환하는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렇지만 쌍성총관부는 공민왕대에 이르러 서기1356년 추밀원부사 유원우를 동북면 병마사로 임명하여
축출하고 화주목(和州牧)을 세웠으며 원의 배척운동을 선포하였습니다.
그 후 서기 1369년 이성계등을 앞세워 동녕로를 탈환하여 원위치로 회복시킨것은 명나라가 건국되기 2년
전입니다.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는 원(元)나라가 고려 화주(和州:함남 永興)에 둔 통치기구라고
우리나라 네이버백과사전에 설명되어 있다. 과연 그러한가?
雙城총관부는 고려와 원나라의 접경을 이루는 중요한 지역이므로 그 위치를 알면 고려의 서북강역을 짐작
할 수 있다. ?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 하면 쌍성은 현 흑룡강성 하얼빈 남쪽 4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쌍성시 쌍성보라고
추정된다.
元史와 金史, 조선왕조실록에 흩어져 등장하는 쌍성(雙城)과 쌍성총관부를 하나 하나 찾아서 연결하여 위
결론이 타당하다는 것을 입증해 보기로 한다.
원사의 과세편에는 쌍성이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九十四 志第四十三 食貨二/歲課
初,金課之興,自世祖始.(..)在遼陽者,至元十年,
聽李德仁於龍山縣胡碧?淘採,每歲納課金三兩.十三年,珞璞∇竇む津珹夾뚤朮τ畜雲?
원나라는 금(金)산출지역에 대하여 매년 금을 공납하게 하였는데, 세조13년 요동의 쌍성(遼東雙城)과
화주(和州)에서 금을 캤다. ☞ 화주(和州)도 요동에 있다고 하였다.
위 고지도 거란 지리도를 보면 화주가 요하를 사이에 두고 심양과 마주보고 있다.
원사에서 쌍성은 요동의 고려와 하얼빈의 여진 경계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本紀/卷十七 本紀第十七 世祖十四/至元二十九年
高麗、女直界首雙城告饑,?高麗王於海運內
以粟賑之.弛平?州酒禁.詔不敦、忙兀[禿]魯迷失以軍征八百?婦國.
고려, 여진 경계의 수령들이
쌍성의 기근을 보고하자, 고려왕에게 조칙을 내려 해운으로 조를 운반하여
기근을 구휼하게 하고, 평주 난주 등에 금주령을 내렸다.
☞ 여기에서 여진 완안부 아골타는 현 흑룡강성 하얼빈시 동쪽 아성(阿城 )에 건국하고 상경회녕부라고
하였는바, 쌍성은 하얼빈에 근거를 둔 여진과 경계에 있었다.
고지도 지리도를 보면 평주, 난주는 난하 하류에 있었다. 이곳에 금주령을 내리고 조를 요하를 통해 쌍성
으로 운반하도록 한 것이다.
평주, 난주의 조를 한반도를 돌아서 함경도 영흥으로 운반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진의 위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찾아 보자.
원사에 元개원로(치소: 하얼빈 東 아성)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開元路
開元路,古肅신之地,隋、唐曰黑水
靺鞨.(..)東瀕海,南界高麗,西北與契丹接壤,?金鼻祖之部落也.初號女?,後避遼興宗諱,改曰女直.
太祖烏古打?滅遼,?上京設都,海陵遷都於燕,改?會寧府.
개원로, 옛 숙신의 땅임. 수, 당대에 흑수말갈, (..) 동은 바다이고(?),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
서북은 거란과 접한다. 金 시조의 부락이고 처음이름은 여진, 요 흥종의 이름을 피하여 뒤에 여직이라
고쳤다. 이곳에 상경 회녕부(역자 주 : 하얼빈 동쪽 아성(阿城))을 설치하였다.
접역도에서 설명하는 고려의 초기 기본도입니다.
개원을 북방경계선으로 그려진 가오리 모양의 장성 안이 고려이고 다시 동쪽으로 점선으로 추가된 선이
조선과 여진의 분계도입니다. 가오리가 조금 더 커졌지요.
책성의 북쪽으로 몽골과 내몽골계라는 분명한 표시가 있습니다.
고려와 요령성을 경계로 국경을 이룬 나라는 거란.발해.몽골.여진이었습니다.
이러한 책성을 쌓은 주인공들은 고려와 조선이었습니다.
따라서 강동6주라는 지명은 요하(압록강)의 동쪽을 위주로 하여 남쪽으로 여순까지를 범위로 잡아야 합니다.
고려의 반역도(反逆盜) 홍복원이 몽고에 바친 고려의 40성은 현 요녕성 요양, 심양로(현재의 심양)
일대이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瀋陽路
瀋陽路,本읍婁故地,渤海大氏建定
理府,都督瀋、定二州,此?瀋州地.契丹?興遼軍,金?昭德軍,[三]又更顯德軍,後皆?於兵火.元初平
遼東,高麗國麟州神騎都領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四十餘城來降,各立?守司,設官以撫其民.後高麗
復叛,洪福源引衆來歸,授高麗軍民萬戶,徙降民散居遼陽瀋州,初創城郭,置司存,僑治遼陽故城.中統
二年,改?安撫高麗軍民總管府.及高麗?國內附,四年,又以質子(淳)[?]?安撫高麗軍民總管,[四]分領二
千餘戶,理瀋州.元貞二年,?兩司?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仍治遼陽故城,轄總管五、千戶二十四、
百戶二十五.至順錢糧戶數五千一百八十三
심양로, 발해 정리부, 도독, 정주, 심주 두 개 주가 심주가 되다.
원나라 초에 요동을 정벌할 때 고려 인주(麟州)신기도령 홍복원은 서경, 도호, 귀주의(龜州) 40여성을 들어
항복하자 각 곳에 진을 두고 지키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반격을 가하여 홍복원은 무리를 이끌고 도망하자, 元은 홍복원에게 고려군민만호를 제수하고
무리들을 요양 심주에 분산하여 살게 하였다.. 뒤에 고려가 거국적으로 내부한 뒤에는 인질로 있던 순(淳)
을 안무고려군민총관으로 삼아 심주를 다스리게 하였다.
총관부는 요양 옛성에 있었고, 총관 다섯, 천호 24, 백호 25를 관할하였다.
원사(元史) 지리지 동녕로 조에는 동녕로가 고구려 평양성이며 고려가 서경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
新校本元史/志/卷五十九 志第十一 地理二/遼陽等處行中書省/東寧路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其王高
璉始居平?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西京.
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
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婆娑府.
동녕로는 본래 고구려 평양성이다.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에 거하였다.
당이 고구려를 정벌하고 평양성을 함락한 뒤 그 나라는 동으로 옮겨갔는바, 압록수 동남 천여리에 있는
것은 옛평양의 땅이 아니다.
왕건에 이르러 평양은 서경이 되었다. 원나라 지원6년 이연령, 최탄, 현원렬 등이 60여성을 들어 항복하
였다.
서경은 동녕부가 되었다. 정주(靜州), 의주(義州), 인주(麟州) 위원진을 떼어서 파사부에 속하게 하였다.
☞ 인주신기도령이던 홍복원이 서경을 들어 항복할 수 있었던 것은 인주가 곧 고려의 서경관할 이었기
때문이다.
요사 지리지에 고구려 옛평양성은 암연현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新校本遼史/志/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東京道/海州 耀州(..)巖淵縣.東界新羅,故平壤城在縣西南.
東北至海州一百二十里.
요주 암연현, 동은 신라와 접한다. 옛
평양성이 현의 서남에 있다.
동북으로 120리에 해주(역자주 : 현 요녕성 해성시)가 있다.
금사 지리지에 쌍성은 심주에 속한다고 하였다.
新校本金史/志/卷二十四
志第五/地理上/東京路
瀋州,昭德軍刺史,中.本遼定理府地,遼太宗時置軍
曰興遼,[一一]後?昭德軍,置節度.明昌四年改?刺史,與通、貴德、澄三州皆?東京.戶三萬六千八百九
十二.縣五: 樂郊(..)章義遼舊廣州(..)遼濱遼舊遼州東平軍(..)邑樓遼舊興州興中軍(..) 雙城遼雙
州保安軍也,皇統三年降?縣,章宗時廢.
심주에 속한 다섯 개 현은 낙교(樂郊), 장의(章義), 요빈(遼濱), 읍루(邑樓),
쌍성(雙城)으로서 쌍성은
심주에 속하였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다.’ (..) 이해 5월에 기씨(奇氏)
를 평정하고 밀직 부사(密直副使) 유인우(柳仁雨)를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 부윤(試少府尹)을 제수(除授)
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중현 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 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內應)하게 하였다.
환조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함매(銜枚)하고 행군(行軍)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소생(小生)과 도경(都卿) 등은 처자(妻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에 화주(和州)·등주(登州)·정주(定州)·장주(長州)·예주(預州)·고주(高州)·문주(文州)·의주(宜州)와 선덕진
(宣德鎭)·원흥진(元興鎭)·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홍헌(洪獻)·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했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만에 지금에 와서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를 승진시켜 대중 대부(大中大夫) 사복 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제택(第宅) 1구(區)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
이제 쌍성의 현재 위치를 추적해 보자
쌍城是一座歷史悠久的文化古城,?位于黑龍江省南端,松花江南岸,距省都哈얼빈去40公里
쌍성:유구한 역사를 간직한 문화고성이다. 흑룡강성남단, 송화강 남안에 위치, 성도인 하얼빈에서 약 40
킬로미터 지점이다.
☞ 위에서 살펴본 바와같이 쌍성은 원사, 금사, 고려에 함께 등장한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되는 쌍성이 모두 같은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금사에 등장하는 심주의 쌍성은 심양에 있고, 또다른 쌍성은 장춘서쪽 60킬로미터 지점의 쌍성보, 나머지
하나는 하얼빈 남쪽 쌍성현 쌍성보가 있다.
고려쌍성은 그 중 여진과 경계지점인 하얼빈 남쪽 쌍성현의 쌍성보가 가장 유력하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합단군의 거점인 대경시와 가까워서 합단군을 견제 방비하기 적정하고, 원사 개원로조에서
개원로(치소 하얼빈 동쪽 아성)의 남쪽은 고려와 접한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공민왕때 회복한 화주, 고주, 의주, 함주 등의 지명도 모두 거란 지리도에서 요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지역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출전:구글에서 sean님의 글]
<접역전도> 함경남도부분 확대도 미 의회도서관 소장 [출전:향고도]
<此邑號相還>차읍호상환:이 읍의 이름들은 돌아온것이다. 즉 교치(僑置)되었다는 뜻이지요.
옛날 지도에 이러한 설명이 기록된 예를 보기는 어렵지요. 명나라가 조선에게 압력을 가하여 요동에 있던
조선영토에 여진인들을 불러 체우니 요동에있던 지명들이 모두 한반도로 쫓겨간것이지요.
예를들면 함주는 함흥, 안주는 안변,회령은 회령, 철령은 철령, 화주는 화주, 통주는 통천등이 그렇습니다.
뿐만 아니라 개마대산을 개마고원으로 동옥저,남옥저,동예등이 모두 이름만 옮겨간것들입니다.
그리고는 도리어 가짜가 진짜라고 큰소리를 치고있는 셈이지요.
오죽했으면 지도를 제작하던 사람이 귀띰을 하였을까요.
이 별도의 주기는 <고려사>권 137 신우(辛禑) 5 창(昌)에서 함경도의 쌍성은 위칭(胃稱)즉 사칭이라는
기록이 확인 되었습니다.
선역도(鮮域圖) 1760년 제작 작자미상 미 의회도서관 소장 [출전:향고도]
규장각 도서관 소장
요계관방도 *고려를 중심으로 둘려처진 성은 1033년에 완성된 고려천리장성으로 추정됨.
고려의 초기 강역이 요동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993년에 1차로 고려를 침략한 거란과의 국경은 당시
압록강으로 부르던 요하를 말하는것이지 요동을 횡단하여 한반도로 침입할 가능성은 희박함.
따라서 당시 서희가 거란장수 소손영과 담판을 벌려 얻어낸 강동6주는 요하의 동쪽으로 거란과 국경을
이루던 지역으로 분산된 지역에 있었다고 추정됨.
명사明史 / 지志 / 第十七 지리地理 二 / 철령위(鐵嶺衛)
鐵嶺衛洪武二十一年三月以古鐵嶺城置。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即今治也。西有遼河,南有泛河,
又南有小清河,俱流入於遼河。又南有懿路城,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又范河城在衛南,
亦曰泛河城,正統四年置泛河千戶所於此。東南有奉集縣,即古鐵嶺城也,接高麗界,洪武初置縣,尋廢。
又有鹹平府,元直隸遼東行省。至正二年正月降為縣。洪武初廢。南距都司二百四十裡
명사明史 / 지志 / 第十七 지리地理 二 / 철령위(鐵嶺衛)
철령위(鐵嶺衛)는 명明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 홍무(洪武) 21년(1388년) 3월, 옛 철령성(鐵嶺城)에
치소를 세웠다.
홍무(洪武) 26년(1393년) 4월, 옛
은주(古은州) 땅으로 치소를 옮기었다. 바로 현재의 치소(治所)이다.
서쪽으로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으로는 범하(泛河)가 있으며 다시
남으로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다 요하(遼河)로 유입되어 들어간다.
또한, 남쪽으로 의로성(懿路城)이 있으며 홍무(洪武) 29년(1396년)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또한,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철령위(鐵嶺衛)-의 남쪽에 있으며 역시 범하성(泛河城)이라고도 말한다.
명(明)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
정통(正統 )4년(1439년)에 범하천호소(泛河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으로는 봉집현(奉集縣)이 있으니 바로 옛
철령성(鐵嶺城)-철령위(鐵嶺衛)사건의 무대-으로 고려
(高麗)와 국경을 접한다. 홍무(洪武)<1368~1398년> 초엽에 현(縣)을
두었다가 폐지하기에 이른다.
또한, 함평부(鹹平府)가 있으니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Dai Ön Ulus>때의
직례요동행성(直隸遼東行省)
이다.
다이온 울루스<大元國> 혜종(惠宗)<이칭 순제(順帝) 지정(至正) 2년(1342년) 정월에 항복하여 현(縣)이
되었으며 홍무(洪武) 초엽에 폐지되었고 남南으로 도사(都司)-치소(治所) 요양현(遼陽縣)-와의 거리는
240리 떨어져있다. [출전:coo2 net 솟대임의 글에서]
거란지리지도 석판본입니다.
동주(同州) 왼쪽에 있는 화주(和州)를 확인하세요.
함경도 영흥궁(永興宮)은 요동의 영흥궁보다 400년후다
함경도에 있던 쌍성총관부가 진짜가 아니라 위칭(胃稱),즉 사칭된것이라는 기록을 <고려사>권 137을
통해서 확인한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쌍성총관부와 관련이 있는 영흥궁은 어떠한가를 추적해본 결과 함흥의 영흥궁은 요동의 심주
주변에 있던 영흥궁 보다 400여년이 뒤진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함흥부지도(咸興府地圖) 채색필사본. 1872년. 112.0 * 76.0cm.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성곽으로 둘러싸인 읍치(邑治)를 중심으로 그린 함경도 함흥지도입니다.
함흥은 북쪽으로는 육진(六鎭)으로, 남쪽으로 바닷가 고을인 정평 등을 거쳐 철령으로 통하는 요충에
위치하여 동북지방의 행정군사의 중심지였습니다.
또한 조선왕조의 발상지로서 문화적으로도 중시되었던 곳입니다. 이러한 고장의 특성이 지도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성곽 내부에는 감영(監營) 등의 관청 건물이, 남문 밖에는 태 조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았던
본궁(本宮)과 동편에는 조상의 능침(陵寢)이 산줄기를 따라 상세히 표시되어 있고,
주변 지역에는 함경도 지방의 행정단위로서 면(面)에 해당하는 사(社)가 황색 직사각형 안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출전:옛 지도여행]
영흥본궁(永興本宮)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에 있는, 이성계(李成桂)의 아버지 환조(桓祖)의 구저(舊邸). 태조 이성계와 신의
왕후(神懿王后)의 위판을 봉안한 곳으로, 이성계가 별을 제사한 곳이라고도 전하고 있다.
1666년(현종 7)부터 본궁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전(正殿)은 정면과 측면이 각 3칸씩이고, 앞면에는 툇간을 두고 마루와 난간을 시설한 점이 특이한데
이는 함흥본궁과 비슷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공포의 형식은 주간(柱間)에 각 1구씩의 공간포(空間包)
를 둔 다포식(多包式)이다.
천장은 우물천장을 대량(大樑) 위치에 시설하였고, 측면에는 충량(衝樑)이 있다.
정전의 왼편에 있는 이안당(移安堂)은 1700년(숙종 26)에 건축된 건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이다.
공포는 익공식(翼工式)이고 공포 사이에는 화반대공(花盤臺工)을 두었다.
비각에는 영조 친필의 태조대왕 탄생구리비(誕生舊里碑)가 있으며, 이곳에서 약간 떨어진 흑석리에는 준
원전(濬源殿)이 있다.
≪참고문헌≫ 增補文獻備考
≪참고문헌≫ 朝鮮古蹟圖譜 11(朝鮮總督府, 1931)
≪참고문헌≫ 우리나라의 력사유적(문화보존연구소, 1983)
백과사전 카테고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유적 > 궁궐·관아 > 궁궐
함흥본궁(咸興本宮)
